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에반은 일단의 사람들과 함께 모릴 산맥을 넘었다.
북대륙과 중대륙, 남대륙을 가르는 건 그 경계선에 위치한 이 모릴 산맥 때문이었다. 그 산맥이 천연의 방어 역할을 해온 터라 나라가 안정이 되지 않으면 쉬이 산맥을 넘어 원정을 갈 생각을 못하는 것이다.
바스트 제국이 북대륙을 대부분 평정할 수 있었던 것도 바스트 제국의 힘이 정말 강해 그 아래 위치한 왕국들이 북으로 진출하는 바스트 제국의 뒤를 감히 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세월이 천 년을 이어 내려오다가 프레스톤 제국의 등장으로 바스트 제국의 국력이 많이 약해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럼에도 왕국들은 제국에 큰소리를 내지 못했다. 오랜 세월 동안 압박을 받다 보니 바스트 제국을 건들일 생각도 못하는 것이다.
대신 남대륙은 지금까지 제국이라고 할 수 있는 나라가 세워지지 않아 중대륙의 왕국들은 호시탐탐 남대륙의 땅을 원했다. 하지만 남대륙은 언제나 전란이 일어나는 터라 그들이 뭉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기에 그저 한 패자가 남대륙을 차지하지 못하게 작업을 하는 데에만 힘을 쏟고 있는 처지였다.
이제 후작이 된 바우어 후작이 그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남대륙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관계로 에반을 보낸 것이다.
이틀을 꼬박 새우고 모릴 산맥을 넘은 에반 일행은 꽤나 큰 마을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크군.”
“중대륙에 있는 왕국과의 교역으로 발전을 한 안딜 영지의 한 마을입니다.”
“안딜 영지라면?”
바우어 후작에게 들은 바가 있었다.
“예. 이제 백작님이 영주로 있게 될 영지입니다.”
“정말 문제가 없나?”
“안딜 영지는 메소스 왕국에서도 정말 부유한 영지입니다. 중대륙의 왕국과의 교역으로 많은 부를 이루었지요. 그래서 많은 암살과 압박에 시달려 이곳 영주 일가는 그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또한 드러낸다고 해도 자신의 얼굴을 감추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영주를 나타내는 인장만 있다면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을 겁니다.”
꽤나 그럴듯한 이유였다. 에반이 다시 한 번 마을을 돌아보았다.
절대 하루 이틀 만에 생긴 마을이 아니었다.
“언제부터 여기가 안딜 영지였지?”
“백여 년은 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영지는 바우어 후작 이전부터 크리프 왕국이 작업을 해놓은 영지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들키지 않고 영지가 유지될 수 있나?”
영주는 계속해서 모습을 감추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번쯤은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또한 왕을 만나보기도 해야 한다.
“사실 남대륙의 왕국들은 저희와 조금 다른 사회입니다.”
“다른 사회라니?”
어느새 마련된 마차에 올라타며 에반이 물었다.
남대륙의 왕국들 대부분은 왕과 영주의 관계가 충성으로 맺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럼 무슨 관계지?”
“왕과 영주의 관계는 계약 관계로 묶여 있습니다. 가장 힘이 강한 왕이 각 지역의 패자들을 아우르면서 나라가 만들어져 있는 형태입니다.”
“동맹이라는 소리인가?”
“거기에서 조금 더 발전이 된 것입니다. 각 영지들을 따로따로 놓고 보면 그렇게 큰 힘이 아닙니다. 다른 지역의 힘 있는 자가 영지를 쳐들어온다면 피해를 입게 되겠지요. 그걸 왕이 막아주는 겁니다. 또한 영지들의 분쟁을 조율해주기도 하지요. 대신 왕은 영주에게 그 보답으로 재물과 약간의 병력을 얻습니다.”
그 말을 듣고는 에반이 고개를 갸웃했다.
“듣고 보니 우리 왕국과 다른 점이 없는 것 같은데?”
“예. 비슷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충성심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만약 왕의 힘이 조금이라도 약해지면 영주들이 모여서 왕을 갈아치울 수도 있습니다. 또한 약해진 왕이 못미더워 다른 나라와 인접한 영지들은 그 다른 나라로 편입을 하기도 합니다.”
“음…….”
에반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했다. 그리고 어째서 남대륙이 통일이 되지 않는지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영주가 보이지 않아도 된다는 건가?”
“예. 영주가 메소스 왕국의 왕도로 갈 이유가 없습니다. 재물만 많이 보내면 왕은 언제도 이곳을 지켜주니 말입니다.”
“그래도 영지전이 있을 수 있지 않나?”
“고맙게도 그 전에 왕이 영지를 보호해 줍니다. 왕이 욕심을 부려서 안딜 영지를 다른 영지가 삼키게 하면 그 다른 영지가 안딜 영주처럼 많은 재물을 바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 왕은 현재의 안딜 영지를 보호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많이 바치나 보군.”
“여기에서 나오는 수익의 반절을 왕에게 바치고 있습니다.”
“그렇게나 많이?”
“어차피 여기는 철저하게 저희 왕국과 상관이 없는 곳입니다. 그러니 의심을 살 짓을 하지 않습니다. 안딜 영지에서 나오는 돈은 대부분 다시 왕과 영지민들에게 돌아갑니다. 그러니 영지민들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영주를 꽤나 칭송하지요.”
“그렇군. 그럼 내가 할 일은 뭐지?”
이제 어느 정도 돌아가는 사태를 알았으니 임무를 떠올릴 때였다.
“거기에 관해서는 제가 들은 명령이 없습니다.”
“그럼 내 마음대로 하라는 말인가?”
“아마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 말이 그리 반갑지는 않았다.
바우어 후작은 에반에게 현재 상황을 파악하고 남대륙이 통일되는 것을 방해하고 혼란스럽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런데 대체 무슨 수로 그렇게 할 수 있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생각을 해봐야겠지.’
그러면서 에반은 몸을 묻었다.
마차는 영주성을 향해 계속해서 달려 나가고 있었다.
* * *
웅성웅성.
“무슨 일입니까?”
아침 일찍 상점의 문을 열려던 피터는 갑자기 광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자 그 중 안면이 있는 상인에게 물었다.
“피터 아닌가? 어디 갔다 왔나?”
“예. 사촌이 결혼을 해서 옆 마을에 좀 갔다 왔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다름이 아니라 오늘 영주님께서 모습을 드러내신다네.”
“예? 그게 무슨?”
“몇 달 전에 전 영주님이 돌아가신 건 알고 있지?”
“예.”
“그 후 소영주님이 영주직을 맡으셨나 보더라고. 그런데 이번 영주님은 전 영주님들과는 조금 다르신 것 같아.”
“뭐가 다릅니까?”
“글쎄. 이제는 전면에 나서시겠다고 하네.”
“정말요?”
“그럼.”
안딜 영지의 영지민들 중 역대 영주를 본 사람은 손에 꼽는다.
그것도 이제는 늙어 기억이 가물가물한 노인들뿐이었다. 요 몇십 년 동안은 그 정도가 심해 아예 영주가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영지의 관리들이 일을 맡아 했었는데 갑자기 영주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공문이 사방에 붙자 그에 호기심이 인 사람들이 이렇게 나와 있는 것이다.
“어? 누군가 나온다!”
“어디? 어디?”
사람들이 목을 길게 빼며 영주성을 보는 가운데 성의 문이 열리면서 한 대의 마차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광장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마을 자체가 계획적으로 지어져 영주성의 정문에서 쭉 달려가면 광장 쪽으로 이어져 있고 가도는 다시 반원의 형태로 도시를 관통했다.
그 길을 따라 마차가 달려오는 것이다.
“워. 워.”
마부가 마차를 멈추고 마차의 문이 열렸다.
모두가 주목을 하는 가운데 아직은 젊어 보이는 한 사람이 내렸다.
그리고 그 뒤를 관리들이 따르니 사람들은 그제야 그가 이번에 영주가 된 알벤다 알딘 자작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긴 갈색 머리에 파란 눈동자는 여기에 모여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같기에 조금 평범해 보였지만 그가 광장 중앙에 마련된 단상에 올라가 자신들을 노려보자 절대 평범치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반갑다. 이번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안딜 영지를 맡게 된 알벤다 알딘이라 한다.”
짝짝짝.
누군가가 박수를 치자 사람들이 덩달아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박수 소리가 점차 잦아지고 알벤다는 다시 한 번 사람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긴장을 하며 쳐다보았다.
알벤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내 모습을 잘 기억해라. 이제는 자주 만날 모습이니 말이다.”
그 말이 끝이었다.
알벤다가 그렇게 말하고는 아래로 내려가자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래도 무언가 많은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간단하게 두 마디를 하고서 내려가니 모여 있는 사람들로서는 허탈한 것이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내려가는 알벤다를 보면서 웅성거릴 때 옆에 있던 중년인이 물었다.
“이걸로 되겠습니까? 백작님?”
“여기서는 자작이고 영주이다. 집사.”
“실수했습니다. 영주님.”
바로 에반과 에반의 길안내를 맡았던 중년인이었다. 그는 이곳 안딜 영지에서 집사를 맡고 있기도 했다.
“아무튼 누군가가 반응을 하겠지. 그들의 대처를 보고 다음으로 나가기로 하지.”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현재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지?”
“메소스 왕국은 아직까지 전화에 휩싸이지 않았지만 남대륙 남부는 이미 마커 왕국에 모조리 먹혀버린 상태입니다.”
“그 정도로 강하나?”
“그것보다는 시세를 읽고 마커 왕국에 몸을 의탁하는 영주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럼 실력이 없는 건가?”
“그건 아닌 듯합니다. 다만 그들이 쓰는 이상한 능력 때문에 정확한 실력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이상한 능력?”
“예. 한순간 병사들을 치료하거나 불바다를 만들거나 얼음으로 만드는 등 이상한 능력을 쓰지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왜 이야기하지 않았나?”
“물어보시지 않았지 않습니까?”
그 말에 에반이 고개를 저었다.
그레이라 불리는 이 사내는 자신이 묻는 것에만 대답을 하고 있었다.
그건 어쩔 수 없이 대답을 하는 거지 호의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오랜 시간 이곳의 집사로 있으면서 권력의 물을 보았나 보군.’
지금 보니 왕국에서 입지를 늘리는 것보다 안쪽을 제대로 살피는 것이 우선일 듯했다. 만약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이들 중 한 명이라도 다른 마음을 먹었다가는 이 영지가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도 있었다.
“지금 남대륙의 상황을 제대로 작성하여 가지고 와주게.”
“분부에 따르겠습니다.”
에반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차에 올랐다.
그 뒤를 그레이는 관리들과 함께 따랐다.
* * *
에반이 모습을 드러내고 며칠이 지나자 바로 반응이 왔다.
바로 옆 영지에서 에반을 초대한 것이다.
하지만 에반은 아직 영지의 일에 몰두하기 위함이라는 명분으로 그의 초대를 거절했다. 다만 영지 일을 처리하는 와중에 잠깐이나마 시간을 내어 안딜 영지에서라면 만들 수 있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똑똑.
“무슨 일인가?”
“손님이 오셨습니다.”
에반은 방 밖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파악하고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들어오라고 해.”
“예.”
그레이가 문을 열고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왔다.
겉모습만 보자면 그저 농사일이나 하며 사는 노인 같았지만 에반은 그를 쫓아내지 않고 그레이에게 말했다.
“나가보게나.”
“예?”
“무슨 문제가 있나?”
“아, 아닙니다.”
그레이가 고개를 젓고 나가고 한참 후 에반이 말했다.
“자네가 여기는 무슨 일인가?”
“그것이 가주님께서 저를 보내셨습니다.”
“켈베스 자네를 왜?”
지금 에반의 앞에 있는 늙은이는 켈베스가 변장을 한 모습이었다.
“그것이 에반 님의 부탁이 있어서…….”
“내가?”
잠시 생각을 하던 에반은 며칠 전 바우어 후작에게 마법사 한 명이 필요하단 이야기를 전했던 것이 생각이 났다.
“어떻게 해서 네가 왔는지는 모르겠군.”
“아닙니다. 에반 님이 부르시면 즉시 달려가야죠.”
그는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이곳에 오기가 죽어도 싫었다.
켈베스는 의도적으로 에반을 피해 다녔는데 그건 아직도 에반을 마족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 폰다 왕국에 나타난 마족도 이놈이 죽인 것이 틀림없어.’
켈베스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에반은 자신이 유희를 하고 있는 도중에 나온 마족을 마음이 들지 않아 에반이 쓰러뜨렸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대륙에서 최고의 명성을 떨치고 있는 루네르가 에반에게 목매는 것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다만 에반도 분명 마족 같은데 신전 사람들을 어떻게 속이는지에 대해서 궁금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에반과는 마주치기 싫었는데 쥬드가 에반에게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자 잠시 고민을 하던 켈베스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가지 않았다가 나중에 그 사실을 에반이 알고 자신에게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잘 왔다. 그나저나 오면서 무슨 이야기 못 들었나?”
“바우어 후작과의 통신을 위해서 불렀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
“그래.”
마도사가 되면 어느 정도 통신에 인해 기밀을 요할 수 있었다.
7서클급의 대마도사라면 알아보겠지만 남대륙에는 동부에 마탑이 하나 있을 뿐이었고 거기에서 탑주를 제외한 모든 마법사들은 6서클이었다. 켈베스가 하는 통신을 잡아챌 수 없는 것이다.
아마 후터스 후작도 그걸 알고 쥬드에게 요청을 한 듯싶었다.
“한번 연결해볼 수 있나?”
“예.”
에반의 말에 켈베스가 통신구를 꺼내 마력을 집어넣자 잠시 후 통신구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대는?
켈베스는 바우어 후작의 모습이 갑자기 나타나자 살짝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켈베스 마법사입니다.”
-아, 켈베스 마도사였군. 벌써 그곳에 간 것이오?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켈베스가 옆으로 비키자 에반이 구슬 안의 바우어 후작을 보았다.
“에반 크라우스입니다.”
-음. 얼굴을 밝혔다고 들었소. 상황은 괜찮소?
“그렇습니다. 모두들 저를 영주로 믿는 눈치입니다.”
-그렇다면 잘되었군. 그런데 왜 통신 마법사를 붙여달라 했소?
“말을 하지 않은 게 있더군요.”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소?
“예. 이 영주성 안의 후작 각하의 수하들이 걸립니다.”
-대체 무슨 일이오?
“그들이 제게 무언가 불만을 가진 듯 보입니다.”
-그럴 리가…… 그들은 충성스러운 사람들이오.
“이곳에서 호의호식을 하면서 배부르게 살아온 자들이 있습니다.”
-음.
에반의 말을 듣고 바우어 후작은 무슨 말인지 알아차렸다.
잠시 고민을 하던 그가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만일 계획에 방해가 된다면 그 누가 되었든 베겠습니다. 괜찮습니까?”
그 말에 멈칫하던 바우어 후작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자신의 사람을 보호하려다가 자칫 이번 계획을 완전히 망칠 수가 있었다.
-그렇게 하시오.
“그리고 이제 중요한 이야기는 후작 각하만을 통해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문제 될 것이 없소. 어차피 이 통신구는 내가 가지고 내 마나로 움직이는 거니까.
본래 오러를 쓰는 마나와 마법사의 마나는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마법사들은 통신구를 쓸 때 오러를 발현하는 기사들 또한 스스로 구동을 하게 만들었다.
다만 마나가 급격히 빠져나가 효율이 좋지 않은데 바우어 후작이 소드 마스터이기 때문에 그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면으로 올리긴 하겠지만 중요한 이야기는 이 통신구를 통해 하겠습니다.”
-알았소.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통신을 끊었다.
바우어 후작이라도 오랜 통신은 힘든 것이었다.
에반은 그걸 보면서 켈베스를 불렀다.
“켈베스.”
“예. 에반 님.”
“내가 혼자서 통신을 할 수 있나?”
“지금 이 통신구로는 불가능합니다. 바우어 후작이 가진 통신구와 주파수가 맞아야 하는데 저는 그 주파수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켈베스 네가 들고 있는 통신구는 연결을 했지 않나?”
“이건 바우어 후작이 건네준 겁니다. 아마 바우어 후작이 주지 않는 이상은 통신구를 혼자 사용하지는 못할 겁니다.”
“그런 쥬드와 대화할 수 있는 통신구는?”
“음. 재료만 있다면 만들 수 있습니다.”
켈베스는 마나석을 이용하여 마우스의 요원들도 짧게 사용할 수 있는 통신구를 만든 적도 있다. 그러니 에반 전용의 통신구를 만들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럼 부탁하마.”
“알겠습니다.”
켈베스가 고개를 숙였다.
* * *
“어서들 오십시오.”
“반겨주어서 고맙습니다.”
“듣던 대로 훤칠하시군요.”
주위의 영주들이 에반을 찾아왔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들의 초대는 거절했지만 자신이 초대를 한다는 뉘앙스를 풍겨 몇몇 영주들과 함께 왔는데 환대를 받으니 속으로 겨우 한숨을 돌리는 중이었다.
이미 매년 초대를 했었지만 그 당시에는 갈 수 없다는 거절의 문구만 쓰여 있어 안면을 트기가 정말로 어려웠다.
네 명의 영주들을 응접실로 안내한 에반은 그곳에 앉아 그들을 둘러보았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사실 오래전부터 안딜 영주와는 인연을 맺고 싶었었습니다. 그래서 초대를 한다는 말에 냉큼 달려온 것이지요.”
“허허.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태도는 아주 조심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모두 안딜 영주에게 돈을 빌린 처지였다.
빠르게 교역을 시작하며 돈을 긁어모은 안딜 영지와는 달리 그에 인접한 영지들은 계속 낙후되었다.
산맥에 사는 몬스터들도 문제였고 교역소를 만들어도 번번이 실패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손실을 제대로 메울 수 없을 때 안딜 영주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돈을 빌려주었고 매년마다 원금의 이자를 갚는 데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에반에게 잘 보여야만 했다.
그 전에는 관리들에게 굽실거렸지만 이제 에반이 나타났으니 직접 그에게 말을 하면 되는 것이다.
에반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렇다면 다른 이야기는 할 것이 없습니까?”
영주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어떻게 말을 꺼내긴 해야 하는데 체면 때문에 도저히 말이 입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뭐, 그러시다면 편히 쉬다 가시지요.”
에반이 자리에 일어나면서 그렇게 말하자 어쩔 수 없이 그 중 가장 큰 영지를 가지고 있는 영주가 다급히 말을 꺼냈다.
“잠시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까?”
“무슨 이야기입니까?”
“채무에 관한 내용입니다.”
“채무요? 아, 제 아버님께서 빌려주셨던 돈을 말씀하시는군요.”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사실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것이…….”
“흠.”
에반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그에게 말했다.
“어렵게 이야기를 꺼낸 것 같은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해보시죠.”
레그닐 영주는 안딜 영주를 보면서 사람을 대하는 것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대체 이런 인물이 지금까지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고?’
몇 마디 말을 나눠본 건 아니지만 그의 태도, 말투 하나하나가 여유가 넘쳐흐르고 위엄이 있었다. 그건 한두 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고 그런 인물이라면 절대 모습을 숨기고 있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하지만 에반의 재촉에 그는 상념에서 벗어나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안딜 영주님이 빌려주신 돈을 갚을 능력이 조금 모자랍니다.”
“제가 알기로는 원금이 꽤 많지만 저렴한 이자만을 갚도록 했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맞습니다. 하지만 몇 번 실패가 있은 후 점점 저를 비롯한 여기 있는 영주들의 영지들이 생산력이 떨어지고 낙후되고 있습니다. 원금도 원금이지만 이제는 이자를 갚는 것도 벅찹니다.”
“음…….”
그 말에 에반이 신음을 흘리며 몸을 바로 하며 앉았다.
그에 영주들이 긴장을 하면서 에반을 바라보며 가슴을 졸였다
잠시 후 눈을 뜬 에반이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원하는 것이 저희에게는 없습니다. 안딜 영주의 뜻을 보고 싶을 뿐입니다.”
“그래요?”
에반이 살짝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하는 일에 동참을 해주시겠습니까?”
“하는 일이라니요?”
레그닐 영주가 물었지만 에반은 그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했다.
“남부의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예?”
뜬금없는 질문에 요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영주들이 어리둥절했다.
“지금 남부의 마커 왕국이 세를 불리고 있다지요.”
“아.”
그 말에 레그닐의 머리가 핑핑 돌아갔다. 하지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남대륙의 최북부이다. 그리고 남대륙의 남부를 평정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여기까지 오려면 꽤나 많은 시간이 흐를 것이다.
그래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혹시 그들에게 투신하려는 생각입니까?”
여기에 모인 돈이라면 마커 왕국이 관심을 가질 만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러나 에반은 고개를 저었다.
“어찌 다른 왕국에 투신을 하겠습니까?”
“그럼?”
“마커 왕국은 몇 명의 영웅들에 의해서 현재의 상황을 만들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재력도 받쳐준다지요?”
“그렇습니다.”
“저희 영지도 그에 꿀리지 않을 이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돈도 좀 모아놓았죠. 그러고 보니 마커 왕국의 현재 왕도 영주 출신이라지요.”
“음.”
“끙.”
에반의 뜻을 알아차린 영주들이 말을 꺼내지 못하고 앓는 신음 소리를 내었다.
그들이 에반을 바라보았다.
에반이 미소를 보여주며 물었다.
“어떻습니까?”
“생각을 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것도 좋지요. 하지만 그리 많은 시간은 주지 못합니다. 한 달 정도면 괜찮겠죠?”
“예.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다른 분들은요?”
“저도 좋습니다.”
“저도요.”
“알겠습니다.”
에반이 일어나 문 쪽으로 갔다.
그들끼리 대화를 할 시간을 주고자 함이다.
에반이 문손잡이를 잡으면서 말을 꺼냈다.
“아, 그리고…….”
모두가 에반을 바라보았다.
“제가 꺼낸 말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꿀꺽.”
말을 흐리는 에반을 보면서 누군가 침을 삼켰다.
“뭐,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탁.
에반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도 그 안에 있던 그 누구도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혹 떼러 왔다가 혹을 붙인 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