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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 라우웰 (60/60)

외전 - 라우웰

세상이 붉다.

방금 전까지 들린 고함 소리나 비명 소리마저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라우웰은 땅에 몸을 뉘었다.

이제는 너무나 힘들었고 또한 쉬고 싶었다.

팔십 평생을 전장에서 보내었지만 한 번도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이제는 쉬고 싶었다.

‘프타를 죽였기 때문인가?’

라우웰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거기에는 눈을 부릅뜬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머리가 있었다.

바로 예전 크라우스 기사단의 부단장인 프타 플렉시의 머리였다.

‘내가 언제부터 이자를 쫓았지?’

사십여 년 전 제국의 황제가 죽은 후 크라우스 가문은 정말로 하루가 다르게 커나갔다. 그건 바로 자신의 주군이자 크라우스 가문의 부가주인 에반 크라우스 백작 때문이었다.

자신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힘을 절대 함부로 쓰지 않는 라우웰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자 평생을 따르고 싶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십오 년 전 그는 공주님과 함께 크라우스 가문을 떠났다.

이제 크라우스 가문이 완전히 안정이 되었으니 자신의 삶을 찾아간다는 말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내심 우리들을 데리고 가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주군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에게 자신의 길이 있고 너희에겐 너희의 길이 있다.’

그것이 주군이 하신 말씀이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서로의 길을 갔다.

칼은 크라우스 기사단의 부단장이 되었다.

에반이 사라지고 얼마 후 프타가 부단장 직을 내놓고 떠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그나르는 세상을 돌아보겠다면서 훌쩍 떠났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바라던 곳을 찾았다.

바로 전장.

아무리 평화롭다고는 하지만 분명 전투가 벌어지는 곳은 있었고 자신은 그런 곳을 쫓아다녔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숙명이다.

피를 보면 갈증이 가시고 그들을 베는 데 희열을 느낀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살기를 모두 자신의 것으로 해 상대를 베면서 라우웰은 전장의 학살자라는 별명이 붙였다.

그 후 이십오 년 동안 살아 있었으니 하루하루를 전장에서 산 사람치고는 꽤나 명줄이 길었다.

‘그것이 다 주군 때문이지.’

주군이 알려준 공무라는 것 때문에 자신은 다른 사람과는 다른 힘을 얻게 되었다.

그저 전투가 좋아 전장을 찾아다니던 그는 어느 날 소식을 들었다. 아그나르가 시신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이야기를 듣고 바로 크라우스 후작가로 달려갔다.

아무리 싸우기는 했지만 주군을 함께 모신 세 사람은 그 누구보다 친했다.

자신의 피에 대한 갈증을 그들이 없었으면 절대로 억제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목숨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끈끈한 유대감을 가졌던 이 세 사람이 오 년 만에 다시 만났다.

이미 중년의 나이였지만 칼이나 자신이나 아직도 젊은이들처럼 혈기 방장했고 꼭 흉수를 잡으리라 다짐을 했다.

그렇게 흉수를 잡으러 다니길 이십 년. 드디어 흉수가 누구인지 알았고 그를 죽이기 위해 이렇게 단신으로 그의 성으로 쳐들어갔다.

이름을 바꾸고 자신이 아는 것을 이용해 세력을 꾸려 한 왕국의 실세가 된 프타를 말이다.

사실 이십 년이나 걸릴 이유는 없었다.

시신에 남겨진 오래된 흔적에서 자신들이 배웠던 검술의 흔적을 발견했고 그 검술을 쓸 수 있는 자를 수소문하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오 년 만에 프타가 흉수인지 알았지만 프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십오 년을 전장과 함께 보내며 프타를 찾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그라면 절대로 숨어 살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어느 날 아주 낯익은 검술을 쓰는 자를 발견했다.

남대륙 출신의 그는 그걸 한 귀족에게 돈을 주고 사사했다고 한다.

라우웰은 그에 또 분노했다.

주군이 아낌없이 전해준 검술을 돈을 받고 판다는 건 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귀족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고 그가 프타임을 확신했다.

그렇다면 이제 칼에게 연락을 해야 했지만 라우웰은 칼에게 연락을 하는 대신 홀로 쳐들어갔다.

벌써 팔십이 넘는 나이에 이미 피의 갈증 또한 희석되고 있었다. 프타를 죽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니 그 후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이제 예전의 혈기가 없어진 그는 혼자 가서 프타만을 죽이고 자신도 죽으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칼에게 편지 한 장만 남기고 홀로 길을 떠났다.

죽음의 길에서 만난 프타는 많이 변해 있었다.

예전의 그 강건했던 몸은 사라지고 살이 찐 전형적인 귀족의 몸매였다.

나는 그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 라우웰이 너를 처단하기 위해 왔노라고.

프타는 놀라 자신의 병사들에게 나를 상대하게 했다.

하지만 병사들만으로는 나를 곤란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온 기사들 또한 자신이 보기에는 우스웠다. 이미 크라우스 가문의 검술은 그 파훼법마저 만들어진 후였다.

그 검술을 그대로 따라하는 기사들을 상대하기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나이 때문인지 힘이 부친 건 사실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기사들을 무시하고 프타를 잡았다. 프타는 겁에 질려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들어줄 테니 자신을 놓아 달라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래서 물었다.

왜 아그나르를 죽였냐고.

그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아그나르가 익힌 비전을 알고 싶었다는 것이다.

프타는 친분을 이용해 아그나르를 꼬여낸 후 그가 마시는 차에다 마비독을 탔다.

당연히 아무런 의심 없이 그걸 먹은 아그나르는 꼼짝없이 프타에게 잡혔고 프타는 고문을 하여 아그나르에게 그 비전을 알려 했다.

그러나 아그나르는 끝까지 입을 다물었고 프타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죽여서 크라우스 가문으로 보내었다.

그것이 그의 조금 남아 있는 양심이 시킨 행동이었다.

그 때문에 프타를 이렇게 잡았지만 나는 정말로 허무했다.

비전이라는 것은 이미 크라우스 가문에서는 공개가 된 것이다. 프타가 나가고 얼마 후 어린 기사들을 받으면서 마음이 정갈한 이들에게 좌공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게 했다.

그 비전 아닌 비전을 지키느라 입을 다문 아그나르나 그걸 알려고 아그나르를 죽인 프타나 둘 다 미련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프타의 목을 베었다.

한순간에 그의 목숨을 끊어준 건 그의 마지막 양심에 대한 보답이었다.

그 후 얼마나 싸웠는지 모른다.

베고 베고 또 베면서 라우웰은 지쳤다.

역시나 생각대로 여기는 내 무덤이 될 것 같았다.

‘참으로 질긴 목숨이군.’

자신이 생각해도 이런 저주받을 종자가 이렇게 오래 살아남았으니 신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자야지.’

라우웰이 눈을 감았다.

이제 편안함에 몸을 맡기려는 것이다.

그때였다.

톡톡.

누군가가 라우웰을 건드렸다.

그냥 죽이면 될 것을 굳이 누가 깨우는가 싶어 귀찮지만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멍해졌다.

거기에는 한시도 잊어버리지 못했던 얼굴이 있었다.

“여기에서 자냐?”

조금은 장난기 어린 음성.

‘아닌가?’

그 때문에 잠시 혼란이 왔다.

자신이 알기로 그 사람은 절대로 이런 가벼운 말투를 쓰지 않는다. 언제나 진중하고 여유롭다. 절대 눈동자 속에 저렇게 장난기가 있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 얼굴은 너무 닮아 있었다.

라우웰이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주군의 아드님이십니까?”

퍽!

“이놈이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가뜩이나 자식이 없어 눈치 보이는 마당에…….”

“윽!”

그가 때린 곳이 아프다. 그리고 그것으로 확실해졌다.

“주군?”

“그래. 나다.”

“어떻게?”

“오랜만에 집에 돌아와 보니 칼이 그러더라. 네가 죽을 자리에 갔다고. 그래서 한번 와보았더니 아예 몰살을 시켜놓았더구나.”

“익히지 말아야 할 것을 익혔습니다. 그리고 섬기지 말아야 할 자를 섬겼습니다.”

“쯧. 넌 그래서 안 돼. 그래서 말인데 날 따라가지 않겠느냐?”

“예?”

“날 따라오라고.”

“어디로 말입니까?”

“네가 좋아할 만한 곳.”

“저 같은 늙은이가 그래도 되겠습니까?”

“넌 늙지 않았어.”

“예?”

라우웰이 자신의 손을 보았다. 주름 하나 없는 젊었을 적 자신의 손이었다.

“알겠지. 너는 이제 늙은 몸이 아니야. 그러니 가자.”

“예. 주군.”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른다. 어쩌면 이건 꿈일 수도, 아니면 영혼이 떠나기 전 보인다는 허상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라우웰은 주군이 내민 손을 잡았다.

그리고 새하얀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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