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리봉 마왕족발-37화 (38/204)

<제37화>

잠시 뒤 ‘가리봉 왕족발’ 뒷골목.

“잘하는 짓이다. 고등학생들한테 처맞고 다니기나 하고.”

불쌍한 드웨인.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기대했을 테지만, 시퍼런 눈두덩만 남았다. 달콤한 그 환상의 맛은 온데간데없고 퉁퉁 부은 아랫입술에서는 비릿한 핏물만 새어 나왔다.

“유진, 왜 마력을 쓰지 못하게 막은 거지? 왜 저깟 애송이들에게 꼼짝 못 하고 얻어터지게 막은 거냐고! 이렇게라도 모욕을 줘서 나를 쫓아내려는 건가?”

“교복 못 봤어? 걔들 진주랑 같은 학교 다니는 애들이야. 네가 걔네 건드리면 진주는 어떻게 학교 다니라고?”

드웨인이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아리아스 대륙 전체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늘 이곳 지구에서는 예외였다. 상대가 진주가 다니는 학교의 학생들이기 때문이었다.

“까불지 못하게 겁만 줄 수도 있는 거였잖아! 나 드웨인이 이런 수모를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수야 없지. 당장 이놈들을…….”

“좀 참지? 아이스크림 안 먹을 거야?”

물론 내가 은밀하게 마력에 목소리를 실어 보내지 않았더라면 녀석들은 벌써 송장이 되어 있을 터였다. 드웨인에게는 한주먹 거리도 되지 않는 것들이었으니까.

드웨인이 이 모욕을 참은 것은 순전히 내 명을 거스르는 것의 후폭풍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참고 넘어가는 대가로 약속한 아이스크림 때문이기도 할 테고.

아무튼 인제 와서 변명이지만, 나는 드웨인이 말로 좋게 상황을 정리하기를 기대했다. 물론 그것이 과한 기대였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느끼고는 있던 바였다.

“내가 뭐 꼭 아이스크림 때문에 참고 넘어가는 건 아니지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먹어야지. 아이스크림이야말로 카렌 신께서 인류에게 내려주신 축복과 은혜의…….”

“그나저나 여기가 진주 집이라는 걸 알고 왔다는 건데 진주 친구들인가?”

“친구는 아닐 거야. 그랬다면 내가 아니라 진주와 이야기를 나눴겠지. 그리고 아까 내가 그놈들한테 한 말 말인데. 마왕이 뭐 꼭 싫다는 게 아니라…….”

마력으로 엿듣기에 녀석들은 분명 진주의 뒤를 캐려던 눈치였다. 그러니 아이스크림을 세 개씩이나 얻어먹고도 마왕이니 어쩌니 하는 소리만 늘어놓은 드웨인을 이리 만든 것일 터.

“진주를 찾는 그놈들이 보낸 건가? 그랬다면 이렇게 허술하게 접근하지는 않았을 텐데……. 도대체 저 녀석들은 왜 진주의 뒤를 캔 거지? 아무튼, 학교도 그리 안전해 보이지 않아. 아무래도 가까이에서 지켜봐야겠어.”

“유진, 어쨌든 시키는 대로 가만히 있었으니까 아이스크림은 사 주는 거지? 분명 아까 세 개 사 준다고…….”

“바로 주 지점장에게 연락해봐야겠다. 진주 모르게 입조심하고, 알았지?”

“유진, 어디가? 아이스크림은? 너 지금 일부러 바쁜 척하는 거지? 야! 마왕 새끼야! 아이스크림은 사 주고 가야 할 것 아니야!”

일전에 주 지점장이 제안했던 가리봉 고등학교 예비 각성자 클래스 교관 자리를 수락해야 할 것 같았다. 두고 간 명함을 어디에 뒀지? 드웨인, 잠깐만. 지금 바쁜 일이 생겨서.

***

다음날 가리봉 고등학교 옥상.

“안 내겠다고?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신입생이라서 그동안 봐준 거야. 일단 학교 적응부터 하라고. 이제 너도 다른 아이들처럼 보호비를 내야 하지 않겠니?”

진주가 낯선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내가 왜 너희한테 돈을 바쳐야 하는 건데?”

진주를 에워싸고 있는 아이들은 드웨인의 얼굴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바로 그 현규 무리였다.

녀석들이 진주를 둘러싼 이유는 바로 보호비 때문. 진주네 집이 그리 내세울 것 없는 집안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녀석들은 곧바로 보호비를 내라며 진주를 들볶았다.

“진주야……. 얘들 예비 각성자 클래스 애들이야.”

끌려오다시피 한 진주의 곁에는 겁에 질린 채 바들거리는 선영뿐이었다. 같은 반 아이들이 뒤에서 가족사를 수군거릴 때도 전혀 주눅 들지 않던 선영도 이 녀석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보였다.

“각성자인 우리가 몬스터로부터 너희를 안전하게 보호해주니까 당연히 그 대가를 내야 할 거 아니야. 너희 가게 알바생도 그러던데?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녀석들은 예비 각성자 클래스 학생들. 비록 정식 각성자는 아니었지만, 기준치 미달의 마력만으로도 평범한 학생들에게는 충분히 위협이 될 만했다. 그러다 보니 가리봉 고등학교 학생 중 그 누구도 이들에게 감히 반기를 들지 못했다.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

진주는 참을 수가 없었다. 선영이 매일 녀석들에게 바치는 보호비는 선영의 아빠가 막노동으로 힘들게 벌어 마련해 준 점심값이었다. 진주가 입학하기 전 선영이 매일 점심을 걸러야 했던 이유가 바로 이 녀석들 때문이었다.

“네가 학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잘 모르나 본데 현규 얘가 원래 마력 아카데미 예비학교에 스카우트될 예정이었…….”

“가자, 선영아.”

진주는 더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돌아섰다. 선영의 손에 들려 있던 소중한 점심값을 함께 움켜쥔 채로.

“야! 어디 가? 지금 내가 말하고 있잖아!”

그런 진주의 앞을 아이들이 가로막았다. 현규라는 녀석의 똘마니들. 녀석들은 진주의 당돌한 모습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켜. 더 할 말 없으니까.”

“아직 얘기가 다 안 끝났는데 네가 이렇게 그냥 마음대로 가 버리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니?”

우두머리인 현규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체면을 운운했지만, 좋은 말로 할 때 보호비를 내라는 협박이었다.

“너는 끝까지 거기 그렇게 가만히 서 있을 거니? 강윤서, 너 반장 아니야? 얘들 억지 부리는 거 안 보여? 양아치 짓 하는 거 안 보이냐고?”

진주는 현규의 말을 무시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현규 무리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모범생 강윤서가 서 있었다.

“박진주, 너 웃긴다. 내가 보기에는 네가 억지 부리는 것 같은데? 현규랑 얘들 없었으면 학비가 얼마나 더 비쌌을지 생각해 봤어? 얘들 덕에 각성자 교관들도 학교에 있는 거고, 그 덕에 따로 사설 길드에 경비를 맡기지 않아도 되니까 학비가 싼 거지. 그 덕에 너희처럼 돈 없는 애들도 학교 다닐 수 있는 거라고.”

반장인 윤서의 반응은 놀라웠다. 팔짱을 낀 채로 진주와 선영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에 멸시의 빛이 서려 있었다. 윤서는 현규에게 바싹 다가서는 것으로 본인의 입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착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인제 보니 너도 얘들하고 한패구나?”

“한패라고 그러니까 어감이 좀 거북하기는 해도 그런 셈이지. 내가 너 같은 애하고 어울릴 수는 없잖아? 네 그 잘난 도시락이 사실은 식당에서 손님들이 먹다 남은 거 싸 오는 거라며? 어쩐지 옷 입은 것부터가 거지 같더라니.”

“삼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

진주는 반듯하고 착한 모범생으로만 알고 있던 반장 강윤서의 실체가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깟 도시락 반찬 때문에 저런 열등감을 느낄 줄은 몰랐다.

“현 쌤이 좀 추켜세워 주니까 네가 뭐라도 되는 것 같지? 너 같은 애들은 그냥 기생충일 뿐이야. 식당 음식이나 주워 먹는 네 삼촌처럼. 나나 현규가 있어야 너 같은 애들도 먹고사는 거라고. 그러니 고맙다고 고개는 숙일 줄 알아야 할 것 아니니!”

진주는 기가 막혀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위선과 가식으로 실체를 숨겨온 그 노련한 비겁함이 혀를 내두르게 했다.

“노려보면 어떨 건데? 너 엄마, 아빠도 없다며? 선영이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정말 대단하다. 그 주제에 무슨 학교에 다니겠다고. 분수를 모르네. 원래 부모 없는 것들은 다 그러니?”

여전히 굽힐 줄 모르는 진주의 눈빛 때문이었을까. 윤서는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고 말았다. 진주에게 제 처지를 깨닫게 해주겠다는 것이 그만 건드려서는 안 될 것까지 건드리고 만 것이었다.

“훗!”

“웃어? 너, 지금 날 비웃은 거야? 네까짓 게?”

한참 동안 윤서를 노려보던 진주가 코웃음을 쳤다. 진주가 눈물을 쏟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윤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 보니까 둘이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그래. 그렇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F 등급 기준 수치에도 못 미쳐서 마력 아카데미 예비학교 문턱도 구경 못 해 본 양아치가 설쳐대는 꼴이나 잘난 부모 말고는 내밀 것 하나 없으면서 같잖은 공주 놀이나 하는 네 그 꼬락서니가 너무 웃기잖아.”

거리를 전전했던 그 세월만큼 진주는 강해져 있었다. 게다가 이제 그 누구에게도 멸시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현규나 윤서 따위는 전혀 부럽지 않을 마력과 가족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너 지금 말 다 했어!”

“일 크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꺼져.”

진주는 선영의 손을 꼭 쥔 채로 앞길을 막아선 윤서를 그대로 어깨로 밀치며 나아갔다.

쿵.

“너 진짜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 애구나? 내가 여자라고 못 건드릴 것 같아!”

자존심이 상했던 것일까. 자리를 뜨려는 진주와 선영의 앞을 현규가 다시 막아섰다. 현규는 겁을 주려는 듯 마력을 가득 실은 발로 땅을 박차면서 제 능력을 과시했다.

“그게 전부니?”

“뭐……?”

“고작 그 정도가 네가 가진 마력의 전부냐고?”

현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마력을 보여주면 백이면 백 모두 눈을 내리깔았다. 아버지는 국회의원에 본인은 예비 각성자 클래스 학생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아이들은 이미 기가 죽은 채 현규를 대했다. 그런데 진주는 달랐다.

“여자애치고 제법 강단은 있어 보인다만 객기 부리지 마. 그러다가 다치면 책임 못 진다?”

“날 건드릴 자신은 있고? 그래서는 닭 모가지도 못 비틀 것 같은데?”

보란 듯이 마력을 가득 담아 땅을 박차는 모습까지 보여줬건만, 효과가 없었다. 강윤서의 집안처럼 돈이 많은 것 같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처럼 마력을 가진 것 같지도 않았다. 도대체 뭘 믿고 저리 고개를 뻣뻣하게 쳐드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네가 마력이 얼마나 무서운 힘인지 잘 모르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내가…….”

“너, 몬스터 죽여 본 적 있어?”

“그거야 뭐 당연히 곧…….”

“목을 비틀면 붉은목쥐나 드워프토끼가 무슨 소리를 내는 줄 알아?”

“……!”

“산 채로 머리통이 으깨질 때 긴팔트롤이 어떻게 발버둥 치는지, 제 눈으로 제 뿔이 짓이겨지는 것을 지켜보는 코뿔멧돼지 표정이 어떤지 봤어?”

“나… 나야 곧 보게 되겠지만, 너 같은 일반인은 아무리 보고 싶어도 평생 볼 수 없다는 건 알지.”

“과연 그럴까?”

꿀꺽.

현규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아직 직접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 몬스터를 대면해 본 적은 없었다.

반면 몬스터의 목을 비틀고 두개골을 으깨는 것을 설명하는 진주는 경험 많은 각성자처럼 별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재미난 놀이를 설명하듯 입꼬리까지 올린 채.

“다치고 싶지 않으면 보호비나 내놓고 꺼져! 어디 일반인 따위가!”

현규는 대화를 이어갈수록 말려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더니 두 손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정식 각성자들처럼 온전한 황금빛 기운이 서리지는 않았지만, 아지랑이 피듯 주변 공간이 흔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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