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리봉 마왕족발-9화 (10/204)

<제9화>

“므스뜨!”

“유언이라도 남기려는 거 아니야?”

“다 조용히 해 봐. 뭐라고?”

그때 김 씨 아저씨가 무언가 웅얼거리셨다. 무슨 뜻인지 몰라 모두 곤혹스러워하던 찰나.

“맛있어! 맛있다고!”

이렇게 김 씨 아저씨는 아주 격정적으로 합격점을 주셨다. 아리아스 대륙에서 장장 십 년간 식도락을 즐긴 세월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 늙은이가 노망이 났나? 깜짝 놀랐잖아!”

“자네들도 먹어 봐. 진짜 맛있다고. 진짜 돼지고기로 만든 건가?”

“몬스터 놈들이 세상 뒤집어 놓은 지가 벌써 십 년인데 돼지고기를 우리 동네에서 어떻게 구해?”

“맨날 속고만 살았나. 내 말이 맞나 틀리나 먹어보라니까.”

역시 족발로 요리하기에는 코뿔멧돼지 고기만 한 것이 없었다. 다른 두 분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족발을 집어 드셨다.

“마트에서 파는 몬스터 고기는 아무리 된장을 듬뿍 풀어도……! 음?”

“고약한 술주정뱅이 노인데. 어떻게 나이 먹더니 주사가 하나 더 늘었어. 뭔 호들갑을 그렇게 떨어대……! 뭐야?”

“두 분은 별로세요?”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아저씨들의 대답을 재촉하는 성진이.

“진…… 진짜잖아? 진짜 돼지고기 맛이라고!”

“이게 얼마 만에 먹는 제대로 된 족발이야!”

아저씨들의 긍정적인 반응에 이제야 확신이 선 듯 성진이의 눈빛이 반짝였다.

“드실만하세요?”

“이거 김 씨가 살아 돌아와도 이 정도 맛은 못 낼 것 같은데?”

“도대체 돼지고기를 어디서 구한 거야?”

“돼지고기가 아니라 몬스터 고기에요.”

“정말? 그런데 이런 맛이 난다고?”

아리아스 대륙에서 갈고닦은 레시피가 이곳에서도 통한다는 사실을 이제 확실하게 확인한 셈. 정말 다행이었다.

‘심심하지는 않겠는데?’

혹여나 이곳에서도 진한 피 냄새를 맡으며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었다. 이제 평범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리봉 왕족발’ 주방장으로.

“허허, 다 좋은데 한 가지가 아쉽네.”

그때 가장 먼저 합격점을 주셨던 쌀집 김 씨 아저씨가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고기의 독성을 제거한다고 개똥민들레를 너무 많이 사용한 것일까.

“뭐가요, 아저씨? 간이 좀 심심해요? 아니면 고기를 좀 더 삶을 걸 그랬나요?”

김 씨 아저씨의 느닷없는 말에 조바심이 났는지 성진이가 아저씨 곁으로 바짝 다가갔다.

“이 술주정뱅이야 막걸리나 한 병 더 얻어먹고 싶다는 말일 테지.”

“맛있기는 한데 나도 사실 못내 아쉬운 게 있기는 해.”

“아저씨도요? 식감이 별로인가요?”

이번에는 복덕방 최 씨 아저씨도 아쉬움을 토로했다. 아저씨들을 만족시키지 못한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 김치말이야, 김치.”

“김치요?”

“이렇게 기름진 음식을 먹는데 겉절이가 있어야지. 막국수가 있기는 해도 느끼한 맛을 없애는 데에는 겉절이가 최고지.”

“나도 바로 겉절이가 생각나더라고.”

한국 사람 식탁에 김치가 빠질 수 없었다. 족발이나 보쌈처럼 기름진 음식을 먹을 때는 더욱더.

“그렇지 않아도 김치는 진혁이 어머니께 부탁드리려고요. 동네에서 김치 맛있게 담그시기로 유명하시잖아요.”

“그거 생각 잘했네. 옛날부터 진혁이네 김치는 꿔다가 먹을 정도였어.”

김치 생각을 안 한 것이 아니었다. 이왕 족발집을 다시 열기로 한 마당이니 동네 제일의 김치 명장인 진혁이 어머니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왜 같이 안 오셨어요? 바쁘신가 보네요?”

“바쁘지. 아침저녁으로 얼마나 바쁘다고. 아주 측은해 죽겠어.”

“어린 것도 그렇고. 쯧쯧.”

“아주머니는 바쁘실 것 같아서 내일 따로 찾아뵙겠다고 했어, 형.”

우리 형제를 어려서부터 친자식처럼 챙겨주시던 분이 초대를 마다하실 리가 없었다. 엄청 바쁘신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진혁이는? 진혁이도 바쁘데? 내가 돌아왔는데 열 일 제쳐두고 와야 하는 거 아니야?”

“어…… 어? 그게…….”

진혁이 어머니야 그러실 수 있다지만 둘도 없는 친구였던 진혁이가 오지 않은 것은 못내 섭섭했다. 당연히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그만큼 보고 싶었다는 의미였다.

“젊은 녀석이 안 됐어. 진혁이네도 참 박복하고.”

“아직 성진이한테 진혁이 소식은 못 들었나 보구나.”

“진혁이 소식이요?”

그런데 그 순간 뭔가 불안한 말들이 오갔다. 진혁이에게 무슨 큰일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몬스터들 손에 죽었어. 한 이삼 년 됐나?”

“진…… 진혁이가 죽었다고요? 성진아, 왜 얘기 안 했어?”

“형이 놀랄까 봐 차근차근 말해주려고 했는데…….”

게이트에서 몬스터들이 언제 떼로 몰려나올지 모르는 환난의 시대. 무사하리라 기대했던 진혁이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가슴 한편이 무너져 내렸다.

‘더 일찍 돌아왔어야 했어!’

아버지도, 진혁이도 이제 너무 그리운 과거가 되어 버렸다.

***

다음 날 아침 등교 시간.

“어? 현희다! 현희야!”

“왈왈!”

민우를 학교까지 바래다주는 길. 민우가 친구를 발견했는지 성진이와 내 손을 놓고 어딘가로 향했다.

‘폐지를 줍고 있는 건가?’

거리에는 부모님 손을 잡고 등교하는 아이들이 여럿 보였다. 그 틈에 흰 머리가 수북한 할머니와 함께 폐지를 줍는 여자애가 보였다.

“저분, 진혁이 어머니 아니야?”

자세히 살펴보니 진혁이 어머니였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찾아뵈려던 참이었는데.

“맞아. 저 애가 진혁이 형 딸 현희고.”

부유하지는 않아도 폐지를 주워 생계를 이을 정도의 형편은 아니었다. 진혁이 부부가 몬스터들 손에 죽었다더니 홀로 손녀를 키우시는 게 결코 쉽지 않으셨을 터였다.

“내가 좀 더 살펴드렸어야 했는데…….”

성진이는 죄송스러운 마음에 차마 진혁이 어머니를 쳐다보지 못했다. 민우의 건강 상태도 그렇고 식당도 문을 닫은 처지였다. 성진이라고 진혁이 어머니가 거리에서 저리 고생하시는 모습을 그대로 두고 보고 싶었을 리 없었다.

‘어머니나 다름없는 분인데…….’

학교 입학식, 졸업식 때마다 장사 일로 바쁘신 아버지를 대신해 우리 형제를 챙겨주셨던 분이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진짜 어머니처럼 옷가지까지 살펴주시던 그런 분인데.

‘저 어린 게 얼마나 힘들었을까.’

진혁이 어머니 옆에서 고사리손으로 할머니를 돕고 있는 기특한 소녀가 바로 죽은 진혁이의 하나뿐인 딸이었다. 저 자그마한 손으로 오늘은 언제부터 폐지를 줍기 시작했을까.

“할머니, 안녕하세요?”

“아이고, 민우구나? 아침은 먹었고?”

“네, 할머니. 현희랑 학교 같이 가도 돼요? 백구도 같이요.”

“왈왈!”

선뜻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진혁이가 너무 일찍 가버린 것이 모두 내 잘못 같았기 때문이었다.

“민우야, 봤어? 지금 나 보고 꼬리 흔들었어. 얘 이름이 백구야?”

“응, 백구가 현희 너 예쁘데.”

꼬리를 흔들어대는 백구의 모습에 현희의 표정이 환해졌다. 영락없이 그 나이 또래 아이의 모습이었다.

“현희야, 이제 할미 혼자서 해도 되니까 민우랑 같이 학교 가렴. 성진이 삼촌 손 꼭 붙잡고 가야 한다?”

“아니야, 할머니. 조금 더 있다가 가도 돼. 할머니 도와줄 거야.”

“저도 도와드릴게요. 백구야, 너도 도와줄 거지?”

“왈왈!”

성진이가 뒤돌아보시는 진혁이 어머니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드렸다. 흘깃 쳐다보고 고개를 돌리시는 모습이 나를 알아보시지는 못한 눈치였다.

‘저 유진이에요.’

어느새 맺힌 눈물 때문에 눈앞이 뿌옇게 변해갔다. 얼른 다가가 메마르고 갈라진 두 손을 잡아드리고 싶었다.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야! 너희 할머니 거지였어? 너희들도 거지구나?”

살집이 실팍한 한 꼬마가 등장했다. 자랑하듯 물고 있던 사탕을 살짝 내밀어 보이는 녀석. 민우, 현희와는 잘 아는 사이로 보였다. 말본새만 보아도 얼마나 철이 없는지 느껴졌다.

“최철승! 우리 할머니 거지 아니야!”

민우가 곧바로 발끈하고 나섰다.

“우리 엄마가 그런 거 줍고 다니는 사람들은 다 게으르고 못 배워서 고생하는 거지라고 그랬어. 그렇지, 엄마?”

“저런 애들하고 말 섞지 말라니까.”

철승이라는 아이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더 가관인 것은 그 옆에 서 있던 아이 엄마의 반응이었다.

“어? 강아지다! 엄마 나 저거 가질래.”

“거지들 거를 뭘 갖고 싶다고 그래!”

“저거! 저거 내 거 할 거라고!”

“왈왈!”

철승이라는 아이의 손가락이 백구를 가리켰다. 거지라고 깔보던 민우가 제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자 심술이 난 모양이었다.

“강아지네? 거지가 강아지를 키운다고? 너, 이거 어디서 훔쳤어? 여보!”

“왜 그래? 바빠 죽겠는데.”

엄마라는 사람은 다짜고짜 민우를 도둑으로 몰아붙였다. 소, 돼지도 구경하기 힘든 세상이니 강아지라고 귀하지 않을 리 없었다. 아이의 욕심 가득한 얼굴이 제 엄마를 닮아 보였다.

“아빠, 나 강아지 갖고 싶어. 강아지!”

“얘가 학교에 가다 말고 갑자기 웬 강아지 타령이야? 어? 진짜 강아지가 있네?”

“여…… 여기 이 폐지들 다 우리 거잖아, 여보?”

바로 앞 가게에서 한 사내가 쪼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사람이 애 아빠인 모양. 부부가 속닥거리는 모양새가 무언가를 꾸미려는 것 같았다.

‘저것들 봐라?’

분명 백구와 관련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탐욕스러운 눈길이 백구에게서 떠나지 않고 있었으니까.

“어……? 그러네. 할머니, 이것들 누가 마음대로 가져가래?”

“폐지로 내놓은 것 아니었수?”

“이 노인네가 어디서 변명이야! 도둑질하려던 거 모를 줄 알아!”

“아이고, 미안합니다. 정말 몰랐수.”

참 못난 억지였다. 겨우 집 앞에 내다 버린 종이 박스 몇 개를 가지고 생색을 내는 것도 모자라 가여운 노인을 도둑으로 몰았다.

“내 집 앞에 있는 내 물건을 가져가려면 돈을 내야 할 거 아니야!”

“그런 줄도 모르고 내가 실수했수. 그대로 모두 제자리에 내려놓을 테니…….”

“그러고 보니까 가게 물건들이 하나둘 없어지던데 그거 다 당신 짓이지? 맞네, 맞아.”

“그게 무슨 큰일 날 소리유? 나는 그런 적 없수, 젊은 양반.”

“내가 노인네라고 봐줄 것 같아!”

종이 박스 몇 개 값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황한 진혁이 어머니는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그들은 애초부터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소리 지르지 말아요! 우리 할머니 도둑 아니에요!”

“넌 뭐야! 이 쥐방울만 한 게 어디서 싸가지 없게 어른한테 바락바락 대들어! 네 부모가 그렇게 가르치든? 너희들 오늘 딱 걸렸어.”

“우리 도둑 아니라고요!”

“왈왈!”

“그래, 그 강아지라도 놓고 가면 되겠네. 훔쳐 간 건 배상해야 할 거 아니야!”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가 절로 나왔다. 결국 저것이었다. 백구가 탐이 났던 것. 그래서 모두를 도둑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백구가 간식 먹을 때가 되기는 했지.’

어쩜 저리 뻔뻔할 수가 있을까. 더는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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