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8장 (57/60)

제8장

“드디어 다시 왔군.”

크라우스 가문의 저택은 똑같은 자리에 똑같이 서 있었다.

국왕이 주위의 국영지를 크라우스 가문에 맡겼어도 크라우스 가문은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선조의 혼과 얼이 서린 이곳을 떠나기란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크라우스 가문이 있던 마을이 굉장히 발전을 했다.

그냥 크라우스 마을이라고 불리던 이곳이 이제는 크라우스 시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건물이 들어섰고 많은 이들이 찾았다.

그건 엘프들 때문이다.

어느 순간 이곳에 아름다운 보석이 가끔 나타난다는 이야기가 돌았고 정말로 엘프들이 세공한 멋진 보석들이 등장을 하자 그것을 얻기 위해서 돈이 많은 이들과 사치품을 좋아하는 귀족들이 하나 둘씩 이곳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그뿐 아니라 엘프들의 축복을 받은 곡물들이 잘 자라 매년 풍년이 이어지자 상단들도 하나 둘씩 이곳을 찾아왔다.

그러면서 당연하게도 발전을 하게 되었다.

게다가 왕도와 그리 멀리 떨어진 지역도 아니었기에 점차 사람들은 이곳을 한 번은 거쳐 가야 할 곳으로 인식을 하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가주는?”

그를 맞이한 건 크라우스 기사단장인 게이브였다.

“왕궁에 가 있습니다.”

“바쁜가 보군.”

“요즘 부가주님이 없으니 가주님이 자주 가십니다.”

왕도에 저택을 하나를 사도 되건만 절대 그렇게 하지 않고 언제나 저택과 왕궁을 왔다 갔다 했다.

“그나저나 축하한다. 드디어 경지를 이루었구나.”

“부가주님 덕분입니다.”

게이브가 웃으며 말했다.

“뭘 축하해주는 겁니까?”

옆에 있던 라우웰이 물었다.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으니 축하를 해줘야지.”

“마스터요?”

라우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분명 자신보다 약한 놈이 먼저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는 소리에 기분이 나빠진 것이다.

칼과 아그나르도 얼굴이 굳었다.

내심 초조한 그들은 게이브가 자신들이 없는 사이 소드 마스터에 올랐다고 하자 더욱 초조해졌다.

“한번 라우웰과 대련이라도 해보아라.”

“라우웰과요?”

“그래. 아직 마스터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그에 준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할 거다.”

“예. 조심하겠습니다.”

에반이 하는 말이니 사실일 것이다.

또한 마스터에 오르고 무언가 모자란다는 생각이 계속 들고 있었는데 자신의 모든 실력을 내보이며 붙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떨려오기도 했다.

* * *

두 사람이 대결을 하려 연무장으로 간 사이 에반은 이제는 엘프숲으로 알려진 폴로냐 산을 올라갔다.

사 년 전만 하더라도 이곳저곳이 파이고 공터가 많았는데 그런 곳은 사라지고 숲으로 채워졌다. 기사들의 훈련장이 있긴 하지만 그곳도 이미 자연과 동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에반이 폴로냐 산의 중간 정도 올라갔을 때쯤 누군가가 나타났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이군.”

시에라였다. 그녀는 인간과 엘프를 이어주는 대변인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하이엘프가 아버지이다 보니 조금은 편히 쉬어도 되건만 언제나 적극적이었다.

“요즘 바쁘시다 들었는데 갔던 일은 잘되었나 보죠?”

“그래. 좀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처리하고 왔다.”

“들어갈 건가요?”

“아니다. 여기에서 보니 모두 잘 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군. 두 드워프들은 잘 지내나?”

“그분들은 언제나 똑같죠.”

그건 잘 지낸다는 이야기였다.

“모자란 것은 없나?”

“넘쳐서 문제예요. 그러니 그렇게 신경 써주시지 않아도 돼요.”

에반이 시에라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를 일이다. 인간들은 언제 바뀔지 모를 존재들이지. 내가 있을 때에는 너희를 지켜줄 수 있지만 내가 없어졌을 때에도 인간들에게서 안전하다 생각하지 마라. 우리 크라우스 가문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엘프들은 인간들보다 더욱 오랜 시간을 산다. 그러니 천 년이 지나도 그들에게는 한 세대 혹은 두 세대가 지나는 시간일 뿐이었다.

그 시간이면 어쩌면 크라우스 가문뿐 아니라 크리프 왕국 또한 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에반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군요.”

“너희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건 재물이다. 이 재물들이라면 나중에 위기가 닥쳐도 한 번쯤은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앞으로 나아가 인간들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약아지기도 해야 한다. 내 말을 명심하는 게 좋을 거다.”

시에라는 에반의 말에 싱긋 웃었다.

심각한 말이지만 에반이 자신들을 생각해준다는 데에 미소를 짓는 것이다.

“고마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열심히 장신구를 만들어.”

그 말에 시에라가 움찔했다.

아직 엘프들이 많이 모여 있지 않던 사 년 전 홀로 보석 세공을 하던 그때가 생각이 난 것이다.

몸을 살짝 떤 시에라는 딴청을 부렸다.

“나중에 봐서요.”

그런 시에라의 밝은 모습을 보고 에반은 그대로 뒤로 돌아 다시 산을 내려갔다.

* * *

“허허허. 오랜만입니다.”

늙은 노안의 황제가 아주 젊은 청년을 보면서 공대를 했다.

대륙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한 바리오스 2세가 공대를 하는 장면은 그 누군가에게 말해도 거짓말하지 말라며 면박을 줄 수 있는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그리고 공대를 받는 청년 또한 그의 공대를 아주 자연스럽게 받고 있었다.

“그래. 정말 오랜만이군.”

“대공을 이루셨는지요?”

“대공? 대공이라…….”

청년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이 길을 가다 보니 두 가지 느낀 점이 있지.”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길에는 끝이 없다는 것. 인간의 한계는 무한하다는 것이다. 계속 강해지고 강해져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아.”

“이 나라의 홍복입니다.”

“재앙이 될 수도 있지 않나?”

“허허허. 어찌 재앙이 되겠습니까? 대륙을 석권할 분께서 이곳에 계신데요.”

“난 절대 피의 길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전 상관없습니다.”

“그때 만났을 때와는 많이 다르군.”

바리오스 2세가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던 때는 삼십 년 전이었다. 그때 그는 모종의 지시를 내렸고 그걸 잘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죽을 때가 다가오자 그가 다시 나타났다.

“세상을 오래 살다 보니 순리라는 것이 보였습니다.”

“내가 순리라는 이야기인가?”

“세상이 순리대로 흐른다는 것이지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시간이 지나면 모두 순리에 어긋나지 않게 되는 게 세상입니다.”

바리오스 2세의 말의 뜻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해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자신은 그가 가진 것만 받으면 되니까 말이다.

“이제 곧인가?”

“예.”

“좀 더 빨리 나에게 주었으면 좋겠어.”

“무엇이 그리 급하신 겁니까?”

“사실 그 전에 많은 일을 벌여놓았는데 계속 실패했지. 내 몸은 하나인데 아랫것들을 부리자니 힘에 부친 건 어쩔 수 없었어. 그러니 내가 전면으로 나서서 일을 처리하고 싶어졌다는 거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제 자리를 내놓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잘 생각했다.”

그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바리오스 2세는 눈을 감았다.

이제야 편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 * *

대륙의 지각변동을 알리는 일이 일어났다.

바로 바리오스 2세의 황위의 양도였다.

이제 얼마 시간이 없는 그가 이렇게 황위를 급작스럽게 양도할 줄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그건 제국의 귀족들도 마찬가지여서 그들이 부랴부랴 황도에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는 이미 대관식의 준비까지 모두 마친 뒤였다.

그리고 곧 대관식이 열리고 황태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지금까지 바리오스 2세보다는 모자라다는 평가를 받았던 황태자는 머리에 왕관이 쓰여진 순간 변했다. 그곳에 모인 모든 대신관료들을 무릎 꿇게 하는 기세를 피워 올리며 바스트 제국의 만년의 영광을 약속하였다.

그 당시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황태자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에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자신을 전전대 황제의 이름인 바리오스라고 칭한 그가 처음 한 건 자신의 수하들을 자신의 옆에 놓아두는 작업이었다.

본래 황태자의 측근들도 처음 보는 그들의 모습에 처음에는 경계를 하려 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권력은 그들이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한차례 황실에 피바람이 몰아치고 사직이 바로 선 후 그는 행동을 개시했다.

처음 상대는 역시나 프레스톤 제국이었다.

지금까지의 힘을 모두 내뿜듯이 프레스톤 제국에 힘을 쏟아 부었다.

친히 친정을 한 황태자는 첫 전투에서 자신이 소드 마스터임을 알리며 종횡무진 프레스톤 제국의 병사들을 베었으며 또한 수하들과 함께 프레스톤의 막사로 돌진하여 프레스톤 제일의 장군이라는 라시페 후작의 머리를 가져오는 쾌거를 누렸다.

처음의 강렬한 전투 때문인지 그 후에 일어난 전투에서 프레스톤 제국은 연전연패를 거듭하여 예전에 빼앗았던 바스트 제국 영토의 삼 할을 고스란히 다시 내주고 말았다.

중대륙과 북대륙을 가르는 강인 더스틴 강을 기점으로 잠시 전쟁이 멈추었고 프레스톤 제국의 제의로 전쟁은 휴전 상태가 되었다.

이제 프레스톤 제국은 북쪽의 야만족의 침략을 막을 시기가 왔는데 바스트 제국과 언제까지고 싸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바리오스는 그들의 휴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바스트 제국의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휴전을 하자 이제는 중소 왕국들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절대 멈추는 법이 없었다.

바스트 제국은 주위에 있는 왕국들에게 제안을 했다.

자신을 받아들여 공국으로 남을 것이냐? 멸망이냐?

대부분의 나라들이 그 제안을 반대했고 그 후 바스트 제국은 차례차례 왕국들을 쳐들어가기 시작했다.

바스트 제국의 행보는 정말로 피에 점철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십만의 병력을 이끌고 하나 둘씩 왕국들을 복속시키는 모습은 정말로 무시무시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왕국들은 서로가 동맹을 맺고 바스트 제국에 대항을 하려 했고 그 때문에 바스트 제국도 약간이나마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세 개의 동맹이 탄생한 가운데 다시 겨울이 왔다.

이제 숨을 고를 때였고 봄이 되면 이 겨울이 누구에게 유리했는지 드러날 것이다.

그렇게 대륙은 긴장을 했다.

* * *

“크라우스 백작님. 오랜만에 뵈어요.”

제니스의 인사에 에반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가문을 정비하느라 바쁜 와중에 바스트 제국의 정복 전쟁으로 나라마저 어수선해졌다.

그래서 에반은 그에 대비하여 이곳저곳에 얼굴을 비추었는데 오늘 일 년 반 만에 제니스 공주를 만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제니스의 어투가 심상치 않았다.

“왜 화가 났소?”

“제가요? 제가 어찌 화를 내겠어요? 공사가 다망하신 분께 말이에요.”

에반이 볼 때 제니스 공주는 화가 나 있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온 왕궁에서 마주친 제니스 공주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스미트 공작이 나타났다.

“크라우스 백작. 여기 있었군.”

“공작 각하.”

“아, 공주 마마도 계셨군요.”

“무슨 일이신가요?”

“신이 크라우스 백작과 긴히 할 이야기가 있는지라.”

그 말에 제니스 공주는 한숨을 한차례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를 데려가세요.”

“감사합니다. 공주 마마.”

에반은 자신을 데리고 가는 스미트 공작에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쯧. 그러게 평소에 행실을 잘했어야지.”

“무슨 말입니까? 저에게는 공주뿐입니다.”

“그 행실이 아니라.”

에반의 말에 잠시 그를 쳐다본 스미트 공작이 답답하다는 듯이 가슴을 치더니 말했다.

“공주 마마께서 자네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나?”

“그건…….”

“그래. 바쁠 수도 있지. 하지만 이미 자네 가문에 워프 게이트까지 설치하지 않았나? 그러면 단 하루 정도 시간을 내서 보러 올 수도 있을 텐데 왜 공주 마마를 보러 오지 않았었나?”

그렇게 말을 하니 에반은 할 말이 없었다.

“제가 잘못한 것이로군요.”

“이제 공주 마마의 나이도 서른이 다 되어간다네. 그 나이면 다른 사람 같으면 장성한 자식이 있어도 될 나이야. 그런데 자네는 일 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공주 마마를 찾지 않았으니 그분께서 얼마나 마음을 졸이셨겠는가?”

스미트 공작의 말이 구구절절 맞기에 에반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래. 어떻게 할 텐가?”

“예?”

“이제 결혼을 해야지.”

“결혼. 결혼이라…….”

그러고 보니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면 결혼을 해야 했다.

그런데 에반은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설마 생각도 해보지 않은 건가!”

스미트 공작이 눈을 부라렸다.

그는 공적으로는 왕국의 고위 귀족이지만 사적으로는 제니스 공주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당연히 에반의 나 몰라라 하는 태도에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생각을 해보았죠.”

그러나 제대로 된 생활을 할지는 미지수였다.

서로가 바라보는 세계가 다르니 아무리 마음이 맞아도 제대로 살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이미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건만 여느 남자들과 같은 고민을 그는 하고 있었다.

“이번에 왕궁을 떠나기 전 결정을 하게. 내 자네를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 못쓰겠구만.”

그러면서 스미트 공작이 화를 내며 그 자리를 떠났다.

에반은 그 자리에 서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 * *

“하…….”

제니스 공주가 한숨을 쉬었다.

일 년 반 만에 다시 본 에반의 모습은 시간이 비껴간 듯이 어느 것 하나 다른 점이 없었다.

‘그래. 그분은 이미 나이를 많이 드셨지.’

생긴 것과는 다르게 이미 오십대를 바라보는 나이이다. 자신과는 한참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런 점 때문에 날 멀리하는 건가?’

제니스 공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 본다면 어느 모로 보나 제니스 공주가 아깝다고 생각하겠지만 제니스 공주만은 자신이 에반에게 한참 못났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점이 오늘 반가우면서도 반갑게 맞이하지 못하고 조금은 쌀쌀맞게 대하게 만든 이유가 되었다.

“하…….”

다시 한 번 제니스 공주가 달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뭐가 그리 아쉬워서 한숨을 쉬지?”

“아…….”

제니스 공주는 갑자기 들려오는 말소리에 옆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에반이 그곳에 있었다.

“에, 에반. 언제부터 거기에…….”

“첫 번째 한숨을 쉴 때부터 여기에 있었지.”

“그런데 기척도 내지 않기예요?”

또 투정을 부린다.

제니스 공주는 그런 자신이 싫었지만 몸과 마음은 따로 행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보러 와주니 기쁘지 않아?”

“음…….”

갑작스러운 에반의 말에 제니스 공주의 말문이 막혔다.

에반의 말대로 그가 온 것이 정말 기뻤다.

여기는 오층의 발코니다.

삼왕자의 반란이 있은 후 공사를 하여 왕족은 한 건물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제니스 공주는 오층을 쓰고 있었다.

이곳으로 에반이 보러 왔으니 기쁘지 않을 리 없었다.

에반은 그런 제니스 공주를 보며 미소 지었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니 기쁘지 않은 것 같군.”

“기, 기뻐요!”

제니스 공주가 소리쳐 대답했다.

“그런데 왜 얼굴 표정은 이상하지?”

“그, 그것이…….”

“말해봐.”

“…….”

잠시 두 사람의 대화가 끊겼다.

하고 싶은 말은 참 많은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에반은 이렇게 가다가는 제니스 공주가 절대 입을 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해야 했다.

“난 말이야. 이 세계가 좋아.”

“예?”

제니스 공주는 에반의 뜬금없는 이야기에 그를 바라보았다.

에반은 그러든 말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저 달도 좋고 어두운 밤도 좋고 그 속에 있는 별도 좋지. 그리고 이렇게 사랑스런 여자가 옆에 있으니 이건 정말 환상이지.”

“아…….”

“날 사랑하나?”

에반의 물음에 제니스 공주가 홀린 듯 대답했다.

“예. 당신을 사랑해요.”

“그래?”

“당신도 날 사랑하나요?”

“그래.”

“그런데 무엇이 문제죠?”

“문제?”

“예. 전 더는 이곳에서 살고 싶지 않아요.”

그러면서 제니스 공주가 얼굴을 붉혔다.

그건 간접적인 청혼이었다.

기어코 자신이 청혼을 하게 하다니 정말 무드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잘해낼 수 있을까?”

“무슨 의미예요?”

“날 알잖아. 난 세상에서 조금은 비껴 있는 존재야. 당신이 그런 나 때문에 괴로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것도 모두 포용을 하는 것이 사랑이에요.”

“그렇군.”

에반은 미소를 지으며 발코니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머.”

제니스 공주는 자신의 허리를 잡아오는 억센 손에 놀란 척했다.

“안으로 들어갈까?”

“……그래요.”

발코니의 문이 닫혔다.

하늘은 아름다웠다.

* * *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제니스 공주의 표정에 스미트 공작은 웃으며 옆에 있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데도 별로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옆에 있는 제니스 공주의 얼굴이 빨개졌다.

“쯧. 역시 재미없구만. 안 그렇습니까? 폐하.”

“그렇지. 허허허.”

웃는 이는 바로 왕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여유로운 생활을 즐기는 선왕인 루드 왕이었다.

그는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깨듯이 점점 건장해지고 있었는데 그건 모두 제니스 공주의 덕이었다.

그녀가 항상 곁에 있으니 불완전한 몸이 치료가 되는 것이다. 제니스 공주 자신도 느끼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녀가 익힌 공무가 그걸 가능하게 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내 딸을 데려가겠다고?”

“예.”

“지금은 시국이 불안정한 때이네.”

“그러니 더욱 지금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을 정했나 보군.”

“그렇습니다.”

“그럼 허락하지.”

“감사합니다. 폐하.”

“허허허. 사실 공주의 나이도 나이인 만큼 늦은 혼인이지. 하지만 딸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아쉬워.”

“아바마마가 크라우스 후작가에 놀러 오시면 되잖아요.”

“그건 그렇고 계속 부가주로 있을 셈인가?”

“그렇습니다.”

“흠. 그건 좀 그런데. 그래도 명색이 공주인데 자네의 관직이 딱히 내세울 것이 없으니 말이야.”

“전 지금 자리로 만족합니다.”

“아니야. 그걸로는 안 돼. 공작.”

“예. 폐하.”

“무슨 자리가 좋겠는가?”

“당연히 가장 좋은 자리를 주어야지요.”

“좋은 자리?”

“예.”

“어떤 건지 한번 말해보게.”

“이번에 동맹국에서 모두가 모이기로 되어 있습니다. 제국의 침공이 언제 있을지 모르니까요. 거기에서 저희 왕국의 총사령관으로 크라우스 백작이 가면 어떻겠습니까?”

“오. 그거 좋겠군.”

하지만 에반의 표정은 아주 미묘해졌다.

꼭 짜고 하는 연극 한 편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장 그걸 제니스 공주가 반대를 하고 나섰다.

“아바마마, 어떻게 이 사람을 그런 위험한 자리에 내몰려고 하나요? 말이 돼요?”

“허. 제니스야. 난 좀 좋은 자리를 주기 위해.”

“그런 자리라면 제가 사양하겠어요. 자리를 줘도 이제는 걱정이 되지 않는 자리를 줘야 할 것 아니에요?”

제니스 공주가 큰소리를 치자 루드 왕은 당장 난감해졌다.

그에 에반이 나섰다.

“제니스, 난 괜찮다. 어차피 제국을 막지 못한다면 우리는 불행할 수밖에 없어. 차라리 내가 나서는 것이 좋겠지.”

“정말 괜찮겠어요?”

“그럼. 나를 믿지 못하나?”

“제가 어떻게 그대를 믿지 못하겠어요? 전 믿어요.”

“그렇지?”

“큼.”

“크흠.”

두 사람의 애정 행각이 도를 더해가자 그걸 참지 못하고 두 사람이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에반과 제니스 공주는 그것을 무시하고 서로를 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허. 우리 같은 늙은이는 보이지도 않는 건가?”

“그런가 봅니다. 폐하.”

“정말 세월이 무상하군. 내게 매달리던 그 꼬마 공주는 어디 가고 저런 시커먼 놈을 좋아하는 딸이라니.”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폐하.”

두 사람의 말에도 끄떡도 하지 않는 에반과 제니스 공주였다.

그에 두 사람은 참지 못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방을 나오자마자 표정이 굳어졌다.

“어떤가? 그가 해낼 수 있을까?”

“마커 왕국의 영웅들도 막은 사람입니다. 당연히 이번에도 해내겠죠.”

“하지만 이번에는 그 규모가 다르네. 또한 한두 사람 죽는다고 끝날 전쟁도 아니고 말이야.”

“그라면 황제를 잡아 전쟁을 끝낼 사람입니다. 그러니 믿어도 될 겁니다.”

“그렇겠지? 그럴 거야.”

루드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애써 그렇게 된다고 생각했다.

* * *

크리프 왕국의 제일 왕녀인 제니스 모플로의 결혼식은 성대하지 않았다.

아주 조용히 왕궁에서 두 집안의 가족들만 모아놓고 식을 치렀다.

이제 겨울이 끝나가고 곧 전쟁의 계절이 다가온다.

이런 때에 화려한 결혼식은 맞지 않았다.

지금은 전쟁을 준비할 때지 축제를 즐길 때가 아니었다.

그러나 공주의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벅차 있는 상태였다.

푸른색의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제니스 공주와 회색의 예복을 입은 에반의 모습은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보며 웃었고 그런 그 둘을 모두가 축복해주었다.

그리고 결혼식이 끝난 후 에반은 그녀를 데리고 하늘 위로 올라갔다.

“잘 보여?”

“예.”

“이곳이 바로 우리가 사는 곳이지.”

“이렇게 보니 너무 멋져요.”

간간이 불빛이 비치는 가운데 왕궁은 정말로 화려했다.

“이곳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게.”

“고마워요. 하지만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말아요.”

“왜?”

“저도 공무를 익혔다고요. 그에 따르는 책임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이 세상에 아주 큰일을 벌이지 않는 한 난 어긋나지 않을 거야.”

“그리고 한 가지 더 약속을 해줘요.”

“뭐지?”

“절대 바람을 피우지 않겠다는 것.”

“바람을 피우지 말라고?”

에반이 황당하다는 듯이 제니스 공주를 바라보았다.

“예.”

“당연하지. 당신을 놔두고 무슨 바람을 피우겠어.”

“하지만 당신은 늙지 않잖아요? 언제 저를 없는 사람 취급할지 어떻게 알겠어요?”

“하하하. 그런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 그대가 아니라면 나는 이 세상에 있을 이유도 없으니까 말이야?”

“예?”

“당신은 내가 왜 여기 있다고 생각해?”

“그야…….”

그러고 보니 에반 같은 존재가 이 세계에 있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대답을 못하는 그녀를 보며 에반이 설명을 해주었다.

“처음에는 이 세계에 있을 내 가족을 보기 위해서였어. 그리고 내 가문이 힘이 없다는 것을 알자 그 힘을 키워주려고 노력을 했지. 지금 이건 그 부산물일 뿐이야. 본래라면 크라우스 가문이 왕국에서 영향력이 있는 가문이 되었을 때 나는 떠났어야 해. 그런데 그런 나를 붙잡은 사람이 있었지.”

“그게 저라는 말이에요?”

“그래. 네가 있기에 나는 존재하는 거야.”

정말로 여인으로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을 에반은 해주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려고 하자 고개를 돌리며 제니스 공주가 말했다.

“조심하세요.”

“그래.”

추운 겨울이었지만 두 사람의 사이에는 훈풍만이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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