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장 (54/60)

제5장

에반은 그를 시기하는 자도 있었고 그를 반기는 자도 있었다.

하지만 크게 보자면 중앙으로의 진출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어찌되었든 그는 현재 왕궁에 머무르고 있고 국왕이 직접 관직을 제수까지 했다.

현재로서는 이름만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만 어찌 되었든 인연의 끈을 만들어 놓았다. 또한 동맹까지 인정을 받았으니 그가 하는 일은 잘 풀린다고 보면 되었다.

이제 신흥 귀족으로 떠오르는 그의 저택에 오늘도 반갑지 않은 손님이 한 명 나타났다.

슥.

어둠에 동화가 되어 날카롭게 주위를 둘러보던 암행인이 슬며시 저택의 그림자 속으로 숨었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이용해 저택의 벽면을 타고 위로 올라가더니 사층의 열린 창문으로 스며들었다.

전혀 소리가 나지 않고 잠입한 그는 절대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 천장을 통해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벅저벅.

가벼운 옷차림을 한 이가 갑자기 복도에서 튀어나왔다.

암행인은 천장에 딱 달라붙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행여나 소리를 내어 들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복도를 가로지르던 자가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위로 들어 올리더니 미소를 지었다.

“내려와.”

‘들켰나?’

암행인은 갑작스런 상황에 든 당황한 마음을 빠르게 수습한 후 그대로 소매에서 비수를 꺼내서는 무방비 상태의 적을 향해 그대로 달려들었다.

퍽.

하지만 그건 암행인의 생각일 뿐 무방비라고 생각했던 그는 그대로 비수를 피하더니 암행인의 뒷목을 쳐 기절시켰다.

“귀찮군.”

하루가 멀다 하고 이렇게 암살자가 침입해 들어오자 피곤해진 건 바로 라우웰이었다.

그는 이 왕도에 머무른 반년 사이에 굉장한 발전을 했다.

어느 때를 기점으로 에반에게 받은 공무에 대해 깨달음을 얻은 것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과거를 인정하고 자신을 인정하자 그 능력이 개화를 했다.

그리고 그에게 특화된 능력은 바로 살기를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어느 정도의 공간 안에서 살기가 일면 라우웰은 알아차렸다.

아무리 미세한 살기라도 알아차리니 이렇게 암살자들이 저택에 들어오면 저절로 눈이 떠지고 그 암살자를 잡으러 오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걱정이 되긴 되네.”

살기를 느끼는 능력이 그다지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전장에 나가면 모두가 살기를 뿜어낼 텐데 거기에서 버텨낼 정신력이 자신에게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요즘은 그래서 저택에 있는 병사들과 칼과 아그나르에게 부탁해 상대를 하고 있지만 그들만으로는 전장의 살기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에반은 그런 라우웰을 보면서도 태연했다.

라우웰이 에반에게 고민을 털어놓자 에반이 그에게 한 말은 한마디였다.

“그때 가보면 알 것이다.”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겠으니 계속해서 고민만 하는 라우웰이었다.

* * *

“그자는 처리를 했소?”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그런 자 하나 처리를 못하다니 어떻게 된 것이오?”

“하지만 그의 옆에 있는 기사들의 실력이 보통이 아닙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 다른 한 사람이 이죽이면서 끼어들었다.

“기사들과 암습을 하는 것은 상관이 없다는 건 나도 알겠소.”

그 말에 이번 일을 맡았던 자가 발끈했지만 그건 중후한 음성의 남자의 말에 진정되었다.

“지금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닌 것 같소만.”

“흠흠. 그렇지요.”

“자중하지요.”

중후한 음성을 가진 남자가 모여 있는 십여 명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제 때가 이르렀소.”

“오오. 드디어.”

“이제…….”

그 말에 모두가 감격하는 가운데 중후한 음성의 남자가 말을 이었다.

“우리가 이제 그분들을 도울 작은 계획을 실행할 때요.”

“언제 움직입니까?”

“일주일 후 파티가 있을 예정이요.”

메소스 왕국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축제를 열었다.

그것이 크든 작든 어찌 되었든 국고를 열어 파티를 즐기게 놔두었고 귀족들도 삼삼오오 모여 파티를 열었다.

당연히 왕가에서도 파티를 열었는데 이번에 열릴 파티는 봄을 위한 파티였다.

한 해가 넘어가고 이제 두 달.

봄을 맞이하는 이번 파티는 여느 때보다 특별했다.

국왕이 모든 것을 주도하는 파티였기 때문이다.

“잘할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 촉박합니다.”

당연하게도 걱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빠르다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에 중후한 음성의 남자가 확신 어린 투로 말했다.

“이미 모든 준비는 되어 있소. 그대들은 그저 계획대로 따라오면 될 것이오.”

“알겠습니다.”

“이제 시작이오. 모두 정신을 차리기 바라오.”

“예.”

그들의 목소리는 결의에 차 있었다.

* * *

메소스 왕국의 축제는 하루 이틀 사이에 만들어진 것 아니었다.

오랜전 남대륙에 있던 제국에서부터 시작된 이 축제는 현재 남대륙의 대부분의 왕국에서 열린다. 그리고 메소스 왕국 또한 이 전통을 지키고 있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왕궁의 그랜드 홀이 개방되어 수많은 귀족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이곳에 모인 수만 하더라도 기백은 넘어 보였는데 그래도 홀은 한산한 것처럼 보였다.

“정말 큽니다.”

“당연히 여기는 왕궁이잖아.”

“하지만 이런 곳은 처음이지.”

“그만 해라. 오늘은 보는 눈이 많다.”

“예.”

칼과 라우웰이 싸우자 그걸 에반이 조용히 중재를 시켰다.

이 파티는 귀족들의 기사들까지 받았기에 더욱 수가 많았다.

에반은 일찍 자리를 잡고 눈에 안 띄는 곳에 서 있었다. 요즘 들어 에반의 성격에 맞지 않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니 좀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런 중요한 파티에 빠지면 좋지 않기에 어쩔 수 없이 참석한 것이다.

다만 국왕이 나와 시작을 알리면 조용히 빠져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한 시녀가 준 음료수를 마시던 에반이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라우웰이 에반을 바라보았다.

라우웰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심상치 않은 것 같습니다.”

갑자기 이곳저곳에서 살기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졌다.

그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증거였다.

“무슨 일입니까?”

아그나르가 조용히 물었다.

“곳곳에서 살기가 나타났다.”

“예?”

아그나르는 그 말에 주위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웃고 떠드는 귀족들뿐이었다.

“칼.”

“예. 영주님.”

“그들에게 들은 바는 없는가?”

그들이란 정보 길드를 말함이다. 하지만 칼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말도 없었습니다.”

“그들도 모르는 것인가?”

“그저 밖에 경계를 서는 기사들이 일으킨 것이 아닐까요?”

“그런 건 아니다. 누군가에게 지시를 받고 도처에 숨어 있는 것 같으니 말이야.”

“음…….”

“제가 한번 나가보겠습니다.”

이미 한 번 느낀 살기는 그 안에 남는다. 라우웰은 그 흔적을 따라가 살기를 일으킨 자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기다려라. 여기서 경거망동했다가는 오히려 더욱 혼란에 휩싸일 수 있어.”

“예.”

에반의 말에 세 사람이 주위를 긴장하며 살피는 가운데 홀을 울리던 소음이 점차 잦아졌다.

홀 앞의 커다란 문이 열리고 국왕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에 귀족들이 예를 갖추어 약식으로 인사를 했다.

“고개를 들라.”

작지만 홀에 울려 퍼지는 소리에 귀족들이 고개를 들었다.

“우선 짐은 이렇게 많은 이들이 이 축제에 참가해주어 고맙다. 이 메소스 왕국의 안정을 위해 더욱 힘써주기 바란다.”

“알겠습니다. 전하.”

“그럼.”

국왕이 그러면서 시종장을 보자 시종장이 손뼉을 두 번 쳤다.

짝짝.

그러자 시종들이 쟁반에 붉은 와인을 들고 등장하기 시작했다.

올해의 풍년을 위해 풍년이 들었던 해의 곡물로 빚은 술을 마시는 것이 전통이었다.

귀족들은 시종들이 가지고 오는 술을 하나 둘씩 들었다.

국왕 또한 술잔을 들며 외쳤다.

“풍요로운 메소스 왕국을 위하여!”

“위하여!”

칼과 라우웰 그리고 아그나르도 술을 마시려 했다.

그때 에반이 그들에게 메시지를 보내었다.

-먹지 마라. 그리고 주위에 누가 이걸 먹지 않는지 살펴.

그들은 일순 멈칫했지만 이내 자연스럽게 먹는 척하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빠르게 주위를 훑으며 귀족들을 살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국왕은 모두가 술잔을 내려놓은 것을 확인하자 말을 이었다.

“이제 왕국민의 모두를 기리면서 즐거운 파티를 보내기를 바란다.”

국왕이 그렇게 말을 하고는 슬쩍 퇴장을 하려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비틀거렸다.

‘뭐지?’

일순 이상한 생각이 들며 어지러움을 해소시키려 머리를 흔들고 있을 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컥!”

“크윽.”

“이, 이건…….”

털썩. 털썩.

귀족들을 지키는 기사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고 있었고 개중에는 귀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국왕은 그걸 보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집사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집사장인 테일러 후작이 웃는 것을 보면서 그 또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테일러 후작이 시원한 웃음을 흘리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주 멀쩡했고 그와 함께 온 기사들 또한 아주 멀쩡한 모습이었다.

국왕을 한차례 바라본 테일러 후작이 그에게 비웃음을 날렸다.

이제는 숨길 것이 없다. 자신들의 작은 계획은 시작이 되었고 완성을 이루리라.

그때 저 구석에 눈에 거슬리는 자들이 보였다.

“아직도 서 있는 분들이 계시는군.”

바로 에반과 세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테일러 후작의 말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테일러 후작은 아주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들을 요리조리 둘러보고는 감탄을 터뜨렸다.

“호, 기사들까지 멀쩡한 것을 보니 수련을 게을리 한 것이 아니라 술을 먹지 않았나 보군. 누구지?”

그 말에 에반이 대답을 해주었다.

“안딜의 영주이다.”

“아, 자네가 그 유명한 안딜 자작이었군. 역시나 몸을 사린달까? 아니면 의심이 많다고 할까?”

“대체 무슨 일을 벌이는 거지?”

에반이 물었고 테일러 후작이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큰일을 하는 분들을 위해서 자그마한 도움을 주고자 작은 일을 벌였을 뿐이다.”

“큰일?”

하지만 그 이상은 알려줄 생각이 없는지 테일러 백작이 말을 삼갔다.

“아무튼 자네 같은 사람이 남아 있어서는 안 되겠지. 처리해.”

그 말에 테일러 후작의 곁에 있던 기사들이 에반을 향해 달려들었다.

쓰러진 귀족들이나 기사들을 밟으면서 그대로 에반을 향해 무식하게 돌진하는 그들을 보면서 라우웰이 피식 웃었다.

자신들의 숫자와 가진 무기들을 믿는 듯 보였기에 라우웰은 가소로웠다.

“웃기는군.”

라우웰에게는 그들처럼 무기가 없었다.

하지만 무기는 곧 생길 것이다.

콱.

“응?”

퍼억.

“컥!”

가장 먼저 달려든 기사가 검을 휘두르는 순간 라우웰이 그의 무기가 든 손을 잡고는 그대로 갑옷을 우그러뜨릴 만한 힘으로 기사의 복부를 치자 그 기사는 비명을 남기며 꼬꾸라졌고 라우웰의 손에는 그의 검이 들려 있었다.

그러고는 일방적인 학살이 벌어졌다.

카카칵.

“크아악!”

갑옷과 함께 그대로 몸이 잘리는 고통에 기사가 비명을 지르면서 쓰러지고 그 뒤에 오던 기사는 어리둥절한 표정 그대로 목이 잘리며 허공을 날았다. 또한 그 광경을 보면서 양옆에서 달려든 기사들은 양손에 잡혀 있는 검에 그대로 가슴을 허용하며 앞으로 쓰러졌고 그 사이 그들이 가지고 있던 검을 빼앗은 라우웰은 그 뒤로 오는 기사들을 쓰러뜨렸다.

콱.

“아악!”

촤악.

“윽!”

쿵!

순식간이었다.

정말 짧은 순간에 달려들던 열다섯의 기사가 피 속에 잠겼다.

하지만 라우웰은 아직 그 욕망이 채워지지 않았는지 테일러 후작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시선에 테일러 후작은 아무것도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그 또한 익스퍼트 최상급에 올라 있는 기사였지만 라우웰이 쏘아 보내는 살기는 그런 그의 이성마저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했다.

쾅!

때마침 홀의 문이 열리면서 기사들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테일러 후작은 아무것도 못하고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라우웰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만 보고만 있었을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각하.”

그가 이룬 경지가 그 소리에 그에게 약간의 이성을 되돌아오게 만들었다.

“저, 저놈들을 죽여라. 어서. 어서!”

홀 안에 들어오는 기사들을 보면서 테일러 후작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라우웰도 그제야 약간 정신을 차린 듯 에반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에반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차피 귀족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고 깨어 있는 자들은 적이었다.

살 가치가 없는 이들인 것이다.

“네 마음대로 해라.”

씨익.

라우웰이 웃었다.

“그 말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몸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살기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 * *

“어떻게 된 일입니까?”

칼이 에반에게 물었다.

분명 라우웰이 에반에게 무언가 전수를 받은 것이 분명했다.

몇 달을 고민하던 라우웰은 마스터가 되지는 못했지만 자신을 능가하는 실력을 가지게 된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게다가 그저 대련을 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라우웰의 모습에 이질감마저 느끼는 그였다.

“본래 그는 살기를 다룰 줄 알았다. 그 능력이 더욱 커진 것뿐이야.”

자신의 살기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살기마저 이용해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바로 라우웰의 능력이었다.

아마 이번 일을 계기로 라우웰은 그 능력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것이다.

에반이 문득 칼과 아그나르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종횡무진하는 라우웰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저들은 공무를 받아들이기에는 부족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이제는 보였다. 그 사람이 능력이 되는지 되지 않는지 보이는 것이다.

이들에게 공무를 배울 능력은 없지만 동양의 무술을 더욱 발전시킬 가능성은 있었다.

“부럽나?”

“아, 아닙니다.”

“내가 알려준 능력은 그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모른다. 다만 그는 이미 마스터와 일전을 벌일 실력을 가졌다는 거지. 너희는 아마 저런 능력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 말에 두 사람이 멈칫했지만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걸 보면서 에반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너희를 마스터의 길로 이끌어줄 수는 있다.”

“그것만으로도 과분합니다.”

“맞습니다. 주군.”

“그냥 영주라 불러라. 아직 사람이 많다.”

“예.”

하지만 에반의 말과는 달리 지금 서 있는 사람은 에반과 에반의 기사 그리고 테일러 후작뿐이었다.

밖에서 들어왔던 기사들은 모두 쓰러져 있었다.

라우웰 혼자 백여 명의 기사단을 막아버린 것이다.

“라우웰.”

“예.”

“이제 쉬어라.”

“알겠습니다.”

라우웰이 미소를 지었다.

지금까지의 답답함이 모두 가시도록 움직이면서 피를 맛보았다.

그것으로 라우웰은 느꼈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은 전장이라고.

그러나 라우웰은 그런 자신을 참아내었다.

아무리 몰상식하고 예의가 없는 그였지만 에반이 자신을 떠나보내지 않는 한 그는 그의 옆에서 충성을 다할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준 보답이라 라우웰은 생각했다.

에반은 라우웰이 벽에 기대앉는 것을 보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히이익.”

테일러 후작이 입에서 쇳소리를 내었다.

설마 단 한 명의 기사가 지금까지 자신들이 준비했던 기사단의 기사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강한 자라고 해도 그건 그저 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인 줄 알았건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고 그런 짓을 저지른 자가 적이라 생각하니 제대로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지 마! 오지 말란 말이야!”

테일러 후작이 어느새 단검을 뽑고는 사방팔방으로 휘둘렀다.

그저 있는 대로 휘두르지만 기본이 있기는 한지 단검에는 오러가 맺혀 있었다.

그러나 그런 몸부림도 칼이 제압을 하며 끝났고 아그나르가 오금을 치자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아까 전의 여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저 두려움으로 에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묻지. 그리고 사실대로 대답하면 살려주마.”

테일러 후작이 고개를 위아래로 열심히 흔들었다.

“먼저 넌 누구냐?”

“무슨 말입니까?”

콱.

“크악!”

라우웰이 반문을 하는 테일러 후작의 손을 밟자 테일러 후작은 비명을 터뜨렸다.

“넌 누구냐?”

“에런. 에런이라 합니다.”

“이제야 이름이 나오는군.”

에반이 미소를 지으면서 다른 질문을 했다.

“언제부터지?”

“오래되었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테일러 후작의 실력이 꽤 강하다고 알고 있는데.”

“집사장에 오른 후부터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되어 속이기 쉬웠습니다.”

“네 뒤에는 누가 있지?”

“…….”

그 말에 테일러 후작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답을 하지 않으면 고통이 수반됨을 알면서도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만큼 배후가 무섭다는 것일 테다.

에반은 다시 고통을 가하려는 라우웰을 제지하고는 물었다.

“살고 싶으냐?”

“예.”

“처음 마음가짐은 그것이 아니었을 텐데…….”

“…….”

그 말에 테일러 후작의 모습을 하고 있는 에런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임무를 완수하려는 마음을 가졌지만 시간이 흐르고 타성에 젖으면서 그런 생각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지금만 보아도 약간의 고통이 자신에게 가해지자 그것을 참지 못하고 바로 알려서는 안 되는 비밀을 바로 토해내었다. 테일러 후작으로 살면서 얼마나 약해졌는지 보여주는 반증이었다.

“뭐, 나야 좋지.”

“더 물어보시지 않습니까?”

“난 이 일에 깊게 관여하고 싶지가 않아.”

“그럼?”

“이들을 깨워야지. 그리고 그 전에 잠들어 있는 척하고 있는 놈들도 처리하고 말이야.”

팍.

그 말에 몇몇이 일어나 도망가려 했다.

하지만 이미 칼과 아그나르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일어서는 자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그 중 아직도 눈을 감고 일어나지 않는 귀족들은 그냥 베었다.

어차피 술을 먹지 않았던 자들은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모두 죽일 생각이었다.

“크악.”

“아아악!”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에반이 홀의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라우웰이 벤 수많은 기사들이 피에 잠겨 있었는데 에반은 손짓을 하는 것만으로 죽은 기사들을 모으더니 가루도 남기지 않고 모두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그건 무엇입니까?”

“내 능력 중 하나다. 너도 열심히 하면 할 수 있는 능력이야.”

“그렇습니까?”

라우웰은 입맛을 다셨다.

정말로 흥미가 가는 능력인데 자신이 아직 부족해서 그 능력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을 듣자 아쉬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라우웰이 지켜보는 가운데 에반은 피를 지워나갔다.

피가 증발하면서 비릿한 냄새가 났지만 그걸 참지 못하는 이들은 여기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정신을 잃지 않은 귀족을 베어낸 칼이 다가왔다.

“모두 베었습니다.”

“아직 한 사람이 남았잖아.”

“증인을 남기지 않습니까?”

“어차피 밖에 많은 증인과 증거들이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너희들의 능력을 다 드러낼 필요가 없어.”

“알겠습니다.”

칼이 고개를 숙이면서 대답을 하고는 테일러 후작의 행세를 하는 에런에게 다가갔다.

“사, 살려주시오.”

“미안하지만 그건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군.”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주겠소.”

“미안하오.”

에런은 칼의 눈에서 단호함을 읽었다. 그러자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에런은 일어서며 욕설을 퍼부으려 했다.

“이런 개…….”

푸슉.

그리고 그의 가슴에 검이 박혔다.

그는 두 눈을 부릅뜨면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 표정에 동정을 할 이들은 여기에 아무도 없었다.

* * *

“전하, 전하. 일어나십시오.”

아련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국왕이 눈을 떴다.

“전하. 정신이 드시옵니까?”

하지만 아직까지 정신이 없었다.

자신이 왜 눈을 감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지막으로 본 테일러 후작이 기억이 나며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시야가 환해지면서 자신을 보고 있는 자를 볼 수 있었다.

‘안딜 자작.’

분명 몇 달 전 보았던 그였다.

국왕이 그에게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대도 이번 일을 벌인 자와 한패였던 건가?”

“한패라니요?”

“시치미 떼지 마라. 짐이 기절을 하기 전 이미 다른 귀족들도 쓰러진 것을 보았으니 말이다.”

“오해를 하시는군요. 저는 전하를 구해드렸을 뿐입니다.”

“구해?”

“예. 일어나 보시죠.”

그러고 보니 자신을 구속하는 그 무엇도 없었다.

“끄응.”

힘겹게 일어난 국왕은 다른 이들을 깨우기 위해 분주히 돌아다니는 세 사람과 함께 곳곳에 있는 핏자국을 볼 수 있었다.

“대체 이건…….”

홀은 시체와 함께 정신을 잃은 자들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자신을 지키는 근위기사들이 죽어 있는 것을 보고는 에반을 쏘아보았다.

“저들은 어찌 된 일인가?”

“테일러 후작의 기사들이 아닙니까?”

“그의 기사들도 있지만 몇 명은 짐을 지키는 기사들이다.”

“그들 또한 저희를 공격해 어쩔 수 없이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테일러 후작은 어디에 있는가?”

“저기 쓰러져 있는 것이 바로 그입니다.”

“으음. 그 또한 죽었는가?”

“저희에게 잡히자 스스로 칼에 찔려 목숨을 버렸습니다.”

그러는 사이 귀족들이 하나 둘씩 눈을 떴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며 놀라더니 서 있는 국왕에게 다가와 그의 안전을 물었다.

모든 것이 정신이 없는 지금 국왕은 누굴 믿어야 할지 모르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으로 그들의 물음에 대답을 대신했다.

“일단 고맙게 생각한다.”

“이 왕국의 귀족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이야기를 해줄 수 있나?”

“신은 본래 다른 자들을 잘 믿지 아니하여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았다?”

“예. 저의 선조들께서는 절대 다른 자들이 만든 술은 입에도 대지 말라 명해서 저는 제 관리하에 만든 술만을 마시고 있습니다.”

“그런가?”

에반은 의심을 하는 국왕을 보며 웃어 보였다.

“어차피 조금만 조사하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거짓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국왕은 에반을 다시 보았다.

이제 보니 그 어디에도 당황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아주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는 그가 다시 보이는 것이다.

“일단 다른 자리로 가지.”

“아직 모두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어차피 일어날 이들 아닌가?”

“그것이, 지금 그들이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제 가문의 비전의 약 때문입니다. 만약 깨어나지 않는 분들이 있다면 제가 다시 약을 먹여야 하기에 기다려야 합니다.”

국왕은 이제는 더욱 복잡한 눈이 되었다.

대체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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