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권-제1장 (41/60)

제1장

방 안으로 들어간 에반은 급히 주위를 살펴보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제니스 공주 외에는 주변에서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에반의 목소리를 들은 탓일까?

바닥에서 얼굴을 묻고 있던 제니스 공주가 고개를 들었다.

“에반…….”

“그래. 무슨 일이야?”

“정말 왔군요.”

그 목소리는 정말 처연했다.

제니스 공주의 물기 어린 시선을 보다가 그제야 왜 소리를 질렀는지 깨달았다.

“무언가를 본 건가?”

에반의 물음에 제니스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와 합일에 이르는 경험을 한 후 제니스 공주는 특화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미래의 부분에 대해서 저절로 알고 보게 되었다.

꿈속에서라든가 일상생활을 할 때 머릿속에서 그 이미지가 스쳐지나갔다.

처음에는 그런 증상이 없었는데 에반에게 점점 심도 있게 공무를 배우면서 이미지도 자세해지고 그 상황도 선명해지고 있었다.

에반은 그걸 주위 사물의 모든 생각들을 읽은 후 종합하여 일어날 일들을 유추한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그녀는 자신이 본 대부분의 미래가 맞아떨어지니 그렇게만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일 년 전 에반과 왕궁에 들렀을 때 보았던 미래로 인하여 크라우스 가문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왕궁에 머물렀던 것이다.

“저, 전 이 사태를 막으려 했어요. 하지만…….”

제니스 공주는 일 년 전 루드 왕에게 자신이 본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루드 왕은 그저 고개를 저으며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말도록 부탁을 했고 그 당시 제니스 공주가 할 수 있는 것은 왕궁에 남아 아버지를 지키는 일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예상한 것과는 달리 너무나 빨리 반란이 일어났고 자신이 무슨 일을 할 틈도 없이 삼왕자의 손에 모든 것이 넘어갔다.

그 후에도 움직이려 했지만 다시 본 미래가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자신이 움직이면 더욱 좋지 않게 흘러가는 미래를 본 것이다.

그래서 별궁에 조용히 있었는데 에반이 나타나자마자 또다시 바뀐 미래가 제니스 공주를 힘들게 하고 있었다.

말을 더듬는 제니스 공주를 에반이 살며시 안아주었다.

제니스 공주는 그 따스함에 아무 말도 못하고 그의 품에 안겨 눈물만 흘렸다.

잠시 후 흐느낌이 사라지고 에반이 제니스 공주에게 물었다.

“그래서 누구를 구하고 싶지?”

“모두를 구하고 싶어요.”

“한번 노력은 해보지. 그래도 가장 먼저 구하고 싶은 분이 있을 것 아냐?”

잠시 생각을 하던 제니스 공주가 대답했다.

“어머니를 먼저 구하고 싶어요.”

“그럼 그쪽으로 가지.”

“예.”

에반이 품에 안겨 있는 공주를 데리고 일어섰다.

둘이 나오자 밖에서 지키고 있던 리츠가 급히 물었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전 괜찮아요.”

“너희는 여기 대기하고 있어라.”

“무슨?”

“따라올 수 있다면 따라오고.”

그 말을 남긴 에반이 공주를 한 손으로 안고는 그대로 땅을 박차고 하늘로 올라갔다.

호위 기사들은 당연히 두 사람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그들을 보면서 리츠가 말했다.

“뭐해?”

“예?”

“빨리 따라가야지.”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공주님이 갈 곳이 어디라 생각해?”

“아…….”

그들은 제니스 공주가 어디로 갈지 바로 생각해내었다.

그리고 그들은 왕비궁으로 바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여기인가?”

“네.”

“어떻게 하지?”

“저쪽으로 들어가면 돼요.”

제니스 공주가 가리킨 곳으로 작은 정원이 보였다.

“저곳으로 작은 문이 하나 있어요.”

“그럼 가자.”

에반이 허공을 밟으면서 서서히 정원으로 내려섰다.

“누구냐!”

그곳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두 사람을 보고는 검을 뽑아들었고 에반은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 뜻을 알아차린 공주가 에반에게 말했다.

“어머니를 지키는 호위 기사들이 아니에요.”

에반이 손을 내저었다.

후웅.

“큭.”

버틸 수 없는 무형의 힘이 기사들을 덮쳤고 그들은 동시에 반대편 벽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쿵.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그들을 향해 에반이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그들의 움직임이 완전히 멎었다.

죽은 것이다.

“들어가자.”

잠시 그들을 바라보던 제니스 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문을 열었다. 에반이 그녀가 보는 앞에서 기사들을 죽인 건 마음을 굳게 먹으라는 뜻이었고 그녀는 그걸 이해했다.

상념을 떨치며 연 문은 아무런 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열렸고 그 후 그녀를 맞이한 건 검광이었다.

쉬익.

제니스 공주가 눈을 부릅뜨는 사이 이미 기습을 알고 있던 에반이 제니스 공주의 가슴을 향해 날아온 검을 잡더니 그대로 뒤로 당겼다.

우당탕.

“크윽.”

기습을 한 이가 쓰러지고 그 뒤에 있던 다섯 명의 기사들이 다시 검을 내질었지만 에반의 앞에서는 그저 헛된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차차창.

다섯 개의 검이 그대로 빨려 들어가듯 에반의 손에 고이 모였고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다섯 기사들을 향해 에반은 잡은 검을 그대로 날렸다.

퍼퍼퍼퍽.

“크악.”

“윽.”

그대로 바닥에 뒹군 그들의 갑옷은 깊게 파여 있었다.

만약 에반이 검날을 겨누고 던졌다면 살아 있는 자가 아무도 없었겠지만 검병으로 맞춘 터라 모두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들도 어머니의 호위가 아니에요.”

“그럼…….”

에반이 다시 손을 쓰려 하자 제니스 공주가 그걸 막았다.

“어머니의 거처예요.”

그 말에 에반이 손을 내렸고 제니스 공주가 천천히 자신의 어머니가 누워있는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

침실 옆에서 조용히 왕비를 지키고 있던 기사와 시녀들은 제니스 공주와 에반이 벌인 일 때문에 잠시 놀랐지만 이내 자리를 살짝 비켜주었다.

제니스 공주가 일왕비의 손을 잡고 말했다.

“어머니, 저 제니스가 왔어요.”

“제니스?”

일왕비가 힘없이 눈을 떴다.

그녀 또한 현재 왕궁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그리고 왕세자와 제니스 공주가 자신 때문에 갇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 때문에 속앓이를 하고 있었는데 제니스 공주가 눈앞에 나타나자 일왕비는 어디에서 힘이 났는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옆에서 그걸 지켜보던 기사가 말했다.

“왕비님. 쉬셔야 합니다.”

“난 괜찮아요. 그룬 경.”

일왕비가 그렇게 말을 하면서 침대에 앉았다.

그러고는 제니스 공주에게 물었다.

“제니스. 괜찮은 거냐?”

“예. 전 멀쩡해요.”

“어떻게 왔지?”

왕비궁은 철저하게 삼왕자의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데 별 소요도 없이 제니스 공주가 나타나자 궁금함이 생겨 일왕비가 물었다.

“저 사람이 도와줬어요.”

제니스 공주가 에반을 가리켰다.

일왕비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것을 안 에반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신 에반 펠로 드 크라우스라 합니다.”

“아, 크라우스 자작이셨군요. 제니스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송구스럽습니다.”

그때였다.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그룬이라는 기사가 검병에 손을 가져갈 때 에반이 일왕비에게 말했다.

“공주님의 호위 기사들이 온 것 같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군요.”

잠깐 긴장을 했던 왕비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또 삼왕자의 기사들이 무례를 저지를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문이 열리면서 갑옷에 피를 묻히고 있는 리츠가 들어왔고 그 뒤로 제니스 공주의 호위기사들도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왕비마마.”

“전 괜찮아요. 리츠 경.”

“다행입니다.”

“그나저나 다친 분들은 없나요?”

“이들 가지고는 저희를 어쩔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리츠는 밝은 표정이었다. 리츠뿐 아니라 다른 호위기사들의 표정도 밝았다.

이 년이라는 시간 동안 크라우스 백작가에서 검술을 익혔던 그들은 그 실력을 과시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는데 오늘 이렇게 원없이 싸우자 속이 후련함을 느끼고 있었다.

제니스 공주는 그들의 마음을 짐작하고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그걸 일왕비가 미소를 지으면서 바라보는데 제니스 공주가 일어났다.

일왕비가 의아한 눈으로 제니스 공주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느냐?”

“이제 다른 곳을 가봐야죠.”

“다른 곳이라니?”

“아바마마를 구할 거예요.”

“제니스, 그건…….”

일왕비가 말끝을 흐리자 그룬이 말을 이었다.

“거긴 너무 위험합니다.”

“어째서요?”

“소드 마스터에 이른 기사 두 명이 그 앞을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 다른 분들이 움직이지 않는 건 그들 때문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스미트 후작이나 노드에르 백작이 가진 힘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움직이지 않은 것은 크리프 왕국의 소드 마스터 세 명 중 두 명이 삼왕자의 편에 있는 탓이 컸다.

“그건 걱정할 것 없어요.”

“예?”

반문을 하는 그룬을 향해 웃어준 제니스 공주가 에반에게 말했다.

“가죠.”

에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제니스.”

“어머니, 걱정 마세요. 크라우스 자작이 절 지켜줄 거예요.”

그렇게 말한 제니스 공주가 그대로 에반을 따라나섰고 일왕비는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그룬에게 말했다.

“그룬 경.”

“예. 왕비님.”

“따라가 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룬은 일왕비의 말에 바로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가 본 것은 주위에 널려 있는 시체뿐, 두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허. 방금 사이 어디로 사라지셨단 말인가?”

그룬은 감쪽같이 없어진 그들을 찾아보다가 내실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제니스 공주가 갈 곳은 정해져 있었다.

* * *

그룬의 생각대로 두 사람은 이미 왕의 처소가 있는 내실로 가고 있었다.

내실은 아주 복잡하고 또한 왕궁의 깊은 곳에 위치해 있어 하늘로 날아서 갈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이 내실이 시작되는 곳에 내려서자 두 사람을 맞이한 건 병사들이었다.

“누구냐!”

몇십 명의 병사가 갑자기 나타난 그들을 보면서 병기를 겨누었다.

제니스 공주는 날선 병기들이 자신을 겨누고 있는 상황에 당황할 법도 하건만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그들에게 물었다.

“설마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이냐?”

그 말에 병사들이 어리둥절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에 제니스 공주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하. 왕궁에 발을 들여놓았으면서 일왕녀인 나 제니스 페리시오 모플로를 모르다니 어이가 없구나.”

그제야 병사들은 지금 자신이 무기를 겨누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깨닫고는 안색이 변했다.

그녀가 소리쳤다.

“그래도 내게 들이민 병기들을 치우지 않는 것이냐?”

공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병사들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면서도 손에서 병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자신의 뒤에 있는 자들은 더욱 무서웠기 때문이다.

“이, 이곳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그런 명령을 누가 내렸단 말이냐?”

“그, 그것이…….”

말을 한 병사가 눈을 굴리면서 변명을 하려 하자 에반이 나섰다.

“되었다. 너를 보고도 무기를 쥐고 있는 것을 보니 말을 듣을 것 같지는 않다.”

에반이 그렇게 말을 하며 발을 찍었다.

쿵.

“억.”

“으윽.”

흔들리는 대지에 병사들은 술에 취한 것처럼 중심을 잡지 못하고 몸을 바닥에 뉘었다.

엎드려 있는 그들의 사이로 들어간 에반이 그들을 모두 제압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그들을 보면서 에반이 말했다.

“상대를 봐가면서 무기를 잡는 거다.”

에반이 그들을 지나치고 그 뒤를 제니스 공주가 따라나섰다.

하지만 곧 두 사람은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내실로 연결된 통로로 들어가려 하자 그 안에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에반과 제니스 공주를 발견한 기사들은 멈칫했다.

기사들은 두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제니스 공주가 멈칫하는 이들을 보며 말했다.

“아는 얼굴들이 많군요.”

그 말에 한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오랜만입니다. 공주마마.”

“제가 아바마마를 뵈러 가는데 방해할 생각입니까?”

“지금 전하께서는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안정이라니요?”

“왕세자 전하께서 반란을 일으켜 또다시 피습을 당하셨습니다.”

그 말에 제니스 공주의 안색이 살짝 흐려졌다. 하지만 이내 기세를 피워 올리며 말했다.

“그 말이 진심인가요? 카를 경?”

“그… 그렇습니다.”

제니스 공주의 기세가 예사가 아니라는 것을 느낀 듯 카를은 살짝 주춤했지만 자신이 할 말을 마쳤다.

“하, 그것 참 이상하군요. 제가 알기로는 내 동생인 키안이 아바마마를 감금하고 왕궁을 장악하려 한다고 들었는데 말이에요.”

키안은 삼왕자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카를이 섬기는 주군이기도 했다.

“말도 안 되는 억측입니다. 설마 그런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 왕세자님을 도우러 여기까지 오신 것 아닙니까? 친혈육이시니 말입니다.”

“호호호. 정말 카를 경의 혀는 매끄럽기가 그지없군요. 그러나 모두 부질없는 추측. 제가 아바마마를 만난다면 해결될 일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두 사람의 대립을 보고 있던 에반이 제니스 공주에게 말했다.

“이미 말로 설득할 상황은 아니라고 보는데…….”

“알아요.”

“그런데?”

“대체 무슨 마음으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알고 싶었어요. 지금 보니 뻔뻔하다 못해 탐욕에 눈이 먼 작자들이라는 것만 알았죠.”

그녀 또한 주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대화를 나누면서 상대에 대한 것을 모두 파헤치는 것이다.

카를은 제니스 공주의 독설에 모욕을 당하기라도 한 듯 얼굴을 붉혔다.

그가 이를 갈며 말했다.

“공주마마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 또한 그렇게 대접을 해드려야겠지요.”

그러면서 손짓을 하자 기사들이 검을 잡았고 에반이 앞으로 나섰다.

“아무리 크라우스 자작님이라 하여도 이 많은 기사들을 상대할 수는 없을 겁니다.”

에반의 활약상은 꽤나 퍼져 있는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에반이 신출귀몰하게 움직이고 단 한 번에 수많은 기사들을 벤다는 이야기를 소문으로 들었다.

그러나 그걸 제대로 믿는 자들은 없었다.

다만 어느 정도 에반이 강하기는 하다고 생각을 했다.

에반은 그들이 살기를 드러내자 피식 웃었다.

“내가 누구라 생각하지?”

“에반 크라우스 자작 아닙니까?”

“맞다. 난 크라우스 가문의 부가주지.”

말을 하면서 앞으로 걸어 나왔다.

에반이 다가오자 한 기사가 그에게 검을 내뻗었다.

쉬익.

에반으로 앞으로 다가온 검을 그대로 잡았다.

파캉.

“억.”

기사가 흐느적거리며 주저앉았다.

에반은 그를 무시하고 기사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제압해! 제압할 수 없으면 죽여도 무방하다.”

카를이 뒤로 살짝 빠지면서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에반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들을 손으로 쳐내면서 앞으로 계속 이동을 했고 에반의 손과 부딪친 검은 부러지는 동시에 그 검의 주인에게 피해를 입혔다.

“크윽.”

“컥.”

순식간에 십여 명이 주저앉았다.

그사이 에반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으니 처음에는 기세 좋게 덤벼들었던 기사들이 어찌할 줄 모르고 뒤로 물러났다.

“무얼 하는 거냐? 무기도 들지 않은 자를 처리하지도 못하는가?”

카를이 소리를 치며 기사들을 독려했지만 이미 전세는 에반에게 넘어간 후였다.

에반이 잠시 멈추더니 카를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소리 지를 힘이 있다면 네가 앞으로 나와라.”

카를은 그 말에 이를 악물면서 검을 뽑았다. 그도 기사이다. 이런 도발을 받고서 가만히 있다면 더는 기사의 자격을 유지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후회하지 마라.”

“덤벼.”

화아악.

그의 검에서 소드 오러가 일렁였다.

그 색이 진하고 검을 완전히 감싸는 것을 보면 익스퍼트 상급에 다다랐다는 반증이었다.

“이얍!”

슈욱.

소드 오러가 잔상으로 남아 허공에 한줄기의 선이 길게 남았다. 그 선은 에반을 사선으로 베고 있었지만 이미 에반은 그 자리에 없었다.

어느새 카를의 바로 뒤로 돌아간 에반이 소리죽여 말했다.

“너무나 힘을 과도하게 쓰는군.”

그 말을 들으면서 카를은 세상이 어두워짐을 느꼈다.

쿵.

“으으으.”

기사들은 카를이 단 한 수에 쓰러지자 더는 다가가지 못했다.

그들은 이미 소드 마스터의 위용을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었다.

몇 번 대련이라는 명목 아래 다 같이 덤벼든 적이 있었는데 그때 소드 마스터는 익스퍼트 중급에 오른 자신들을 늑대 속의 양처럼 휘저었었다.

그리고 에반은 그때를 생각나게 하는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덤비지 않나?”

챙그랑.

여기에서 저런 괴물과 싸우다 죽으면 자신만 손해라는 걸 안 한 기사가 검을 떨어뜨렸다.

챙그랑 챙그랑.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검을 떨어뜨리는 기사들이 속출했다.

처음 행동하는 것이 어렵지 그다음 기사들은 검을 버리는 것이 아주 쉬운 일이었다.

개중에는 검을 버리지 않고 에반에게 달려들려는 기사도 있었지만 그런 이들은 검을 버린 기사들에게 막혔다.

“지나가시오.”

“그것 참 배려해줘서 고맙군.”

에반이 피식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곤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 뒤를 제니스 공주가 뒤따라가면서 내실로 통하는 문을 닫자 그곳에 남은 기사들 중 에반에게 끝까지 덤비려고 했던 기사가 문을 열려 했다.

“그만둬.”

“무슨 소리야? 우리는 기사다. 기사의 사명을 저버릴 셈인가?”

“그럼 개죽음 당하고 싶다는 거냐?”

“뭐?”

“그는 맨손으로 우리를 상대했다. 그것도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이 말이야. 그 말은 그가 살수를 펼치면 이미 우리는 모두 죽은 목숨이라는 거다.”

“으음.”

그 말에 문을 열려던 기사는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괴물은 괴물끼리 싸우라고 놔둬.”

“괴물?”

“잊었나? 어떤 이들이 전하의 처소를 지키고 있는지 말이다.”

“아…….”

그제야 자신들의 뒤에 있는 든든한 아군이 생각이 난 듯 탄성을 질렀다.

“그 괴물들이라면 아무리 크라우스 자작이라도 지나가지 못할 거다.”

불안한 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만약 그 괴물들마저 크라우스 자작을 막지 못하면 반란은 실패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 * *

“조용하군.”

“그러게요.”

보통 내실로 들어와 왕의 침소로 가는 길은 아주 어수선했다.

기사들이 돌아다니고 시종들이 바삐 걸어 다녔다.

그것이 평소의 모습이건만 지금 복도는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저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만이 이곳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복도가 끝날 즈음 넓은 회랑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회랑의 끝에는 왕의 침소로 갈 수 있는 문이 있었는데 그 문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서로에게 등을 돌려 앉아 있었다.

한 명이 에반과 제니스 공주를 발견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지? 여기는 함부로 올 수 있는 곳이 아닐 텐데.”

그러자 반대편에 있던 자도 일으키며 한마디를 꺼냈다.

“이제 보니 제니스 공주이시군.”

“제니스 공주? 일왕녀 말인가?”

“그래.”

“일왕녀라면 갇혀있다고 알고 있는데 여기를 어떻게 왔지?”

“저자가 데리고 왔나 보군.”

그가 에반을 가리켰다.

제니스 공주는 그 둘 중 자신을 알아본 자를 바라보면서 얼굴을 굳히고는 말했다.

“슐츠 경이었군요.”

“예. 접니다.”

“어째서죠?”

“제 동생이 바로 이왕비마마라는 걸 알면서 묻는 겁니까?”

이왕자와 삼왕자는 이왕비의 태생이었다.

그리고 슐츠는 이왕비의 오빠였다.

“소드 마스터가 그런 인연에 연연하다니…….”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소드 마스터이기 때문에 인연에 연연합니다.”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적인 것 같은데 그냥 제압하자고.”

제니스 공주가 갑자기 끼어든 자를 바라보았다.

황금빛의 갑옷을 입은 장신의 기사였다.

“보아하니 당신은 위쓰 경이군요.”

“호. 절 아십니까?”

“우리 왕국의 마스터 중 한 명인 철벽의 마스터를 모를 리가 없지요.”

“알아주시니 영광입니다.”

그가 경박한 인사로 화답했다.

과묵함의 대명사로 불리는 모습과는 매치가 되지 않았지만 제니스 공주는 지금의 모습이 본래 그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무튼 절 알아봐주신 대가로 몸에 생채기를 내지 않고 조용히 본래 있던 곳으로 보내드리지요.”

위쓰가 그렇게 말하면서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옆에서 잠자코 있던 에반이 말했다.

“재밌는 놈이군.”

“응? 뭐라고?”

“재밌는 놈이라 했다. 같잖은 실력을 가지고 으스대는 꼴이 너무나 가소롭구나.”

“뭐? 넌 누구야?”

“난 크라우스 가문의 부가주다.”

“에반 크라우스 자작.”

슐츠의 말이었다.

에반이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나지.”

“소드 마스터라는 소문이 있던데.”

“훗. 소드 마스터?”

“아닌가?”

“그런 같잖은 실력으로 날 보지 마라.”

“이놈이 보자보자 하니까!”

먼저 에반에게 덤벼든 건 위쓰였다.

그는 자신의 철검을 아래로 내려찍으면서 에반을 윽박질렀다.

에반이 그의 검술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리고 처음으로 검을 뽑았다.

채애앵.

검과 검이 맞부딪치면서 그 소리가 회랑에 울려 퍼졌다.

파앗.

두 사람이 떨어지고 다시 한 번 위쓰가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방금처럼 가벼운 검이 아니라 아주 서서히 다가오면서 주위의 기운을 억누르고 있었다.

“내가 왜 철벽의 마스터인지를 보여주지!”

주위의 기운이 에반을 옥죄어 왔다.

그리고 점점 마나가 위쓰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위쓰의 검술이 이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런 상태로 검을 휘두르면 마법사건 기사들이건 위쓰에게 상처 하나 못 입히고 그대로 도륙이 될 것 같았다.

괜히 소드 마스터라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에반은 그의 마나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관찰했다.

공격을 하면 검에서 마나가 쏟아져 나와 주위 몇 미터 정도를 그 힘으로 옭아맨다. 검에서 나오는 마나이기 때문에 날카로움을 띠면서도 위쓰의 마나의 성질을 닮아 무거웠다.

그 때문에 마나가 촘촘히 얽매여 위쓰가 노린 상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걸 풀 정도가 되려면 위쓰와 동급이 아니면 안 되었다.

“그런 거였군.”

자신의 목 밑까지 다가온 검을 바라보며 에반이 중얼거렸다.

너무나 태연한 그 모습에 위쓰가 소리쳤다.

“뭐라 지껄이는 거냐?”

위쓰는 더욱 기운을 쏟아내면서 에반을 압박했다.

그리고 검이 에반의 목 바로 앞까지 왔을 때 에반이 움직였다.

탁.

후우웅.

강대한 마나가 한순간 실타래가 풀리듯 주위로 흩어져 버렸다.

“뭐, 뭐야!”

위쓰는 자신의 검이 힘을 쓰지 못하고 에반에게 잡혀버리자 깜짝 놀랐다.

“내가 말했지. 같잖다고.”

“으윽.”

쇄애액.

위쓰가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는 사이 갑자기 에반의 옆구리를 파고드는 검이 있었다.

슐츠였다.

에반은 잡고 있던 위쓰의 검을 놔주면서 뒤로 물러났다.

“호. 소드 마스터들은 자존심이 강하다고 들었는데.”

“난 그런 것들을 따지지 않는다.”

위쓰는 슐츠가 도와주었는데도 별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가만히 자신의 검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너도 저자처럼 이름이 있는가?”

“날 검의 마술사라고 칭하지.”

“조심하세요. 그의 검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해요.”

제니스 공주가 에반에게 한 말이었다.

“그럼 한 번 보여줘 봐.”

그 말에 슐츠가 검을 내뻗었다.

팍.

검이 변화한다.

앞으로 내뻗은 검이 두 개로 보였다.

스스슥.

두 개로 보인 검은 또다시 늘어나 네 개로 보이더니 다시 여덟 개로 늘어나고 종래에는 예순여덟 개의 검영이 에반의 모든 곳을 덮쳤다.

그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예기는 절대 경시할 수 없는 것이어서 절대로 허상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피할 곳을 절대 주지 않으면서 다가오는 검을 보는 에반이 미소를 지었다.

“이것도 흥미롭군.”

위쓰가 검의 기운을 쏟아 붓는 것이라면 슐츠는 검의 기운을 분산시켰다.

빠르게 움직여 잔영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검의 기운을 불어넣으니 모두가 실제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아마 보통의 기사였으면 이 검을 보는 순간 암담함을 느끼고 검을 뻗지도 못하리라.

그러나 상대는 에반이었고 에반은 검을 뽑아 자신을 찔러 들어오는 수많은 검들을 아무렇지 않게 베었다.

카캉.

그 한 수에 잔영이 사라지고 슐츠가 비칠비칠 물러났다.

“어, 어떻게?”

슐츠가 놀란 눈으로 에반을 바라보며 물었다.

에반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알고 싶으면 덤벼.”

“이익.”

그는 믿고 싶지 않은 듯 빠르게 검을 내질렀다.

조금 전처럼 화려함은 없지만 쾌속함 속에 변화를 숨기고 있는 일격이었다.

카캉.

하지만 그것도 너무 허무하게 막혔다.

“이것이 다인가?”

에반이 다시 도발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쉬이 공격하지 못했다. 그가 가진 실력이 자신을 훨씬 상회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아…….”

뒤에서 그걸 지켜보는 제니스 공주는 뭐라 말을 하지 못하고 에반의 뒷모습만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강하다고는 알고 있었고 그 능력이 굉장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인간을 초월했다는 소드 마스터들을 이렇게 쉬이 상대할 정도라는 것은 짐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능력을 자신도 배우고 있다는 것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혼자서는 자신이 없다면 두 사람이 같이 덤벼라.”

그 말에 슐츠가 위쓰를 바라보았다.

슐츠가 에반과 몇 차례 검을 나누는 것을 보며 정신을 차렸던 위쓰였다.

위쓰는 슐츠가 자신을 쳐다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혼자서는 저자를 이길 수 없다는 걸 체감을 하고 있었다.

그건 슐츠도 마찬가지였고 위쓰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 슐츠가 먼저 공격을 했다.

변화무쌍한 검이 에반을 압박했다.

그걸 에반이 피해냈고 슐츠 자신이 만든 공간 안으로 들어온 슐츠가 뒤로 물러서마자 위쓰가 검을 아래에서 위로 휘둘렀다.

에반은 자신을 반으로 쪼개려는 듯 엄청난 힘으로 짓쳐오는 검을 보면서 검을 내려찍었다.

쾅!

검과 검이 마주치고 폭음이 일 때 그 사이로 다시 한 번 슐츠의 검이 에반의 가슴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에반의 몸이 검이 찔러오는 속도와 맞추어 뒤로 미끄러지듯 물러났다.

검은 손가락 한 마디 차이를 두고 에반의 가슴에서 멈추었고 슐츠가 검을 회수한 순간 다시 한 번 압력이 에반을 향해 밀려들어왔다.

쾅 쾅 쾅!

세 사람의 싸움으로 회랑이 흔들렸고 기운들이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벽에 금이 갔다.

순식간에 세 사람의 싸움은 수십 번을 넘어 수백 번의 공방이 이어졌다.

제니스 공주는 주위의 여파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편안하게 그 싸움을 볼 수 있었다.

에반이 두 사람을 압도하는 실력을 가졌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두 사람도 곧 눈치 챘다.

슐츠가 계속되는 연계 공격을 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쿵.

“크윽.”

위쓰도 에반이 내지르는 검의 힘에 밀려 슐츠의 옆에 나란히 섰다.

슐츠가 물었다.

“헉. 헉. 대체 우리를 가지고 노는 이유가 무엇이오?”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장하군.”

에반은 슐츠를 비꼬고 있었다.

슐츠나 위쓰도 그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기 싫어 계속해서 에반에게 덤벼들었고 그걸 에반이 비꼰 것이다.

“알려주시오.”

에반은 슐츠의 물음에 검을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별것 없다. 내 휘하에 있는 기사들 중 두 사람이 너희가 이룬 경지에 근접하기만 했을 뿐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해 그걸 도와주기 위해서 상대를 해준 것이다.”

변화의 검과 무거움의 검은 라우웰과 게이브에게 잘 맞는 검술이었다.

그 둘은 소드 마스터에 근접을 하긴 했지만 소드 마스터에 이르지는 못했다.

깨달음을 얻지 못해 지지부진한 상태인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이미 그런 유형의 검술들로 소드 마스터에 이른 두 사람이 있었으니 참고가 많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그들을 봐주면서 싸운 것이다.

“그것 때문에 우리를?”

위쓰가 화를 내려 하자 슐츠가 제지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우리를 얼마 만에 제압할 수 있소?”

“얼마 만에?”

“그렇소.”

“아직도 자신들을 과대평가 하는군.”

“무슨?”

“너희는 내 한 수도 버티지 못해.”

“말도 안 돼!”

위쓰가 소리쳤다.

그걸 보며 에반이 검을 잡았다.

“시험해 볼까?”

“해보시오.”

꾸욱.

그들 또한 검을 굳게 쥐었다.

팟.

하지만 그 순간 그들은 에반을 시야에서 놓쳤다.

“어? 무…….”

갑자기 사라진 에반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두 사람은 자신들의 뒤에 있는 에반을 보며 말을 꺼내려 했지만 채 말을 끝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바닥에 몸을 뉘였다.

절명한 것이다.

“에반…….”

“어차피 적이다. 그들이 삼왕자와 함께 궁을 빠져나가면 골치만 아파지지.”

그건 맞는 말이었지만 크리프 왕국에 있는 세 명의 소드 마스터 중 두 사람을 죽였으니 후에 일 파급 효과가 너무 컸다.

“아무튼 들어가자.”

“알았어요.”

제니스 공주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두 소드 마스터를 잃은 것보다 자신의 아버지가 괜찮은지 확인을 할 때였다.

* * *

“아바마마.”

침상에 누워있는 루드 왕을 본 제니스 공주가 재빨리 아버지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이미 그의 안색을 본 순간 소드 마스터들은 죽음 저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 옆에는 프라마 남작이 창백한 얼굴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었다.

“독을 먹었군.”

에반이 프라마 남작을 바라보았다.

“저, 전 모르는 일입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밖에는 소드 마스터들이 있었고 그 두 사람은 지금 이 자리에 없다. 그걸 보면서 에반이 그 두 사람을 어떻게 했으리라 유추를 한 프라마 남작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거짓말이군.”

“저, 정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나는 진실을 볼 수 있지. 그리고 너는 거짓을 말하고 있다. 네가 독을 먹였나?”

“아닙니다.”

“또 거짓이군.”

그의 등 뒤가 축축하게 젖었다.

“에반, 그자는 놔두고 아버지를 살려줘요.”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제니스 공주는 자신의 주위에 자신의 공간을 만들 정도는 되었다. 그리고 그 정도가 되면 독을 몰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저, 전 못하겠어요.”

그녀는 손이 떨릴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소성에 도달할 때까지 공무는 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녀의 주위가 일렁이는 것을 보면 자칫 잘못하면 지금까지 이루어 놓았던 것이 산산이 부서질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군.”

에반이 루드 왕의 몸 위를 훑어 내리자 독기가 사라졌다.

독기를 생기로 바꾼 것이다.

그 덕에 루드 왕은 바로 정신을 차렸다.

“누, 누구냐?”

아직은 흐릿한 시선 속에서 자신의 앞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 구별을 못하는 루드 왕이었다.

“아바마마 저예요.”

“제니스?”

“예. 제니스예요.”

“이곳에는 어쩐 일이지?”

지금 보니 루드 왕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듯했다.

“아바마마…….”

제니스 공주는 잠시 루드 왕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어 프라마 남작을 바라보았다.

루드 왕은 프라마 남작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었었다.

그 당시 프라마 남작은 암살자와 내통한다는 혐의를 받고 쫓겨나야 옳았지만 루드 왕이 그를 용서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은혜를 잊고 그는 루드 왕을 배신하고 독을 먹여 지금까지 깨어나지 못하게 했다.

“고, 공주님.”

“당신은 절대 용서가 안 돼요.”

프라마 남작의 표정이 창백해질 때 루드 왕은 그제야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끼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실은…….”

그녀는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루드 왕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삼왕자가 왕궁을 장악해 자신과 왕세자 그리고 일왕비를 감금한 것과 현재 왕도에 일어난 일 등을 설명한 것이다.

‘이제 보니 모두 파악은 하고 있었군.’

제니스 공주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세한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건 그녀가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일단 나가보자.”

그때 침실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아바마마.”

바로 왕세자와 스미트 후작 그리고 노드에르 백작이었다.

그 뒤로 왕궁 기사단들이 포진을 하니 넓은 침소가 꽉 차 보였다.

“난 괜찮다. 왕세자는 괜찮은가?”

“저는 잠시 억류되었던 것뿐입니다.”

에반이 제니스 공주와 함께 내실로 향했을 때 리츠는 곧바로 왕세자에게 갔다. 그에게 현재 상황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에반이라면 충분히 루드 왕을 구할 거란 믿음이 있었기에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왕세자가 에반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를 구해주어서 감사하오.”

“아닙니다. 전 공주님의 뜻에 따랐을 뿐입니다.”

모두가 제니스 공주를 돌아보자 그가 왕세자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키안은 어떻게 되었죠?”

“그는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모습을 감추다니요?”

“대전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그곳으로 사람을 보내었는데 그의 기사들과 병사들도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내실과 왕비궁에 변고가 생겼다는 소리를 들은 삼왕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친 것처럼 보였다. 소드 마스터가 죽은 것을 안 것이다.

루드 왕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침상에서 일어나다가 비틀거렸다.

“전하, 몸을 보중하소서.”

“전하.”

“아바마마.”

모두가 안타까운 듯 루드 왕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미소를 지었다.

“허허. 짐은 괜찮네.”

하지만 그의 표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

자신의 아들이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에게 독을 먹였으니 심사가 절대 편할 리 없었던 것이다.

“왕세자.”

“예. 아바마마.”

“짐을 대신해 이 사태를 진정시켜 주게.”

“아바마마.”

“이제는 좀 쉬어야지.”

그렇게 말을 한 루드 왕이 침상 한쪽을 치자 그곳이 툭 떨어지며 무언가를 뱉어내었다.

바로 옥새였다.

“이 옥새를 받게나.”

그 말에 왕세자가 깜짝 놀라며 루드 왕의 앞에 꿇어앉았다.

“아바마마, 저는 아직 그걸 받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니야.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건대 왕세자 자네가 나라를 바로 세울 때라네.”

“아바마마.”

“어서.”

힘 있는 목소리였다.

왕세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가 주는 옥새를 조심스레 받았다.

그걸 보며 환한 미소를 지은 루드 왕이 모두에게 말했다.

“이만 물러가게나. 난 좀 쉬고 싶다네. 이제는 왕세자가 짐 대신 일을 처리할 걸세.”

그의 말에 모두가 침소를 빠져나왔다.

“고맙소.”

왕세자가 다시 한 번 에반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닙니다.”

“누님, 누님도 고맙습니다.”

그에 잠시 왕세자를 바라본 제니스 공주가 입을 열었다.

“왕세자.”

“예. 누님.”

“제가 누나로서 한마디 해도 될까요?”

“듣겠습니다.”

그 말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아서 물러났다.

그곳을 지키고 있는 것은 에반과 스미트 후작, 노드에르 백작뿐이었다.

모두가 물러가는 것을 본 제니스 공주가 왕세자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할게. 너는 이번 일을 너무 무르게 처리했어. 이미 키안이 움직일 거란 걸 알고 있었잖아. 안 그래?”

“그, 그건.”

“넌 너무 우유부단해. 이제 일국을 이끌어가야 할 사람이 그렇게 결단성이 없어서 어떻게 하지?”

“죄송합니다.”

“이건 죄송해서 될 문제가 아니야. 지금 아바마마의 상태가 어떤지 넌 아직 잘 모르겠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왕세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제니스 공주의 얼굴이 어두웠다.

“누님…….”

“설명을 해줘요.”

제니스 공주는 차마 말을 못하고 에반에게 떠넘겼다.

에반은 속으로 한숨을 쉬고는 왕세자에게 말했다.

“지금 전하께서는 매우 위독하십니다.”

“위독하시다니요?”

“몸 안으로 독기를 치료하지 않아 몸이 많이 상하신 상태입니다. 지금 빨리 신관을 데리고 오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 말에 노드에르 백작이 빨리 움직였다.

왕세자가 에반에게 물었다.

“그 말이 정말이오?”

“예. 지금 굉장한 고통 속에 있을 겁니다.”

“아…….”

형제끼리 피를 보기 싫었던 왕세자는 이왕자와 삼왕자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버려 두었고 그건 루드 왕을 위험하게 만들었다.

“이제 알았으면 이제부터라도 과단성을 가져야 해. 알겠지? 루셀.”

“예. 누님.”

“이야기가 끝났으면 저는 왕세자님과 함께 대전으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스미트 후작님.”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왕세자를 달래며 스미트 후작이 대전으로 향했다.

이미 내신들을 불러들였으니 곧 대전에는 그들로 꽉 찰 것이다. 그곳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되기에 왕세자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그 모습을 잠시 보던 제니스 공주의 표정은 굉장히 어두웠다.

“괜찮을 거다.”

“전 왕세자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

“전 이 나라에 흘러내리는 많은 피가 보기 싫어요.”

“저들을 믿어.”

제니스 공주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제가 보았던 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어요. 아무리 부정을 해도 피가 흐르겠죠.”

“그렇다면 마음을 쓰지 마라. 그 모습이 별로 좋지 않으니 말이야.”

“그런가요?”

“그래. 네가 그런 말을 하면 도와주러 온 나는 뭐가 되지?”

그 말에 제니스 공주가 웃었다.

“괜히 당신 탓을 하는 것같이 되었군요.”

“뭐가 웃기지?”

“목석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저 때문에 이렇게 달려와 준 것을 보니 웃음이 나오네요.”

“이번만이다.”

“정말요?”

“그래.”

“정말인지 어디 시험해 볼까요?”

에반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있는 슬픔이 느껴지는데도 그녀는 자신을 위해 밝게 행동하려 하고 있었다.

그것이 에반을 미소 짓게 하고 있었다.

* * *

왕세자는 내신들을 다독이며 왕궁을 안정시켰지만 도망간 삼왕자가 문제였다.

그는 왕세자가 루드 왕을 죽이려 했고 스미트 후작과 노드에르 백작의 힘을 업어 왕위를 찬탈하려 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그뿐이면 믿지 않았겠지만 이왕자가 그에 동조를 해 두 사람이 연합을 하니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 명분을 앞세운 두 왕자는 서쪽을 장악하고 아트베라를 중심으로 난을 일으켰다.

제 이차 크라운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싸움은 싱거웠다.

처음으로 내세운 명분은 루드 왕이 옥새를 맡기면서 왕세자를 처단해달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는데 삼왕자가 가지고 온 옥새가 가짜라고 판명 난 것이다.

그리고 루드 왕에게서 직접 옥새를 전해 받은 왕세자는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여론이 좋지 못하게 된 이왕자와 삼왕자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그들은 결단을 내린다.

왕국을 찢어서 가질 결심을 한 것이다.

만약 두 소드 마스터가 살아만 있었다면 절대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겠지만 그들의 병력 내에 소드 마스터가 없다는 사실에 왕세자와 제대로 싸우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들이 그럼에도 버틸 수 있는 것은 그랜트 크로스를 만들 때 만든 몇 개의 관문이 방어의 역할을 한 것이다.

관문 안에 새겨져 있는 마법진은 마탑에 특별하게 부탁을 하여 공수한 것으로 7서클의 마법사가 아니라면 절대로 마법이 통하지 않게 되어 있었다.

그럼으로써 그들을 제압하기 위해 모인 십만의 병력은 첫 관문인 엘도라 관문을 넘지 못하고 묶여 있어야만 했다.

그걸 보면서 두 왕자들은 크리프 왕국을 양분하여 가질 수 있다는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꿈도 채 반년이 지나기 전에 무산이 되었다.

스미트 후작과 노드에르 백작의 물밑 작업으로 처음에 이왕자와 삼왕자의 편에 섰던 귀족들이 배신을 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반년 동안 행한 왕자들의 착취에 민중들마저 봉기를 일으켰다.

안으로 무너지니 어느 순산 엘도라 관문을 십만의 병력이 넘을 수 있었고 왕자들은 그대로 아트베라 앞에 있는 아트베라 관문까지 밀려버리게 되었다.

처음 절반을 먹으려는 욕심에서 이제는 십분의 일도 자신들의 땅이 남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이왕자는 삼왕자가 수습을 하는 틈을 타고 홀로 도망을 갔다.

그런데 거기에서 이왕자는 최악의 선택을 했다.

폰다 왕국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의 명분은 이렇다.

-무능한 왕세자로 인하여 민란이 일어나고 그 뒤에서 루드 왕은 그걸 힘으로 제압하여 민심을 돌려버렸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민란이 일어난 것은 맞지만 그건 이왕자로 인해서 일어난 민란이었고 또한 힘으로 제압한 것 역시 그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뻔뻔하게 나왔고 폰다 왕국은 눈과 귀를 막고 이왕자의 편에 섰다.

또다시 내전에서 외전으로 변질이 되는 순간이었다.

* * *

쾅!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진정하시오. 지금은 진정하고 차분히 생각을 할 때입니다.”

“그렇소. 일단 모인 병력을 폰다 왕국과의 전쟁을 위해 북쪽으로 보내야 합니다.”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어째서요?”

“아직 삼왕자의 세력이 남아 있습니다. 그 수가 오만인데 어찌 병력을 빼겠습니까?”

왕세자는 그들의 말을 듣고 있다가 한 귀족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오?”

그가 본 귀족은 이제 크리프 왕국에 한 명 남은 소드 마스터인 바우어 백작이었다.

곱상한 얼굴에 체구가 장대하지도 않고 손도 고와 절대 검사로 보이지 않지만 그는 이미 오십대가 넘은 나이의 소드 마스터였다.

하지만 그냥 보자면 삼십대로 보이는 그는 대륙에서도 이름을 떨치는 검사이기도 했다.

“신은 타 왕국이 더욱 걱정입니다.”

“다른 왕국이 무슨 문제란 말이오?”

현재 폰다 왕국을 빼고는 바스트 제국에 인접해 있는 왕국들은 모두 동맹국이었다.

본래는 폰다 왕국도 동맹국이다. 그런데 지난 전쟁으로 인하여 크리프 왕국과 사이가 틀어졌고 폰다 왕국과 동맹국인 나라도 있고 아닌 곳도 있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두가 동맹국이었고 몇 나라가 함께 뭉친 것이기에 서로의 감시와 견제로 인하여 맹약은 끈끈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우어 백작이 말하는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신이 보기에는 남쪽에 있는 이들이 문제입니다.”

“남쪽에 나라가 있습니까?”

“슬슬 나라의 틀이 잡히고 있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음.”

대륙을 북, 중, 남으로 나눈다면 북은 두 개의 제국으로 되어 있고, 중은 여러 개의 왕국 그리고 남은 전란의 지역이었다. 본래 남쪽에도 하나의 거대한 제국이 있었지만 이백 년 전 제국이 무너지자 서로 왕국을 세우면서 아귀다툼을 벌였고 그 다툼이 끝을 보이지 않고 계속 지속이 되었다.

나라가 없다면 다른 왕국들이 눈독을 들일만도 한데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무너진 제국과 연관이 없던 왕국이 자신들의 땅을 먹으려 하면 그들은 그대로 힘을 합쳐서 몰아내었다.

그들이 합친 힘은 절대 약한 것이 아니어서 중대륙의 왕국들은 신경을 끄고 살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 남대륙에 서서히 나라의 기틀이 완성이 된다는 소리가 왕세자를 난감하게 하고 있었다.

모두가 말을 하지 못하고 침묵에 잠겨 있을 때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제가 의견을 내어도 되겠습니까?”

“그대는?”

“코퍼 남작이라고 합니다.”

“아, 이 영지의 주인이었군.”

지금 이곳은 코퍼 남작령이었다.

만약 이곳이 아니었다면 절대 코퍼 남작은 여기 있을 처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코퍼 남작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서든 기회를 잡고 싶었다. 지금이 아니면 어중간한 곳에 위치한 그의 영지만큼 그도 어중간하게 살다 끝날 수 있었다. 그에게 중앙으로 진출할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이었고 이렇게 나설 자리가 아닌데도 나서는 대범함을 보였다.

“해보시오.”

“남쪽은 동맹국에게 맡기고 저희는 이번 일에 집중하는 겁니다.”

“동맹국에 말이오?”

“어차피 그들 또한 남쪽에 나라가 생기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이번 일을 알려 그쪽에 신경을 쓰게 하는 겁니다. 분명 우리 왕국의 동맹국 중에는 아직도 폰다 왕국과 인연이 있는 나라가 있는 만큼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것이 좋다 생각합니다.”

“흠. 좋은 의견이군.”

이곳에 모인 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나타났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참모를 맡고 있는 로버슨 자작이었다. 그는 이번 내전의 총사령관인 로버슨 후작의 아들이기도 했다.

“무엇이오?”

“아직 저희는 삼왕자군을 처리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그 병력을 처리하지 못하는 한 십만의 병력을 모두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총사령관의 아들이기에 후광을 입고 참모로 발탁되었다는 세간의 평가가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자 그런 소리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왕자와 삼왕자 쪽에 선 귀족들을 다시 끌어들여야 한다고 스미트 후작과 노드에르 백작을 설득한 것도 그였고 민란을 은근히 조종한 것도 그였다.

군사라기보다는 책사에 가까웠지만 이런 내전에서는 정말로 유용한 참모이기도 했다.

“그렇기는 하겠군.”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방법이 있습니까?”

“예. 그들의 수는 오만이지만 오합지졸이며 언제 무너질지 모를 모래성 위에 위태하게 서있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적은 병력만으로도 그들을 나오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이 오만이라는 숫자에도 굴하지 않는 담력을 가진 병력들을 보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이들이 있겠는가?”

“적은 숫자이지만 있기는 합니다.”

“누군가?”

왕세자가 관심을 드러내었다.

로버슨 자작은 가만히 앉아 있는 에반을 힐끗 한 번 바라보더니 왕세자에게 말했다.

“바로 글로리 기사단입니다. 그들이라면 분명 해낼 수 있을 겁니다.”

“음.”

“아…….”

“그들이 있었군.”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그들도 에반의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글로리 기사단이라고 하자 본래 글로리 기사단이 속해 있었던 크라우스 백작가가 생각이 난 것이다.

에반은 명목상 왕세자를 돕기 위해 병사 천 명을 데리고 전쟁에 참여했다. 백작가에서 단 천 명의 병사가 참여를 했지만 거기에 지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크라우스 백작가는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충분히 공을 세웠다. 왕을 구하는데 일조를 했으니 아마 가장 큰 공일 것이다. 그래서 다른 귀족들은 약간의 병력만을 데리고 온 에반을 보며 오히려 안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왕세자가 생각지도 못한 발언을 했다.

“에반 자작.”

“예. 저하.”

“글로리 기사단을 자네가 맡아서 막아보는 것이 어떤가?”

“왕세자님.”

“어찌 그런 중책을…….”

이건 말 그대로 중책이었고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 맡아야 할 자리였다.

그들이 이의를 제기하자 왕세자가 물었다.

“그렇다면 여기 있는 분들 중 이 일을 맡을 사람이 있소?”

그 말에 대답을 하는 귀족이 없었다.

중책이지만 잘못하면 목숨을 보장하지 못하는 일이다.

몇몇은 할 마음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여기보다는 폰다 왕국과의 전쟁에서 더욱 실력을 발휘해야 하기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왕세자의 물음에 선뜻 나서는 사람은 없었고 조용해진 좌중을 한차례 둘러본 왕세자가 에반을 쳐다보았다.

“어떤가?”

“그런 영광된 자리라면 한 번 해보겠습니다.”

“미안하지만 그리 많은 병력은 주지 못한다네.”

“알겠습니다.”

이렇게 삼왕자군 방어라는 중책을 에반이 맡게 되었다.

* * *

“제길, 그 새끼가…….”

“진정하십시오.”

삼왕자가 화를 내며 탁자를 치자 그 옆에 있던 브런디 자작이 그를 말렸다.

“지금 화가 안 나게 생겼어?”

“그래도 이왕자님께서는 병력을 전혀 가져가지 않으셨습니다. 그건 삼왕자님을 믿는 겁니다.”

“흥. 그 새끼가 날 믿어? 오우거가 오크를 생각해주는 소리 하고 있군.”

뼛속 깊이 불신을 가지고 있는 그를 보면서 브런디 자작은 난감했다.

‘제길. 내가 줄을 잘못 서가지고…….’

만약 다른 귀족들처럼 몸을 뺄 수 있는 상황이었으면 그도 여기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반란에 너무 깊게 관여를 했기에 그는 빼도 박도 못하고 이렇게 삼왕자를 졸졸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브런디 자작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삼왕자가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새끼가 뭐라고 했어?”

“예?”

“네가 이리저리 붙은 거 다 아니까 무슨 말을 했는지 이야기나 해봐.”

그 말에 브런디 자작은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이미 삼왕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던 것이다.

“그, 그것이 지원을 해달라고 했습니다.”

“지원?”

“예. 폰다 왕국과 손을 잡고 왕세자의 눈을 흐리는 사이 병력을 이끌고 수도를 점령해 달랍니다.”

“그러니까 일단 외세와 손을 잡았지만 외세에 우리 왕국을 팔아먹는 짓은 하지 않겠다는 소린가?”

“예.”

한마디를 하면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듣는 삼왕자를 보며 브런디 자작은 자신이 지금까지 삼왕자를 잘못 평가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계획은?”

“예?”

“그냥 오만의 병력을 밀고 들어가면 될 줄 알아? 계획을 짜야 할 것 아냐?”

“아. 예.”

“하. 대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삼왕자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실 그는 왕의 자리에 그리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의 본모습을 숨긴 채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 싶었다.

그의 꿈은 세상을 자신의 두 눈으로 보면서 자유롭게 사는 것이었다.

그런 그를 이런 상황에 오게 만든 것은 바로 그의 어머니와 외할아버지였다.

이왕자를 어떻게 해서든 왕의 자리에 올리려 했던 그들은 멍청하다고 생각되는 삼왕자를 희생시키려 했다. 삼왕자도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기에 그들의 말을 듣는 척하면서 여차하면 발을 빼려 했다.

만약 자신을 따랐던 위쓰가 죽지만 않았다면 자신은 절대 이곳에 있지 않았을 것이다. 복수심이 뭐라고 그의 눈을 지금껏 가리고 있었고 지금의 상황에 오게 된 것이다.

‘이미 누가 그를 죽였는지는 안다. 그러니 복수는 나중에 해도 되지 않을까?’

삼왕자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브런디 자작이 멀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에게 소리쳤다.

“뭐해?”

“예?”

“나가서 계획을 짜 와야 할 것 아니야! 빨리 안 가?”

“가, 가겠습니다.”

그가 물러나고 삼왕자는 고심을 하기 시작했다.

‘우선 남아있는 자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서 몸을 빼든 말든 해야 하는가?’

이왕자의 바람과는 달리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삼왕자였다.

* * *

에반이 맡은 방어군의 병력은 단 오천이었다.

거기에 본래 에반이 데리고 온 병사들의 숫자를 합치면 육천밖에 되지 않았다. 글로리 기사단이 올 것이지만 기사의 숫자도 글로리 기사단이 전부다.

왕세자가 생각하는 그림은 에반이 밀리더라도 엘도라 관문에서 삼왕자군을 막아 고착화시켜주는 것이다.

말 그대로 방어군이니 방어가 용이한 지점에서 피해 없이 막아주는 것이 주 임무인 것이다.

일견 쉬워 보이는 일이었지만 삼왕자군의 숫자가 오만이나 되니 생각대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에반이 이번 일을 맡자 쥬드가 병력을 데리고 출정했다.

본래 크라우스 백작가 자체는 중립을 표방하기 위해서 표면적으로는 에반이 자신이 가진 병력만을 데리고 왕세자군에 힘을 보탠 것이었는데 폰다 왕국과 전쟁이 일어나자 이제 중립을 표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에반은 병사들도 모조리 함께 끌고 오고 싶었지만 예비 기사단과 크라우스 기사단만을 이 전장으로 불렀다.

“어서 오십시오.”

왕세자가 오천의 병력을 에반에게 주고 떠난 다음날 온 쥬드를 환영한 것은 이 영지의 주인인 코퍼 남작이었다.

크라우스 백작가가 영지 개념이 아닌 봉토 개념으로 자리를 잡고 있고 자신은 한 영지의 영주이지만 코퍼 남작은 깍듯했다. 크라우스 백작가가 가진 힘은 절대 만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형님께 안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코퍼 남작이 사는 저택에 있는 자그마한 회의실이었다.

그곳에는 노기사가 에반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가 들어오는 쥬드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허. 가주님이십니까?”

“오랜만에 보는군요. 버피 경.”

버피라 불린 노기사가 벌떡 일어나더니 쥬드에게 다가가 와락 그를 안았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윽. 아픕니다.”

“하하하.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그러면서 쥬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가주께서도 늙으셨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럽니다.”

쥬드를 가르친 스승과 같은 이가 바로 버피였다. 어렸을 때부터 그가 크는 걸 보아왔던 그는 이제는 중년인의 티가 팍팍 나는 쥬드를 보자 허허로운 웃음을 짓는 것이다.

“버피 경만 늙었을까요?”

“그런가요? 허허허.”

그가 웃고 있을 때 누군가 회의실로 들어오며 그를 타박했다.

“그러게 왜 은퇴를 안 하고 기사단 안에 죽치고 있나? 무슨 영광을 보려고?”

“레오폴트? 자네가 왜 여기 있나?”

“왜긴. 난 크라우스 기사단을 가르치고 있네. 그래서 그놈들이 칼질을 잘하나 보러 온 것이네.”

“흥. 그놈의 오지랖은 아직도 넓은가 보군.”

두 사람이 말다툼을 하자 코퍼 남작은 그저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다.

글로리 기사단은 국외에서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도 굉장히 유명했고 그 중 가장 이름을 떨친 두 사람이 바로 기사단장과 부기사단장이었다.

기사들에게는 유명한 두 사람이었고 그 두 사람이 말싸움을 하고 있으니 기사 아카데미를 나온 코퍼 남작으로서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자자. 그만하시고 자리에 앉으시지요. 앞에 오만의 병력이 있습니다.”

“크흠. 알겠습니다. 가주님.”

“가주님의 얼굴을 봐서 앉겠습니다.”

그 말에 다시 레오폴트가 버피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쥬드의 말도 있고 해서 그냥 자리에 앉았다. 모두가 착석을 하는 가운데 코퍼 남작만이 서있었다.

“앉으시지요.”

“제, 제가 앉아도 될까요?”

“이 영지의 주인이 앉지 않으면 누가 앉겠습니까?”

“아. 예.”

코퍼 남작이 앉고 쥬드가 에반을 바라보았다.

“계획은 있습니까?”

“있긴 하다만 아직 잘 모르겠다.”

“무슨 계획입니까?”

“그들에게 기습적으로 타격하는 거지. 그러면서 발걸음을 늦추는 방법을 쓴다.”

“가능하겠습니까?”

쥬드의 물음에 에반이 고개를 끄덕이자 코퍼 남작이 끼어들었다.

“저 진영에는 두 명의 마스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능하겠습니까?”

그 말에 모두가 그를 돌아보았다.

“왜, 왜 그러십니까?”

“너는 마스터를 본 적이 있나?”

“당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뜻으로 물어 본 것이 아니다.”

“그럼?”

“삼왕자군에 있는 두 명의 마스터를 내전이 일어나는 동안 본 적이 있냐고 묻는 거다.”

“그건…….”

생각해보니 내전이 일어나고 단 한 번도 그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회의에서도 소드 마스터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도 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어, 어째서?”

“그야 삼왕자군에는 소드 마스터가 없기 때문이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쥬드가 에반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대답을 한 건 언제 들어왔는지 앉아있던 베켓이었다.

“그건 극비라 함부로 이야기를 하면 안 되는 사안입니다.”

“그런가?”

“누, 누구십니까?”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나 말을 하고 있는 베켓에게 코퍼 남작이 물었다.

“우리쪽 사람이다.”

“아. 예.”

“알아보라고 한 건 알아보았나?”

“예. 역시가 유타 상단에서 자금이 흘러들어왔습니다.”

“신경 쓸 것 없다고 말한 건 베켓 너였지?”

“부가주님, 정말 억울합니다. 유타 상단의 자금이 빠져나간 것도 아니고 전 상단주가 비밀리에 모아놓은 재산에서 빠져나간 겁니다. 당연히 눈치 채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후계자라면 이제 아홉 살 아닌가?”

“맞습니다.”

“그럼 이번 일은 누가 꾸몄지?”

“삼 년 전에 나타난 후계자의 후원자가 꾸민 짓 같습니다.”

“그 후원자에 대한 건 아직까지 정확한 정보가 없고 말이지.”

“예.”

베켓의 음성이 조그마해지더니 입을 다물었다.

변명을 하려면 아주 많았지만 에반의 앞에서는 그냥 입 다물고 있는 것이 백 마디의 변명보다 좋다는 걸 알기에 가만히 있는 베켓이었다.

“이번 일이라면?”

“이왕자에게 군비를 제공하고 폰다 왕국 안에서 전쟁을 조장한 일을 말하는 겁니다.”

그 말에 코퍼 남작이 놀라 물었다.

“그걸 상단이 했다는 말입니까?”

다시 한 번 시선이 코퍼 남작에게 갔다.

“아니, 전 그냥 그깟 상단에서 이런 일을 꾸몄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그들이 가진 돈은 나라를 사고팔 정도가 된다. 그러니 뒤에서 전쟁을 조장하는 것쯤은 아주 쉬운 일이지.”

“그럴 수가…….”

자신도 세상을 의심하고 살아왔다지만 전쟁을 뒤에서 조장하는 세력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코퍼 남작이 망연히 있는 가운데 에반이 베켓에게 물었다.

“일단 삼왕자군에 대한 정보를 가져와봐.”

“그럴 줄 알고 준비해두었습니다.”

그 말에 함께 베켓이 현재 삼왕자군의 병력 현황을 주었다.

잠시 그걸 본 에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뭐가 좋다는 겁니까?”

“일이 쉽게 흘러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에반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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