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얘들아!”
“선생님!”
체육관 유리창이 모두 한꺼번에 깨져 버렸다. 조금 전 엄청난 기운이 만들어낸 바람 때문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모두 무사한 것을 확인하자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고 했다.
“어디 다친 데는 없니? 어서 가자. 선생님이랑 같이 대피소 쪽으로 뛰어가는 거야, 알았지?”
수현은 먼저 가까이에 있던 민우와 현희의 손을 붙잡았다. 조금 더 떨어진 곳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철승이까지 챙겨 빨리 이곳을 빠져나갈 생각뿐이었다.
“선생님, 이제 괜찮아요. 지금 방금 백구가…….”
잔뜩 긴장한 수현과 달리 민우는 밝은 표정이었다. 무언가 꼭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백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민우야, 대피소에 도착하고 나서 들어도 될까?”
“선생님, 그게 백구가요. 방금…….”
지금 한가롭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수현은 서둘러 철승이에게 다가갔다. 그때 말을 이어가던 민우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불안해진 수현이 황급히 민우 쪽을 바라보았다.
“다들 괜찮니?”
“큰아빠!”
“아저씨!”
다행히 몬스터는 아니었다. 민우의 큰아빠인 유진 씨와 달수파 길드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던 대머리 아저씨가 나타났다. 민우는 마치 누구에게 주의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검지로 입술을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예…… 예, 저는 괜찮아요. 일단 모두 빨리 피해야 한다고요. 방금 이곳 근처에서 몬스터 소리가 났거든요.”
“이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선생님.”
어찌 된 영문인지 유진 또한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걱정거리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었다. 몬스터가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어쩜 저리 느긋할 수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여기 계시면 위험합니다. 어서 피하세요! 어서 이분들을 학교 밖으로 대피 시켜.”
곧이어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어깨에 박혀 있는 문양은 분명 유명 길드인 마탄의 로고였다. 선두에 서 있던 여성 팀장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수현 일행을 인도했다.
[ 팀장님, 마력파 반응이 끊겼습니다. ]
“마력파 반응이 끊기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때 팀장이 가지고 있던 무전기가 쩌렁쩌렁 교신내용을 내뱉었다. 팀장의 반응에 무리 전체가 멈춰 섰다. 당장 대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듯 보였다.
[ 아무래도 소멸한 것 같습니다. ]
“소멸이라니? 우리가 여기 있는데 녀석이 소멸했다는 게 말이 돼?”
소멸. 분명 소멸이라는 말이 무전기 전파를 타고 흘러나왔다. 학교로 쳐들어온 몬스터가 사라졌다는 말이 틀림없었다. 수현은 이제야 안심이 되는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아이들을 껴안았다.
[ 확실합니다. 소멸한 것이 아니라면 마력파가 끊길 리가 없으니까요. ]
“정말 소멸한 거 맞아? 도대체 누가 소멸시킨 거지?”
팀장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교신 내용을 재차 확인했다. 생명과 직결된 문제인 만큼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모습이었다.
“혹시 여기서 빅터스크캣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그러니까 커다란 고양이 형태의 몬스터인데…….”
확인할 것이 남았는지 팀장은 수현 일행에게 몬스터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갑작스럽게 소멸해 버린 경위를 알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팀장님, 이 아이는 아무래도 병원으로 후송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백…… 백구가 고…… 고양이를 잡아 먹…….”
“철승아, 왜 그래? 철승아, 선생님 알아보겠니? 철승아!”
수현은 이제야 어느 정도 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재빨리 철승에게 다가갔다.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 KBC 박대기 기자입니다. 지금 제 앞에는 빅터스크캣으로부터 목숨을 걸고 어린 학생들을 살려낸 영웅, 팽달수 씨가 서 계신대요. 영웅의 한 말씀 들어보겠습니다. ]
시끌벅적한 오전이 지나갔다. 학교에는 3일 동안 임시 휴교령이 내려졌다. 놀란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무너진 시설물을 보수하기 위한 조처였다.
[ 영웅이라니요? 에이, 제가 무슨. 저는 그저 이 한 몸 으깨지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아이들만큼은 살리고 봐야겠다는 그 일념 하나로…… (중략)…….]
세상은 새로 탄생한 영웅을 칭송하느라 바빴다.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유명 길드도 처치하지 못한 몬스터를 단칼에 소멸시킨 영웅.
“큰아빠, 저건 거짓말이잖아요?”
“거짓말은 나빠요!”
대한민국 전체가 칭송하고 있는 영웅은 다름 아닌 달수였다.
“‘선의의 거짓말’이라고 해야 할까? 거짓말은 나쁜 거지만 가끔은 누군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할 때도 있단다.”
볕이 잘 드는 창턱에서 허연 배를 까발리고 잠들어있는 백구. 시흥과 금천, 구로 일대 사람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빅터스크캣은 지금 저 녀석의 배 속에 있다. 그 커다란 몬스터가 얼마 안 있으면 콩알만 한 똥이 되어 땅바닥을 뒹굴 터.
“백구를 위해서요?”
“그래, 민우랑 현희는 백구랑 오래오래 같이 지내고 싶지?”
“네!”
백구가 빅터스크캣을 꿀꺽하는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셋. 민우와 현희, 그리고 철승이었다.
“아마 백구도 그럴 거야. 그런데 백구가 몬스터를 제압한 영웅이라는 게 알려지면 사람들이 백구를 가만히 놔둘까?”
철승이라는 녀석은 그냥 놔두기로 했다. 어차피 녀석이 아무리 떠들어댄다고 해도 아무도 녀석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주먹만 한 강아지가 무시무시한 몬스터를 먹어 치웠다는 말을 믿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니요!”
그래도 사람들을 납득시킬만한 설명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파고들 테니까.
“그래서 달수 아저씨가 대신 거짓말을 해주시는 거야.”
그렇게 달수는 영문도 모른 채 영웅이 되었다. 시키는 일은 그래도 썩 잘 해내는 녀석이었다.
“아! 달수 아저씨는 착하구나.”
아이들도 이제야 ‘선의의 거짓말’에 대해 이해 한 모양이었다. 한결 달라진 시선으로 TV 속 달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형님, 저 왔습니다.”
“와! 달수 아저씨다!”
그때 우리의 영웅께서 ‘가리봉 왕족발’을 방문하셨다. 민우와 현희는 유명 연예인을 만난 것처럼 달수의 품으로 달려갔다.
“쑥스럽게.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그냥 나는 우리 형님들은 물론 너희들과 백구를 위해 이 한 몸 바쳐…….”
벌써 몇 시간째인지. TV에서 같은 거짓말이 수천 번은 흘러나온 것 같았다. 그걸 집에서도 들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오늘은 좀 부실한 놈을 잡았나 본데?”
“형님 덕분에 여기저기 인터뷰하러 다니느라 시간이 있어야지요. 겨우겨우 작은놈으로 한 마리 잡아 왔습니다.”
서둘러 화제를 바꿨다. 오늘은 코뿔멧돼지를 비롯한 식자재들을 납품받는 날. 오늘따라 코뿔멧돼지 앞다리가 홀쭉했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마. 다른 사람한테 부탁하지, 뭐.”
뭐, 사실 굳이 달수일 필요는 없었다. 녀석과 수하들의 입을 막기 위해 피를 보는 게 귀찮은 것일 뿐.
“아…… 아닙니다, 형님. 제가 지금 바로 튼실한 놈으로 다시 잡아 오겠습니다.”
“그래, 하마터면 서운할 뻔했어.”
그렇다고 고작 고기 한 덩어리 때문에 내칠 생각은 아니었다. 그동안 정도 들었고 무엇보다 지금처럼 놀려먹는 재미가 쏠쏠하니까.
***
“자네 채찍도 이제 많이 녹슬었어. 고작 저런 삼류 양아치에게도 밀리고 말이야.”
“면목 없습니다.”
여의도 마탄 빌딩 98층. 마탄 길드 게이트 관리 부문장 빌리 그레이엄의 사무실에서는 서울 전역을 모두 굽어볼 수 있었다. 남태현 회장과 비서실이 사용하는 빌딩 99층, 100층만을 제외하고.
“그리 죄인처럼 기죽을 필요 없어. 다행히 이사회에서는 회장의 부재를 탓하는 분위기니까.”
남태현 회장의 부재가 길어지면서 이사회는 사실상 빌리가 장악한 상태였지만, 지분 관계 때문에 당장 회장을 갈아치우지는 못했다.
“다음에는 절대 이런 실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괜찮다니까.”
그들도 TV 화면으로 팽달수의 인터뷰 장면을 보고 있었다. 방송사들은 앞다투어 팽달수에 관한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미화했다. 흑사파와의 백 대 일 대결이 압권이었다.
“…….”
“그런데 정말 저 녀석이 맞나? 변이까지 일으켰다면 B 등급이었다는 말인데 D 등급 각성자가 B 등급 몬스터를 그것도 손바닥만 한 도축용 정육칼로 단칼에 소멸시켰다는 것이 말이 되냐는 말이야.”
빌리는 TV 내용을 전부 사실로 믿을 만큼 물러터진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 냄새가 났다. 애들 장난감 같은 도축용 정육칼로 빅터스크캣을 상대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생각해보면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고개 숙인 클레어를 편들고 싶었던 것일까. 평소 필요한 말 이외에는 말수가 적은 민형식 법무팀장이 반론을 제기했다.
“각성자의 각성 수치가 고정적이지 않고 변할 수 있다는 보고서 기억하십니까?”
“그래, 기억해. 몬스터들이 변이를 일으키듯 각성자도 수련을 통해서 마력 수치를 상승시킬 수 있다는 내용이었지. 자네도 알겠지만 아주 엉터리는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고 또 틀린 것이 아니라고 볼 수도 없잖아?”
각성자의 마력을 증폭 시켜 각성 등급을 끌어올리는 랭크업. 모든 각성자들의 꿈이었다. 이것이 가능하다면 신의 경지라는 S 등급 각성자가 벌써 탄생했을 터였다.
“맞습니다. 부문장님 말씀처럼 마력 수치가 소폭 변할 수는 있어도 각성 등급을 변화시킬 정도로 큰 변화를 보이지는 않죠. 오히려 자신의 등급에 맞지 않는 과도한 마력은 독이 되기도 하고요.”
랭크업이라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한 번 정해진 각성 등급을 바꾸려는 시도 자체가 각성자의 목숨을 위협했다.
“그래, 모든 각성자들이 경험하는 그 벽. 그 벽을 깰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그게 그리 쉬운 일이라면 우리 잘난 회장님께서 이리 오랫동안 두문불출하시겠나?”
자신의 등급에 맞지 않는 과도한 마력은 결국 어딘가에 응축하기 마련. 이것이 곧 후천성 마력 거부 증후군이라는 질병의 원인이었다.
“그래도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당분간 지켜볼 필요는 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인 마탄의 남태현 회장조차도 같은 증상을 겪고 있었다. 물론 그의 병명은 극비였다.
“어떻게 할까요, 부문장님?”
마탄의 주인이 바뀔 날이 가까이 와 있었다. 남태현 회장이 겪고 있는 후천성 마력 거부 증후군은 치료법이 없는 질병. 더 높은 곳을 바라본 것이 화근이었다.
“그래도 영입 작업은 차질 없이 진행해. 그 믿을 수 없는 일이 만에 하나라도 사실이라면 팽달수라는 저 녀석, 남태현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람일 테니까. 남 회장이 저 녀석과 만나도록 놔둘 수야 없지.”
빌리는 남태현 회장에게 일말의 희망도 남겨주고 싶지 않았다.
“부문장님, 한 가지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뭐가? 뭐 미심쩍은 거라도 있어?”
잠자코 빌리와 민형식 팀장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클레어가 입을 열었다. 사실 현장에서 돌아온 내내 마음에 걸렸던 일이었다.
“현장에서 병원으로 후송된 한 아이가 이상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상한 이야기라니?”
빌리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클레어 또한 빌리처럼 TV 속 저 얼간이가 진짜 영웅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백구가 고양이를 잡아먹었다고요.”
“백구가 고양이를 잡아먹었다? 고양이는 빅터스크캣일 테고. 그럼 백구는? 설마 말 그대로 흰색 똥개는 아닐 것 아니야?”
“현장에 분명 흰색 강아지가 있기는 했습니다만…….”
“강아지? 훗! 클레어, 설마 지금 정말로 강아지가 빅터스크캣을 잡아먹기라도 했다고 얘기하려는 거야?”
이런 반응이 나오리라고 짐작하지 못한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는 심한 PTSD 증세를 보였다. 확실히 무언가를 보기는 봤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