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장 (56/60)

제7장

“무슨 일이지?”

브리즈는 이제는 완전히 타버린 막사와 북쪽으로 나 있는 고랑을 보며 물었다.

“갑자기 저쪽으로 가셨습니다. 저희는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그래?”

브리즈가 기사의 말을 듣고는 두 사람을 보았다.

한 명의 여인과 한 명의 남자.

파이레까지 합쳐 이 네 명이 신의 기사들이라 불리는 존재들이었다.

“어떻게 할 거야?”

“찾아봐야지. 아마 그러라고 흔적을 남긴 것 같으니 말이야.”

물을 다스리는 트리아스가 말했다.

“가보자.”

“그래.”

그들은 고랑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브리즈나 트리아스는 날아서 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땅을 다스리는 란도스는 비행 능력이 없었다.

또 자존심이 강해서 남의 손을 빌어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여 어쩔 수 없이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상에서는 꽤나 빠르게 움직일 수 있기에 상관이 없었다.

쿠르르릉.

땅이 저절로 움직이며 세 사람을 빠르게 이동시키고 있었다.

고랑을 따라 한참을 간 끝에 세 사람은 고랑이 사라진 곳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힘을 썼군.”

“그래.”

“그것도 얼마 되지 않았어.”

피아레가 첫 선방으로 불의 힘을 쓴 것을 트리아스가 감지했다. 서로가 상극이기에 더욱 서로를 잘 알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얼마나 되었지?”

란도스의 물음에 허공으로 떠오른 브리즈가 주위를 살폈다.

“길어야 오 분이야.”

“오 분 사이에 사라졌다고? 감쪽같이?”

“그래.”

“어디로 갔는지 알아?”

그 물음에 브리즈는 고개를 저었다.

주위가 아주 정적이었다.

어디로 움직였는지 느껴지지도 감이 잡히지도 않았다.

“마나를 쓴 건가?”

“그것도 아니야. 그런 움직임은 없었어.”

“그럼 대체 뭐야?”

마나를 쓴 것도 아니고 어디론가 이동을 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사라졌다.

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에 세 사람은 혼란을 느꼈다.

* * *

세 사람이 찾는 그는 현재 그들 바로 앞에 있었다.

하지만 파이레도 나머지 세 사람도 그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반이 공간을 왜곡시킨 것이다.

“헉. 헉.”

파이레나 에반이나 그 어디에도 싸운 흔적이 없는데 파이레는 힘이 든다는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주먹을 뻗었고 그걸 에반이 막은 후부터 파이레는 정신없이 에반에게 공격을 가했다.

에반은 그 공격을 아주 쉽게 쉽게 피하면서 파이레를 짜증나게 했다.

“넌 누구냐?”

파이레는 질문을 하면서도 아차 했다.

만약 그가 이 질문에 답을 한다면 자신이 살아 나가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물어보는데 알려줘야지. 난 에반이라 한다.”

상대가 이름을 알려준다는 낭패감에 얼굴을 찌푸리던 파이레는 낯익은 그 이름에 다시 물었다.

“누구?”

“에반 크라우스. 크리프 왕국의 귀족이지.”

“에반 크라우스. 에반 크라우스…….”

잠시 그 이름을 중얼거리던 파이레가 얼굴을 굳혔다.

“엄청난 힘으로 성벽을 부순 자.”

“그 영상이 그렇게 널리 퍼졌나?”

“정말이군.”

성벽을 누군가가 부수었다는 말에 사실 처음에는 시큰둥했다.

란도스도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영상을 보고는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는 힘으로 성을 부순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성을 부수는 건 원소의 힘이나 또는 다른 물체를 움직이는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곳에 새겨진 마법진이 발동도 하기 전에 힘에 눌려 파괴되었다는 말을 듣고서는 괴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후에 그것이 신물에 의한 힘이었다고 밝혀졌어도 파이레는 에반을 잊지 못했다.

그런 에반이 앞에 있으니 그로서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대체 당신 왜 여기에 있지?”

“남대륙이 통일이 되면 귀찮아지는 건 우리라서 말이야.”

“그래서 마커 왕국을 막겠다는 건가? 혼자의 힘으로?”

“누가 혼자의 힘으로 막는다고 했지?”

“그렇다면 어떻게?”

“난 네 명만 막을 거다. 그 후에는 다른 왕국들이 알아서 마커 왕국을 절단 내겠지. 너희들이 없는 마커 왕국은 아무런 힘도 없는 곳이니 말이다.”

“자신 있게 말하는군.”

“사실 별것 아닌 일이야.”

“신물의 힘을 빌려 힘을 내는 주제에…….”

“정말 신물일까?”

에반의 손이 사선으로 그어졌다.

파악.

보이지 않는 공격에 파이레가 놀라며 정면으로 불을 최대한 모아보았지만 헛수고였다.

촤악.

“크악!”

몸이 갈라지는 고통이 전신을 관통했다.

콰콰쾅!

그대로 공중에서 떨어져 내리며 지상에 처박힌 파이레는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으으윽.”

에반이 천천히 내려왔다.

그는 파이레의 온몸을 샅샅이 훑고 있었다. 파이레의 능력이 발현되는 곳을 찾기 위해서였다.

“죽어!”

파이레는 에반이 자신에게 접근한 그 순간 자신의 온 힘을 다하여 응축된 불길을 만들어 에반에게 쏘아 보내었다.

응축된 불을 만들어내는 그 찰나의 순간 힘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느낀 에반이 웃으며 자신에게 다가온 불을 그대로 없애버렸다.

“어, 어떻게…….”

“네 힘은 이 세상에서 기인하는 것. 그러니 날 해할 수는 없다.”

“말도 안 돼!”

“이미 이 세상이 나고 내가 이 세상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내 뜻에 따라 움직이고 변할 수 있다. 넌 힘을 다스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세상의 법칙에 약간 어긋난 존재구나.”

스윽.

그러면서 에반의 손이 파이레의 머리를 스치듯 지나갔다.

하지만 그 이후 파이레는 순간의 허전함과 함께 그대로 기절했다.

지금껏 충만하게 쓰던 힘이 일순간 사라지자 그 공백을 몸이 버티지 못하고 그를 잠재운 것이다.

에반은 잠든 파이레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건 누군가가 불의 원소를 다스릴 수 있게 억지로 연결을 시킨 것이다. 대체 누굴까?”

분명 이런 자들을 만든 존재가 뒤에 있을 것이고 그는 아마 힘을 다룰 수 있는 존재일 것이다.

그건 파이레가 깨어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전에 다른 이들부터 처리해볼까?”

세 방향으로 파이레를 찾기 위해 갈라지는 그들을 에반이 보면서 중얼거렸다.

에반이 그런 생각으로 걸음을 옮기자 세상을 단절시켰던 벽이 사라지며 에반의 공간과 세상의 공간이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그리고 우선은 바람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이, 이건…….”

갑자기 바람으로 타고 온 두 존재의 느낌에 브리즈는 가던 길을 멈추고는 방금 다른 이들과 헤어졌던 장소를 바라보았다.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네가 보지 못한 거지.”

“무, 무슨!”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브리즈가 뒤로 물러났다.

거기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넌 누구지?”

“공격해라.”

“뭐?”

“네 힘을 보여주라는 거다. 그 힘이 약하다면 네 능력은 사라질 것이다.”

“무슨 소리야!”

촤악.

브리즈의 두 손에서 바람이 생성되더니 에반을 향해 날아갔다.

촤촤촤악.

소리는 있되 아무런 모습도 보이지 않는 그 공격에 많은 이들이 겁을 집어먹다가 죽음에 맞닥뜨렸다. 그러나 에반은 손을 한차례 움직이는 것으로 그 공격을 아주 손쉽게 막아버렸다.

파앗.

“바람에 날카로움은 담았지만 은밀함을 극대화시키느라 힘이 약하군.”

“무슨 헛소리냐!”

파앗.

브리즈는 자신의 공격을 평가하는 에반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공격을 했다. 이번에는 에반을 중심으로 여덟 방향에서 바람이 생성되어 에반에게 날아들었다.

각각의 바람은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어 막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 공격들이 하나라도 만나게 되면 연쇄반응을 일으킬 거다.’

이건 브리즈가 가진 비기 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의 공격을 손쉽게 막아낸 에반을 향해 처음부터 자신의 온 힘을 다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브리즈의 생각대로 에반이 공격을 피하면서 엄청난 폭발을 했다.

콰콰쾅!

바로 옆에서 폭발이 일어났으니 그 여파에 노출이 되었을 거라 생각하며 득의만만한 미소를 짓던 브리즈는 폭발이 가시고 멀쩡한 에반을 보자 멈칫했다.

“무, 무슨.”

“혼자서는 더욱 큰 힘을 내지 못하는 건가?”

“이 새끼가…….”

조롱으로 알아들은 브리즈가 재차 공격을 하려는 순간 에반이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네 동료들이 곧 올 테니 말이야.”

‘동료?’

그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갑자기 나타난 에반으로 인해 제대로 생각을 할 수 없었는데 에반이 그걸 깨우쳐 주었다. 브리즈가 시선을 돌리자 란도스와 트리아스가 이쪽으로 오는 것이 느껴졌다.

브리즈는 에반을 공격하려 모으던 힘을 풀었다.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는 동료들과 자신이라면 저 오만한 사내를 꺾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일단은 힘을 아껴야 했다.

그리고 잠시 시간이 남는 틈을 타 에반을 바라보았다.

아주 평범한 인상의 사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머리칼과 눈동자 색이다. 그러고 보니 많이 낯이 익은 모습이었다.

잠시 그에 관해 생각하던 브리즈의 눈이 커졌다.

“에반 크라우스?”

“날 알아보는군.”

“성을 힘으로 없애버리는 장면은 기억에 남을 만하니까. 그런데 네가 왜 여기 있지?”

“나중에 불을 다룰 줄 알았던 네 동료가 깨어나면 물어봐라.”

“그렇다면?”

“저기쯤에 기절해 있을 것이다.”

“으윽.”

브리즈는 그대로 덤비고 싶은 것을 참고 있는 사이 두 명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란도스와 트리아스였다.

“브리즈!”

“브리즈, 무슨 일이지?”

“이자다. 이자가 파이레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장본인이다.”

“누구지?”

“에반 크라우스. 지난번에 본 영상의 주인공이지.”

브리즈의 말에 그들이 흠칫 놀라며 더욱 경계를 했다. 지금까지는 자신들이 이긴다는 여유가 넘쳤지만 그것이 사라졌다.

에반이 그들을 보며 말했다.

“덤벼.”

브리즈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바로 공격했다.

그에 두 사람도 덩달아 에반을 공격했는데 그 공격이 쉽게 볼 수 없는 것이었다.

흙이 비산하고 그 안에 물의 거력이 담긴 후 바람을 타고 에반에게 쏘아졌다. 수천수만 개의 강력한 힘을 가진 알갱이들이 피할 공간을 내주지 않고 들이닥친 것이다.

‘되었다.’

브리즈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에반을 방심시킨 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공격을 펼친다.

그것이 브리즈의 생각이었다.

이미 그들이 이곳으로 올 때 바람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보내었다.

그들은 그러면서도 에반을 모르는 척 연기를 하면서 에반의 방심을 유도한 것이다.

타타타타탓.

콩 볶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면서 먼지가 자욱이 끼었다.

그들은 이겼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눈은 계속 에반이 있던 자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한순간 방심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는 강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죽었을까?”

“그렇겠지. 우리가 가진 최고의 기술이다.”

“그러나 파이레가 없었잖아.”

“파이레의 불은 좀 더 많은 자들을 살상할 수 있는 기술이야. 한 명을 죽이려고 한다면 어차피 파이레의 불은 필요가 없다.”

“음…….”

그들은 절대 적을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로써 위안을 가지는 것도 바로 불안감 때문이었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먼지가 걷히고 그림자가 보였다.

세 명은 그곳을 주시했다.

브리즈가 바람을 날려 먼지를 걷어낼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 그렇게 하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그리고 완전히 먼지가 걷혔을 때 그들은 낭패감을 맛보았다.

어디 하나 다친 곳이 없는 에반이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기 때문이다.

에반이 입을 열었다.

“불쌍하군.”

“뭐?”

“진정한 강자와 싸워보지도 못한 것 같아. 지금 이것이 너희들의 최고의 힘이라고?”

“흥. 그럴 것 같나?”

란도스가 허세를 부리며 다시 힘을 모았다. 다른 두 명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속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당당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고 있는 에반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애송이들이야. 내가 아닌 라우웰이 왔어도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을…….”

그래도 어느 정도 기대를 하고 왔건만 그들은 기대에 한참을 못 미쳤다.

그들이 다루는 원소는 세상에 종속되어 있고 그들도 원소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 힘을 동등한 입장에서 다루는 것이 아닌 그저 빌려다 쓰는 것. 지금 인간들이 마나나 오러를 쓰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익! 죽어!”

“가랏!”

사아아악.

콰콰콱.

쿠쿠쿵!

세 사람의 힘이 에반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에반은 움직이지도 않고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쿵!

힘들과 에반이 만났다.

에반의 공간을 침투하려는 힘들은 아무리 애써도 에반의 공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힘이 너무 약한 것이다.

“이익!”

“으아악!”

그걸 보면서 세 사람은 눈에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자신들의 힘을 쏟아 부었다.

“부질없는 짓.”

에반은 그들과 그들의 힘의 원천인 원소 사이의 공간을 끊어버렸다.

털썩. 털썩.

“크억!”

“뭐, 뭐야?”

갑작스럽게 자신의 힘이 끊기자 공중에 떠 있던 브리즈와 트리아스는 지상으로 떨어졌고 란도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때 에반이 세 사람의 앞에 다다랐다.

“이제 그만 쉬어라.”

스윽.

파이레처럼 아예 힘을 낼 수 있는 곳을 막아버리자 그들은 힘의 공백을 견디지 못하고 기절했다.

“이 정도면 되었겠지.”

에반은 그들을 잠시 바라보더니 그대로 몸을 돌려 자신이 있을 곳으로 돌아갔다.

* * *

“그들이 후퇴를 하는 중입니다.”

“역시나 맞습니다. 후퇴, 후퇴입니다.”

“와아아아아.”

마커 왕국의 병사들이 물러가는 것을 보며 포넬리아 왕국군은 환호했다.

설마 이렇게 쉽게 그들이 물러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며칠 전 나타난 신의 기사들이 갑자기 사라지고 어리둥절하던 포넬리아 왕국군에 한 가지 소문이 퍼졌다.

이제 신의 기사들이 힘을 잃었다는 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 말을 믿지 못하고 누군가 자신들을 함정을 빠뜨리기 위해 낸 헛소문이라 치부했지만 후에 그들이 마차에 실려 가는 모습이 목격이 되고 점점 사실이라고 판명이 되자 포넬리아 왕국군은 결단을 내렸다.

저기에 진을 치고 있는 오합지졸들을 왕국 내에서 물러나게 하겠다고 의견의 일치를 본 것이다.

그 후 성 밖으로 나온 포넬리아 왕국군의 위용을 보면서 마커 왕국은 싸우지도 않고 그냥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들이 여기에 있는 이유는 싸움을 벌이려는 것이 아니라 신의 기사들이 포넬리아 왕국군을 전멸시키면 뒤처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런 신의 기사들이 사라졌으니 놀라 그대로 도망을 가는 것이다.

에반은 성벽에서 그걸 담담히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린톤 자작이 흥분을 하며 말했다.

“포넬리아 왕국민 모두가 한마음으로 그들을 물리치고자 하니 그 소원을 신께서 들어주신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정말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

린톤 자작은 에반의 말에 미소를 짓다가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말했다.

“그나저나 군수물품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건 이미 포넬리아 왕국에 드린 물건입니다. 이미 드린 물건을 왈가왈부할 수 없는 일이지요.”

“전쟁이 이대로 끝나도 말입니까?”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시작이지요.”

“예?”

“마커 왕국에 신의 기사들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현재의 힘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아…….”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난세가 남대륙을 휩쓸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잘 쓰겠습니다.”

린톤 자작은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 포넬리아 왕국은 사방으로 마커 왕국과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아직 정복한 왕국들을 제대로 정비도 하지 않는 상태였다.

분명 반란군과 함께 왕조를 복고하려는 세력들이 들불처럼 일어날 것이다. 게다가 포넬리아의 국왕은 왕국의 영토를 늘리려는 마음을 먹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건 살아남은 다른 왕국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메소스 왕국은 마커 왕국과 직접적으로 영토를 맞대고 있는 곳이 없기에 이제 일어날 전쟁에서는 한 발 물러나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린톤 자작은 그런 에반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시작될 난세는 마커 왕국이 지금까지 정복 전쟁을 하며 흘린 피보다 더욱더 많은 피를 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 피를 마시고 흘리다 보면 어쩌면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었다.

그제 탐욕이라는 것이 남대륙을 집어삼키면 그 미래는 너무나 어둡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에반의 환영식은 꽤나 거창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목숨을 담보로 전쟁이 일어나는 곳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갔고 거기에서 살아 나왔다.

누군가는 운이 좋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일단 그곳에 갔다는 자체만으로 칭찬을 받아 마땅했다.

“어서 오게. 안딜 백작.”

“백작이라니요?”

“이번에 국왕 전하께서 자네의 작위를 높이신다고 하더군.”

“너무나 과분합니다. 그리고 한 일도 없습니다.”

“아니야. 그 사지에 들어가려는 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그건 멍청한 놈들은 절대 하지 못할 용감한 행동이었다네.”

슈렌츠 백작은 에반을 칭찬하고 또 칭찬했다.

자신의 안위를 챙기지 않고 전장으로 뛰어드는 그를 보면서 이런 인재가 왕국에 있다는 것에 기꺼워하는 것이다.

언제나 숨어 지내었던 안딜 가문 선조들의 행동과 관직을 얻으려는 태도에 처음에는 못미더워했지만 이제는 누구보다도 그가 마음에 들었다.

에반은 자신에게 과도하게 관심을 보이는 그를 보며 곤혹스러워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나오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가는 꼼짝없이 이 왕국에 잡혀 있을 것만 같았기에 빠져나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알벤다 안딜 자작은 대전에 들라.”

시종장의 큰 소리에 문이 열리고 그 안으로 에반이 들어갔다.

많은 이들이 좌우로 길게 늘어선 가운데 그 사이를 에반이 당당히 걸어갔다.

그런 그의 모습에 호감이 있는 귀족이 있는 반명 적개심을 드러내는 귀족도 있었다.

그리고 왕좌에 앉아 있는 국왕에게 에반이 인사를 했다.

“신 알벤다 알딘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수고했소. 알딘 자작.”

“아닙니다. 국왕 전하의 은혜에 보답을 드리는 일일 뿐이었습니다.”

“허허. 자네 같은 귀족이 우리 왕국에 있다니 정말 홍복이로다.”

“…….”

에반은 그저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래. 그 물품들을 모두 주고 왔다고?”

“예. 전하.”

“어째서 그런 조치를 취했지?”

남는 군수물자라 하더라도 십만의 병력을 한 달 정도 먹여 살리고 일만을 무장시킬 수 있을 정도의 군수물자였다.

그걸 전쟁도 흐지부지 끝난 그곳에 왜 그냥 남겨두고 왔는지 국왕이 묻고 있었다.

“제가 볼 때에는 전쟁은 이제 시작입니다. 그들은 이제 마커 왕국과 마찬가지고 정복 전쟁을 할 겁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그들을 도와야지요.”

“그건 우리 왕국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나?”

“아닙니다. 그들이 오래 버티면 버틸수록 저희에게는 기회입니다. 어차피 그 군수물자는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대금을 어느 정도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군수물자를 포넬리아 왕국에 넘겼다는 소문이 난다면 다른 왕국들도 저희에게 모자라는 물품을 사려고 할 겁니다.”

“왕국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자는 거군.”

“예. 대신 저희는 언제나 중립을 지키면 됩니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그 상대가 누구든 가격만 맞으면 계속해서 군수물자를 팔면 됩니다.”

“하하하하. 알딘 자작은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하는군. 아니 우리 왕국에서 거부인 알딘 자작이니 할 수 있는 생각인가?”

“그저 일이 잘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자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말로 자네는 우리 왕국에 필요한 인재 같네.”

국왕이 일어나 에반에게 다가왔다.

그러고서는 무릎을 꿇고 있는 에반의 어깨에 뽑아든 검을 대며 말했다.

“메소스 왕국의 삼십이대 군주 나 치렌 2세의 이름으로 여기에 있는 알벤다 알딘을 백작으로 승작시키노라. 자, 고개를 들라.”

에반이 그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대는 왕국에 헌신하겠는가?”

“예.”

“그대는 귀족의 임무를 다하겠는가?”

“예.”

“그대는 나에게 충성을 바칠 텐가?”

“예.”

“이로써 메소스 왕국에 한 명의 백작이 더 생겼음을 천명하노라.”

그 말과 함께 나팔 소리가 울렸다.

이미 준비를 해둔 국왕이었다.

“일어서게나.”

“예.”

“백작으로 승작을 했으니 한 가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들어주겠네. 말해보게나.”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러나 국왕은 이미 그를 옭아매려고 작정을 하고 있었다.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 알딘 백작이 있다면 그에게도 좋은 점이 많기 때문이다.

에반이 잠시 고민을 하는 척하다 물었다.

“어떤 것이든 들어주시는 겁니까?”

“그렇다.”

“영지에 가서 얼마간 편히 쉬고 싶습니다.”

그 말에 국왕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번에 타 왕국을 갔다 오고 나니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쳤습니다. 그러니 조금만이라도 쉬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것이 자네의 소원이라고?”

“예.”

다른 이들 같으면 보물을 하나 내려주십시오, 아니면 세금을 조금 줄여주십시오, 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반은 쉬고 싶다고 하니 그 진의에 대해서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그럼 편히 쉬다가 오게나.”

“그 기간 동안 아무도 저를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도 전하께서 해주실는지요.”

“당연히 해주고말고.”

“전하의 은혜에 감사드리옵니다.”

“하하하. 자네의 소원이 너무 평범하여 짐이 당황스럽군.”

“저는 절대 평범한 소원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자가 세상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조금만 움직이면 일이 벌어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니 저 또한 제대로 쉴지는 알 수 없는 겁니다.”

“음. 자네의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군.”

국왕은 이렇게 수락을 했다.

* * *

알딘 영주가 다시 선대 영주들처럼 칩거에 들어갔어도 그걸 선대 영주들하고 똑같이 보는 사람은 없었다.

일단 그는 처음부터 다른 영주들과 다른 행보를 보였던 몸이다.

게다가 어떻게 해서든 관직을 차지하려고도 하였고 전장의 한복판에도 서보았다.

이런 그이기에 절대로 다시 조용한 생활을 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을 못했다.

하지만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나도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사람들은 혹시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삼 년째 되는 날 국왕이 참지 못하고 그에게 서찰을 보내었고 그 서찰에 쓰여 있는 답변으로 인해 사람들의 생각은 의심에서 확신으로 돌아섰다.

〈아직도 여유를 즐기며 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제대로 쉴 때가 오면 그때 다시 밖으로 나가겠습니다.〉

보통 국왕이 서찰을 보낸다면 당연히 한 번 생각해보겠다거나 왕도로 달려가겠다는 말을 쓰기 마련이다.

하지만 알딘 자작은 아직도 더 쉬어야 한다는 답변을 적어 보내었고 그걸 본 국왕은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이렇게 알딘 자작은 파격적인 일 년의 행보만을 남긴 채 선대 영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다시 알딘 영지에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혹자는 전쟁을 겪어보고 다시 가문의 피가 되살아났다고 했고 혹자는 힘을 기른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의 이유가 맞다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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