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리봉 마왕족발-28화 (29/204)

<제28화>

“개업 축하드립니다.”

드디어 ‘가리봉 왕족발’이 정식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개업 첫 손님은 선글라스에 모자를 푹 눌러쓴 누가 봐도 연예인 병에 걸린 사람이었다.

“그 꼴은 뭐냐?”

“하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냥 다닐 수가 있어야죠, 형님.”

달수였다. 한여름에 마스크, 스카프에 선글라스까지. 제발 알아봐 달라고 시위를 하는 것 같았다.

“아주 연예인 납셨네. 근데 개업 축하한다는 놈이 왜 빈손이냐?”

“예? 화환 같은 거 필요 없다고 하셨잖아요? 괜히 제 이름 적혀 있으면 사람들만 모여들 거라고…….”

“그래서 진짜 빈손으로 왔어? 네 이름 안 적힌 거로 준비해서 두 손 무겁게 올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역시 달수는 놀려먹는 재미가 있다.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놈의 ‘구로 천사’라는 호칭이 떡하니 박힌 물건을 들고 왔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제가 매상은 확실하게 올려드리겠습니다. 족발 100인분! 족발 100인분 포장해 주십시오.”

딴에는 미안했는지 달수는 통 크게 족발 100인분을 주문했다. 이 정도면 제 몫은 다했다는 표정이었다.

“안 돼.”

“예? 안 된다니요?”

“족발이 무슨 3분 짜장이냐? 100인분을 나 혼자 언제 만들어서 포장까지 하라고? 그냥 와서 먹어. 한꺼번에 오지 말고 고루고루 나눠서 와라. 몰려오면 문 안 열어줄 줄 알아. 그리고 오늘 일손 모자랄 것 같으니까 너는 이리 들어오고.”

코뿔멧돼지의 독성을 말끔하게 제거하고 족발다운 맛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식구들끼리 분업해서 일한다고 해도 당장 100인분을 요리하자면 모두 몸이 남아나지 않을 터. 식구들 파스값이 더 나올 것이 뻔했다.

“저… 저요? 제가 왜 주방에……?”

“여기서 설거지 좀 해.”

오늘은 그냥 잠시 손을 빌리는 것으로 개업 축하 인사를 대신하는 것이 나아 보였다. 달수와 나 사이에 이 정도 부탁이야, 뭐.

“이 차림으로 설거지를 하라고요? 형님, 그리고 저 ‘구로 천사’ 팽달수입니다.”

“너 달수인 거 누가 몰라?”

옷차림이 문제라는 건지, 체면이 문제라는 건지.

“설거지하는 알바생도 이미 구하셨네요. 굳이 저까지……! 헉! 당신은 어제 그……!”

“아, 어제 봤지? 앞으로 자주 보게 될 테니까 정식으로 인사라도 나눠.”

달수 녀석한테 설거지를 전부 떠맡기겠다는 것도 아니었다. 이미 설거지를 맡아줄 아르바이트생은 구해 놓은 상태였다. 달수와도 구면인 사람이니 오늘 하루 심심하지는 않을 터였다.

“역시 악의 기운이 느껴져. 네놈은 뭐지? 유진한테 영혼이라도 팔아 버린 건가?”

달수의 오늘 하루 파트너는 바로 드웨인. 사정상 당분간 붙박이로 ‘가리봉 왕족발’의 설거지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 정도면 나름 달수를 배려한 인사말이었다. 적어도 당장 검을 뽑아 들지는 않았으니까.

“드웨인, 너 자꾸 악의 기운이니, 마왕이니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당장 나가.”

“어이, 친구. 나는 드웨인이라고 하네. 여기, 고무장갑. 이거 아주 신묘한 물건이더군. 오늘 함께 열심히 일해 보세나.”

“저… 저는 구로 천사 팽달수라고…….”

“어쩐지 처음 볼 때부터 인상이 영락없는 천사 같더라고.”

드웨인 녀석, 꽉 막힌 옹고집일 거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융통성도 있고 생존력도 강해 보였다. 그렇게 주방 싱크대 앞에 두 녀석을 박아두고 나오던 그때, 요란한 음악 소리가 귀청을 찢어놓을 듯 울려 퍼졌다.

[ 오늘 이곳에서는 몬스터 고기의 새로운 발견,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기적의 족발인 ‘가리봉 왕족발’의 오픈을 맞이하여 고객 만족 100%, 고객 감동 200%의 고객 사은행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직접 저희 ‘가리봉 왕족발’ 매장을 찾아주신 고객님들께는 … (중략) …. ]

시끌벅적한 행사 멘트까지. 대충 들어보니 ‘가리봉 왕족발’의 고객 사은 행사라는데 사장인 성진이도 처음 듣는다는 눈치고 나나 어머니도 모르는 일이었다. 시끄럽게 사람들 이목을 끄는 건 질색인데.

“누가 이런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을까?”

내 시선은 당연히 달수에게로 향했다. 이런 바보 같은 짓을 벌일 놈은 이 녀석뿐이었다. 본인은 전혀 몰랐다는 표정인데 달수 녀석이 아니라면 녀석의 미련한 부하 중 한 명의 짓이 틀림없었다.

“큰형님, 개업 축하드립니다!”

“너 이 새끼, 밖에서 지금 뭐 하는 거야!”

역시 예상대로였다. 달수 녀석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어 나름 달수파 수뇌부 행세를 하는 두 녀석 중 하나의 작품이었다. 달수가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러댔다.

“하하하! 형님도 참. 뭐, 별거 아닙니다. 큰형님을 향한 이 오춘복이와 달수파 길드원 전체의 마음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형님보다는 아무래도 제가 이런 실무에는 더 밝지 않습니까? 미처 준비하지 못하신 것 같아서 마련해 봤습니다. 그래도 개업 날인데 이 정도는……! 읍! 아니, 왜 그러십……! 읍!”

빡!

“형님, 죄송합니다. 당장 치우겠습니다. 뭣들 해! 당장 저거 다 치워! 어서!”

요란한 타격음과 함께 음악 소리가 뚝 끊어졌다. 열심히 행사 멘트를 읊어대던 모델들도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구로 천사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고함을 질러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잠시 소란이 일고 난 뒤.

“어서 오세요. 어? 선생님?”

“오늘 정식으로 식당 오픈하신다고 들어서요. 축하드립니다. 여기 이거…….”

다음 손님이 수줍게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섰다. 백수현 선생님이었다. 품에 작은 화분을 안고 계셨다. 누구와 달리 성의가 가득 담긴 개업 축하 선물까지 마련해 오신 것이었다.

“뭘 이런 걸 다 사 오셨어요? 그냥 오셔도 되는데…….”

성진이가 서둘러 화분을 받아들었다. 얼굴이 벌게진 것이 백 선생님이 오실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아니면 백 선생님이 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든지.

“아이고, 선생님. 현희야, 민우야! 선생님 오셨다!”

“선생님!”

“왈왈!”

백 선생님을 발견한 식구들이 하나둘 몰려나오기 시작했다. 어머니에서부터 애들은 물론 백구까지. 마치 오래 떨어져 있던 가족을 다시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정말 잘 오셨어요. 우리 성진이가 정식으로 개업하면 꼭 다시 한번 모셔서 제대로 대접해야 한다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었거든요.”

음식 준비 때문에 주방을 비울 수는 없었기에 하는 수 없이 겨우 목을 내밀어 인사를 건넸다. 숫기 없는 성진이를 위해서 없는 말도 좀 보태줄 겸.

“아…… 예. 그렇지 않아도 연락을 드리려던 참인데……. 저번에는 족발을 드셔보셨으니까 오늘은 다른 걸 대접하겠습니다. 오늘 보쌈도 잘 삶아진 것 같고 김치찜도…….”

물론 성진이가 따로 백 선생님 이야기를 꺼낸 적은 없었다. 마음만은 정말 그랬던 것인지 마치 속내를 들킨 것처럼 더 허둥거렸다. 그런 아빠의 모습을 바라보는 민우의 표정이 영락없는 개구쟁이의 그것이었다.

“아니요, 오늘은 돈 내고 먹어야죠. 그래서 일부러 친구들하고 같이 왔어요. 많이 팔아드리고 가려고요.”

“안녕하세요? 수현이 얘가 하도 졸라대서 끌려왔습니다. 족발을 먹고 싶은 건지 딴 데 관심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요.”

“얘는! 지금 뭐라는 거니?”

“여기까지 와서 얌전한 척은. 신나서 달려올 때는 언제고.”

백 선생님 쪽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 성진이한테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우리 작은형님이 애타게 기다리실 만하네요. 가까이에서 뵈니까 진짜 미인들이시네. 음식을 잘못 준비한 것 같은데요, 작은형님?”

“응? 왜?”

“미인들은 이슬만 드시는 거 아닙니까? 이슬을 어디 가서 구하나?”

달수 녀석이 지원 사격에 나섰다. 저 나이에 어떻게 저런 20세기 유머가 나올까. 하긴, 외모만 놓고 보면 무리도 아니었다. 아무튼 대충 여기 모인 사람들은 전부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실없는 소리는.”

달수의 싱거운 농담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진주였다. 진주는 요즘 유독 달수에게 차가웠다. 역으로 진주와 대화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이 달수이기도 했다.

“뭐! 쪼그만 게. 너 자꾸 오빠한테 까불래?”

달수 녀석이 일부러 더 진주에게 허물없이 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였다. 함께 랭크업 훈련을 하다 보니 그새 나름 정이 많이 든 눈치였다. 진주 오빠가 죽었다는 사실 때문에 더 신경이 쓰이기도 할 테고.

“와! 이분은 혹시 구로 천사님 아니에요?”

“하하하! 천사는요, 무슨. 생긴 게 이렇다 보니 다들 천사라고 부르기는 합니다.”

“천사가 아니라 오크겠지.”

“야! 박진주! 너 이렇게 깜찍한 오크 봤어!”

진주도 달수의 마음을 모르는 것 같지는 않았다. 톡톡 쏘아대는 말속에 적대감이 담긴 것 같지는 않았다. 가끔 너무 편하게 받아치는 것 같아서 탈이기는 했지만.

“저 선생님, 그렇지 않아도 부탁드릴 게 하나 있었는데 말씀드려도 될까요?”

“예? 저한테 무슨 부탁을…….”

달수와 진주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서로 투덜거리던 그때. 성진이가 조심스레 백 선생님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작은형님도 참. 무슨 놈의 데이트 신청을 이렇게 느닷없이 하십……! 읍!”

“가서 설거지나 마저 하시지?”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눌 모양이었다. 이쯤에서 조연들은 빠지는 거로. 서둘러 달수의 입을 틀어막고 함께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 진주 때문에요. 진주가 한창 학교 다닐 나이인데 사정상 그동안 그러지 못했거든요. 다시 학교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할 만한 분이 선생님뿐이라서요.”

엥? 진주 얘기였어? 그건 백 선생님께 도움 받지 않아도 될 일인데 모두가 다른 말을 기대하고 있는 지금 굳이 그 말을 꺼낼 것까지는……. 설마 말은 걸고 싶고 무슨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서 그런 건 아니지?

“여기 아름다운 아가씨 이름이 진주인가 보네요?”

“우리 언니 예쁘죠, 선생님?”

“그래, 현희 너만큼 예쁜데?”

“…….”

꾸뻑.

진주는 자신을 향한 주변의 관심이 어색한 듯 말없이 눈치만 살폈다. 성진이는 남들의 기대에 찬 눈초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말을 멈췄고.

***

‘진짜 SDS였던 건가?’

‘가리봉 왕족발’ 밖에도 때를 노리는 사람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정체를 들키지 않고 식당 안으로 발을 들이고 싶은 자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유진 식구들과도 인연이 깊은 마탄의 클레어 팀장도 있었다.

‘역시 처음 왔을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았어. 아무튼 꽤 주도면밀하군. 이런 의외의 장소를 접선 장소로 삼은 것을 보면.’

클레어는 팽달수와 SDS와의 연관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 구로 바닥에서 SDS의 수장과 대면할 만한 중량감 있는 인물은 당연히 구로 천사뿐이었다.

‘팽달수, 도대체 네 정체가 뭐야? 아이는 어디에 숨긴 거고? 애 얼굴을 알아야 찾든지 말든지 하지.’

골목을 서성이는 사람은 클레어 팀장만이 아니었다. 지현우 비서실장의 지시를 받아 팽달수의 주변을 감시하는 또 한 명의 인물. 차재명 비서도 있었다.

‘응? 잠깐! 저 사람은 차 비서잖아! 아직 팽달수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건가?’

완벽하게 위장을 했다고 자부했건만, 눈이 마주친 순간 둘은 곧바로 서로를 알아봤다. 둘 다 짐짓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 척 다른 곳을 바라보며 머리를 굴렸다.

‘클레어 팀장? 역시 저것들이 배후였어! 나를 알아보지는 못했겠지? 우리가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게 해야 해.’

애써 딴짓을 하는 것은 차 비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이! 거기 두 사람!”

그때 어디선가 두 사람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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