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7장 (38/60)

제7장

다그닥! 다그닥!

“하…….”

마차 안에서 몸을 기대고 있던 제니스 공주가 한숨을 쉬었다.

“공주님, 괜찮으세요?”

어릴 때부터 함께해 온 시녀인 제시의 물음에 공주가 웃으며 말했다.

“난 괜찮아.”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제시가 볼 때 걱정 근심이 한가득인 얼굴이었지만 괜찮다고 하니 다른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나저나 갑갑한데 밖을 볼 수 있게 차창 좀 열어줄 수 있겠니?”

“잠시만요. 어디인지 확인을 먼저 할게요.”

공주는 함부로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제시는 살며시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금 지나가는 곳이 허허벌판이라는 걸 확인한 제시가 차창을 열었다.

“자리 좀 바꾸자.”

“예.”

공주가 제시와 자리를 바꾸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

속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넓은 대지가 그녀의 눈에 들어오면서 그녀의 예술혼을 깨우는 것 같았다. 무언가 그릴 도구가 있다면 그림으로 남겨보고 싶다는 욕구에 손이 근질근질했다.

언제나 좁은 왕궁이나 사람이 많은 곳에서만 생활을 하다가 이런 곳을 보자 너무나 좋은 제니스 공주였다.

만약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대지에 묻혀 있다는 걸 안다면 이렇게 좋아하지 못하겠지만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넓은 대지뿐이었다.

잠시 동안 밖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는 사이 병사도 없는 성벽을 마차가 지나갔다.

크라우스 가문이 영지전을 치르기 전의 경계에 있던 성벽이었다.

“응?”

그런데 갑자기 공주가 무엇을 보았는지 눈을 크게 뜨더니 제시에게 말했다.

“여기서 잠시 쉬자고 이야기 좀 하렴.”

“여기서 쉰다고요?”

“그래.”

공주가 두 눈을 빛내는 것을 본 제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기분이 좋아진 듯하자 뭐라도 도와주고 싶었다.

“아저씨, 여기에서 잠시 멈춰 주실 수 있나요?”

앞에 나 있는 조그마한 창을 열고 말하자 마부가 속도를 줄이면서 옆에 가던 리츠에게 말했고 리츠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마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워, 워.”

히이잉.

마차가 서는 걸 느낀 공주가 제시가 문을 아직 열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열고 나갔다.

“공주님, 위험합니다.”

제니스 공주의 돌발행동에 모두가 놀란 가운데 공주는 어느 정도 달려 나가더니 한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공주…….”

제시가 그녀를 부르려다가 멈칫했다. 저런 표정을 지을 때는 최대한 조용히 해줘야 한다는 걸 아는 까닭이다.

한참을 바라보던 제니스 공주가 중얼거렸다.

“아름다워.”

제니스 공주가 갑자기 제시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렇지 않니?”

“예?”

제시는 대체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몰라할 때 제니스 공주가 성벽을 가리켰다.

지난 영지전의 여파로 곳곳이 무너지고 아직도 돌이 박혀 있는 곳도 있었다. 영지가 늘어나고 여기에 경계를 할 필요가 없어지자 방치되어 버린 성벽이었다.

제시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보다가 공주가 대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깨달았다.

성벽의 한쪽에 이상한 구멍이 뚫려져 있는 부분에 묘하게 시선 간 것이다.

“저것 봐. 저 조각 보이지?”

자신에게는 그저 큰 구멍으로 보이지만 그녀에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듯했다.

“예.”

“정말 완벽한 원이야. 그래서 아름다워.”

제시도 공주를 따라 많은 예술품을 봐왔고 많은 문학작품을 읽었다.

그런데도 제니스 공주의 미적 감각에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공주가 설명을 해주어도 제시의 눈에는 그저 뻥 뚫린 구멍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성벽 위에 난 구멍은 공주가 말한 것처럼 완벽한 원 모양도 아니었다.

“제 눈에는 원으로 보이지 않는데요. 공주님.”

“제시, 너 내가 전에 준 책 읽지 않은 거야?”

“무슨 책이요?”

“동방에 대한 책 말이야. 거기에 비움의 미학이라는 게 나오잖아. 그 책에 나오는 이야기와 같이 보이지 않으니 더욱 완벽한 원이 되는 거라고.”

“그래요?”

하지만 제시는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공주는 제시가 이해를 하지 못하자 다시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들며 정신없이 성벽을 바라보았다.

공주는 문득 궁금해졌다.

“하, 저런 걸 만든 사람은 누굴까?”

그러자 옆에 가만히 있던 아그나르가 나섰다.

그는 이번에 공주와 함께 크라우스 백작가로 돌아가는 와중이었다.

“제 주군이 만드신 흔적입니다.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지만 말입니다.”

본래는 원이 아닌 주먹 모양이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주먹 모양보다 큰 원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제니스 공주가 물었다.

“아그나르 경의 주군이라면?”

“에반 크라우스 자작님입니다.”

“아, 그분이…….”

요즘 들어 가장 많이 듣는 이름 중 하나였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크라우스 백작가를 찾아가는 이유가 그 때문이니 당연히 기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다가 이런 흔적이 만들어졌죠? 석공을 써서 저렇게 만든 건가요?”

“아마, 그랬을 겁니다. 본래는 저런 흔적이 아닌 다른 흔적이었는데 그걸 없애기 위해 명령을 한 것 같습니다.”

사실은 에반이 마법사들을 죽일 때 주먹 모양이 새겨졌다고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주먹 모양이 지워진 것을 보면 어쩌면 석공을 썼을 수도 있었다.

물론 아그나르는 에반이 다시 여기에 원 모양의 구멍을 내었다고 생각했다. 그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제니스 공주가 조금이라도 에반에게 좋은 마음을 품게 하기 위해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리고 제니스 공주는 정말로 에반에게 약간이나마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 * *

“형님.”

“무슨 일이지? 가주.”

카캉.

에반이 자신을 공격해 온 칼과 라우웰을 밀어내며 물었다.

“공주가 오실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가봐야 하지요.”

“내가?”

“예. 왕의 뜻은 거기에 있을 거니까요.”

“귀찮은데.”

“그래도 나가봐야 합니다. 부가주이지 않습니까?”

“알았다.”

사실 에반도 나가봐야 한다는 걸 안다.

지금까지 왕가에 보여준 모습은 자신의 충성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니 그런 연기를 계속 보여주어야만 했다.

“둘은 여기서 더 연습하고 있어.”

“예.”

대답을 한 칼과 라우웰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걸 보는 쥬드가 미소를 지었다.

“이곳이 아니면 절대 버티지 못하고 연무장이 벌써 부서졌을 겁니다.”

이곳은 본가의 지하에 땅을 파고 만든 연무장이었다. 드워프들에게 부탁해서 비밀스럽고 안전한 연무장을 만들어 달라고 하자 저택의 지하로 파고 내려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지하에 땅을 파면 지반이 약해져 저택이 무너질 위험이 있었겠지만 드워프들이 직접 설계를 하고 감독을 한터라 정말로 튼튼했다.

게다가 아무리 밤낮을 싸워도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았다.

이런 점들 때문에 에반은 크라우스 가문에 복귀한 이후에 이곳 지하 연무장에서만 살았다.

부가주가 되긴 했지만 노기사들이 원로직을 맡아 잘해주고 있었고 크라우스 기사단의 기사들도 노기사들의 도움만으로 아직까지는 잘 굴러갔기 때문이다.

“역시 드워프라는 거지.”

에반이 마음에 든다는 듯 말했다.

쥬드는 에반의 말에 미소를 짓고는 힐끗 대치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칼은 예전에 에반이 가르친다면서 데려왔던 연약한 병사가 아니었다. 피의 광전사라고 불리는 라우웰에게 꿀리지 않는 투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재미있겠어.’

공주를 마중하러 가야 하기에 저 싸움의 결과를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쥬드는 에반과 함께 지하 연무장을 나섰다.

* * *

화려한 마차가 저택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많은 호위들의 눈에 보였다.

거기에는 리츠도 보였고 아그나르도 보였다.

에반과 쥬드가 서 있는 자리에 마차가 멈추고 공주가 내렸다.

“어서 오십시오. 공주님.”

“환영해줘서 고마워요. 백작님.”

쥬드가 인사하자 이번에는 에반이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에반 크라우스 자작입니다.”

그 말에 제니스 공주가 놀라며 옆의 리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에반에게 말했다.

“제가 듣기로는 리츠 경과 나이가 비슷하다 들었는데 제가 잘못 들은 건가요?”

“아닙니다. 그의 말이 맞습니다.”

“호호. 젊게 보인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설마 이렇게 젊을 줄은 정말 몰랐군요.”

공주는 왕의 속내가 에반에게 있다는 것을 안다.

왕이 처음 그와 자신의 인연을 만들라고 했을 때 리츠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리츠는 어렸을 적의 이야기를 해주면서 에반과의 추억을 말해주었고 그녀의 머릿속에서 에반의 이미지는 중년의 아저씨였다.

그런데 지금 보니 중년의 아저씨가 아닌 스무 살 청년으로 보이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쥬드가 슬쩍 에반을 앞으로 밀었다.

그전에 피할 수 있다면 있는 손길이었지만 쥬드였기에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왔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가시지요.”

“고마워요.”

저택으로 가는 길은 많은 보수가 되어 있었다.

본래는 정원의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전혀 보수를 하지 않았었다. 손님이 오지 않으니 자연스레 소홀해진 것이다.

그러던 것이 미관상 좋지 않다면서 드워프들이 나서서 손질을 했고 쥬드가 그 뒤를 이어 사람들을 시켜 정원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그 중 백미는 정원의 한가운데에서 만나게 되는 분수대였다.

걸어가는 도중 분수대를 보며 공주가 멈춰 섰다.

“와, 멋지군요.”

물은 네 개의 구슬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는데 그 구슬의 색이 달라 물이 뿜어져 나올 때 구슬의 색에 맞추어 네 개의 색으로 변화된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아래로 떨어진 물은 색이 섞이고 다시 본래 투명한 물로 변했다.

그 마법 같은 현상을 한참 바라보던 제니스 공주가 말했다.

“속성석이군요. 게다가 저렇게 조화롭게 나오다니 멋져요.”

“백여 년 전 저희 가문을 방문했던 파보베시란 분이 만든 작품입니다.”

그에 제니스 공주가 눈을 반짝이면 에반을 돌아보았다.

“파보베시요? 설마 그 건축계의 거장이라는 파보베시 말인가요?”

“맞습니다.”

“아, 이런 곳에 그의 작품이 있다니…….”

왕가에도 없는 것이 그의 작품이었다.

그런데 그의 작품을 이런 곳에서 발견을 했으니 제니스 공주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의문이 들었다.

왜 그가 크라우스 가문에 작품을 남겼나 하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듣고 싶군요.”

“선조께서 예술에 많은 관심이 있었답니다. 그래서 많은 예술가와 친분을 있었고 그 중 파보베시라는 분도 있었던 것뿐입니다.”

에반이 어떻게 그들이 만났고 왜 정원에 이런 분수대를 만들었는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건 쥬드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공주에게 말하는 이야기는 그도 처음 들어보는지라 당연히 귀를 기울였다.

그에 관한 몇 가지 에피소드의 이야기가 끝나자 공주가 탄성을 터뜨렸다.

“과연.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사연을 들어보니 이 분수대가 더욱 특별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정신없이 분수대를 바라볼 때 쥬드가 에반에게 넌지시 물었다.

“대체 그런 건 어디에서 들은 겁니까?”

“서재에서 읽은 것이다. 넌 몰랐나?”

“제가 그걸 어찌 압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서재에 들어가는 걸 싫어하는 건 마찬가지인가 보구나.”

“본성이 어디 갑니까?”

“그래도 가문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적혀 있으니 거기 가서 한 번 읽어보아라.”

“알겠습니다.”

대답은 하였지만 서재에 갈지는 미지수였다.

그때 리츠가 옆으로 왔다.

“크라우스 자작님.”

“그냥 에반이라 불러라. 네가 나한테 존칭을 붙이니 이상하다.”

그 말에 리츠가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뭐, 원하신다면.”

리츠도 공주의 기사가 되면서 남작의 위를 받았다. 그러니 평대를 해도 귀족의 예에 벗어나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왜 그러지?”

“이제 공주님을 안으로 모셔야지. 아직은 날씨가 쌀쌀해.”

이제 늦봄이지만 오늘은 조금 추운 날씨였다.

“알았다.”

그에 에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니스 공주에게 말했다.

“공주님.”

“예?”

정신없이 분수대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던 공주는 에반이 부르자 대답을 하면서 그를 바라보았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이곳에 방문한 예술가는 이것을 만든 파보베시뿐 아니라 더 많습니다.”

공주의 눈에 기대가 서렸다.

“그 말은 더 많은 다른 분들의 작품이 있다는 말씀인가요?”

“예. 저택 안으로 들어가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어서 가죠.”

그녀의 머릿속에는 대가들의 작품을 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는 듯했다.

그러자 호위 중 한 명이 나섰다.

“공주마마, 아직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가요?”

본래 손님으로 방문을 하면 일단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예의였다. 하지만 제니스 공주는 그런 시간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쥬드가 눈치 챘는지 나섰다.

“그런 예는 저희 가문에는 맞지 않습니다. 본가는 허례허식을 싫어하니까요.”

“그럼?”

쥬드가 에반을 흘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여기 부가주가 공주마마를 안내해 드릴 겁니다.”

“가시지요.”

에반이 앞장서고 그 뒤로 제니스 공주가 뒤따랐다.

“자네들도 먼 길을 왔는데 쉬어야지.”

“그래도 공주님을 호위하는 것이 저희 일인지라.”

“몇 명만 공주님을 모시게나. 여기는 안전하다네.”

“알겠습니다. 백작님.”

그 말에 두 명의 기사가 제니스 공주의 뒤를 따라붙었다.

제니스 공주는 그들이 따라붙는지도 모르고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 * *

공주는 현재 기분이 너무 좋았다.

왕궁 안에서도 볼 수 없는 진귀한 예술품들이 저택 곳곳에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안내하는 크라우스 자작은 예술품을 보는 안목이 높아 자신과의 대화가 잘 통하는 상대였다.

자신의 주위에서 만날 수 있는 상대들은 대부분 귀족의 영애들뿐이었고 그녀들이 좋아하는 건 사치와 사교계의 소문뿐이었다.

그녀들을 만나면 장단을 맞춰주기는 하지만 그녀들과 있는 시간이 즐거운 건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에게 기사들은 뇌까지 근육만으로 찼다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 그녀를 호위하는 기사들이었으니 사실 그녀와 제대로 예술이나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상대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이십삼 년을 살아오면서 정말 마음에 맞는 상대를 찾기 어려웠는데 그 몇 명 없는 상대를 찾은 제니스 공주는 에반과 함께 대화를 나누기를 좋아하며 계속 붙어 다녔다.

그것 때문에 가장 귀찮은 건 당연히 에반이었다.

에반으로서는 그저 책에 나와 있는 것을 토대로 정보를 취합하여 공주에게 말했을 뿐이지만 공주는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에반이 자신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흑마법사에게 억류되어서 고통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럼 낌새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구나.’

그녀는 당연히 이곳에 오기 전 에반에 대해 조사를 했기 때문에 그걸 알고 있었다.

흑마법사가 아닌지 다오를 통해서 알아보고자 했다.

그리고 그가 다오의 십이사도 앞에서 자신이 흑마법사가 아님을 당당히 증명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실 공주가 모르는 뒷이야기도 있었다.

다오로서는 좀 더 그를 괴롭힐 수 있었으나 그들에게 흑마법사의 본거지를 하나 알려주는 대가로 그냥 덮었다. 또한 사라졌다는 루네르가 포른 신전의 성녀로 나타나고 신전을 위해 그걸 숨겨주었다는 것을 알고는 관심을 끊었다.

또한 크라우스 가문에 라우웰이 머물러 있고 싶다고 하니 상관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공주는 이런 사실을 모르지만 어쨌든 에반은 아무런 하자가 없는 사람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에요.”

에반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제니스 공주에게 묻자 공주는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리면서 얼굴을 붉혔다.

꿈이 많던 시절 그녀는 자신과 예술을 논하고 문학에 대해 토론을 하는 배우자를 꿈꾸었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그저 예술을 좋아한다고만 알고 있는데 그녀는 예술 뿐 아니라 문학 쪽에도 일가견이 있었고 나아가 학문에도 능통했다.

그런 그녀였기에 언제나 자신과 눈높이가 맞는 배우자를 찾았고 사교계에 진출하여 많은 이들을 접하면서 그것이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요즘 귀족들은 예술은커녕 글자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실망한 그녀는 혼자만의 세상에 갇혀 예술과 문학을 공부하며 시간의 흐름을 잊어갔다.

그런 그녀에게 젊게 보이는 남자로서는 처음으로 마음에 드는 남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의 나이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겉모습으로는 그런 걸 찾아볼 수 없으니 나이는 상관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못생긴 것도 아니잖아?’

에반은 미남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못생긴 얼굴도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남자답게 생겼다고 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에반은 계속 고개를 숙이고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공주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너무 오랜 시간 아무런 말이 없자 이곳을 빠져 나가기 위해서 에반이 헛기침을 했다. 혼자 생각하고 있다면 자신이 필요 없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흐흠.”

그제야 상념에서 깨어난 공주가 에반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공주가 옆의 그림을 가리켰다.

“이건 뭔가요?”

“프루브 화가가 그린 검은 얼굴이라는 작품입니다.”

에반은 대답을 하면서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벌써 오 일째였다.

처음에는 그저 작품을 보면 이건 누가 만든 어떤 작품입니다라고만 이야기해 주면 감탄을 하면서 그 작품을 감상했던 제니스 공주였는데 어느 순간 에반의 생각을 물어오더니 이제는 감상을 하는 시간보다 예술품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프루브 화가는 사실주의로 이름을 널리 알린 사람이지요. 그런 사람이 이런 그림을 그리다니 정말 검은 얼굴을 가진 인간이 있다고 생각하나요?”

이렇게 자신은 관심도 없는 이야기에 대해 물어오니 에반은 지금 시간이 지루할 수밖에 없었다. 꼭 사부와 함께 다른 세계에서 둘만 살고 있는 기분이기에 어서 이 시간이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뭐라고 하는지도 모르는 채 에반이 이야기를 했다.

“엘프들 중에서도 검은 피부를 가진 이들이 존재합니다. 다크엘프들이지요. 그들은 마기가 몸속으로 침투하여 그런 존재로 변했는데 그걸 볼 때 인간도 검은 피부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역시 에반 공이시네요.”

이제는 스스럼없이 이름을 부르는 제니스 공주였다.

오 일 간 같이 다닌 효과였다.

검은 얼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공주가 무엇을 보았는지 눈을 반짝이더니 그쪽으로 갔다.

하던 말도 멈추고 그 그림 앞에 서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호기심이 드는 모양이었다.

에반은 그녀를 보며 자동으로 그 그림에 대한 내역을 읊었다.

“이건 선물로 받기는 했지만 자세한 건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동쪽에 있는 이 대륙과는 다른 대륙에서 건너 온 그림이라고는 들었습니다.”

“동양화로군요.”

“이 그림이 무언지 알고 있습니까?”

동양이라는 개념은 에반의 사부가 그에게 알려줄 때까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는 개념이었다. 다만 사부가 동양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걸 알기에 나중에 그쪽을 다녀올 생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이 대륙에는 그런 개념이 그렇게 확실히 잡히지 않아서 에반이 동양의 것이라면서 무술을 알려주어도 기사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했다.

그런데 제니스 공주가 그걸 알고 있으니 에반으로서는 정말 의외였다.

“예. 책을 읽으면서 동쪽에 있는 대륙도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때문에 호기심이 생겨 그들의 생각이나 예술품들을 모으려 해보기도 했었죠. 물론 그렇게 많은 걸 얻지는 못했지만요.”

“그렇습니까?”

에반에게 말을 하면서도 제니스 공주는 한시도 동양화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아름답네요. 그렇죠?”

그는 그저 책을 읽고 거기에 나온 정보를 토대로 그대로 읊는 것이기에 이렇게 모르는 것이 나왔을 때는 선뜻 말을 꺼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는 건 안 될 일이기에 그림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산이 크게 그려져 있었고 폭포가 쏟아지며 나머지는 모두 공백이었다.

사부와 같이 지낼 때 읽었던 책 중에서 이와 대한 내용이 있었던 듯 해 겨우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자연에 대한 성찰을 그림으로 표현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도 하죠. 대부분의 동양화라는 것이 이런 구도라니까요.”

제니스 공주가 에반의 말에 미소를 짓다가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나네요.”

“무엇이 말입니까?”

“이곳으로는 오는 도중 본 건데 성벽에 구멍을 조각한 것이 에반 공이 만든 것이라면서요?”

공주가 무엇을 지칭하는 건지 알아챈 에반은 지금 상황에서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는 끄덕였다.

“아, 예.”

“동양화에 영향을 받았나 봐요?”

“예?”

“어? 아니에요?”

에반이 반문을 하자 제니스 공주가 자신이 잘못 짚었냐는 표정으로 물었다.

거기에 대고 아니라고 할 수 없었던 에반이 장단을 맞춰주었다.

“맞습니다. 그런데 공주님은 그걸 보며 왜 동양화를 떠올리셨습니까?”

“동양화는 여백을 넣어 그림을 완전하게 만들잖아요. 전 에반 공도 동양화처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남은 부분을 원으로 생각하게 해서 완벽한 원을 만들었다고 생각했어요.”

꿈보다 해몽이 좋았다.

에반은 어이가 없어서 웃으며 물었다.

“공주님은 그래서 완벽한 원을 보셨습니까?”

사실 거기에는 주먹 모양이 나 있었다. 하지만 크라우스 가에 방문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성벽에 주먹 모양의 커다란 흔적이 있다면 방문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 에반은 자신의 실력을 확인할 겸 주먹 모양보다 더 큰 원을 그려 주먹 모양을 덮었다.

그가 원을 그린 이유는 공간을 압축해서 주먹을 내지를 때 주먹 모양과 원 모양만이 나왔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거의 반 장난으로 제니스 공주에게 물었지만 공주는 그 성벽에 나있는 구멍을 생각하는지 약간 허공에 시선을 주더니 말을 했다.

“예. 전 완전한 원을 보았어요. 에반 님이 여백을 남기셔서요.”

“여백이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사실 그건 여백이 아니다. 주먹 모양을 덮기 위해 압축된 공간이 그 위를 지나가자 큰 원이 주먹 모양을 없애면서 성벽이 없던 부분이 여백이 된 것뿐이다.

그런 사실을 모르는 공주는 에반의 물음에 진지하게 대답을 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제 눈을 통해 보이는 것과 합쳐서 완벽함을 이루는 것이죠. 바로 이 동양화처럼요.”

공주의 말에 에반의 표정이 굳었다.

그저 장난으로 한 질문인데 공주의 대답은 자신을 막고 있는 무언가를 건드리고 있었다.

“좀 더, 좀 더 자세히 좀 말씀을 해주십시오.”

갈증이 인다.

온몸이 무언가를 원하는 듯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이 제니스 공주를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이 열렸다.

“이 동양화를 보면 그림보다는 여백이 더 많잖아요. 하지만 이 여백은 여백이지만 여백이 아니에요. 실상은 그림을 이루는 한 핵심이죠. 그리고 채워져 있는 색이기도 해요. 에반 님이 만든 조각처럼 남겨둠으로써 채워지며 완성이 되는 거죠.”

“남겨둠으로서 채워진다.”

에반이 중얼거렸다.

요즘 에반이 짜증이 나 있는 이유는 바로 더 늘어나지 않는 공간력 때문이었다.

그는 분명 자신이 더 채울 수 있을 것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채울 수 있는 부분이 있는 만큼 모자란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아는데 공간력은 더는 늘어나지 않고 있었다.

자신의 손에 금방 잡힐 것 같은 한쪽의 공간이 잡히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공주의 말을 들으며 깨달았다.

채워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미 모든 것은 채워져 있었다. 자신이 그걸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공간력이 한계에 다다라 늘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정도의 공간을 좀 더 자세히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미 세상은 자신의 것이었다.

세상은 여백이고 자신이 한계라 느끼던 공간에는 그림을 그려 넣었을 뿐이다.

그것이 어우러져 완성된 그림이 된다.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이다.

우우웅!

공간이 한없이 뻗어나갔다.

그 옆에 있던 공주는 갑자기 느껴지는 생소한 기분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엄청난 무언가가 자신의 숨을 막히게 하고 있었다.

에반이 깨달음을 얻고 소성에 다다르면서 에반의 직접적인 공간에 있던 공주 또한 에반이 느끼는 기분의 일부를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공주가 미치지 않은 것은 에반이 계속 공주를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에반이 신경 쓰지 않았다면 공주는 이미 공간 안에서 수많은 정보를 접한 순간 미치거나 그대로 휩쓸려 사라졌을 것이다. 그걸 에반이 막아내고 사부가 자신에게 공간력을 다룰 수 있게 공간력을 심어준 것처럼 공주에게도 심어준 것이다.

소성밖에 이루지 못한 에반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지만 깨달음으로 인해서 한 번 크게 세상을 본 직후인지라 그 찰나의 순간 공주에게 공간력을 심어줄 수 있었다.

몸은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해 정지되어 있었고 정신만이 세계와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그 속에 공주의 정신도 함께 머물러 있었는데 그러면서 그녀가 자신과 인연의 끈과 이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 이 인연의 끈이 자신을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그녀 또한 공간력을 인지할 수 있는 길로 인도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는 걸 보며 에반이 말했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나를 보십시오.

그녀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자신을 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말을 할 수 있지요?

-말? 말이요? 아…….

에반과 하나로 이어진 지금 공주는 에반이 할 수 있는 건 자신도 할 수 있었다.

-이게 뭐죠?

-내가 익히고 있는 능력입니다. 공무라고 합니다.

-당신의 능력이요?

-그렇습니다. 당황하지 말고 느껴보십시오. 그렇다면 알게 될 겁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건만 공주는 공간에 몸을 맡겼다.

그러자 에반은 공주가 지금까지 느끼고 생각해왔던 것을 너무나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녀의 경계가 풀리자 에반이 그녀를 쉽게 받아들인 것이다.

공주는 정말로 편안해졌다.

그리고 저택 곳곳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은 분명 그 자리에 있건만 자신은 제시의 곁에도 있었고 리츠의 곁에도 있었으며 저택을 벗어나 하늘에도 있었다.

이상하지만 충만한 느낌은 공주 자신을 지고한 존재로 느끼게 했다.

-어떻지?

-좋아요.

옆에 그가 있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느낄 수 있었다.

-아쉽지만 이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해.

-어째서죠? 전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었어요. 이제 인간이 아닌 것이 아니었나요?

이제 인간이 아니라는 건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하게 하고 있었다.

예술의 극의가 있다면 지금의 상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이 상태로 있고 싶었다.

그때 에반이 말했다.

-넌 인간이다.

둥.

그 한마디가 자신을 울리고 있었다.

-지금 너는 그저 자연에 먹혀버린 것일 뿐이다. 좀 더 시간이 흐른다면 너는 생각이라는 것도 할 수 없게 되겠지. 네가 바라는 것이 그건가?

-아니에요.

-인간은 인간일 때 인간다운 생각을 할 수 있어.

-그래서 지금 상태가 싫다는 말인가요?

-지금 상태는 인간으로서도 이룰 수 있는 거다. 인간을 포기하면 이룰 수 있는 것도 이룰 수 없고 자신이 현재 느끼는 마음도 느낄 수 없게 되는데 왜 지금 상태를 고집해야 하는 거지?

-정말 이 느낌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요?

-그래.

-그렇다면 전 다시 인간이 될래요.

공주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자신은 에반이 옆에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느끼는 것이 아닌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녀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다섯 개의 손가락이 모두 있었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신도 있었다.

방금 일어난 일이 한순간의 꿈이었나 싶기도 했지만 너무나 생생했다.

“아. 아.”

그녀가 목소리를 내어보았다.

생생한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오랜 시간 동안 몸을 쓰지 않은 것처럼 몸이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도 느꼈다.

이걸 보면 절대 환상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니스 공주가 에반에게 물었다.

“꿈이었나요?”

“아니다.”

에반의 입에서 평대가 나왔지만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자신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잠시 에반을 쳐다보던 공주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신인가요?”

“내가 뭐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지?”

“인간…….”

“그래. 난 인간이기를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거다.”

“어째서죠?”

그녀가 보기에는 자신과 에반은 처지가 달랐다. 자신은 자연에 먹혀버리겠지만 에반은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에반의 이유는 간단했다.

“난 에반 크라우스니까.”

그녀는 그 말을 바로 이해했다.

에반과 함께 세상을 느끼면서 에반이 공주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듯이 공주도 에반을 받아들였다. 그렇기에 그가 가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떠올랐고 왜 인간이기를 고집하는 지 이해했다.

조금 전에는 그저 꿈같았던 시간이라 생각했지만 에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이 세상을 느꼈다는 것을 인지하자 자신이 느꼈던 것을 그대로 다시 이해하기 시작했다.

세상으로 돌아오자 인간이라는 한계에 막혀서 몸이 스스로 깨달았던 걸 일부로 생각나지 못하게 하려 했는데 에반이 그 제한을 풀어버린 것이다.

“이야기를 해줘요.”

제니스 공주는 좀 더 자세히 자신이 느낀 것이 무엇인지 듣고 싶었다.

“그러지.”

그와 어떤 인연인지는 몰라도 단단한 끈으로 이어졌다는 건 그녀도 지금은 느끼고 있었다. 에반이 느낀 것이었으니 당연히 그녀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제니스 공주가 에반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잠시 생각을 하던 에반이 그녀에게 물었다.

“무엇부터 이야기 하지?”

“당신의 과거 이야기부터요. 당신을 보면 당신의 과거는 말이 되지 않거든요.”

그건 맞는 말이다. 거짓 위에 쌓은 진실은 거짓으로 보일 뿐이다.

일단 진실이 토대로 되어야 제니스 공주는 믿어 줄 것이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이야기다.”

그 말을 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 뒤에 따라 다니는 기사들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제니스 공주가 흘끗 뒤를 보았다.

만약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바로 자신을 호위하러 달려오던 기사들이 잠잠한 것을 보니 방금 세상과 하나가 되어 시간의 흐름을 잊었을 때 시간이 거의 흐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만이라도 멍하니 있으면 달려오는 것이 저들이었기 때문이다.

제니스 공주가 시간에 대한 걸 생각하고 있는 사이 에반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다른 세계로 어렸을 때 끌려간 이야기부터 해서 다시 이 세계로 돌아와 켈베스와 만난 이야기까지 모든 것을 풀어놓은 것이다.

그러다가 그 이야기에서 나오는 내용 중 무언가가 그녀를 놀라게 했다.

“에반.”

“응?”

“설마 이 비전을 배우려면 그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래. 하지만 당신은 시간이 많이 줄어들겠지.”

“어째서죠?”

“난 공무를 배우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몸을 단련하는 데에 썼어. 하지만 당신은 공간력을 이미 느끼고 사용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지.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짧아졌지.”

단련법이 없이 공무를 무리하게 익힌다면 사실 공무에게 자신을 먹혀버린다. 그런데 공주는 이미 그걸 뛰어넘고 공무를 익힐 준비가 되었다.

에반이 공주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 건지 생각해봤나?”

“전 배우겠어요.”

“아무리 시간이 짧아졌지만 평생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다.”

“알아요. 하지만 다르게 생각한다면 평생 동안 이루어야 할 목표가 생긴 것이잖아요? 오히려 더 힘이 나는데요.”

“그럼 우선 관계를 정립하지.”

일단 그녀는 공주이다.

여기에서 평생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사부와 사제 관계를 맺기에 그녀는 공무를 속성으로 배웠다. 아무리 지금부터 제대로 배우더라도 에반이 이른 만큼의 경지에 다다를 수 없을 것이다.

에반은 그런 것을 생각하며 물은 것인데 제니스 공주는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이미 스스럼없이 나를 부르면서 잘도 말하는군요. 전 그냥 지금의 관계가 좋아요.”

모호한 관계를 정립하고자 한 말인데 그녀는 그런 관계가 좋다고 한다.

에반은 오해를 풀어줄까 생각하다나 그냥 두기로 했다.

어차피 나중에 해결될 일이라 본 것이다.

‘어떻게든 되겠지.’

에반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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