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장 (52/60)

제3장

에반이 한 달의 유예기간을 준 영주들은 며칠 영주성에 머물더니 하나 둘씩 떠나갔다.

그들은 떠나기 전 안딜 영지의 관리들을 몇 만났고 에반은 그걸 몇몇 사람들에게 들을 수 있었다.

“어떻게 할까?”

에반이 곰곰이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음? 왔나?”

그는 바로 라우웰이었다.

다만 얼굴의 윤곽이 약간 바뀌고 머리색도 바뀌어 그와 아주 친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사실 라우웰이 무작정 찾아올 줄은 몰랐기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어차피 이 영지에 믿을 사람이 몇 명은 있어야 하기에 반갑게 맞이했다. 라우웰은 이곳에 올 때 혼자 온 것이 아니라 칼과 아그나르를 데리고 왔다.

홀로 몰래 빠져나오려는 걸 칼에게 걸렸고 덩달아 아그나르까지 따라온 것이다.

어차피 이 세 명은 자신이 거둔 제자나 마찬가지인 이들이니 상관없다는 생각을 하며 약간 모습을 고쳐주는 걸로 이곳에 머물게 했다.

그 후 시간만 나면 라우웰은 찾아와서 에반이 했던 능력을 조금이나마 나눠달라고 보채는 중이었고 에반은 그런 라우웰을 보면 우선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나 먼저 오르라고 잔소리를 하는 중이었다.

“급한 일이 있습니다.”

“일단 소드 마스터부터 되는 것이 먼저야.”

에반이 라우웰의 말을 듣지도 않고 그렇게 말하자 라우웰이 씩씩거리면서 말했다.

“그것이 아니라 진짜 급한 일입니다.”

“무슨 일?”

그제야 시선을 라우웰에게 맞추었다.

“관리 중 한 명이 몰래 영주성을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이미 다른 마음을 품은 이들을 골라낸 에반이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통해 생각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배신자들을 찾기란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렇게 찾은 배신자들을 세 사람에게 맡겨놓았는데 그 중 라우웰이 눈여겨보던 관리 중 한 명이 나간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

“일단 칼이 그 뒤를 붙었습니다.”

“연락은 되지?”

“예. 이미 켈베스 마도사에게 간이 통신구를 받아놓았습니다.”

간이 통신구로는 길게 이야기를 하지 못하지만 마나가 없는 이들이라도 몇 마디는 보낼 수 있는 아주 유용한 도구였다. 본래 왕실 안에 있는 마탑에 실험 자료로 있는 것을 켈베스가 연구를 통해 제대로 만들어내었고 그건 몇 년 전 있었던 크라우스 가문과 팔로스 영지 간의 영지전에서 아주 요긴하게 쓰였었다.

그 후 좀 더 개량을 거쳐 성능이 좋아졌는데 예전에는 주파수의 범위가 넓어 다른 마법사에게 도청을 당할 위험이 아주 높았던 것을 많이 개선했다.

“그럼 너도 쫓아가봐.”

“영주님은 움직이지 않으실 겁니까?”

그래도 생각은 있는 건지 라우웰은 에반을 영주님이라 칭하고 있었다.

“그래. 이번 일은 너희들에게 맡기겠다. 생각해보니 언제나 내 손을 거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너희의 역량을 시험해보려 하는 거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저는 그쪽 방면으로는 꽤나 전문가라는 사실을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러니 한번 멋진 모습을 보여봐. 혹시 또 아나? 내가 내 능력을 네게 조금이라도 전수할지?”

“당장 가겠습니다.”

라우웰이 집무실을 쏜살같이 나가는 모습을 보며 에반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얼마나 바라는지 방금 행동으로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번 제니스처럼 터득할 수 있게 해줘?’

어차피 공무는 비인부전이 아니다.

누구나 배울 수 있고 어디로든 퍼뜨릴 수 있다.

하지만 인연이 닿지 않는 사람은 공무의 첫걸음도 떼지 못할 것이고 연이 닿았다 하더라도 제니스 공주처럼 반쪽짜리가 될 수도 있었다.

온전히 배울 수 있는 건 에반처럼 선택을 받은 이여야만 했다.

어차피 그 또한 어렴풋이 제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먼 훗날이 될 테고 지금은 공무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절대 에반처럼 온전히 이해를 하는 사람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저렇게 원한다면 한 번쯤 기회를 줘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에반은 하고 있었다.

* * *

영주성이 있는 컨트리 시티에서 하루 정도 더 가면 나오는 마을이 바로 이곳 로렌스 마을이었다. 이곳은 교역으로 활발한 조네 마을과 영주성이 있는 컨트리 시티의 중간에 위치해 있기에 자연히 발전을 할 수밖에 없었고 밤이 되어도 밝은 대낮처럼 환한 곳이었다.

“어윽. 좋다.”

“이제 어디로 갈까?”

“로샤를 보았으니 나타샤도 봐야지. 안 그래?”

“그렇군. 그럼 거기로 가자고.”

탁.

비틀거리며 소리친 장한과 걸음을 빨리하며 가던 와일러가 부딪쳤다.

“어이! 똑바로 안 다녀?”

“죄송합니다. 제가 급해서 그만…….”

영주성에서 관리로 일해온 와일러는 그가 가진 힘을 가지고 남을 괴롭히기 일쑤였고 이렇게 사과하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는 자신을 보호해줄 병사도 없었고 자신의 이름이 통할 상대도 아니었다. 그러니 아니꼽지만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는 것이다.

“어? 그래? 알면 되었어. 가봐.”

와일러가 순순히 사과를 하자 화를 내려던 장한이 머쓱하면서 손짓을 했고 와일러는 고마움의 표시로 살짝 인사를 하고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빠르게 걸으면서 생각했다.

‘이미 얼굴은 외워두었으니 나중에 보자.’

방금 전의 일을 잊을 와일러가 아니었다.

지금이야 조금은 급한 마음에 자신이 물러나지만 일이 잘되고 난 후에는 절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으리라 다짐을 하면서 으슥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탁탁탁.

이상한 것은 이런 으슥한 곳이라면 보여야 할 도둑이나 소매치기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와일러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듯이 아주 거침없이 골목 사이사이를 헤치더니 어느 허름한 간판이 걸려 있는 주점 앞에 섰다.

‘다 왔군.’

와일러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그 주점으로 들어갔다.

끼익.

문이 열리는 소리가 거칠게 났다.

그 소리에 주점에 있던 이들 몇몇이 문 쪽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다시 앞에 있는 술잔을 들거나 상대방에게 말을 걸었다.

와일러는 그런 광경 속에서 아무렇지 않은 듯 구석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더니 종업원을 불렀다.

“어이.”

“예. 갑니다.”

종업원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빠르게 다가왔다.

“무엇을 시키시겠습니까?”

“블루 드래곤으로 두 잔 주게나.”

“그 독한 걸 두 잔이나요? 일행이 있으신가요?”

“없네. 여기에 올 때는 혼자 오는 버릇이 있어서 말이야.”

“그렇다면 안주는 무엇으로 드릴까요?”

“날지 못하는 오리로 만든 구이를 주게나.”

“꽤나 어려운 요리를 시키는군요.”

“내 팁을 줄 테니 좀 해주게나.”

“알겠습니다.”

그러면서 와일러가 은화 몇 개를 꺼내 종업원의 손에 올려놓는 순간 그 손을 잡는 사람이 있었다.

“그만하지.”

흠칫.

갑자기 잡힌 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와일러가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며칠 전 영주의 기사라고 소개를 받았던 그자들 중 한 명이 자신의 앞에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옆에 있다가 덩달아 놀란 종업원이 이내 표정을 추스르며 웃더니 말했다.

“손님. 저에게 들어오는 부수입을 막으시려고요?”

“팁은 가져.”

라우웰이 그러면서 와일러의 잡은 손을 뒤적거리더니 은화에 끼어 있던 종이를 빼내었다.

“그 대신 이것은 내가 가지지.”

팟.

그가 종이를 손에 쥔 순간 종업원이 소매 속에서 단검을 빼더니 그대로 라우웰을 베어왔다.

캉.

“내게 칼을 휘두른 거냐?”

라우웰은 손목에 찬 토시로 단검을 막고는 그대로 종업원의 손을 움켜쥐자 종업원은 비명을 지르며 단검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크윽.”

“난 내게 무기를 휘두르는 자를 그대로 두지 않아.”

그때였다.

피핏.

종업원의 손을 쥐고 있는 라우웰에게 작은 암기들이 쇄도해 들어왔다.

“이건 또 뭐야?”

탁자에 앉아 있던 이들 중 몇몇이 일어서더니 암기를 던진 것이다.

라우웰은 재빨리 종업원을 끌어들여 그의 몸으로 암기를 막고는 땅에 떨어진 단검을 주워서는 그대로 몸을 박차 그들 사이로 돌진했다.

“크악!”

“악!”

움직이지 못할 정도만을 베어내면서 자신을 공격한 이들을 모조리 쓰러지게 한 라우웰이 도망도 가지 못하고 그대로 굳은 와일러를 바라보더니 그곳으로 다시 걸어갔다.

“쯧쯧. 본래 줄을 잘 서야 하는 것인데 이렇게 눈치가 없나?”

“으으으.”

와일러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그저 신음만 흘렸다.

그는 살면서 지금까지 이런 장면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병사들을 동원해서 사람들을 구타한 적은 있어도 사람의 피를 보면서 웃는 장면은 처음 보는 것이다.

쾅!

그때 갑자기 주점 안쪽의 문이 열리면서 일단의 무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라우웰은 그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 자리에 서더니 웃었다.

오랜만에 피를 볼 생각을 하자 즐거운 마음이 절로 일고 있었다.

수십 명의 사람들이 그 안에서 나와 주점을 꽉 채우더니 그 중 가장 평범하게 생긴 자가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넌 누구냐?”

“안딜 영지의 기사이자 감찰관.”

흠칫.

그 말에 살짝 놀란 평범하게 생긴 자가 옆에 있는 이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잡아.”

“예. 마스터.”

우르르르.

한꺼번에 많은 숫자가 라우웰을 포위했지만 라우웰은 무섭지 않았다.

이들로서는 자신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마스터가 아니지만 만약 폭주를 한다면 마스터에 비견할 정도의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러니 이런 자들이 덤빈다고 무섭지 않은 것이다.

“이얍!”

조무래기 중 한 명이 라우웰을 뒤에서 기습했다.

퍼걱.

그의 턱뼈가 나가며 기절하는 동시에 양쪽에서 다시 검이 찔러 들어왔고 라우웰은 살짝 몸을 비틀면서 자신을 공격해온 두 명의 검을 든 손을 잡고는 양쪽으로 교차했다.

푹. 푹.

“커헉!”

“큭!”

두 사람이 피를 흘리며 쓰러질 때 이번에는 다섯 명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달려듦과 동시에 그대로 바닥에 몸을 뉘었다.

그 후부터는 무인지경이었다.

자신의 기세에 주춤주춤하는 조무래기들을 처리하는 건 라우웰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모두가 바닥에 기고 있을 때 몰래 빠져나가려는 자가 있었다.

바로 그들에게 마스터라 불리는 자였다.

턱.

슬그머니 쪽문을 잡고 있을 때 그 옆으로 발 하나가 살짝 열린 문을 다시 닫았다.

그는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겨우 돌려 라우웰을 쳐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리 와.”

“예. 예.”

“자, 말해봐.”

“예?”

“저 기절한 새끼가 대체 너희에게 뭘 팔려고 했는지 이야기해보라고.”

어느새 와일러는 기절해 있었다. 라우웰의 기세와 주위로 흩뿌려지는 피로 인해 도저히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정보 길드냐?”

“아, 아닙니다.”

“그럼?”

“그냥 도둑 길드입니다.”

“도둑 길드?”

“예.”

“저자와의 관계는?”

그는 라우웰의 말에 제대로 대답해야만 살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는지 모두 불었다.

“저희의 뒤를 봐주던 관리였습니다.”

“도둑 길드가 할 것이 뭐가 있다고?”

“오가는 상품이 꽤 많은지라 거기에서 몇 개가 빠진다고 알 수 있는 사람은 몇이 없습니다.”

“그 중 한 명이 저자이고 말이지.”

“예.”

“흠. 그럼 이번에도 그 일이었냐?”

“예? 예.”

라우웰은 그의 대답에 잠시 망설였다.

이제 보니 그냥 조무래기일 뿐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러다가 그에게 물었다.

“저자 한 명만 상대하나?”

“예. 그렇습니다.”

“그럼 다른 정보는 없나?”

“예?”

“난 저놈이 그래도 중요한 일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해서 이렇게 몸소 온 건데 지금 보니 별것 없는 놈이었어. 그래서 그 화풀이를 너희한테 할 수도 있다는 거야.”

“그, 그것이…….”

도둑 길드의 마스터는 계속 머리를 굴리고 굴렸다.

무언가 내놓는다면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조금이나마 생긴 것이다.

“왜? 없어?”

“아니요. 있습니다. 있고말고요.”

그는 근래에 들었던 모든 소식을 라우웰에게 쏟아 부었다.

거짓과 진실이 섞인 정보였지만 현재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 * *

“영주님.”

“벌써 왔나?”

“그놈은 그저 약간 재물을 빼돌리는 부패한 관리였을 뿐입니다.”

“처리는?”

“감옥에 가두어 놓았지만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조심해. 괜히 찔리는 놈들이 숨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제가 누구입니까? 이런 일은 수백 번 겪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정보도 얻어왔습니다.”

“다른 정보?”

“예.”

라우웰은 그간 있었던 일을 간략히 보고를 했다. 보고를 다 들은 에반이 물었다.

“그래서? 그자가 어떤 정보를 토해내었지?”

“메소스 왕국의 고위 귀족 끄나풀들이 이 영지의 관리 몇 명과 접촉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위 귀족?”

“예. 백작 이상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한번 조사해봐.”

“이미 칼과 아그나르에게 시킨 후입니다.”

칼과 라우웰의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에반이 관련된 일이라면 칼은 언제나 질문도 하지 않고 일단 행동을 하고 보았다.

그래서 아무리 라우웰이 시킨 일이라고 하더라도 두말 않고 그의 말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 수고해라.”

하지만 라우웰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른 용무가 있나?”

“잊어버리셨습니까?”

“뭘?”

“제게 영주님의 능력을 알려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아.”

“이틀 전 이야기인데 오랜만에 들었다는 반응은 좀 짜증이 납니다.”

라우웰은 예나 지금이나 에반을 대하는 태도가 똑같았다. 잠시 그에 미소를 짓던 에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다.”

“음? 뭘 말입니까?”

“알려주지.”

“정말입니까?”

“속고만 살았나?”

“그런 경험 많이 당했죠.”

“요 몇 년간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믿어.”

“예.”

그러면서 에반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라우웰은 주춤했다. 에반의 태도에 놀란 것이다.

에반은 라우웰이 놀라건 말건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느껴봐라.”

갑자기 세상이 어두워졌다.

위와 아래의 구분이 사라지고 자신이 느껴지지 않았다.

찰나이나 수천 년의 시간이 지나간 것 같았다.

‘뭐지?’

그리고 휩쓸렸다.

자신을 찾지 못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방금 전까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대로…….’

그런 생각이 상념을 끊으려는 찰나 무언가가 눈앞으로 지나갔다.

처음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하지만 호기심이 남아 있었는지 그걸 보았고 그것이 어떤 영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영상에는 소년과 동물 한 마리가 등장했다.

소년은 아무렇지 않게 동물의 가슴을 갈라 그 속을 헤집었다. 그리고 그 동물이 언제쯤 죽나 시간을 재었다.

그러는 사이 그 소년의 표정은 희열로 가득 차 있었다.

‘이건?’

어렴풋이 기억난다.

그리고 그 당시 느꼈던 희열의 감정도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불쾌감으로 물들었다.

자신은 어떻게 해서든 그 상황을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혹시라도 마을 사람들을 죽일까 봐 자신의 집을 떠나온 것이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점점 그는 살인을 할 수밖에 없는 길로 들어섰고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아니야. 내가 원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니야.’

잊어버린 그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펼쳐졌고 그 상황 속에 이끌려 가는 그를 보면서 절규했다. 그리고 마지막 에반을 보는 순간 그는 눈을 떴다.

“헉. 헉.”

“어떠했는가?”

“…….”

하지만 라우웰은 말이 없었다.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탓이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일시간 생각이 안 난 탓도 있었다.

잠시 후 라우웰은 기억을 온전히 찾고는 고개를 들었다.

“이, 이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가진 능력의 일부분이다.”

“제 능력이요?”

“그래.”

에반은 그가 본 것을 함께 느꼈다.

본의 아니게 그의 과거를 보게 된 에반이었지만 그가 어떠한 마음을 가슴속에 품고 있는지 알고도 아무렇지 않았다. 어차피 라우웰의 지우고 싶고 또한 벗어나고픈 운명 같은 건 이 대륙의 누군가라도 겪고 있을 법한 이야기다. 자신에게 굉장히 큰일이겠지만 대륙을 놓고 또는 차원을 놓고 보면 별것 아닌 일이다.

어차피 인간은 쾌감을 위해서 먹고 잔다. 라우웰은 조금은 특이한 쪽으로 흥분을 하는 것이었고 인간의 굴레에 묶여 있는 자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의 능력을 어렴풋이 보았다.

“전 보지 못했습니다.”

지나가는 과거로 인해 라우웰은 제대로 집중을 하지 못했고 능력이 무언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내가 보니 넌 제니스 공주와도 약간 달라. 그녀는 기본적으로 공무의 능력을 얻었으면서도 특별하게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도 가져갔지. 너 또한 그런 능력이 있고 또한 공무를 배울 자질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제 능력이 뭡니까?”

“숙제야.”

“예?”

“네가 본 것을 한 번 곱씹어 봐라. 그리고 발견해내라.”

“전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외면하면 외면할수록 넌 나에게 배울 수 없게 되는 거다. 나가봐.”

그 말에 놀란 라우웰이 무언가 물어보려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에반은 닫힌 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네가 네 자신과 당당히 마주 서는 날 너는 내게 배울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 * *

“부르셨습니까?”

“그래.”

“오랜만에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가?”

그레이의 가시 있는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긴 에반이 그에게 두꺼운 서류를 넘겼다.

“자.”

“이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조사할 자료이다.”

“조사를 하다니요?”

“이 영주성의 집사로서 사람 관리를 하라는 뜻이다.”

그 말에 그레이는 무심코 몇 장을 넘기다가 그대로 몸을 굳혔다.

“뭐? 이상한 거라도 쓰여 있나?”

“아, 아닙니다.”

“할 수 있겠지?”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쉴 새 없이 떨리고 있었다.

“한번 해봐.”

“예.”

그가 나가고 어둠 속에서 칼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에반 님.”

“영주님이라고 불러.”

“죄송합니다. 영주님.”

“뭘 물어보려고?”

“저것을 그에게 넘겨도 되겠습니까?”

저건 라우웰과 아그나르 그리고 칼이 한 달에 걸쳐서 조사를 한 자료였다.

거기에는 메소스 왕국의 백작이나 후작과 연이 닿아 있는 이들의 이름과 그들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에 대해 쓰여 있었다.

바우어 후작은 메소스의 귀족들과는 절대 사적으로 이어지지 말라고 했으니 저들은 크리프 왕국의 충성심을 버렸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어차피 저 조사가 완전하게 믿을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도 대부분은 맞는 사실일 겁니다.”

“대부분이지 완전한 건 아니지.”

“그렇다고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다니요.”

“그가 내통했는지는 불분명하다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석연치 않은 구석이 굉장히 많은 자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니 맡기는 거야.”

“예?”

“이미 너희는 모든 조사를 끝냈다. 아닌가?”

“맞습니다.”

“만약 조사도 제대로 하기 전에 그들을 건드렸다면 분명 먼저 숨겼을 테지. 하지만 이미 조사는 모두 끝났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저항을 하느냐 용서를 비느냐만 남아 있다는 거다.”

“그렇군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에반이 느긋한 마음으로 있을 때 지금 그레이는 온몸에 식은땀이 나고 있었다.

조금 살펴보았지만 분명 자신이 아는 내역도 몇 개 있었고 그건 여기에 쓰여 있는 것이 사실이라는 말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공교롭게도 오늘이 안딜 영지의 정례 회의가 있는 날이기에 부득이하게 오지 못할 관리들 빼고는 모두가 모여 있었다.

어서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지만 여기에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레이가 자신에게 물어온 관리를 보며 말했다.

“어서 회의실로 들어갑시다.”

그 관리는 그레이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고 재빨리 그를 따라갔다.

그레이가 회의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대부분이 와 있었다.

‘스물두 명.’

안딜 영지를 실질적으로 이끌어가는 이들은 스물일곱이다. 즉, 다섯 명만 빼고는 모두가 모인 것이다.

“아직 오지 않으신 분들은 참가를 못하는 겁니까?”

“예. 연락이 되지 않는 와일러 물류관을 빼고는 모두 모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회의를 시작하지요.”

그러면서 그레이가 눈짓을 하자 회의실 문이 굳게 닫혔다.

그들은 그레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이미 느끼고 있었다. 노회한 상인들을 상대하다 보니 눈치가 빨라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이걸 돌려 보시오.”

그레이가 서류를 첫 자리에 앉아 있는 관리에게 넘겼고 관리는 그걸 읽다가 눈을 부릅뜨고는 그레이를 바라보았다.

“일단 모두 읽고 이야기를 나눕시다.”

“아, 알겠습니다.”

이미 그 관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궁금증을 간직한 채 자신들 차례만 기다리던 다른 관리들은 그걸 읽자마자 대부분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중 몇 명은 서류를 읽어보며 비웃는 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다른 이들이 부당한 이익을 취할 때 말리던 이들이었다.

그레이는 그들의 표정을 보고는 아차 싶었다.

너무나 경황이 없어 여기에서 솎아낼 사람까지 모두 참석을 시켰다.

그레이는 머리를 굴리며 그들에게 말했다.

“어차피 우리는 함께 가야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부끄러움 없이 지내왔는데 왜 운명공동체가 되어야 하는지 이해를 할 수 없군요.”

그는 잡여관이었다. 돈이 나올 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차피 그 정도는 받는 돈이나 양심을 팔아버릴 정도는 아니었기에 받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그가 다른 담당이었다면 어쩌면 여기에서 창백한 안색의 대부분의 관리들과 같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럼 영주님이 아무 잘못도 없는 저희에게까지 죄를 물으시겠습니까?”

“분명 어떻게 해서든 그럴 겁니다.”

“이유는요?”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이가 나섰다.

그는 통행관이었지만 아주 청렴하였다. 사실 통행관이 마음만 먹는다면 가장 많은 뇌물을 받을 수 있는 직위였다. 그런데도 그는 아주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여 그의 아래 있는 이들도 어쩔 수 없이 깨끗할 수밖에 없었다. 아주 조그마한 것이라도 받은 것이 그의 귀에 들어간다면 일벌백계로 다스린 후 바로 영지에서 쫓아냈기 때문이다.

“딜프 님은 잘 모르겠지만 제가 봐온 영주님은 개혁을 원하십니다.”

“개혁?”

“그렇습니다. 영주님은 자신의 뜻에 맞는 사람들을 관리로 채워 넣으려 합니다. 저희는 이제 퇴물이죠.”

그 말에 딜프가 잠시 그레이를 바라보았다.

그레이는 그의 눈빛에 움찔했다.

딜프가 물었다.

“저 보고서는 누구에게 받은 겁니까?”

“영주님께 받았습니다.”

“그걸 받고 여기까지 바로 온 겁니까?”

“예.”

“흠. 영주님의 집무실에서 회의실까지 걸어오는 시간이 짧은 터인데도 꽤나 머리를 잘 굴렸습니다.”

“무, 무슨 소리입니까? 제가 거짓으로 꾸민다 생각하시는 겁니까?”

“그럼 아니라고 하실 텐가요?”

“예. 아닙니다.”

“하하하. 그레이 님.”

“예.”

“제가 누군지 잊으셨습니까?”

“무슨…….”

“제가 통행관이 된 것은 전 영주님 지시였습니다. 그레이님 지시가 아니라요.”

“으음…….”

그레이는 움찔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은 모르지만 이 영지 곳곳에 크리프 왕국에서 온 자들이 있음을 깨달았다. 아마 딜프도 그 중 하나일 것이고 에반이 왜 왔는지도 이미 알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딜프가 일어섰다.

“이제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면 헛짓 하지 마시고 자중해주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영주성이 무너질 정도로 영주님이 화를 내실지도 모릅니다.”

“헉!”

그레이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 또한 에반이 그저 손을 댄 것만으로 아트베라 관문을 무너뜨린 영상을 보았었기 때문이다. 아마 딜프는 그걸 돌려 말하는 바일 것이고 그걸 알아들은 그레이는 온몸이 떨려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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