<제38화>
“설현규!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선생님!”
선영을 보호하기 위해 진주도 어쩔 수 없이 마력을 끌어올리려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현규를 막아 세웠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진주네 반 담임인 김치국 선생이었다. 선영은 그를 부르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일반인을 상대로 마력을 사용하는 건 살인이나 다름없다는 거 몰라? 그리고 너 분명 내가 경고했었지? 계속해서 애들 괴롭히고 돈 갈취하면 내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고.”
김치국 선생은 현규 무리가 그동안 어떤 짓을 벌여 왔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여러 차례 주의를 줘 봤지만, 그의 말을 들을 아이들이 아니었다. 학교에서도 그의 말을 무시했다. 설현규와 강윤서의 든든한 뒷배 때문이었다.
“아이고, 무서워라.”
“왜 저래?”
“순간 애니메이션 주인공인 줄. 정의의 이름으로 너희를 용서치 않겠다!”
현규 무리의 눈빛에 선생님을 향한 존경심, 어른에 대한 공경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빈정거리며 김치국 선생에게 모욕감을 안겨주었다.
“선영이랑 진주는 교실로 돌아가 있어. 여기는 선생님이…….”
“꼴에 선생이라고. 쌤,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함부로 내 앞에서 깝죽거리지 마시라고.”
김치국 선생은 비아냥대는 현규 무리의 행동을 애써 참아가며 우선 진주와 선영부터 교실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이 현장에서 일단 아이들을 꺼내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규는 이를 용납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설현규! 강윤서! 너희 둘 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 못할 거다. 내가 반드시…….”
“감당하실 수 있겠어요? 지금 실수하시는 건데…….”
도를 넘은 현규 무리의 작태를 더는 두고 보지 않기로 한 김치국 선생. 선생 자리를 걸고서라도 아이들의 잘못을 꾸짖어 줄 생각이었다. 김치국 선생은 그것이 선생인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믿었다.
***
“너희 부모님은? 너 이거 그냥 안 끝나. 어서 부모님께 연락드려.”
“…….”
“너 내 말 안 들려?”
“엄마, 아빠 안 계세요.”
“부모가 없어? 그러니 애가 이 모양이지. 너는?”
“아빠한테 문자는 보냈는데 아마 지금 일하고 계실 거예요.”
잠시 뒤 교무실에서는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교감 선생은 오히려 진주와 선영을 가해자로 지목했다. 순식간에 가해자와 피해자가 뒤바뀐 것이다.
“학교에 보내놓기만 하면 다인가? 도대체 가정교육을 어떻게 했기에……. 이래서 아무나 받아주면 안 된다니까. 김 쌤, 김 쌤이 담임이니까 김 쌤이 얘들 보호자한테 전화해 봐. 이런 놈들은 학폭위를 열 것도 없어. 그냥 퇴학 처리하고 경찰에 인계해야 한다니까.”
교감 선생은 사건의 실체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학교 재단 이사장의 손녀인 강윤서. 지역구 국회의원의 아들인 설현규. 이들의 말이 곧 사건의 실체여야 했다.
“교감 선생님, 가해자는 진주랑 선영이가 아니고 현규와 윤서입니다. 현규가 마력까지 사용해 저 애들을 겁박하는 걸 직접 봤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김 선생! 당신 정말 잘리고 싶어? 여기 애들 증언까지 있는데 뭔 소리야! 그동안 얼마나 시달렸으면 애들이 제발 이것들을 처벌해 달라고 탄원서를 다 썼겠어!”
“현규랑 윤서가 어떤 애들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애들이 버젓이 지켜보는 앞에서 누가 사실대로 탄원서를 쓸 수가 있었겠습니까?”
“김 선생 당신도 징계 대상이라고! 교육자라는 사람이 죄 없는 애들을 가해자로 몰아서 상처나 주고 말이야. 징계위 열릴 때까지 헛소리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김치국 선생도 징계를 피할 수 없어 보였다. 다른 교사들도 그의 억울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딱히 나서서 그 억울함을 항변해주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기세등등한 교감 선생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쾅!
“박진주가 누구야!”
“이… 이사장님!”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요란하게 문을 열어젖히며 교무실로 들이닥쳤다. 그 선두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서 있었다. 그 뒤를 교장 선생과 설현규, 강윤서 두 학생이 뒤따랐다.
“어떤 놈이 감히 우리 윤서한테 손찌검을 해!”
“저기 쟤요, 할아버지. 현규랑 제가 그러지 말라니까 다짜고짜 저희 뺨을…….”
노인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강윤서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할아버지를 더욱 부추겼다.
“뭐? 현규도 맞았어? 현규야, 너는 괜찮니? 다친 데는 없고?”
“다치지는 않았는데 이번에는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럼, 당연히 그냥 넘어갈 수 없지. 이것들 바로 경찰에 넘겨. 이런 깡패 새끼들은 콩밥을 먹어 봐야 정신을 차린다고. 하필 의원님하고 다른 귀한 손님들까지 모신 날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이사장은 마치 상전을 모시듯 현규라는 남학생을 챙겼다. 남학생 또한 그런 대접이 익숙해 보였다.
“이사장님, 일단 전후 사정부터 정확히 파악한 후에…….”
“교장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물러 터졌으니까 학교가 이 모양 이 꼴이잖아! 우리 윤서가 없는 말을 지어냈겠어? 현규도 그렇다잖아!”
“아이들의 미래가 걸린 일입니다. 신중하게 다시…….”
교장 선생은 연거푸 무시를 당하면서도 이사장의 흥분을 누그러뜨리려고 했다. 이사장은 그런 교장 선생에게 연신 삿대질을 해댔다.
드르륵.
“아이고, 설 의원님!”
“여기 계셨군요.”
“하필 모처럼 인사차 모신 날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서 정말 죄송합니다. 다행히 현규 학생은 무사해 보입니다.”
그때 또다시 교무실의 문이 열렸다. 비서로 보이는 수행원이 말끔한 양복 차림의 중년 신사를 안내했다. 나이는 훨씬 젊어 보였지만, 이사장은 상대방을 깍듯하게 대했다.
“이 아이들인가요?”
“정말 면목 없습니다, 의원님. 그렇지 않아도 지금 바로 퇴학 처리하고…….”
휙.
이사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설 의원이라는 남자의 손이 허공을 가르며 진주의 뺨으로 향했다.
***
덥석.
사정없이 내리꽂히던 설대성의 오른손이 무안하게 공중에서 멈추고 말았다. 누군가 그의 손을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누가 혼날 짓을 했는지는 좀 더 상세히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당신 뭐야? 그 손 놓지 못해! 감히 이분이 어떤 분인 줄 알고…….”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이사장이 다급히 의문의 사내를 다그쳐보지만, 그는 설 의원의 손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기 박진주 학생 삼촌입니다. 시간 맞춰 도착한 셈이군요. 얼마나 대단한 분인 줄은 몰라도 함부로 애들 뺨 때릴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요?”
국회의원 설대성. 삼십 대 초반에 국회에 입성해 내리 3선에 성공한 그는 차기 당 대변인으로 거론될 정도로 중진급 정치인이었다. 요즘 들어 정치인들이 각성자들에게 밀리는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영향력은 여전했다.
그의 눈동자가 서둘러 유진의 옷차림을 살폈다. 분명 이사장이 자신을 ‘의원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을 텐데도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더 대단한 뒷배가 있거나, 아니면 세상 물정 모르는 무지렁이일 터.
“당신 조카하고 저 애 둘이서 우리 설 의원님 자제분을 폭행했어. 돈까지 갈취하려고 했고. 무릎 꿇고 싹싹 빌어도 시원찮을 판국에…….”
“진주야, 선영아. 너희 정말 그랬어?”
“아니요. 오히려 현규가 마력을 실어서 진주를 때리려고 했어요. 애들한테 돈을 빼앗은 것도 쟤들이고요.”
“들으셨죠? 우리 애들은 그런 적이 없다고 그러네요. 오히려 혼날 애들은 그쪽 애들 같은데…….”
말없이 유진의 행색을 살피는 설 의원을 대신해 이사장이 유진을 상대했다.
“선영아!”
“아… 아빠!”
그때 또 한 사람이 교무실로 들어섰다. 선영의 아버지였다. 그는 옷 갈아입을 새도 없이 달려왔는지 작업복 차림이었다.
“당신은 또 뭐야!”
“선영이 아빠 되는 사람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옷 입은 꼬락서니하고는. 저러니 애가 못된 짓만 골라 하지. 당신 딸이 애들을 괴롭히고 돈을 뜯었다고! 도대체 애를 어떻게 가르친 거야!”
이사장은 학부모에 대한 예의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조금 전 유진을 처음 대면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반말로 선영 아버지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우리 선영이가 그럴 리가 없습니다. 비록 풍족하게 키우지는 못했어도 그런 짓을 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습니다.”
“그 주제에 가르치기는 뭘 가르쳐! 그거 가지고 와 봐.”
“예, 이사장님. 여기 있습니다.”
“당신 이게 뭔 줄 알아? 피해 학생들이 견디다 못해 제발 당신 딸 처벌 좀 해달라고 쓴 탄원서야. 이런데도 발뺌할 거야!”
이사장의 손아귀에는 두툼하게 쌓인 종이 다발이 들려 있었다. 진주와 선영에게 돈을 갈취당한 학생들이 제출했다는 탄원서였다.
“아빠, 나 그런 적 없어. 정말이야.”
“뭔가 착오가 있을 겁니다. 우리 선영이는 그런 아이가 아닙…….”
“구로구 국회의원 설대성입니다. 여기 피해자 설현규 학생 아빠이기도 하고요.”
“예…….”
아직도 잡혔던 손목이 뻐근한지 유진을 째려보는 것을 잊지 않는 설 의원. 상대가 국회의원이라는 말에 선영 아버지는 기가 죽은 표정이었다. 설 의원도 그걸 기대하고 본인 소개를 그렇게 한 것이 틀림없었다.
“댁의 따님들이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한 번이라도 들여다보신 적 있나요?”
“그게 먹고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대게 댁 같은 부류들이 그런 핑계를 많이 대죠.”
설 의원은 말을 조곤조곤 이어갔지만, 그 내용은 이사장의 반말보다 더 무례했다.
“우리 아들하고 윤서 학생이 애들 돈을 갈취했다고요? 얘들 한 달 용돈이 얼마인 줄은 아십니까? 당신 월급보다 두 배는 많을 겁니다. 없는 것들이나 남의 돈을 욕심내는 법이죠.”
“말씀이 지나치신…….”
“그리고 애를 낳아놓기만 했다고 다 부모가 아닙니다. 키울 능력이 안 되면 낳지를 말았어야죠. 배경도 능력인 세상입니다. 따님 같은 애들이 자라서 뭐가 될까요? 공사판이나 전전하는 댁하고 크게 다른 삶을 살 것 같지는 않군요. 헛돈 쓰지 마시고 일찌감치 공장이나 다니게 하세요. 괜히 다른 아이들 앞길까지 방해하지 않게. 사람은 다 제 분수가 있는 법입니다.”
설 의원은 작정한 듯 상대를 깔아뭉갰다. 공사판 작업복 차림인 선영 아버지나 평범하기 그지없는 유진의 겉모습을 보고 판단을 내린 것일 터. 표심에 영향을 줄 정도로 대단한 인물들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었다.
“이보세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옆에서 듣고 있던 김치국 선생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설 의원을 꾸짖어보려고 했지만, 오히려 선영 아버지는 딸이 앞에 있음에도 입을 다물었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딸에게 더 큰 피해가 생길까 봐 무릎이라고 꿇고 빌 것 같은 눈빛이었다. 모든 힘없는 부모들의 심정이 그렇듯.
“훗! 지랄하네.”
그렇게 상황이 맥없이 정리되려던 찰나.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 설 의원의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그로서는 살면서 이제껏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모욕적인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