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화>
[ 부문장님! 큰일 났습니다! ]
“큰일? 곧 도착하니까 회의실에서 듣는 것으로 하지.”
빌리 그레이엄 부문장은 아침 출근길에 걸려온 전화에 살짝 짜증이 났다. 회사가 코앞이었다. 이리 호들갑까지 떨 만한 일이 뭐 있겠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던 그때.
[ 일단 보고부터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K94C-03 게이트가 셧다운 됐습니다! ]
“그게 뭔 소리야? 셧다운이라니?”
너무나 충격적인 소식에 빌리 부문장은 하마터면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마력을 뿜어낼 뻔했다. 게이트가 셧다운 되는 경우는 딱 두 가지. 게이트가 완전히 소멸하거나 보스 몬스터가 죽어서 15일간 재생성 과정을 거치는 경우였다.
[ 아무래도 습격을 당한 것 같습니다. ]
“습격? 마탄에서 관리하는 길드를 누가 감히 습격한다는 말이야?”
빌리의 반응은 노여움이 아니라 의아함이었다. 트리스타나 태극에서 선전포고를 해오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세 길드 사이의 전쟁은 곧 공멸을 의미했다. 즉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의미였다.
[ 확인 중에 있습니다만 현재까지 파악한 바로는 트리스타나 태극이 움직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
“확실해?”
[ 양쪽 모두 밤새 따로 인력을 동원한 정황이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
“그럼 도대체 누구 짓이라는 거야!”
[ 뚜렷한 단서라고 할 만한 것이 나오지 않아서 거기까지는 아직 잘……. ]
“전담 관리팀장이 모르면 그걸 누가 알아!”
통화가 길어질수록 빌리 부문장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K94C-03 게이트는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게이트가 아니었다. 무려 B 등급 게이트. 빌리 부문장의 비자금 창구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게 누군가 야간 보안 팀원 전원을 기절시키고 침입하는 바람에……. 다행히 우리 쪽 CCTV에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모습이 일부 찍혔습니다.”
“얼굴은? 얼굴은 확인했어?”
빌리 부문장은 서둘러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이미 그와 통화하던 관리 3팀장을 포함한 게이트 관리 부문 주요 임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그게 좀 애매합니다.”
“애매하다니?”
“두 명인 거 같기도 하고 한 명인 것 같기도 하고…….”
“당장 화면에 띄워 봐.”
“예, 부문장님.”
남아 있는 단서라고는 CCTV 녹화 기록이 전부였다.
휙!
“지금 화면에 지나간 게 뭐지? 사람 같은데?”
“얼굴을 식별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분명 방금 무언가가 게이트를 통과하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하지만 하필 그 순간에 화면이 갑자기 환해지는 바람에 그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었다.
“잠깐! 저건 분명 사람 같은데?”
그때 CCTV 녹화 화면에 또 다른 무언가가 등장했다. 분명 사람이었다. 정면은 포착되지 않았지만, 서둘러 게이트 안으로 향하는 사람의 뒤통수가 분명히 화면에 보였다.
“그런데 보시는 것처럼 정면에서 잡힌 모습이 없습니다. 금발인 것으로 보아서는 외국인으로 보입니다만…….”
“잠깐 멈춰봐. 손에 끼고 있는 저게 뭐지? 건틀릿인가? 저 빨간색 말이야.”
범인은 금발의 외국인. 눈에 띄는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마치 사람의 피부처럼 유연하기 그지없는 새빨간 건틀릿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저기 그게…….”
“왜?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저 정도의 유연성을 가진 건틀릿은 세계적인 장인의 작품이 분명했다. 빌리 부문장마저 탐이 날 정도로 움직임이 부드럽고 가벼워 보였으니까. 화면 속 인물을 특정하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저것은 정밀 영상 분석 결과 건틀릿이 아니라 시중에서 판매하는 고무장갑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뭐? 고무장갑이라고? 그럼 베히모스를 상대하러 가는데 설거지할 때 쓰는 고무장갑을 끼고 갔다는 거야? 도대체 저놈 뭐야?”
어처구니가 없었다. 베히모스가 무슨 음식물 쓰레기도 아니고.
“체형이라든가 머리 색깔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외국인인 것만은 확실해 보입니다.”
“당장 관리국에 연락해서 국내에서 활동 중인 B 등급 이상 외국인 각성자 명단 보내 달라고 해. 해외 외국인 각성자 출입국 기록도 요청하고!”
어쨌든 범인은 최소 B 등급 이상의 실력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다. 잘못 짚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게 이미 확인해 보았습니다만…….”
“그래?”
“현재 국내에 체류 중인 B 등급 이상 외국인 각성자는 단 한 명뿐입니다.”
“이렇게 금방 들통 날 일을 가지고. 아무튼 잘 됐군. 그래, 어떤 놈이야?”
이 사달을 일으킨 용의자가 단 한 명으로 좁혀졌다. 빌리 부문장의 목소리에는 자신의 것을 건드린 녀석을 제대로 응징해 주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부문장님이요.”
“뭐? 나?”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예. 현재 국내에 체류 중이거나 활동하고 있는 B 등급 이상 각성자 중에서 금발의 백인은 부문장님 한 분뿐입니다.”
국가 몬스터 관리국 자료가 없었더라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B 등급 이상 각성자라면 매스컴의 관심을 받을 정도로 소수였으니까. 거기다가 금발의 외국인이라면 익히 들어본 인물일 것이 틀림없었다. 빌리 부문장처럼.
“그게 뭔 소리야? 다른 곳도 아닌 저기서 내가 저렇게 고무장갑을 끼고 설쳐댔을 리가 없잖아!”
금세 억울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빌리 부문장. 졸지에 제 비자금 출처를 털어 매스컴에 폭로한 바보가 되어 버렸다.
***
[ 어젯밤 중구 장교동 청계천 인근에 위치한 K94C-03 게이트에서 무허가 레이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게이트는 국내 3대 길드 중 하나인 마탄에서 직접 관리 중인 곳으로 밝혀져 충격을 더하고 있는데요. 국가 몬스터 관리국과 마탄은 화면에 잡힌 금발의 외국인을 용의자로 특정하고 공개 수사를 결정한 가운데 … (중략) …. ]
TV 소리가 한창 장사 준비 중인 ‘가리봉 왕족발’에 울려 퍼졌다.
“새벽에 고생 많으셨겠는데요, 드웨인 형님?”
한창 설거지 중인 드웨인과 달수. 달수는 오전 훈련을 마치고 점심을 얻어먹으러 왔다가 다시 붙잡힌 참이었다.
“내가 새벽에 유진과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지? 역시 너도 저 녀석과 한패였나?”
새벽에 드웨인이 내 뒤를 밟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녀석과 나 둘뿐. TV 화면을 보던 달수는 한눈에 그 뒤통수가 드웨인의 것임을 알아차렸다.
“형님, 그랬으면 제가 형님하고 같이 이렇게 설거지나 하고 있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렇군. 그나저나 정말 볼 때마다 신기해. 저 마법 상자 속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는 거지? 저 많은 사람을 어떻게 저 안에 가둔 거야?”
드웨인은 달수의 지극히 논리적인 대답에 곧바로 수긍했다. 의심을 거두고 이내 TV 화면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형님, 저건 마법 상자가 아니라 TV라는 겁니다. 저기 저 뒤통수가 형님 뒤통수고요.”
“저게 나라고?”
TV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드웨인이었다. 저 화면 속 뒤통수가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화면 속에 저기 저 고무장갑 보이세요? 지금 끼고 계신 이거 말입니다. 화장실 갈 때도 안 벗으셨죠?”
“이거 벗으면 저 마왕 녀석이 나를 쫓아낼 것 같아서……. 아무튼 그럼 저게 정말 나라고? 나는 지금 여기 있는데?”
정작 본인도 몰라본 뒤통수를 달수가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저 화면 속 고무장갑 때문이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금발의 외국인이 고무장갑을 끼고 길거리를 활보하는 일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 분명했다.
“정확히 말하면 오늘 새벽 형님 모습이죠. 설거지할 때 말고는 이것 벗으셔도 돼요. 안 그러면 주부습진 걸립니다.”
“주부습진? 그게 뭐지?”
“병 걸린다고요.”
“병? 지금 내 걱정을 해주는 건가?”
“제가 아니면 또 누가 형님 걱정을 해주겠습니까? 저하고 형님이 어디 보통 인연입니까?”
달수 녀석, 하여간 혓바닥 하나는 난 놈이었다. 그걸 또 이렇게 인연이라고 포장하나.
“달수! 내가 저 마왕 놈 심장에 검을 꽂는 그 날까지 반드시 참고 견뎌야 해!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거야!”
감동이라도 받았는지 드웨인은 달수와 고무장갑 차림으로 두 손을 맞잡고 결의를 다졌다.
“달수야, 착실하게 열심히 일하는 애한테 괜히 바람 넣지 마라.”
“바… 바람이라니요?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형님? 그냥 동료로서 이런저런 이야기나 나눴을 뿐입니다.”
“드웨인이 안 따라갔으면 과연 저걸 누가 들고 와야 했을까?”
“하하하! 역시 두 분의 호흡은 못 따라갈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그 옆자리는 양보해드려야겠네요.”
다 들었는데 아닌 척은. 달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박수까지 치면서 곧바로 드웨인을 손절했다. 드웨인은 나와 달수의 대화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커다란 눈만 끔뻑거렸다.
“뭐야? 웬 박수? 무슨 좋은 일 있어?”
난데없는 박수 소리에 궁금한 듯 주방으로 들어온 성진이.
“아… 아닙니다, 작은형님. 이번에 도축한 몬스터가 육질이 하도 기막혀서 감탄하던 참입니다. 여기 마블링 한 번 보십시오.”
“이것도 코뿔멧돼지야? 이번에는 몸통을 잘라왔나 보네?”
“하하하! 맨날 앞다릿살만 먹을 수야 있나요? 가끔 삼겹살도 먹고 등심에 목살도 먹어봐야죠. 헤헤.”
달수는 혹여 성진이가 의심할까 봐 오늘 새벽 드웨인이 열심히 짊어지고 온 베히모스 앞다리를 코뿔멧돼지 몸통이라고 둘러댔다. 따로 눈짓을 보낸 것도 아니었건만 알아서 척척 이야기를 꾸며댔다.
“아무튼 달수 너는 진짜 볼 때마다 대단하다. 이런 걸 맨날 어떻게 그렇게 손쉽게 사냥하는 거야? 안 무서워?”
“각성자가 몬스터를 무서워해서야 되겠습니까, 작은형님?”
“아무튼 너도 몸조심하면서 다녀. 돈도 좋지만, 몸이 먼저야, 알지?”
이제 성진이는 달수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놓았다. 달수가 한참 어린 동생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 셈이었다.
“백번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마음처럼 되나요? 살다 보면 가끔은 정말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습니까, 작은형님?”
“그래, 길드를 꾸려가다 보면 그런 일도 있겠지만, 앞으로는 그런 일 되도록 하지 마. 여기 형도 그렇고 다들 너 걱정하는 거 알지?”
“그럼요, 작은형님.”
달수는 마치 나 들으라는 듯 일부러 더 목소리를 높였다. 진짜 더럽고, 치사해도 죽기 싫어서 어쩔 수 없이 시키는 대로 심부름도 하고 훈련도 받는다는 투였다.
“그리고 형. 이따가 학교 다녀올 수 있겠어? 내가 다녀올까?”
“아니야. 내가 다녀올게. 그런데 학교를 어떻게 벌써 알아봤어? 단 하루 만에?”
“백 선생님이 바로 알아봐 주셨어. 다행히 요 근처더라고.”
드웨인과 달수는 마치 한 몸처럼 같은 눈빛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뒷감당을 어찌 하려고.
“진주한테는 말해 줬고?”
“응. 옛날에는 초등학교로 쓰였었나 봐. 어릴 적 오빠랑 같이 다녔던 학교라던데?”
진주 학교 문제는 일사천리로 처리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내로라하는 마력 아카데미 예비학교에 보내고 싶었지만, 진주를 노리는 세력이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은 지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튼 놈들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지낼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