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폰다 왕국이 마기로 잠식해 들어가자 흐지부지 전쟁을 끝낸 크리프 왕국은 내실을 다지는 한편 마기에 근접한 마을의 사람들을 모두 후방으로 불러들이고 마기가 있는 땅으로의 접근을 금지시켰다.
또한 도망친 삼왕자를 찾기 위해 추격대를 조직하였고 폰다 왕국으로 갔던 이왕자가 어떻게 되었는지 수소문을 하기도 했다.
“어서 오시오. 크라우스 백작.”
“저하를 뵈옵니다.”
쥬드가 왕세자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나저나 크라우스 자작은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
“형님께서는 많은 힘을 소진하시어 가문에서 쉬고 계십니다.”
“그렇군.”
그 말에 자리에 앉아 있던 대신들의 눈이 반짝였다.
에반에게 신물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는데 지금 그걸 쥬드가 확인시켜 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건 모두 스미트 후작의 배려였다.
이미 대부분의 귀족들은 아트베라 관문의 성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영상을 통해 보았다. 만약 그것이 인간의 능력이었다고 한다면 두려움에 에반을 어떻게 해서든 쳐내려 했겠지만 성물의 힘을 빌린 것이라면 상관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크리프 왕국에서도 성물을 가진 가문이 하나 있었기에 성물이 가진 제한을 어느 정도 알기 때문이었다.
그렇데 성물로 제약이 있다면 어차피 한 번 큰 힘을 쓸 수 있는 것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그런 힘은 왕국에서 관리를 한다.
마도사급의 마법사들이 영지전에 참여를 하지 못하는 것처럼 성물을 가진 사람은 그 힘을 사적인 일에 쓰지 않게 많은 제한을 두어 관리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먼저 건들지만 않는다면 자신들과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라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크라우스 자작을 한 번 보고 싶었는데 아쉽군.”
“곧 보게 되실 겁니다.”
“그나저나 정말 잘해주었소. 삼왕자군을 와해시키고 거기에 가담했던 귀족들을 제대로 처리를 하다니… 수고했소. 크라우스 백작.”
“모두 왕국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럼 자리에 앉으시오.”
“예.”
이곳은 정말 왕국에 변란이 일어날 때 사용되는 회의실이었다.
수많은 귀족들이 이곳에 참여를 했고 이 안에 드는 것만으로도 왕국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걸 말해주는 척도와 같았다.
어수선함이 가라앉고 스미트 후작이 중앙으로 나섰다.
귀족들이 부채꼴 형태로 몇 층으로 이루어진 곳에 각각 앉아 있었고 부채꼴의 가장 앞에는 상석이 있어 거기에 왕세자가 앉아있었다.
본래대로라면 루드 왕이 직접 이 자리에 나와야 하지만 몸이 많이 좋지 않은 관계로 왕세자가 담당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단상이 있었는데 스미트 후작이 서 있는 곳이 그곳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모인 이유는 모두 알고 있으리라 봅니다.”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가장 큰 일은 바로 마기였다.
폰다 왕국을 뒤덮고만 있지만 이 마기가 언제 크리프 왕국까지 덮을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대체 이 마기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궁금했다.
스미트 후작은 귀족들을 한차례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다오라는 단체가 만들어진 연유에는 흑마법사들과의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이 되는 일이 이번 일과 관계가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관계가 있다는 뜻이오?”
왕세자가 스미트 후작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바로 백여 년 전 실론 왕국의 수도가 무너져 내린 것은 다 알 것입니다. 그 일에 각 나라들은 경각심을 가지고 흑마법사들 적으로 선포하고 전쟁을 시작했었습니다. 그 이면에는 그들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했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이 무엇이오?”
“바로 마족을 소환한 겁니다.”
“음.”
“오…….”
사실 흑마법사들이 마족을 소환할 수 있다는 건 그저 떠도는 유언비어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천여 년 전부터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 흑마법사들을 핍박했지만 단 한 차례도 마족이 이 대륙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스미트 후작은 그런 생각을 뒤집고 흑마법사가 마족을 소환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정말 마족이었습니까?”
“그 당시 생존자들은 분명 마족이라 하였습니다. 수도를 마계화하여 죽은 자의 시체들에서 마물들을 태어나게 하고 사람들을 자신의 뜻대로 조정하는 사악한 마족이 세상에 나타났었던 겁니다. 그 일로 흑마법사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각 나라들은 다오라는 단체를 만들게 승인을 해주는 한편 흑마법사들이 다시는 발호하지 못하게 막으려 했습니다.”
“그럼 다오가 생겨나는 배경에는 마족이 있었다는 말인가?”
“예.”
무거운 침묵이 회의장을 감쌌다.
그때 한 귀족이 손을 들었다.
“질문이 있습니다.”
“말씀해 보시오.”
“왜 지금까지 그걸 숨기고 있었던 겁니까?”
“이 이야기가 은폐된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흑마법사가 마족을 소환해 내었고 그 마족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렇다면 이후 평범함 사람들이 어떻게 대처할 것 같습니까?”
스미트 후작의 물음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느낌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다시 묻지요. 만약 흑마법사가 소환해낸 마족으로 인해 마탑의 주인이 마족이 쓴 마법 한 방에 소멸이 되었습니다. 당신들은 어떻게 대처할 것 같습니까?”
그 말에 귀족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마탑의 탑주가 누구인가?
바로 이 세상에서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절대자들이었다.
그런 그들 중 한 명이 마족에게 죽는다니 생각지도 못하는 일이었다.
“농담이 과하십니다.”
“전 농담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사실을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실론 왕국에 무엇이 있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바람의 마탑…….”
누군가 중얼거리자 스미트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실론 왕국에는 바람의 마탑이 있었습니다. 보통 마탑주는 자신의 마탑이 있는 곳에서 그리 긴 거리를 여행하지 못하는데 실론 왕국에 마탑이 있었기에 마탑주가 수도로 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마족과 싸웠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제가 방금 이야기했을 텐데요.”
“정말로 마법 한 방에 마탑주가 소멸을 했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렇습니다. 그에 격분한 바람의 마탑의 마법사들이 마족에게 덤벼들었지만 모두 소멸이 되었습니다. 그 후 수도는 엉망진창이 되었고 하루가 가기도 전에 수도의 본래 모습은 사라졌습니다.”
“으으으.”
“이제 묻겠습니다. 이런 마족을 소환할 수 있는 흑마법사가 세상에 나타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죽여야지요.”
“세상에 나타나지 않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찾아 없애야 할 겁니다.”
“모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예.”
“그렇군요. 그리고 이렇게 생각을 할 것 같아 이 일을 숨겼던 겁니다.”
“무슨?”
“세상에는 죽음의 신을 섬기는 사제도 있고 약간 패도적인 마법을 쓰는 마법사들도 있습니다. 이단이 아니지만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이단으로 보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분명 평범한 사제나 마법사들이 아니니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흑마법사라 생각한다는 이야기입니까?”
“맞습니다. 마족의 힘을 알고 있다면 사람들은 일단 죽이고 보자는 마음을 품게 될 겁니다. 또한 이간질을 하기 위해 흑마법을 익혔다고 하면 이유 불문하고 죽이기도 하겠지요. 사람들이 흑마법사에 대해 그리 큰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은 지금도 일어나는 일인데 만약 흑마법사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안다면 더욱 빈번하게 일어나겠지요.”
그 말에 귀족들은 말을 하지 못했다.
스미트 후작의 말이 맞는 것이다.
“그런데 그 후 마족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누군가가 없앴으니 하루 만에 사라졌을 것 아닙니까?”
“그건 아직도 정확한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가장 타당성이 있는 이유는 흑마법사와의 계약이 끝나 돌아갔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후 경각심을 느끼고 흑마법사와 전쟁을 벌이는 한편 다오라는 조직을 만들어 내어 흑마법사들이 이 대륙에 발붙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럼 이번에도 마족은 사라진 겁니까?”
스미트 후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때 당시 마족이 사라진 후 며칠이 지나자 마기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 달이 지나고 이 시점에도 마기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을 볼 때 마족은 아직도 소환이 되어 있는 형태일 거라는 것이 여타 마법사들의 추측입니다.”
“우리가 모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기에 우리가 모인 이유는 알고 계시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까?”
“아직까지는 그런 이야기는 없습니다. 지금은 다오에 맡겨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도 실패를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마탑주들에게 비한다면 그들은 평범한 인간들이니 말입니다.”
“방법이 없는 겁니까?”
“이야기 속의 용사가 나온다면 혹시 모르지요.”
그러면서 스미트 후작이 힐끔 쥬드를 바라보았지만 그걸 눈치 채는 귀족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너무나 암담한 현실에 좌중은 침묵 속에 빠져 들었다.
* * *
“오랜만이네요.”
“음?”
“제 얼굴도 잊어버렸나요?”
갑자기 페른 교단의 사람이 찾아왔다는 말에 왕도에 가 있는 쥬드를 대신해서 에반이 그들을 맞이했다.
거기에서 아주 낯익은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잊을 수 없는 얼굴이지.”
그때 옆에 있던 청년이 인사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신도님.”
“넌?”
“리스터라고 합니다. 전에 한 번 뵌 적이 있죠?”
그때 루네르를 데리고 갔던 사제 옆에 있던 소년이었다.
삼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소년은 청년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에반에게 그는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에반이 루네르를 바라보았다.
기질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루네르를 보자니 에반으로서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루네르라고 해요.”
“성녀가 된 것인가?”
“예.”
“아주 높은 자리에 올라섰군.”
“성녀라는 직위는 신도들의 밑에 있는 자리예요.”
“그런가?”
“그렇답니다.”
“그런데 페른 교단의 성녀가 왜 여기에 왔지?”
에반이 루네르를 대하는 태도는 이야기하는 내내 거칠었다.
하지만 그에 대해서 화를 내는 이는 없었다.
루네르가 이미 그들에게 이야기를 해놓았기 때문이다.
“부탁이 있어요.”
“부탁?”
“예.”
“우리가 부탁을 주고받을 사이인가?”
“너무 무례한 것이 아니요?”
에반의 태도에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참을 수 없었던 성기사 한 명이 나섰다.
“무례하다!”
“그렇소.”
“난 크라우스 가문의 부가주이자 자작의 위를 가진 귀족이다. 나를 만나러 오려고 우선 가문에 양해를 구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지. 지금 무례라 했나?”
귀족들을 만나는 예식은 꽤나 까다로웠다.
에반이 평소에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아서 그렇지 얼마든지 그것으로 예의에 어긋남을 따질 수 있었다.
“으음…….”
성기사도 그걸 아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에반이 냉소하며 말했다.
“그만 가봐라. 그리고 나와 만나려면 일단 날짜를 알아봐라.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그러면서 에반이 신형을 돌리자 루네르가 에반의 옷을 잡았다.
“잠시만요.”
“이게 무슨 무례지?”
그의 기운이 주위를 잠식했다. 루네르와는 악연이지 절대로 좋은 인연이 아니었다.
에반이 속이 좁은 것은 아니지만 가문이 힘이 없을 때 그들이 행했던 일들이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제발. 제발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그녀의 표정은 정말 간절했다.
그걸 보면서 에반은 마음이 움직였다.
겉으로만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이 아닌 온 마음으로 무언가를 원하고 있던 탓이다.
예전처럼 겉과 속이 따로 노는 여자는 아닌 것 같았다.
“들어주지.”
에반이 루네르의 손을 뿌리치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루네르의 안색이 밝아지면서 성기사와 사제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나가 있어 주세요.”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성녀님.”
“나가 있어요.”
반대를 하던 그들은 루네르가 단호하게 말하자 찔끔하며 조용해졌다. 하지만 아직 망설이며 선뜻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에 리스터가 나섰다.
“제가 남아있겠습니다. 모두 걱정하지 마세요.”
그의 말에 서로가 돌아보았다. 차기 교주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훌륭한 그였다.
그가 성녀의 옆에 있다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믿겠습니다. 리스터님.”
“예.”
모두가 나가자 입을 다물고 있던 에반이 입을 열었다.
“부탁이 뭐지?”
“제 성력을 좀 채워주세요.”
“뭐?”
“당신이 마나구를 성물로 바꾸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난 그런 적 없다.”
“호호. 이미 페른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저에게 신탁이 내려졌었거든요.”
“신탁?”
“예. 페른님께서는 당신의 성물을 복구한 자에게서 힘을 찾으라 하셨죠.”
“그래서 날 찾아왔다는 건가?”
“그래요. 그 일을 벌인 사람은 당신밖에 없으니까요.”
에반은 페른이라는 신이 거슬렸다.
자신을 어떻게 안다고 자신을 귀찮게 한단 말인가?
에반이 그런 생각을 하며 루네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에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걸 보자 에반은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나중에 해주지.”
그 말을 하며 에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도 이미 그녀의 심장에 박혀있는 성물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성물은 처음 자신이 그녀에게 주었을 때보다는 많이 그 힘이 약해져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 힘을 채워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지금 그 일을 해준다면 왠지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 같아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루네르는 급해졌다.
지금 위험한 일을 앞두고 있는 와중이다. 그런데 이렇게 에반이 거절을 해버리면 자신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페른 교단에서는 당신을 가장 우호적으로 볼 거예요.”
“그 정도로는 어림없다.”
이미 어느 정도 크라우스 백작가의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그 위세가 전 크라우스 백작이 살아 있을 정도가 된 것이다. 그건 모두 오만의 삼왕자군을 단 칠천의 병력으로 제압하여 나타난 효과였다.
사람들은 크라우스 가문을 보면서 ‘역시나’라며 칭찬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교단과 우호적인 정도로는 그 명성이 올라가지 않을 것 같았다.
루네르가 에반에게 급히 물었다.
“그럼 무엇을 원하나요?”
“그런 것을 없다. 페른 교단이 아무리 그 교세를 확장을 한다고 하더라도 신생 교단이다. 자신들의 힘도 뛰어나지 않은데 우리 가문에 해줄 수 있는 일이 있을까?”
“…….”
루네르가 에반의 말에 쉬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포기를 할 수가 없었다.
에반은 그런 루네르의 감정을 읽었다.
“무슨 급한 일이 있나 보군.”
“예.”
“그게 뭐지?”
잠시 머뭇거리던 루네르가 말했다.
“페른님께서 내려주신 신탁 중 나머지가 실현이 되려 하고 있어요.”
“암흑의 시대가 도래한다는 말이냐?”
“예. 지금 폰다 왕국에서 일어난 일은 그 전조예요. 저는 그걸 막아야 할 사명이 있어요.”
“당신의 입에서 대륙의 평화를 운운할 줄은 몰랐군.”
“저 또한 제가 변한 것이 이상하지만 지금 이게 제 모습이에요.”
에반은 루네르의 진실한 마음을 느끼고는 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다고 그냥 해주겠다는 건 아니었다.
“그럼 우선 계약서를 쓰지.”
“계약서요?”
“그럼 내가 널 무엇을 믿고 해줄 거라 생각하지?”
‘페른 교단의 성녀라는 직위는 가벼운 것이 아니에요.’
루네르는 에반에게 그렇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한숨을 쉰 루네르가 말했다.
“알겠어요.”
“공증인은 이 사제가 하면 되겠군.”
“알겠습니다.”
리스터 또한 쓴웃음을 지었다.
성녀를 믿지 못해 계약서를 쓰자는 데에 화를 내야 할지 아니면 어이없어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에반은 어떻게 하면 페른 교단의 힘을 빌려 자신의 가문에 이익을 줄 수 있는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 * *
“그럼 시작하겠다.”
“예.”
에반은 조건을 조율한 후 계약서에 인장을 찍자 바로 루네르의 손을 잡고는 눈을 감았다.
정말 숨을 쉬듯 성물의 힘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성물이 순환을 하는 것도 보았다.
‘어디에서 기운을 가져올까?’
어차피 기운이 루네르의 몸 안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순환을 한다.
하지만 주위의 많은 기운이 급작스럽게 사라진다면 생물에게 좋지 않다.
에반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전에 들렀던 광산을 생각했다.
이제 새로운 엘프숲을 조성하여 살고 있는 엘프들과 두 명의 드워프들은 크라우스 백작가에 없어서는 안 될 이들이 되었다.
그들이 만들어 주는 무구와 장신구가 은밀한 루트를 통해서 많은 재물을 벌어다 주고 있는 탓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크라우스 가문에 원하는 건 아주 작으니 재산이 불어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곳에서 기운을 뽑자.’
작은 구리 광산을 발견해 거기에서 빠르게 채광을 했었다.
채광을 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엘프들의 도움을 받아 노움이 돌이 아닌 금속을 추출하여 쌓아놓으면 끝이었다.
사람을 쓸 필요도 없고 엘프들도 정령술을 익히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다크 엘프로 생활하여 정령술을 제대로 쓰지 못했는데 에반의 도움을 받아 거의 하루 종일 정령술을 사용할 수 있었다.
에반이 그들의 옆에서 정령술에 필요한 마나를 지속적으로 공급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채광 속도가 너무나 빨라서 반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엄청난 양의 구리를 얻을 수 있었고 그곳은 폐광산이 되었다.
그곳에는 정령들의 기운이 간간이 뿌려져 있어서 공간에 마나의 기운이 맑고 농도가 짙었기에 그곳을 생각한 것이다.
스윽.
그의 손이 공간을 격해서 폐광산과 연결이 되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리스터 사제는 그 광경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에반은 그를 상관하지 않고 기운을 흡수하여 그녀에게 보내주었다.
움찔.
갑자기 들어오는 기운들에 루네르가 놀라 몸을 떨었지만 입을 열거나 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녀도 본능적으로 이때는 가만히 있는 것이 좋다는 걸 알았다.
화아악.
점점 에반과 맞잡은 손을 타고 위로 올라간 기운이 그녀의 심장에 박혀있는 성물과 만났다.
성물은 생소한 기운에 그 기운을 밀어내려 했지만 에반이 성물을 먼저 컨트롤했다. 성물 안으로 기운을 들이부으면서 기운들이 바뀔 수 있게 유도한 것이다.
처음에는 제대로 기운들을 바꾸지 못하던 성물이 이내 자신이 할 일을 알고는 에반이 유도하지 않아도 알아서 기운을 신성력을 바꾸기 시작했다.
루네르는 느껴지는 충만함에 얼굴이 밝게 변했고 리스터 사제는 신성력이 넘쳐흐르자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감히 이런 곳에서 그냥 서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루네르 또한 옆에서 들려오는 기도하는 소리에 마음속으로 페른을 찾았다.
그러자 성물이 반응을 하며 스스로 기운들이 몰려들었지만 신성력의 충만함으로 인해 안타깝게 그걸 느끼지 못한 루네르였다.
* * *
“에반.”
“형님.”
두 사람이 시선이 부담스럽게 에반에게 향했다.
어제부터 저런 태도를 취하는 그들에게 처음에는 무시로 일관을 했지만 하루가 지나자 더는 버티지 못하고 대꾸를 했다.
“날 그렇게 보내고 싶은 것이냐?”
“저는 왕국을 위해서 에반이 나설 때라 보아요.”
제니스 공주의 말이었다.
“가문이 있으려면 세상이 밝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데 가문의 영광을 이루어서 무엇을 할 겁니까?”
“하…….”
에반이 한숨을 쉬었다.
그들이 이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바로 성녀인 루네르였다.
그녀는 죽음의 위기에서 깨어났을 때보다 더욱 많은 신성력이 자신의 몸을 돌아다닌 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해도 얻을 수 없는 신성력이 에반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다.
그 충만함에 빠져 있던 루네르는 그가 있음으로 해서 암흑의 시대를 막기 위해 떠날 일행들이 더 안전해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신성력을 주는데도 계약을 하려 하는데 같이 길을 떠나기를 청한다면 절대 에반이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에반이 아닌 그 주위의 인물들을 포섭하기로 생각했다.
그것이 바로 쥬드와 제니스 공주였다.
아픈 루드 왕을 간호하고 있던 제니스 공주는 루드 왕이 에반을 한 번 보고 싶다는 말에 왕도에 와 있던 쥬드와 함께 이곳으로 내려와 있는 상태였다.
에반은 아직 처리할 것이 몇 개 있어서 쉬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틈을 노려서 루네르는 두 사람에게 자신이 가려는 곳을 흘렸다.
페른 교단에 내려진 신탁은 워낙 유명한 것이라 그녀가 그 말을 흘리자 쥬드는 그대로 그 말을 믿었다.
이미 스미트 후작에게 전말을 들었던 쥬드는 정말로 암흑의 시대가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이야기 속의 용사 일행처럼 마족을 처단하기 위해 길을 나서는 페른 교단이 여기에 있다는 데에 자부심을 느끼며 그들을 아주 편하게 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건 제니스 공주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녀는 틈만 나면 루네르를 찾아갔다.
성녀라는 직책은 공주라 해도 그리 많이 만날 수 없는 지위였고 또한 그녀가 대륙을 구하기 위해 간다는 것을 알았기에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싶었던 것이다.
루네르는 거기에서 제니스 공주에게 에반이 도와준다면 좀 더 쉬울 거라는 걸 스리슬쩍 알렸다. 자신의 신성력을 채워줄 수 있다면 많은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돌려서 말을 한 것이다.
그 뜻을 알아차린 제니스 공주는 그 이야기를 쥬드에게 했고 두 사람은 이렇게 에반을 압박한 것이다.
“내가 죽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느냐?”
“흥. 엘프숲 십분의 일에 해당하는 지역의 마기를 없앤 분답지 않네요.”
“그렇습니다. 혼자 성을 허물 수 있는 분이 너무 엄살이 심하십니다.”
그들 또한 걱정이 아예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페른 교단의 신탁에 의하면 그들은 분명 암흑의 시대의 도래를 막을 것이라 했으니 에반은 참여를 해도 안전할 것 같았다.
“후. 가족이라는 것이…….”
“그리고 여차하면 이곳으로 도망을 오면 되지요.”
“맞아요.”
가족이라는 말에 은근히 얼굴을 붉혔던 제니스 공주가 쥬드의 말에 동조했다.
“알았다. 나도 그 일행에 끼지.”
“감사합니다. 형님.”
“왕국의 이름을 알릴 기회예요.”
그 두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에반은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그럼 나나 잠시 나갔다 오마.”
“예.”
“조금 쉬셔야겠지요.”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에반이 간 곳은 루네르와 페른 교단 일행이 쉬고 있는 곳이었다.
벌컥.
문이 열리고 모두가 에반을 돌아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페른 교단 일행이 모두 모여 있었다.
에반은 상관하지 않고 루네르에게 다가가더니 말했다.
“역시 그 잔머리를 쓰는 것은 변하지 않았군.”
“죄송해요.”
“죄송? 지금 죄송하다는 말이 나오나?”
“참으십시오. 성녀께서 잘못된 선택을 하신 건 알지만 이 대륙을 위해…….”
“대륙? 이 대륙을 위해?”
화악.
“억.”
“으윽…….”
리스터의 말에 에반이 그대로 자신의 기운을 개방했다.
그러자 그 누구라도 할 것 없이 버티지를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엎드렸다.
그 자세가 에반을 향해 있어 누가 본다면 그를 향해 경배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대륙을 위해서라면 나를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너희는 폰다 왕국에 있다는 마족은 무서워도 나는 무섭지 않다는 말이냐? 내가 정말로 그 마족처럼 행동을 해야 너희가 후회를 할 것이냐?”
신성력으로 버텨보려 했지만 오히려 그건 독이었다.
그들이 신성력을 일으키자 신성력이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빠져나갔다.
그 때문에 안색마저 질리는 그들을 보면서 에반이 물었다.
“우선 너희의 힘을 빼앗아 가줄까?”
“아, 아니에요. 제가 잘못했어요.”
지금 가장 심하게 신성력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은 루네르였다.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성물은 그녀를 지키기 위해 신성력을 뿜어내었지만 그건 깨진 항아리에 물 붓기였다.
계속해서 허무하게 신성력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 상실감에 다른 사람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을 때 루네르가 인내력을 발휘하며 입을 연 것이다.
“그래. 이건 날 알지 못해 일어난 잘못이라고 알겠다. 하지만 한 번만 더 내 주변의 사람을 선동하거나 꾐에 빠지게 할 시에는 정말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주마.”
에반이 그렇게 말을 하고는 방 안의 기운을 모조리 신성력으로 만들었다.
공무에 대해 더욱 능숙해지는 그였기에 이 정도 일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 신성력을 확연하게 느낀 페른 교단의 사람들의 당황했다.
그가 어떻게 한지는 모르지만 분명 페른 교단이 가지는 신성력을 만들어내었다.
그건 성물을 이용해서 만드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신성력이 몸에서 많이 빠져나갔기에 더욱 확연히 느껴지는 신성력 때문에 망연한 눈으로 에반을 바라보았다.
“자. 이것이 너희가 그렇게 바라는 신성력이다. 하지만 내게는 이런 기운을 만드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그리고 이 기운을 나누어 주는 것도 아주 쉬운 일이지.”
루네르의 신성력을 채워주면서 신성력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모두 습득한 에반에게 신성력을 만들기란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에반이 하는 말은 자신이 신과 같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그 의미를 깨달은 그들의 뇌리에는 어떠한 생각도 나지 않았다.
“이제 알았다면 이제 그런 짓을 벌이지 말아라. 이번만은 같이 가주겠지만 두 번은 없다.”
에반이 말을 하고 몸을 돌렸다.
“아.”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루네르는 탄성을 터뜨렸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확연히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어떻게든 만회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정말로 무서운 사람이자 자신들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때 한 사제가 물었다.
“대체 저분은 누구십니까?”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를 만난 것은 단 두 번이다.
그런 그녀가 에반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에반이 아무리 협박을 했어도 그 열망은 더욱 커지고 있었다.
* * *
며칠이 지나고 소문이 퍼졌다.
대륙에 드리운 어두운 그늘을 걷어내기 위해서 페른 교단이 원정대를 꾸린다는 것이다.
페른 교단의 신탁에서 말하는 현세의 암흑이 드리울 것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만큼 지금이 그 시기에 해당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리고 그걸 거두기 위해 페른 교단이 나선다는 말에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 원정대의 출발이 크리프 왕국의 작은 백작가에서 한다고 알려지자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페른 교단은 유물이 있던 곳에 근거지를 마련하였고 그 땅을 샀던 왕국도 도시만 한 크기를 무상으로 페른 교단에 대여를 해주었다.
페른 시라 불리는 그곳에서 당연히 원정대가 출발하리라 생각을 했는데 페른 시에서 멀리 떨어진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한 백작가에서 폰다 왕국으로 간다고 하자 사람들은 이해를 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이해를 했던 하지 않았던 페른 교단의 사제와 성기사가 속속들이 크라우스 백작가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페른 교단에는 사제밖에 없다고 알려져 있는데 갑자기 성기사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이미 그들이 암흑의 시대를 대비하고 있었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세간의 이목이 모두 주목이 된 가운데 조촐한 환송식이 치러졌고 그들은 페른 왕국으로 출발을 했다.
그 안에는 에반 크라우스라는 귀족이 끼어있었지만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