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53/60)

제4장

안딜 영지가 영주에 의한 거대한 바람을 맞이했다.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더니 얼마 후 관리들의 처벌이 행해진 것이다.

처음에는 어떻게 해서든 피해보고자 했지만 너무나 명확한 증거 앞에 관리들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에반의 말에 통신구 너머로 있는 바우어 후작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것이 사실인가?

“예.”

-으음…….

그는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지는 몰랐다는 듯 침음을 흘렸다. 충성스러운 이들을 보내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영지의 재산을 착복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잠시 고민을 하던 바우어 후작이 어렵사리 말을 꺼내었다.

-영지의 법대로 처리하게.

“그렇게 하자면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겁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야지.

단호한 그의 말에 에반이 물었다.

“괜찮습니까?”

-내가 괜찮겠는가?

“아닙니다.”

에반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몇 명은 남아 있다는 데에 안도를 해야지.

관리들 중 처벌을 받지 않은 이들 대부분이 크리프 왕국에서 보낸 사람들이었다. 아마 그들이 있었기에 아직까지 안딜 영지가 무사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나저나 자네는 무슨 일을 하려는 건가?

“무슨 뜻입니까?”

-내가 받은 보고로는 주위의 영주들을 불러들여 바람을 넣었다고 하는데.

“힘을 갖추려고 하는 겁니다.”

-힘이라니?

“안딜 영지에서 버는 돈이 많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변방의 영주이고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중앙의 귀족과의 접점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왕을 쉽게 만날 수 있겠습니까?”

바우어 후작이 에반을 보낼 때 생각한 건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그의 실력을 보여주어서 마커 왕국을 막는 것이었다.

어차피 마커 왕국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마커 왕국에서 영웅이라 불리는 이들 때문이다. 그들만 에반이 막는다면 남대륙의 통일은 없을 거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계산과는 달리 일단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일단 중요한 요직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 에반의 생각이었다.

허공에 붕 뜬 자리에 앉아서 활약을 해보았자 모든 공은 다른 사람이 채 갈 것이 분명했다. 그 전에 힘을 키워서 절대 만만하게 보이지 않게 만들어야 했다.

-그것이 다인가?

“일이 잘 풀리면 메소스 왕국 자체를 크리프 왕국의 공국으로 만들 수도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군.

메소스 왕국이 왕국의 이름을 하고는 있지만 크리프 왕국처럼 큰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다.

크리프 왕국은 영지만 해도 백 개가 넘지만 메소스의 왕국은 오십여 개의 영지만 존재할 뿐이고 영지 자체의 크기도 작다. 그렇다고 메소스 왕국이 남대륙에서 작은 왕국은 아니었다. 다만 남대륙에 수많은 왕국이 난립해 있기에 땅이 작은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에반이 보기에는 힘만 갖춘다면 이곳을 장악해도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야 하네.

“무엇을 말입니까?”

-남대륙이 왜 중대륙이나 북대륙에 먹히지 않는지 아는가?

“그건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자존심이 있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아직 바스트 제국이란 이름도 없었을 때 제국을 통일한 나라가 남대륙에서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네. 그들은 그 자존심으로 만약 북대륙이나 중대륙이 자신을 넘본다면 한데 뭉치지. 그건 자칫하면 통일을 앞당기는 일이 될 수도 있어.

바우어 후작의 충고에 에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난 자네가 잘해내리라 믿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통신을 끊지.

“예.”

통신구에서 바우어 후작의 모습이 사라지고 에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두 가지 일을 처리할 시간이었다.

* * *

“크윽…….”

“윽…….”

이곳저곳에서 신음이 들려왔다.

에반이 옆에 있는 라우웰을 바라보았다. 그가 멋쩍은 모습으로 시선을 돌린다.

하지만 계속된 에반의 시선에 라우웰이 에반을 바라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가슴이 답답하여서 손을 과하게 썼습니다.”

“그것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예?”

“지금 넌 답답함을 다른 사람에게 풀려고 하지만 그걸 네 안에서 풀어야 한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인내를 하라는 말이다. 너는 지금까지 네가 인내를 했다고 생각하느냐?”

“…….”

평소 같으면 그렇다, 라고 대답을 하겠지만 이미 에반이 자신의 과거를 엿보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니 제대로 대답을 못하는 것이다.

“잘 생각해보아라.”

“알겠습니다.”

라우웰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칼은 그런 라우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그러지?”

“요즘 라우웰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입니다.”

“그럴 일이 좀 있다.”

“예.”

“그레이는 어디 갇혀 있지?”

“여기입니다.”

칼이 안내한 곳에는 피투성이가 된 인영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크으음…….”

잠시 보던 에반이 그를 불렀다.

“그레이.”

“크윽. 영주님이신가?”

“그래.”

“크크크. 여기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그에게는 독기까지 보였다. 아직까지 자신이 저지른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분에게 이야기를 전했다.”

“무, 무어라 하십니까?”

그 말에 눈을 감고 있던 그레이가 눈을 번쩍 뜨면서 에반을 바라보았다.

잠시 그레이의 눈을 바라보던 에반이 말했다.

“내 뜻대로 하라더군.”

“이럴 수가.”

그레이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거기에 에반은 쐐기를 박았다.

“사실이다.”

“거짓말. 그분이 날 버릴 리 없다!”

그레이는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하지만 에반은 고개를 저으면서 담담히 말했다.

“다른 죄를 저질렀다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것이 그렇게 큰 죄인가?”

“돈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막고 판단을 흐리게 하지. 이미 몇몇은 다른 영주에게 붙으려 한 자도 있었다. 물론 그 중에는 내 편이라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말도 안 돼.”

“그것이 인간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그런 일을 벌이지 말았어야 하는 거다. 그렇지 않다면 후에 더 큰 일이 벌어지는 거지.”

“으윽. 흑.”

그레이가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 억울한 것이다. 그저 미래를 대비하여 약간의 돈을 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에반은 그런 그를 뒤로하고 감옥을 빠져나왔다.

* * *

“어서 오십시오.”

“예.”

지난번에 불렀던 수보다 약간 모자란 수의 영주가 에반을 찾았다.

한 달의 유예기간을 주었지만 십오 일이 더 지난 오늘 온 것은 바로 안딜 영지에 분 피바람 때문이었다.

비리를 저지른 모든 관리들이 벌을 받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거나 노역형에 처해져 분위기는 뒤숭숭했고 인근의 영주들도 쉬이 에반을 찾지 못했다.

겨우 그 피바람이 잦아질 때쯤 눈치를 보면서 안딜 영지에 들어왔다.

“한 분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군요.”

에반의 웃는 낯을 보면서 영주들이 흠칫 떨었다. 절대 저 미소에 속으면 안 된다는 걸 이번 사건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또한 그가 할 행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보이는 듯했다.

“그럼 오늘 참석을 하지 않는 분은 제 제의를 거절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의 말에 오지 않은 영주의 미래가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 계획은 세워져 있습니까?”

지금 보니 레그닐 영주가 이들을 이끄는 수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별 계획은 없습니다. 다만 저희의 동맹을 왕국에 알릴 뿐이지요.”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메소스 왕국에 영지들끼리 동맹을 맺는 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중 살아남은 영주들은 모두 왕과 밀약이 된 동맹일 뿐이다.

그 외에는 왕이 절대 용서치 않았다.

어차피 왕국은 힘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힘 있는 영주가 나타나면 허수아비 왕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왕의 자리에 자신이 그냥 앉아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왕은 언제나 영주들을 주시해야만 했고 동맹을 맺으려 하면 철저히 응징을 하려고 했다.

“두렵습니까?”

“…….”

“두려우시다면 제 제의를 거절해도 됩니다.”

아무렇지 않게 거절하라는 그 말이 더욱 무서웠다.

“아닙니다. 안딜 영주의 말에 따라야죠.”

그에 레그닐 영주가 급히 말했다.

“맞습니다. 그래야죠.”

“제의를 거절하다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그 뒤로 두 명의 영주들이 찬성을 했다. 만약 여기에서 거절을 한다면 그 뒤는 안 보아도 뻔했다.

영지전에 이은 영지의 패망. 이것밖에 없었다.

한 달여를 안딜 영지에 대해 알아보려 백방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얻는 것은 없었다.

꼭 신기루처럼 분명 보이기는 하지만 모두 허상이었다.

정보 길드에 의뢰를 해보기도 하고 세작을 침투시켜 보기도 했지만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것은 이미 안딜 영주가 준비를 마치고 힘을 숨기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에반은 그들을 보며 속으로 웃음 지었다.

이미 정보는 모두 통제를 해놓았다.

바람의 마탑은 백여 년 전부터 정보 길드를 운영해 왔고 이제는 대륙 최고의 자리를 다투는 곳으로 성장을 했다.

당연히 남대륙에도 진출해 있었는데 레그닐 영주는 그것도 모르고 그곳에 의뢰를 했으니 제대로 상황을 알려줄 리 만무했다. 정보 길드는 신용을 제일로 쳐준다지만 이제 바람의 마탑은 크리프 왕국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 상황이기에 크리프 왕국을 조금은 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제의를 거절한 영주를 어떻게 처리할지부터 생각하지요.”

그 말에 모두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설마 제의를 수락한 순간 이런 이야기를 꺼낼 줄은 생각도 못한 것이다.

“그, 그것이…….”

“사실 오늘 오지 않은 미슐 영지의 영주는 본 영지의 관리와 내통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것 때문에 나오지 않은 듯한데 조금은 아쉽군요.”

“으음.”

“자, 시작해 봅시다.”

그러면서 에반이 하나의 지도를 꺼내었다.

그것은 메소스 왕국 중에서도 현재 안딜 영지 주위가 자세히 그려진 지도였다. 그리고 그 중 한 곳에 빨간 점이 쳐져 있었는데 그건 분명 미슐 영지였다.

에반은 벌써 예측을 하고 있었다는 소리였기에 영주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명목상 동맹 관계이지만 이미 에반에게 끌려가고 있는 그들이었다.

* * *

“전하를 뵈옵니다.”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슈렌츠 백작을 보면서 메소스 왕국의 국왕인 치렌 2세가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

“조금은 심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심각한 일?”

“예.”

“이야기해보게나.”

“안딜 영지라고 아십니까?”

“안딜?”

잠시 생각해보던 국왕이 대답했다.

“세 번째로 세입이 많던 곳으로 기억이 나는군.”

“그곳의 영주가 나타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곳의 영주는 한 번도 본 적이 없군. 몇 번을 초대했는데 말이야. 그런데 나타났다는 표현은 무엇인가?”

“안딜 영주는 대대로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극도로 주위의 위협에 조심하는 것이 그들 가문의 혈통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관례를 깨고 모습을 드러낸 겁니다.”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나?”

“그리 큰 문제는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모습을 보이자마자 주위의 영지의 영주들을 불러들였습니다.”

꿈틀.

국왕의 표정이 매서워졌다.

지금까지 그는 굉장히 많은 위기를 겪어왔고 그때마다 슬기롭게 헤쳐 왔다. 그 수많은 위기 중 대부분이 영지를 가진 귀족들의 반란이었다. 언제나 싹을 잘라도 다른 곳에서 다른 씨앗이 싹을 틔우니 끊임이 없었다.

그러니 그저 영주를 만난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표정이 매서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무엇을 했지?”

“동맹을 맺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때 참석하지 않은 영지를 영지법에 의거하여 공격하여 이기고는 동맹을 맺은 다른 영지들과 땅을 분배했습니다.”

“으음.”

영지법은 메소스 왕국 국법의 위에 있다.

어떻게 국법의 위에 있을 수 있냐고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현재 국왕도 어떻게 보면 일개 귀족의 후예가 본래 있었던 나라를 전복하고 세웠던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약 영지법을 국법의 아래에 둔다면 지금 안정되어 보이는 나라는 금세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

“그걸 보고는 했나?”

“예. 하루 전에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보고를 하는 것이고?”

은은히 노기마저 띠고 있는 국왕의 목소리이지만 슈렌츠 백작은 당당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안딜 영지를 주시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빠르게 일을 벌일 줄은 몰랐습니다. 하루 만에 영지를 복속시키고 바로 그날 저희에게 보고를 했습니다.”

“하루? 한 영지를 먹는 데 단 하루라고?”

“예.”

“어떻게?”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자네가 그리 무능했나?”

“저는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그 말에 국왕은 큰소리를 낼 입장이 못 되었다.

슈렌츠 백작을 믿지 못하여 그가 거느린 정보부를 축소시킨 것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힘이 강하다고 생각해 조치를 취했건만 그 조치가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쯧. 예전만 못하군.’

한창 젊은 시절에 국왕은 포용할 건 포용을 하고 버릴 건 과감히 버렸다.

한 번 자신이 거둔 귀족들을 의심하거나 외면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늙어감에 따라 의심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졌다. 또한 현재에 안주하길 원하게 되자 모든 것이 불안해졌다.

그러나 이번 일로 깨닫는 것이 조금 있었다.

지금 자신은 왕이다.

무소불위라고 말을 할 수는 없지만 수많은 이들이 자신에게 충성을 하고 있다.

그들과 지금까지 거리를 벌렸지만 이제는 아니다.

“슈렌츠 백작.”

“예. 전하.”

“짐에게 원하는 것이 뭔가?”

그 말에 슈렌츠 백작이 고개를 들어 그가 충성을 맹세했던 왕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예전처럼 광채가 나는 것 같았다.

* * *

“괜찮겠습니까?”

이번에 새롭게 집사가 된 딜프가 물었다.

“무엇이?”

“지금 가는 길이 굉장히 험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지 않으면 안 돼.”

며칠 전 미슐 영지를 얻은 후 곧바로 왕궁에서 사신이 왔다. 이제 모습을 보였으니 충성을 맹세하라는 국왕의 지시였다.

하지만 국왕이 동맹을 굉장히 싫어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분명 지금 가는 길이 죽음으로 가는 길일 거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 만약 가지 않는다면 역대 안딜 영주처럼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껴 움직이지 않는다는 조롱의 목소리가 나올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애써 형성해 놓은 동맹 관계가 깨질 수도 있었다.

국왕은 이번 일을 벌인 안딜 영주를 미끼로 다른 영주들을 충분히 꾀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에반은 어떻게 해서든 가야 했고 그걸 딜프가 불안해했다.

“하지만…….”

“아아. 내가 누군지 잊었나?”

“아, 아닙니다.”

“그리고 내 기사들은 강하다. 그들이 있다면 난 언제든 살아 돌아올 수 있어.”

사실 그들이 없어도 에반이 살아 돌아오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홀로 왕국을 상대해도 결코 죽지 않을 이가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지킬 것이 많았고 그런 만큼 자신의 실력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지금까지 에반이 드러낼 실력이 에반의 진짜 실력의 극히 일부분이라는 걸 안다면 어떻게 해서든 에반을 끌어들이려 할 것이고 그 와중에 자신이 가족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다칠 것이다. 혼자 힘으로 제국도 상대할 수 있지만 그러지 않고 지내는 이유는 가족의 안전을 지키고 인간답게 살기 위함이다. 그 두 가지만 충족이 된다면 자신은 아무런 걸림이 없다.

“가겠네.”

“예.”

딜프의 뒤로 에반이 마차에 올랐다.

그를 마중하는 이는 별로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가 처음 모습을 드러내고 한 행보는 너무나 무서운 일들뿐이었다.

관리들을 죽이고 영지를 통합시키고 동맹을 맺는 모습은 모두를 불안에 떨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런고로 그를 좋아하는 이들은 거의 없는 실정이고 그가 왕궁을 향해 간다고 하자 사람들은 분분히 자신의 모습을 숨겼다.

이런 이미지 때문인지 그가 가는 길을 의외로 안전했다.

그를 건드리려는 사람도 없었고 그를 초대하는 사람도 없었다.

귀족들로서는 돈이 많은 안딜 영주를 초대할 만도 하건만 그와 인연을 만들 정도로 간이 큰 사람은 없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그와 엮여서 국왕의 눈 밖에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왕도까지 하루가 남았을 때 일은 벌어졌다.

모두가 잠이 든 시각 라우웰만이 고민을 하며 불침번을 서고 있을 때였다.

“응? 불청객인가?”

아직 모습은 드러내지 않았지만 확연히 느껴졌다.

에반에게 공무에 적합한지에 대한 시험을 당한 후 생긴 일이었다.

마차를 습격하려던 습격자들은 라우웰의 말에 멈칫했지만 이내 빠르게 움직였다.

라우웰이 다른 누군가를 깨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혼자 일어서자 그 틈을 이용하여 먼저 그를 제압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첫 번째 실수였다.

팟.

촤아악.

라우웰의 검에 그대로 몸이 갈라지며 습격자 한 사람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절명했다.

그리고 그대로 라우웰이 그들 속으로 뛰어 들어가자 그는 순한 양 무리 속에 홀로 뛰어든 늑대와 같았다.

촤악.

“막아!”

“컥!”

“아악!”

비명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몇 명이 당황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결심 어린 눈빛을 하고는 라우웰을 피해 천막 안으로 들어가려는 시도를 했다.

촤악.

하지만 그 전에 천막이 걷히면서 아그나르가 두 명의 습격자의 목을 베어버렸다.

“왜 일어났어?”

“지금 두 명이나 놓치고서 그런 말이 나옵니까?”

“그런데 이들은 누구인지 아나?”

“제가 그걸 어찌 알겠습니까?”

“그나저나 이제 바꿔야지. 나만 밖에 있을 수는 없잖아.”

“어허. 저는 영주님의 명령에 따라 영주님 행세 중입니다. 그런데 쉬이 모습을 드러낼 수 없죠.”

“그건 내가 해도 되잖아!”

“영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럼 칼이라도 내보내.”

“칼은 영주님의 호위 중 최측근이라는 설정입니다. 그럼.”

그러면서 아그나르가 천막을 다시 닫았다.

그걸 보면서 라우웰은 고개를 저었다.

“쯧. 대체 이런 일을 왜 벌이시는 건지…….”

사실 에반은 여기 없었다.

그는 처음부터 마차에 타지 않고 홀로 움직였다.

그것이 습격자들의 두 번째 실책이었다.

있지도 않은 에반을 찾아 지옥의 문턱에 발을 내민 것이다.

사실 에반이라면 이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에반은 왕에게 보여줄 이미지를 만들 필요가 있다면서 이렇게 번거롭게 하고 있었다.

* * *

현재 라우웰을 투덜거리게 하고 있는 에반은 이미 왕도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어느 여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름은 마르뜨랑이었다.

‘똑같은 이름을 대놓고 쓰다니…….’

에반이 고개를 저으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점원이 앞에서 그를 맞이하는 가운데 에반이 프런트로 곧장 갔다.

“예약이 되어 있으십니까?”

“사백사호로 되어 있을 것이다.”

그 말에 지배인의 눈이 살짝 이채를 띠었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귀한 손님이셨군요.”

그러면서 열쇠 하나를 꺼내면서 누군가를 불렀다.

“마크.”

“예. 지배인님.”

“이분을 사층의 특실로 모시게.”

“예.”

마크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을 하자 지배인이 에반에게 말했다.

“이 종업원이 데려가 줄 겁니다.”

“알았다.”

에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크를 따라갔다.

마크는 정말로 에반을 사층으로 안내했다. 다만 사층으로 오를 때에는 그곳에 서 있는 덩치가 좋은 남자에게 제지를 받았지만 마크의 말에 바로 길을 비켜주었다.

에반은 설마 하다가 사층까지 올라오자 고개를 갸웃했다.

‘사층에 본거지를 마련한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마크가 에반에게 말했다.

“이곳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러면서 촛대와 함께 옆에 붙어 있는 그림을 건드리니 벽이 스르르 밀려났다.

“혼자 들어가나?”

“저에게는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지.”

그렇게 꽤나 아래로 내려간 에반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막아서는 이들부터 해서 주위의 모든 것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철문 앞에 있는 자를 보며 에반이 물었다.

“당신이 마스터의 후계자인가?”

“그렇습니다.”

“이름은?”

“레드라고 합니다.”

“그래? 아무튼 열어주게.”

“예. 마스터 안딜 자작님께서 들어가십니다.”

“들어오라 해라.”

“예.”

문이 열리고 똑같은 방에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는 엠을 보는 순간 꼭 과거로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에반이 그를 보며 물었다.

“마법사들은 모두 다 이런가?”

“무엇이 말입니까?”

“크리프 왕국에 있던 여관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군.”

“여기는 한 번도 들키지 않았으니까요.”

살짝 고개를 저은 에반이 그에게 물었다.

“아무튼 현재 상황을 좀 알려주면 고맙겠군.”

“별것 없습니다. 에반 님을 시험해보기 위해서 술수를 부린 것 빼고는 그다지 신경을 쓰는 기색이 없습니다.”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예. 꼭 사람이 바뀐 것처럼 아니, 예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행동을 합니다.”

“예전으로 돌아가다니?”

“본래 메소스의 국왕은 꽤나 담대한 자였습니다. 나이가 든 후에는 실정을 많이 했지만 그가 젊을 적 등용한 인재들이 있어서 그 표가 나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그러던 것이 요 며칠 새에 사람이 바뀐 듯이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엠은 에반에게 국왕이 예전처럼 변한 후 한 행동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주었다.

에반은 모든 정보를 듣고는 물었다.

“그렇다면 내게 좋은 점은?”

“휴. 제가 거기까지 알려줘야 합니까?”

“그럼 너희들이 한 일에 대해 내가 말할까?”

마기로 물들었던 마법서 이야기를 꺼내자 엠은 바로 말을 바꾸었다.

“국왕은 이곳에 도착했다는 것만으로 후한 점수를 주실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에반 님을 회유하려 들겠죠.”

“일이 술술 풀리는군.”

“그것이 그렇지 않습니다.”

“어째서?”

“국왕은 예전의 모습을 찾았다지만 그 당시 인재들이었던 현재의 관리들까지 예전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니까요.”

“그럼?”

“아마 에반 님을 쳐내려 할 겁니다.”

“그 정도도 버티지 못하면 현재 상황을 풀어나갈 수조차 없겠지.”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마커 왕국이 심상치 않으니 빠르게 자리를 잡으시기 바랍니다.”

“갑자기 협조적이 되는군.”

“생각해보니 크리프 왕국이 안정이 되어야 저희도 복구를 할 시간이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하긴 그렇군.”

그리고 대화가 잠시 멈추었다.

묘한 침묵 속에서 에반이 헛기침을 했다.

“흠. 흠.”

“왜 그러십니까?”

“내게 무슨 전할 말 같은 것 없나?”

“전할 말이라니요?”

엠이 모르겠다는 어투로 말을 하자 에반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내가 장난을 좋아하지 않는 사실을 잘 알 텐데…….”

그러자 즉각 답이 나왔다.

“제니스 공주님께서 일을 잘 마무리하시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알았다.”

그걸 끝으로 에반이 나가려 하자 엠이 그를 잡았다.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보시지 않는군요.”

“중요한 것?”

“예.”

“더 남아 있었나?”

“현재 크리프 왕국의 상황은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내가 알기로는 많이 안정을 찾았다고 알고 있는데 아닌가?”

“그렇기는 하지만 국왕 폐하께서 큰 결심을 하셨습니다.”

“왕위를 왕세자에게 넘겨주었나?”

“맞습니다. 새해가 되면 대관식이 열릴 겁니다.”

“그것이 큰일인가? 어차피 귀족들은 모두 일왕자의 편에 있을 텐데…….”

“왕권의 교체는 쉬이 보아서는 안 됩니다.”

“어차피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에반이 문을 열고는 나갔다. 그 모습을 보며 엠이 중얼거렸다.

“나무가 크면 바람이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 법입니다.”

에반은 그 소리를 들었지만 무시했다. 그는 그런 진흙탕 속에 발을 뻗고 싶지가 않았다. 지금 하는 일만으로도 짜증을 느끼는 그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 * *

“신 알벤다 알딘 자작이 메소스의 주인이신 국왕 전하를 뵈옵니다.”

“호, 자네가 알딘 자작이라고?”

국왕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에반을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내 알기로는 알딘 자작은 왕도에 도착하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던데…….”

“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있어 자그마한 계책을 내었습니다.”

“그렇군. 아무튼 내 초대에 응해주어서 고맙네.”

“아닙니다. 당연히 와야 할 곳이었습니다.”

국왕은 잠시 에반을 바라보았다.

그의 심경은 복잡했다.

분명 그가 다른 수를 쓴 것은 아니다. 얼마 전의 그였다면 아마 그를 죽이려고 자신이 키운 이들을 보내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을 달리하여 보인 새로운 세상 속에서는 그를 죽이는 것이 아닌 그를 먼저 회유해보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나타난 알딘 자작을 보면서 국왕은 생각을 굳혔다.

“자네에게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다네.”

“경청하겠습니다.”

“자네는 국가를 뭐라 생각하는가?”

그 말에 잠시 뜸을 들이던 에반이 이내 대답했다.

“안정을 느끼는 곳이라 생각합니다.”

“무슨 말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그 나라에 속한 자가 그 안에서 안정을 느끼며 자신의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국가라 생각합니다.”

짧지만 강렬한 대답이었다.

“안정을 느낀다라…….”

안정을 느끼려면 먼저 외세의 침략을 제대로 막아내야 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안으로는 권력을 휘두르는 이들이 약자를 괴롭히게 놔두어서는 안 되고 또한 권력자들도 나름대로 만족도 시켜주어야 한다.

“어려운 일이군.”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저 알딘 자작을 시험해보겠다는 생각에 낸 문제에 국왕 자신이 휘말려든 꼴이었다.

하지만 언제고 생각을 이을 수 없었던 국왕은 알딘 자작을 보며 말했다.

“그럼 사흘 후 있을 임명식에서 보지.”

“알겠습니다.”

“물러가게나.”

에반은 예법에 맞게 인사를 한 후 물러났다.

그리고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국왕이 조용히 옆에 있던 이들에게 물었다.

“어떻게 보았나?”

“꽤나 눈길이 가는 자였습니다.”

“위험한 자로 보입니다.”

처음의 대답은 슈렌츠 백작의 답이었고 두 번째는 궁정장을 맡고 있는 하딩 백작의 답이었다.

그리고 국왕은 두 사람의 대답 모두에 만족했다.

서로가 다른 의견,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조금 지켜보면 알겠지. 자네들이 도와주게나.”

“알겠습니다.”

“전하의 명을 받듭니다.”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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