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장 (37/60)

제6장

카캉.

검과 검이 불꽃을 튀며 만나고는 다시 떨어졌다.

빠른 검이 상대의 목을 노렸지만 느린 검은 빠른 검의 검로를 막으면서 교묘하게 빠른 검을 펼치는 자의 손목을 취하려 했다.

쉬익!

창.

자신의 손목으로 다가오는 검을 빠른 검이 공격으로서 방어했다.

빠른 검이 약간의 손해를 보았는지 뒤로 물러가고 그 틈새로 느린 검이 빠른 검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깡! 깡! 깡!

세 번의 검격이 느린 검에 퍼부어졌고 느린 검은 주춤했다.

빠른 검이 빠름을 이용하여 느린 검을 멈추게 한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의 공격은 빠른 검에게도 손해였다.

빠른 검을 펼쳤던 라우웰이 살짝 뒤로 물러서면서 손에 묻은 피를 혀로 훑었다.

느리게 뻗어오는 검을 막기 위해 빠르게 검을 세 번 휘두르면서 손이 찢겨진 것이다.

만약 건틀릿이 있었다면 괜찮았겠지만 지금의 대결은 너무나 엉뚱하게 일어난 것이라 제대로 무구를 착용하지도 못한 채 펼친 대결이었다.

하지만 그건 게이브도 마찬가지인 듯 아래로 내린 손으로 검을 타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라우웰이 미소를 지었다.

“재밌군. 정말 오랜만에 이런 재미를 느껴봐.”

다오에서도 지금은 라우웰과 검을 맞대고자 하는 자가 없었다.

그의 검은 살검이다.

처음에는 재미로 시작을 해도 나중에 가면 피를 보고 살점이 떨어지며 뼈가 갈라진다.

그건 그의 검이 살검이기도 했지만 멈추지 않는 연환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게이브의 느린 공격에 라우웰이 특유의 사람을 홀리는 연속 공격을 못하고 있었다.

이제 피까지 보았으니 완전히 흥분을 한 라우웰이 게이브에게 말했다.

“너도 빨리 장비를 갖추라고. 이제부터는 정말 제대로 상대할 테니까 말이야.”

그렇게 말한 라우웰이 검을 옆으로 뻗으며 소리쳤다.

“언락!”

촤촤촤악!

갑자기 라우웰의 검이 밝게 빛나면서 형태를 달리하기 시작했다.

레이피어처럼 얇게 보이던 검이 크기를 키우더니 사람 키만 한 대검으로 변모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검병 부분이 라우웰을 감싸더니 대검과 라우웰을 일체 시켰다.

그걸 보며 게이브가 얼굴을 굳혔다.

지금까지 라우웰이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저런 대검은 휘두르는 것만으로 중검이 된다.

자신은 겨우 중검을 터득하고 있건만 상대는 빠른 검에 더해 중검이라는 비기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제길. 하다못해 무구라도 착용을 하면.’

지금 드워프들과 켈베스의 노력으로 연구를 계속하고 있지만 제대로 된 무구를 갖추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마법 무구가 아닌 손수 무구를 챙겨야 했고 스승님을 만나러 온다는 가벼운 마음에 갑옷을 입고 검만을 착용하고 왔지 다른 무구들은 착용하지 않은 것이다.

지금 이 상태에서 저자와 싸웠다가는 자신은 필패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질 땐 지더라도 포기를 하면 안 된다.

자신은 크라우스 가문의 자랑스러운 기사였다.

라우웰이 검을 휘두르며 체크하는 것을 보며 게이브는 투기를 끌어올렸다.

“자, 이제 다시 놀아볼까.”

라우웰이 눈을 번뜩이면서 대검을 미친 듯이 휘두를 준비를 한 순간 갑자기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그러나 이미 불이 붙은 라우웰에게 그런 소리가 귀에 들려올 리 없었다.

그는 그 목소리를 무시 한 채 몸을 하늘 높이 띄우더니 검을 뒤로 크게 젖혔다.

그리고 그때 자신의 앞에 잊을 수 없는 얼굴이 나타났다.

자신을 단 한 수에 패퇴시키며 깊게 각인을 한 자.

바로 에반이었다.

‘역시 너였구나.’

유령처럼 나타난 에반을 보는 라우웰의 두 눈이 번뜩였고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검이 반응이라도 하는 듯 피처럼 빨갛게 변하더니 온몸에 핏빛 기운이 흘러넘쳤다.

그는 전장에서 피의 광전사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아무리 패색이 짙은 전투에서라도 그가 지금처럼 변하면 상황이 역전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그는 소드 마스터도 아니지만 소드 마스터와 겨룰 수 있는 미친놈이었다.

그가 피의 광전사로 불리는 모습으로 자신의 공중에서 가로막은 에반에게 검을 휘둘렀다.

“이 날만을 기다렸다!”

그의 연환검은 빠를 뿐 아니라 어마어마한 힘도 갖추고 있었다.

마법도 쪼갤 수 있는 그 검이 에반의 정수리로 떨어졌다.

팍!

그때 에반의 손이 움직였다.

자신에게 뻗어오는 검을 그대로 한 손으로 잡아버린 것이다.

“큭. 뭐야?”

지금 검이 뿜어내는 혈기는 절대 다른 인간이 만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닿은 사람의 피를 흡수하는 것은 물로 그가 가진 힘까지 흡수하는 마물 중의 마물이었다.

그런 마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았으니 라우웰이 당황할 만도 했다.

하지만 에반은 그가 당황하든 말든 검을 손으로 잡더니 그대로 발을 들어 올려 라우웰을 걷어차 버렸다.

퍽!

쿵!

“컥.”

꽤나 높은 높이에서 그대로 낙하한 라우웰이 신음을 흘렸다.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다 잡으면서 자신이 원하는 목표 에반을 쳐다보았다.

“이, 이 새끼가.”

그의 몸이 더욱 혈기에 휩싸였고 누워 있던 그의 몸이 튕기듯 일어나 그대로 허공에 떠 있는 에반에게로 다가갔다.

검을 곧게 세워 그대로 갈라버릴 듯 찔러 들어온 검을 에반이 가볍게 파했다.

정말 여유로운 몸짓에 라우웰은 몸을 틀어 다시 한 번 검을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그가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에반이 라우웰의 검의 옆면을 가볍게 때렸고 그에 비명을 질렀다.

딩!

“크아아악!”

검이 빠르게 진동을 하면서 검과 일체가 되어 있는 손에서 떨어져 나갈듯한 고통이 전해져 온 것이다.

그와 동시에 다시 한 번 라우웰을 발로 차 지면으로 떨어뜨린 에반이 자신도 아래로 서서히 내려왔다.

“크으윽.”

그래도 같은 공격이라고 아까처럼 볼썽사납게 바닥에 뒹군 것이 아닌 두 발로 우뚝 선 라우웰이 에반을 뚫어질 듯 바라보았다.

그 살기 어린 눈에 에반이 게이브에게 물었다.

“너와 원수 사이더냐?”

“아닙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살기를 뿜어내는 거지?”

그 말에 대답을 한 것은 라우웰이었다.

그가 틈을 노려 검을 다시 에반에게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바로 너 때문이다. 에반 크라우스.”

팟!

콰아악!

검에서 뿜어져 나온 혈기가 바닥에 긴 고랑을 만들어내었다.

본래대로라면 에반을 갈기갈기 찢어야 하건만 에반은 라우웰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고 있었다.

“죽인다!”

살기가 더욱 주위를 뒤덮었다.

너무 과한 살기는 드디어 주위에 영향을 끼칠 정도가 되어 라우웰 주위의 풀들이 급속도로 생기를 잃어갔다.

그걸 보면서 더는 가만히 둘 수 없던 에반이 손을 한차례 휘저었다.

쿠아앙!

“억!”

아무런 기척도 어떤 낌새도 없었다.

갑자기 자신의 가슴에 무언가가 생성되어 자신을 그대로 날려버린 걸 깨달은 라우웰은 몇 미터를 날아간 후에야 겨우 바닥에 나뒹굴었다.

콰콰콱!

라우웰이 뒹군 바닥이 깊게 파였다.

에반이 어느 정도의 힘으로 라우웰을 날려 보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컥!”

라우웰도 더는 버틸 수 없었는지 입에서 선홍빛의 피를 토해내었다.

그제야 대화할 분위기가 이루어졌다는 듯 에반이 라우웰에게 물었다.

“넌 누구지?”

그 말에 표정이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던 라우웰이 급기야 소리를 질렀다.

“설마 내가 누군지 잊어버린 거냐?”

“꼭 너를 알아야 한다는 말 같군.”

“프레스톤에서 날 엿 먹이고 튀더니 아예 기억에서 지워버리다니.”

라우웰의 말에 에반이 잠시 그를 쳐다보다가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때 내 옆을 알짱거리던 그 시끄러운 놈이었군.”

“이 새끼가.”

라우웰은 에반의 말을 들으면서 살심을 키우려 했다.

살심은 라우웰의 근본적인 힘이다.

라우웰이 가진 검과 라우웰의 살심이 합쳐지면 혈기를 피어오르게 하고 전혀 오러와는 다른 형태의 능력을 가지게 한다.

그렇기에 살심을 애써 방출하려 했는데 이상하게 살심이 늘어가기는커녕 줄어들고만 있었다.

그저 에반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뿐인데 위축이 되는 것이다.

‘안 돼.’

그런 자신을 느끼면서 어떻게 해서든 그에게 대항하고자 했지만 한 번 사그라지는 살심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이성보다 본능이 앞에 있는 자가 감당하기 힘든 자임을 느끼면서 살심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라우웰은 인정을 해야만 했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자다.’

자신이 왜 그를 쫓아왔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때 그의 한 수를 받고 기절을 한 순간 그는 마음에 두려움이 생겼다.

절대 마음속에 파고들 수 없다는 두려움이 생기고 그것이 그를 싸우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걸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본능이 깨닫고는 라우웰을 여기까지 인도한 것이다.

자신이 에반을 넘지 못하는 한 평생의 족쇄가 되어 예전의 그 광포한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걸 이제 라우웰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을 감돌던 붉은 빛이 점차적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검 또한 레이피어처럼 얇아졌다.

투기를 없애가 경계를 하고 있던 게이브가 검을 바닥으로 내렸다. 사실 단 몇 수의 공방이었지만 그 때문에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던 것이다.

라우웰이 에반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에반 크라우스다.”

라우웰은 그걸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사는 야수에 족쇄를 채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의 정체를 묻는 것이었다. 이미 조사를 해보았기에 삼십년 동안 사라진 것도 알고 있는 라우웰이 다시 물었다.

“나도 당신의 이름은 알고 있소. 내 말은 당신의 정체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오.”

“크라우스 가문의 기사단장 에반 크라우스다.”

라우웰은 에반의 말에 그가 자신을 밝힐 뜻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저었다.

“아, 아. 그렇다고 해둡시다. 대신 다른 질문에 대한 답을 좀 주시오.”

“한 번 말해봐라.”

에반도 사실 라우웰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 크라우스 가문은 그저 기사도를 아는 기사들뿐이다. 부정을 저지르는 기사들을 모두 몰아내고 교화를 시켰더니 그런 기사들만 남은 것이다. 그런 무리 속에서 저런 자유분방하고 온몸에 피를 적신 자가 있다면 더욱 발전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 정도로 라우웰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다.

라우웰이 물었다.

“당신이 강한 이유가 뭐요?”

“수련을 했기 때문이지.”

“수련? 당신이 수련을 했다고?”

흑마법사에게 잡혀 실험체가 된 대상이 수련을 언제 했겠는가?

라우웰이 의심의 눈으로 에반을 바라보자 에반이 대답했다.

“세상에 알려진 것과 진실이 같으라는 법은 없지.”

‘멍청한 녀석들.’

다오의 정보를 담당하고 있는 이들을 한차례 욕을 한 라우웰이 물었다.

“그럼 수련으로 나도 강해줄 수 있소?”

“강해질 수 있다.”

“난 지금의 당신만큼 강해지길 바라는 것이오.”

그 말에 에반이 지금 기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무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현재 기사들이 배우는 외공이나 내공과 검술이 하나가 되어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고 그걸 또 뛰어넘는다면 어쩌면 지금의 자신과 대적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그의 추측이 아니라 그의 사부가 해준 말이었다.

소성의 경지에 들지 못한 공무라면 무술을 극의에 다다르게 익힌 무인들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을 말이다.

그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기사들을 가르치고 자신도 무술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해가면서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비슷하게 오를 수는 있다.”

생각을 하고 낸 결론이었다.

그 말에 라우웰의 표정이 환해지더니 에반에게 무릎을 꿇었다.

털썩!

“그럼 나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주시오.”

“내게 말인가?”

“그렇소.”

“넌 충분히 강하다.”

“강하기는 하지만 내 생각만큼 강하지는 않소. 나는 당신을 뛰어넘어야만 진정한 자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오.”

“날 뛰어 넘고 싶나?”

“그렇소.”

그래야만 족쇄를 풀 수 있을 것이다.

“마음에 드는군.”

“단장님!”

게이브가 다급히 에반을 불렀다.

“마음에 안 드나?”

“그는 믿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또한 잔혹하고 미쳐보였다.

이 말마저 하고 싶었지만 게이브는 그 말을 그저 속으로만 되뇌었다.

“그래서?”

“이런 자가 저희 가문에 있다는 것만으로 트러블이 일어날 겁니다.”

“상관없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 정도 되는 자도 제어하지 못하면 가문을 지키지도 발전시킬 수도 없다.”

에반이 보는 라우웰은 게이브가 보는 것과 비슷했다.

광폭하고 피에 미쳐 있었다.

그리고 강했다.

아마 제대로 그가 검을 휘두른다면 그와 필적하는 자는 현재 아그나르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강자를 받아들이지도 못하면 크라우스 가문이라는 이름을 버려야 할 것이다.

에반이 무릎을 꿇고 있는 그를 보며 말했다.

“너를 훈련시켜주지.”

“고맙소.”

“하지만 당연히 조건이 있다.”

“무엇이든 들어드리겠소. 괴롭히는 자들의 목을 따오라면 다 따오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보석을 가져오라면 가져오겠소.”

“그것도 어쩌면 내 조건에 포함되어 있을 수 있겠군. 내 조건은 네가 나를 뛰어넘을 때까지 우리 가문에 종속이 되는 거다. 어떠냐?”

“좋소.”

어차피 에반을 뛰어넘지 못하면 가슴에 하나의 불안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것보다는 여기서 그를 뛰어넘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이 나은 방법이다.

라우웰이 흔쾌히 대답하자 에반이 그에 말했다,

“크라우스 백작가에 들어온 것을 환영한다.”

정말 듯하지 않게 한 명의 강자가 크라우스 가문의 품속으로 들어오는 순간이었다.

* * *

“헉. 헉. 이 미친…….”

그가 열심히 뛰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보이지 않지만 느껴졌다.

분명 그 악녀가 자신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계속 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왜 이렇게 도망을 가야 하지?’

한참을 뛰고 있는 그의 머리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벌써 며칠 째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손에서 찢겨져 죽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을 칠뿐이었다.

하지만 몸이 피폐해지자 정신이 버티질 못했다.

그가 서서히 걸음을 멈추었다.

이제 더는 힘도 없었고 도망을 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한 번이라도 발악을 하여 그 악녀에게 대적이라도 하고 싶었다.

“시발. 이 개년아! 나와! 한 번 붙어보자.”

“여전히 입을 걸군.”

스윽.

공간 속에서 한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정말 성스러워 보이는 여인이었다.

꼭 빛 무리가 뒤에서 비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루네르…….”

그녀를 보며 그가 입을 갈았다.

그렇다. 그녀는 예전에 포른 신전의 사제의 품에 안겨 사라졌던 루네르였다.

“이제 포기인 건가?”

“아직 아니야!”

그가 소리를 지르며 둔기를 발악적으로 휘둘렀다.

도망을 가면서도 절대 손에서 떨어뜨려 놓지 않은 무기였다.

쾅!

하지만 그녀의 곁에 다가가기도 전에 무언가에 막힌 듯 허공의 벽을 치더니 그대로 뒤로 물러났다.

“크윽…….”

신음을 흘리는 그를 보며 루네르가 말했다.

“호호. 파트. 이게 다는 아니겠지? 그때의 그 기세는 어디 간 거야? 어서 다른 연놈들처럼 좀 더 발악을 해봐.”

성스럽게 보이는 그녀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보기 힘든 천박한 말이었지만 그녀가 말을 하자 천박한 말이 성스럽게 들렸다.

그건 파트도 마찬가지 있듯 귀를 막으면서 욕설을 내뱉었다.

“제길. 제길.”

파트는 왜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했다.

루네르의 심장을 부신 후 파트와 다른 세 명은 희희낙락하며 다오로 복귀를 했었다.

그 누구도 그들이 그녀를 죽였다고 모르리라 생각을 했기 때문에 대담하게 복귀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조금씩 분위기가 바뀌었다.

루네르는 죽은 것이 아닌 실종 처리가 되더니 크라우스 가문을 핍박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을 감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 낌새를 알아차린 그들은 도망을 갔고 겨우 다오의 이목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찰나 그녀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는 정말로 유령을 보는 듯 소스라치게 놀랐다.

파트 자신의 손으로 분명 그녀의 심장을 터뜨렸으니 당연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가 그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씩 차례차례 도망을 치다 붙잡혀 사라지고 이제 자신만 남았다.

마지막으로 해본 발악은 그녀에게 통하지도 않았다.

파트의 눈에는 지금 오로지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예전과는 또 다른 의미로 변한 그녀가 자신을 철저하게 괴롭힌다는 생각에 더욱 무서웠다.

잠시 그녀를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던 파트는 더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제발 죽여줘.”

루네르가 그의 말을 들으면서 크게 웃었다.

“호호호. 난 악마가 아니야. 너를 그렇게 쉽게 죽이지 않아.”

“그럼 다른 사람들은 뭐야!”

“그들도 죽지 않았어.”

“그럼?”

“그래. 아주 생생하게 살아 있어. 다만 그들은 감금을 당해 있는 처지이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 말에 파트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자신을 쉽게 죽이지 않는다는 말이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그녀라는 죽이는 것보다 자신들을 고통스럽게 해 평생을 고통에 허덕이게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차라리 죽음이 안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죽자.’

파트가 자신의 혀를 있는 힘껏 깨물었다.

“큭!”

파트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잘린 혀는 목구멍에 걸려 그의 숨을 막히게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루네르는 태연했다.

루네르는 숨이 막혀 고통에 몸부림치는 파트에게 서서히 다가가더니 그의 얼굴에 손을 올렸다.

파앗!

후우웅!

목구멍을 가로막고 있던 잘린 혀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피가 멈추었다.

그리고 혀가 다시 자라고 있었다.

“아. 아.”

파트가 눈물을 흘렸다.

이건 살았다는 기쁨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녀의 힘이 신성력이고 자신의 혀마저 재생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고는 파트는 절망의 탄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그녀가 죽이지 않는다면 절대 그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주키.”

“예. 성녀님.”

몸을 숨기고 있던 성기사 한 명이 몸을 드러내었다.

“이자를 데려가 그들과 함께 두세요.”

“예.”

파트가 아무런 힘없이 끌려가는 모습을 루네르가 보며 웃었다.

“호호호.”

하지만 조금은 공허한 웃음이었다.

한참을 웃던 그녀가 누군가를 향해 말했다.

“잠시만 혼자 있게 해주세요.”

신성력이 숨어 있던 성기사들이 빠져나가는 것을 확연히 느끼게 해주었다.

홀로 공터에 남은 그녀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주 깨끗하고 성스럽게 보이는 손이었다.

마법으로 인해 다쳤던 상처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 손을 자신의 심장에 가져다 대며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자신이 이런 성력을 얻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죽음을 생각했는데 깨어나자 성녀가 되어 있다는 것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깨어난 후 그녀의 마음에 있었던 건 복수심이었다.

마지막으로 느낀 감정이 그것이었으니 당연하게 그 감정이 먼저 고개를 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그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준비했다.

복수를 하는 일이 손쉽게 흘러갔다.

그 시기가 절묘해 그들이 의심을 받고 다오에서 도망을 나왔던 때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죽여 버릴까도 생각을 했지만 마음이 바뀌었다.

마음이 바뀌었다기보다는 이상하게 예전처럼 독한 마음을 먹지 못하고 있었다.

신성력이 그녀를 바꾸고 있었다.

그걸 그녀도 느끼고 있었기에 변하는 자신이 두려웠다.

또한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돌아다니는 신성력도 거추장스러울 때가 한 번이 아니었다.

가문에 메어 있을 때나 다오에 속해 있을 때도 그녀에는 자유가 있었지만 지금의 생활에는 거의 자유가 없었다.

예전의 자신이 그리워지고 있었다.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자신의 심장에 자리한 신물이 자신을 성녀로 만들고 죽지 않게 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걸 그렇게 만든 자가 에반이라는 것도 안다.

성전을 이용해서 자신의 가문을 좀 더 성장시킨 후 그녀는 에반을 찾아가 볼 것이다.

다시 예전의 귀계와 독심이 가득한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녀가 남쪽의 어딘가를 망연히 쳐다보았다.

* * *

“가거라.”

“아바마마!”

루드 왕의 말에 맞은편에 서 있는 여인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세상에 루드 왕의 앞에서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여인은 단 한 명뿐일 것이다.

바로 제니스 공주였다.

본래대로라면 그녀도 왕위계승을 할 수 있는 왕족 중 한 명이지만 그녀는 스스로 그 기회를 포기하고 예술과 문학에 자신을 맡겼다.

어렸을 때 제국에서 넘어온 예술품을 보고 반한 그녀는 자신의 손으로 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들고 싶어 했다. 또한 거기에 더해 문학에도 심취하면서 그녀는 그쪽 방면으로 대가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녀는 어느 정도 왕가와 거리를 두고 지냈는데 갑자기 루드 왕이 이런 말을 꺼내자 화가 난 것이다.

“전 정략적으로 이용당하지 않을 거라고 예전에 말씀 드렸을 텐데요.”

“그가 있다면 우리 왕국 뿐 아니라 네게도 도움이 되어서 그런다.”

“제게 무슨 도움이 된다는 거죠?”

“그를 만나보면 알겠지만 그는 야망이 있는 남자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주변의 신경을 많이 쓰지.”

“그렇다고 해도 전 가지 않을 거예요. 배경이 어떻던 전 머리에 근육만 찬 사람은 절대로 싫다고요.”

잠시 생각을 하던 루드 왕이 말했다.

“그렇다면 네 기사를 위해서 한 번 다녀오는 것은 어떠냐?”

“리츠 경 말씀인가요?”

“그래.”

루드 왕이 십 년 만에 그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 때문에 제니스 공주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리츠는 자신에게 루드 왕보다 더 아버지 같고 자신에게는 없는 오빠 같은 사람이다.

이번 습격 때도 그가 있었기 때문에 자신은 안전했다.

언제라도 밖으로 나갈 수 있지만 자신 때문에 왕궁을 한 번도 떠나지 않는 그를 생각하자 제니스 공주도 별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떠냐?”

그녀가 마지못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아바마마의 뜻에 따르겠어요.”

조금은 차갑게 말을 하는 그녀를 보며 루드 왕이 푸념을 했다.

“허, 내가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매일같이 찾아와 하프를 키며 내 건강을 빌어주던 딸의 모습은 그냥 내 꿈이었나 보구나.”

루드 왕은 피습을 당하고 한 번도 잠든 적이 없었다.

계속에서 신성력을 주입시키고 힐을 해대니 정신이 멀쩡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깨어 있는지 모르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루드 왕은 제니스 공주가 계속 찾아와 하프 소리를 들려주거나 이야기를 걸어주던 모습을 알고 있는 것이다.

루드 왕의 말에 제니스 공주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제, 제가 언제 그랬다는 거예요?”

뾰족이 소리를 지르는 제니스 공주를 보면서 루드 왕이 생각했다.

‘나는 이런 겉모습만 보고 살았구나.’

자신을 보면 화를 내는 태도를 보이는 제니스 공주를 보며 루드 왕은 언제나 못마땅했다. 그녀가 자신을 싫어한다 생각한 것이다.

어릴 때는 그렇게 자신을 따랐던 그녀였기에 더욱 마음이 아파 거리를 두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그저 겉모습이라는 걸 중독되어 누워 있을 때서야 깨달았다.

자신의 딸은 언제나 자신을 걱정하는 효녀였고 울음이 많은 울보였다.

그걸 표현을 하지 않고 속으로만 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지만 그는 그들이 자신의 앞에서 다투는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었다.

자신에게 충성을 하리라 믿었던 귀족은 후계를 빨리 세워야 한다며 핏대를 세웠고 자신의 일에 사사건건 참견을 하며 쓴소리를 입에 올렸던 귀족은 어서 깨어나길 빈다면서 눈물을 보였다.

이런 모습을 누워 있는 동안 보다보니 자신이 얼마나 시야를 좁게 하고 살아 왔는지 이제는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실 이제야 아직도 자신의 귀여운 딸이라는 걸 알게 된 루드 왕은 제니스 공주를 어디론가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은 위험했다.

본래대로라면 제니스의 뜻대로 제국의 예술을 좋아하는 귀족에게 시집을 보내려고도 생각했지만 곧 이번 일의 배후에 제국이 끼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포기하고 크라우스 가문으로 보내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곳이라면 아직은 불안한 정국에서 제니스 공주를 지켜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후계를 정하기 전에 보내야 한다.’

세 명의 왕자들이 모두 자신을 찾아왔었고 눈을 뜨지 않는 자신에게 하는 말로 미루어 만약 후계 한 명을 정한다면 암중으로 권력다툼이 굉장히 심해질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도 부끄러운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제니스 공주에게 루드 왕이 말했다.

“아무튼 내 말은 알아들었지?”

“알았어요.”

제니스 공주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루드 왕은 마음을 놓았다.

* * *

“제길…….”

콰장창!

탁자에 놓여 있던 값비싼 물건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그는 탁자마저 쓰러뜨렸다.

쾅!

“고정하시옵소서. 왕자 저하.”

“뭘 고정해! 응? 확실하다며?”

이왕자는 심복인 트레인 말에 진정을 하기는커녕 그를 닦달했다.

그러자 그가 조용히 말했다.

“왕자 저하, 귀는 어디에도 있는 법입니다.”

“큭.”

좀 더 마음에 담아내고 있던 말을 쏟아내려던 이왕자는 트레인의 충고에 주먹을 부르르 떨더니 의자에 몸을 묻고는 그에게 말했다.

“차단해.”

“예.”

대답을 한 트레인이 반지를 쓰다듬자 이왕자가 있는 방 전체에 마법이 걸렸다.

“이제 말해도 되나?”

“그렇습니다.”

“그럼 물어보지. 이번 일이 실패한 이유가 뭐야?”

“여러 가지 상황이 겹쳤을 뿐 아직 실패라고 판단하기에는 이릅니다.”

“그 늙은이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국정을 운영하고 있잖아. 그런데 실패가 아니라니?”

이왕자는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들을 만나기 위해 왕국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계획대로 일이 돌아간다는 생각에 마음을 놓은 것이다.

그런데 절대 일어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루드 왕이 독에 당하고도 죽기는커녕 몸이 좋아져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당연히 이왕자의 신경이 날카로워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왕자를 보며 트레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지금이야 그렇지만 언제 죽을지 알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하이엘프가 치료를 했지만 완치가 아니라는 것이 세작의 말입니다.”

“그럼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거야?”

“예. 하지만 하이엘프가 자신이 제대로 치료를 할 수 있는 때가 온다면 치료를 하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건 또 뭐야?”

트레인의 말에 짜증이 가득 섞인 얼굴을 하고 잠시 궁리를 하더니 물었다.

“지금 그 하이엘프 어디 있어?”

“그것이 지금 크라우스 가문의 비호를 받고 있습니다.”

이왕자가 인상을 썼다.

가장 건드리고 싶지 않은 곳이 크라우스 가문이었다.

그곳과 악연으로 연관이 되면 꼭 끝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이왕자도 되도록 그곳과 연관이 되지 않게 아예 인연을 만들고 있지 않았다.

이왕자의 고민이 길어지자 트레인이 넌지시 말했다.

“하이엘프를 건드리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차라리 그 원인이 돌연사를 당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돌연사라…….”

잠시 생각을 하던 이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방법도 있군. 좋아.”

지금 이왕자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권력이라는 것이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한 번 연구해 보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그쪽에서 연락이 온 건 있나?”

“모든 연락이 끊겼고 접촉을 하려고 해도 방도 또한 없습니다.”

지금은 이게 문제였다.

자신들이 움직이려면 외부의 세력이 제대로 된 계획대로 움직여줘야 가능하다. 지금 이왕자가 손을 놓고 있는 것도 그들과의 연락이 끊긴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들에게 다시 연락이 올 가능성은?”

“낮게 보고 있습니다.”

“그럼 위험하더라도 우리가 직접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야?”

“예. 대신 천천히 공을 들여야 성공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삼왕자도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이니 말입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해 보고 아무튼 네가 이번 일을 진행해봐.”

“알겠습니다.”

“난 꼭 이 왕국을 손에 넣고 싶어.”

“뜻대로 되실 겁니다.”

이왕자의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 * *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보았나?”

“모르겠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무너지고 산산이 흩어졌습니다.”

하스의 대답에 마스터가 고민을 하다 물었다.

“마법의 흔적은?”

“그런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마탑이 만든 건물을 마법으로 없애는 간 큰 짓을 할 자도 없고 말입니다.”

“그렇긴 하군.”

“어떻게 할까요? 포기하겠습니까?”

“가족들이 있을 텐데?”

“이미 헤르라는 부단주가 그들의 신병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유타시에서 누군가가 빼돌려 그에게 넘긴 것 같습니다.”

“그 누군가는 혼란을 원하는 것 같군.”

마스터의 고심이 길어졌다.

그러자 잠시 그를 보고 있던 하스가 말을 조심스레 꺼냈다.

“그들과의 끈이 떨어졌다지만 어쩌면 저희에게는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기회?”

“예. 현재 부단주 세 명 뿐 아니라 지부장들도 많이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유타시의 시장에 시옵이 올라섰지만 어차피 그건 유타 상단 상인들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닌 제국의 관리들에게 뇌물을 줘 올라간 자리입니다.”

“시장은 되었지만 그에게 인심은 없다는 소리군.”

“예. 지금 유타 상단은 아무나 차지할 수 있는 맛있는 먹잇감입니다. 상단주의 아들만 확보한다면 말입니다.”

“가능할 거라 보는가?”

“백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성공 가능성이 칠팔십은 됩니다.”

하스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마스터가 물었다.

“그럼 누굴 보내지?”

“제가 가겠습니다.”

“안 돼! 이미 넌 너무 노출이 되었어.”

하스는 그때 한 번 잡혀간 후 철저하게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싫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가야 한다는 겁니다. 흑마법사들의 희망으로써 일을 성공시키겠습니다. 또한 이미 전 그들 가족과도 만난 적이 있기에 호의적일 겁니다.”

“음.”

마스터가 고심을 했다.

“저는 저를 떠받들기만 하는 이들 안에서 안주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움직여야 희망이 움직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스가 그렇게 까지 말하자 마스터는 반대를 할 수 없었다. 그는 귀한 몸이었지만 그렇다고 의심을 하게 싸고 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잘 할 수는 있겠지?”

“예. 마스터. 꼭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하스가 다짐하듯 말했다.

* * *

사에타 상단의 시몬은 크라우스 가문에 굉장히 오래 머물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법사의 마법 물품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크라우스 가문의 성장하는 모습이 그에게 많은 자극을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몬.

“예. 단주님.”

-이제 그만 돌아와라.

“좀 더 여기에 머물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 유타 상단의 본점이 무너지고 상단주가 실종 상태다. 실종이라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는 점을 보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 그리고 상단주 아래에서 숨죽이고 있던 상인들이 서서히 패를 가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느냐?

“유타 상단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소리 같습니다.”

-맞다. 우리와 비슷한 재력과 힘을 가진 상단이 공중분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만약 공중분해가 되면 그걸 많이 움켜쥔 자만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단 한 사람의 손도 필요할 만큼 바쁜 때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일의 원인을 만든 곳이 크라우스 가문이라면 좀 더 머무르며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 않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로 관여를 했다고 생각하느냐?

“예.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나 공교롭습니다.”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마탑이 지은 건물을 부수는 건 드래곤도 하지 못할 일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으음.”

시몬은 한 번도 에반이 실력을 드러내는 걸 보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이야기를 듣지 못한 건 아니었다. 성벽을 날려버린다거나 공간을 열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소문을 이곳에 듣고 있었다.

처음에는 믿지 못할 일이라 무시를 했었는데 만약 그 이야기가 모두 진실이라면 유타 상단을 그렇게 만든 건 어쩌면 에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되었든 유타 상단은 십오 년 전의 일 때문에 크라우스 가문과 원수 사이가 되었고 그 원수의 본거지로 찾아간 날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충분히 의심해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 점을 보아서 좀 더 에반과 크라우스 백작가를 살펴보고 싶은 것이 지금 시몬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상단주로서는 그를 그런 곳에 두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 일을 크라우스 가문에서 벌인 일이라면 더욱 그곳에 있으면 안 되었다.

-난 네가 이미 그곳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었다고 판단한다. 더구나 그곳을 간 이유는 실무를 경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냐? 그러니 돌아와라.

지금 상단주는 통보를 내리고 있었다.

시몬은 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시몬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상단주의 말을 거역할 수 없으니 이제는 짐을 꾸려야 할 때였다.

* * *

“저, 에반 님.”

“왜?”

“저자가 왜 저곳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겁니까?”

가문으로 돌아온 후 한동안 바빴던 베켓이 이렇게 에반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는 연무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라우웰 때문이었다.

“누군지 아는 것 같군.”

“당연히 알지요. 저런 위험한 자는 언제나 체크를 하니 말입니다.”

“위험한 자?”

“예. 저자는 다오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신비감 같은 것이 없이 그가 평소 저지르는 행동으로 꽤나 유명한 자입니다.”

“다오에 소속되어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가 뭐라 불리는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뭐라 불리지?”

“그는 사람들에게 피의 광전사라 불리는 그냥 미친놈입니다.”

“미친놈?”

“예. 그냥 미친놈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작성한 위험한 자들의 리스트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놈입니다.”

크라우스 가문 안에도 요원들은 있다.

그러니 당연히 조사가 들어갔고 누구인지 파악을 한 순간 베켓에게 보고가 들어간 것이다.

베켓은 그의 존재를 안 순간 화들짝 놀라며 에반을 찾아온 것이고 말이다.

“대체 그가 여기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강해지고 싶다더구나.”

“예?”

“저자가 나를 보고 강해지고 싶다고 했지.”

“그래서 받아들였다는 겁니까?”

“다른 이유가 있나?”

“하아…….”

베켓이 에반에게 방금 말한 라우웰에 대한 건 최대한 순화해서 말을 한 것이다.

그냥 원색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는 극악무도하고 비열함이 그 누구에게도 비견되지 못할 정도로 최고인 자라는 것이다.

그가 속한 조직인 다오에서조차 그와 상종하는 인간이 아예 없었다.

언제 그에서 뒤통수를 맞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자가 자신들 사이에 끼어 있다니 당연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잠시 한숨을 쉬고 검을 휘두르고 있는 라우웰을 가만히 바라보던 베켓이 에반을 불렀다.

“에반 님.”

“불만이 많은 것 같군.”

“정말 많습니다.”

“저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나?”

“그것도 그렇지만 계속해서 다오와 연관이 된다는 것이 조금 불편합니다.”

“저자는 이제 다오의 사람이 아니야.”

“예?”

“내 수하로 들어왔다는 소리다.”

“다오가 그리 쉽게 내 줄 자가 아닙니다.”

미친 자이고 상대하는 이가 없다고는 하지만 다오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라우웰이다. 다오가 쉽게 그를 내보낼지 의문이었다.

“이미 그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다. 자신이 본래 속한 곳에서 나왔다는 말을 말이다.”

“그래도 그렇게 쉽게 믿을 이야기를 아닙니다.”

“어차피 다오와의 인연은 남겨 놔야 한다.”

“무슨 소리입니까?”

“이러나저러나 우리는 흑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은 고맙게도 도움을 주었는지 아니면 우리를 없애버리려고 한 건지 모르는 짓을 해놓긴 했지만 어쨌든 도움은 도움이다. 그들이 만약 그걸 다오에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겠나?”

베켓이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다오가 다시 조사를 할 것 같긴 합니다. 물론 저번 영지전에서 한 짓을 보면 그들의 이야기를 믿을 자들은 별로 없겠지만 말입니다.”

도움을 준답시고 흑마법사들은 서커 마법을 사용했다.

그 때문에 자신들이 도움을 받았다는 인상보다는 흑마법사들이 팔로스 영지와 자신들을 공멸시키려 하고 있는 인상을 주게 했다. 그것이 하스의 진짜 계획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흑마법사들이 서커 마법을 사용한 것이 다오가 자신들을 그때 의심하지 않고 넘어간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그걸 대비해서 저런 자가 있으면 좋겠지. 어차피 흑마법사와는 악연이다. 그들과의 관계는 언제고 청산을 하는 것이 좋아. 우리의 불안요소이니 말이야.”

“음.”

그 말에는 딱히 반박을 하지 못한 베켓이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엘프숲에서도 흑마법사가 모종의 일을 꾸미려는데 에반이 방해를 했다.

그들에게는 에반이 눈엣가시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 정도면 너도 이해를 하겠는가?”

베켓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흑마법사와의 악연을 생각한다면 다오의 일원인 라우웰이 여기 있어 다오와 끈을 만들어 두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였다.

“예.”

에반은 이미 완전하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라우웰을 가문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좀 더 가문의 사람답게 만드는 건 자신들이 할 일이었다.

“이제 이야기가 끝났다면 난 내려가 보겠다.”

에반이 연무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열심히 훈련을 하던 기사들이 멈추어 서서 에반에게 군례를 했다.

몇 달 전 에반이 왕궁으로 떠난 후 처음으로 기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였기에 훈련을 멈추고 에반을 바라보았다.

“충.”

모두의 군례소리가 연무장을 떠나갈 듯 울려 퍼졌다.

에반이 없는 몇 달 사이 다시 가문을 찾은 은퇴한 기사들이 현재 기사들에게 크라우스 기사단이 가져야 할 올바른 태도를 제대로 알려 주고 있었고 지금 이 모습이 그 결과였다.

그 때문에 예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크라우스 기사단이 되었다.

끊긴 전통이 다시 이어진 거지만 크라우스 기사단이 변모한 것은 사실이었다.

에반은 그들의 달라진 기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을 보니 이들 스스로 나아가게 맡겨도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오랜만이군. 아무튼 할 이야기가 있으니 모두 모이도록.”

그들이 일사불란하게 단상 부근으로 모였다.

모두가 모이고 말을 할 분위기가 형성이 되자 쥬드와 나눈 이야기를 그들에게 했다.

“이제 난 기사단장직에서 물러난다.”

웅성웅성!

담담하게 뱉은 에반의 말은 파장이 굉장히 컸다.

지금까지 그들의 실력이 일취월장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에반 때문이기 때문이다.

그런 에반이 더는 단장이 아니라는 말에 당연히 기사들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웅성거리는 걸 잠시 보고 있던 에반이 말을 이었다.

“내가 단장직에서 내려온다고 너희들의 훈련을 돌보아 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너희는 아직까지 미흡하기는 하지만 크라우스 기사단의 모습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 처음 가주와 한 약속이 너희를 제대로 된 기사로 만들 때까지 단장을 하겠다는 것이었으니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려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 말에도 기사들의 표정은 어두웠다.

언제나 자신들의 단장님일 것 같았던 사람이 떠난다고 하자 가슴 한쪽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실망감이 든 것이다.

그때 데일이 질문을 했다.

“누구에게 단장직을 물려주시는 겁니까?”

이미 아버지에게 약간의 언질을 들었던 데일은 다른 이들보다는 조금 담담하게 에반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가능한 질문이었다.

“그건 너희들이 정한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간단하다. 단장이 되고 싶은 사람은 스스로 기사들에게 인정을 받고 단장이 되라는 말이다.”

크라우스 기사단의 평균 나이는 삼십 대 초반이었다.

이십 대와 사십 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기사들의 나이대가 그렇다는 것이다.

나이차가 크게 나는 이들이 아니기 때문에 연륜이라는 걸로 단장을 할 수는 없다. 아니, 그걸 이제 여기 있는 기사들이 원치 않을 것이다.

지금만 보아도 에반의 이야기를 기사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누가 기사단장이 되었든 간에 에반 정도의 실력이나 카리스마,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니라면 차라리 자신들이 인정한 사람이 단장이 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 갑자기 라우웰이 손을 들었다.

“저도 참가할 수 있습니까?”

그 말에 에반이 고개를 저었다.

“너는 크라우스 기사단이 아니니 그럴 수 없다.”

“저도 이제 크라우스 기사단이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너는 내 기사가 될 것이다. 그렇게만 알고 있어라.”

라우웰은 그 말에 약간 불만이 있는 것 같았지만 오히려 크라우스 기사단의 기사들은 그런 라우웰을 부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에반의 기사가 되면 얼마나 강해지는 지는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프타의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자신은 어떤 아양을 떨어도 에반에게서 다른 것을 얻어 배울 수 없는 데 갑자기 며칠 전에 나타난 녀석이 에반에게 배운다니 질투심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게 프타가 라우웰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을 때 에반이 말을 이었다.

“그렇게 알고 다른 사안으로 넘어가겠다.”

그 말에 다시 기사들이 긴장하며 에반을 바라보았다.

처음 한 말이 단장직을 내려놓겠다는 말이었으니 그들로써는 또 어떠한 말이 나올지 긴장이 되었다.

“지금까지 본가는 한 기사단만을 운용해왔다. 하지만 너희들의 실력이 뛰어남에 따라 이제 들어올 다른 기사들과의 차이가 많이 날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제2기사단을 만들기로 했다. 제2기사단 창설의 목적은 실력을 갈고 닦아 너희와 겨룰 정도가 되면 크라우스 기사단으로 편입시키려고 있는 예비 기사단이라 볼 수 있다. 그러니 우선 너희들은 너희의 시동이나 본가의 병사들 중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추천을 해라. 그들을 우선적으로 뽑고 나머지를 모집할 것이다.”

갑자기 많은 것이 변하려는 조짐이 보였다. 하지만 기사들은 조금은 담담하게 그 변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변화가 크라우스 가문의 도약을 위해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때 게이브가 갑자기 물었다.

“그런데 이제 단장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무슨 말이지?”

“전하를 살리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혹시 그 때문에 영지를 받아 떠나시는 겁니까?”

에반의 기사인 아그나르가 일왕자를 구하고 에반은 엘프를 데려가 사경을 헤매는 왕을 치료했다. 어떠한 포상이 주어져도 할 말이 없는 일을 해낸 것이다.

그 때문에 기사들도 이제 에반이 떠날 것이라 예상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미 작위도 있는 상황이니 영지를 받지 않을까 예측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에반은 게이브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난 영지를 받지 않았다.”

받지 않았다는 것은 제의는 있었다는 소리였다.

“제의를 거절한 것입니까?”

“그래. 난 그 누가 뭐라고 해도 크라우스 가문의 사람이다. 아직 크라우스 가문이 비상하는 걸 보지도 못했는데 영지를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단장님은 어떠한 직책을 맡으신 겁니까?”

“가주께서 내게 부가주의 자리를 주었다. 그러니 내가 떠날까 봐 걱정은 하지 마라.”

“예.”

기사들이 크게 대답했다.

* * *

본래 권력은 둘로 나누는 것이 아니다.

수장이 필요에 따라서 그 아래 있는 이들의 직책들을 겹쳐줄 때는 있었다. 수하들이 서로 견제하게 하여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게 하고 또한 더 좋은 방향으로 그들이 일을 수행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수장의 자리는 절대 둘이 될 수 없다.

하늘이 두 개일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런데 쥬드는 그런 생각의 틀을 깨고 에반에게 부가주 자리를 주었다. 어차피 가주의 자리에 큰 욕심이 없는 쥬드이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부가주라는 직책을 새로 만들어 그에게 가주와 동일한 권력을 안겨준 것이다.

그건 정말 새로운 시도였지만 본래 있던 이들에게는 크나큰 위협이었다.

쾅!

“이건 너무한 처사요.”

한 명의 가신이 분기를 하며 탁자를 쳤다.

“그렇소. 아무리 전대 가주의 아들이라지만 이건 너무하오. 또한 가주는 우리와 한마디 상의도 없었기에 더욱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오. 그렇지 않소?”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가신들의 의견을 이끌어 내고 있는 건 가신들 중에서도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월터였다.

월터의 말에 다른 가신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옳은 이야기요.”

여기 있는 가신들은 대부분 마을을 하나씩 다스리고 있는 이들이었다. 마을을 다스린다는 것은 가문에서 내릴 수 있는 가장 높은 직위였다.

사실 여기 있는 가신들은 만약 크라우스 기사단이 십오 년 전 왕가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마을을 봉토로 받기는커녕 집 하나도 제대로 받기 어려운 직책의 사람들이었다. 그저 가문에 사람이 없었기에 연장자라는 이유만으로 마을을 다스리는 권한을 쥐게 된 것이다.

게다가 지금 가문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가신들은 이들의 입김이 들어가고 있었다.

사실은 별것 없었던 이들이 높은 직위에 올라가자 그 직위를 계속 움켜쥐기 위해 한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데일이 한 예전의 만행은 기사단장은 물론이고 이들이 눈을 감아주었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사실 가문이 비상을 하려면 이런 가신들을 쇄신을 하여야 했다.

이미 마우스라는 정보부로 인하여 크라우스 가문의 영역 아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알고 있기에 쥬드도 이들이 지금까지 어떠한 일을 했는지 알고 있었고 이들을 이제 일선에서 물러나게 하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 많은 일들이 일어났기에 아직도 처리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고 그래서 아직까지 같은 대우를 해주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자세히 모르는 그들은 자신들의 발언권이 작아졌다고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에반에게 모든 탓을 돌렸다. 에반이 오고 그와 연관이 되면서 자신들이 설 자리가 대부분 사라진 것이다.

점점 쥬드와 에반을 흉보는 자리가 될 무렵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누가 함부로… 헉!”

샤인 마을에 만들어 놓은 이 회의실은 그 누구도 사사로이 들어오지 못한다.

마을들을 아직까지는 실제적으로 지배하는 이들이 여기 모인 가신들이었고 그 회의실은 그들이 가끔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었으니 함부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없는 것이다.

본래는 크라우스 가문 영역 안에 사는 일반 평민들을 위하여 세운 마을 회관이었지만 지금은 가신들만 이용하는 곳으로 변질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곳에 자신들이 아닌 이가 함부로 들어왔으니 월터는 그 사람을 보고 호통을 치려했지만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그대로 기겁을 하고 말았다.

월터를 기겁하게 한 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 다들 반가운 얼굴들이군그래.”

“정말이군. 반가운 얼굴들이야.”

그 뒤로 또 다른 얼굴이 보이자 가신들의 얼굴을 더욱 핼쑥해졌다.

“으. 으.”

가신들이 말을 꺼내지 못했다.

현재 회의실로 들어온 이들은 모두 크라우스 기사단에 몸을 담았던 노기사들이었던 것이다.

어떤 결정을 하건 전대 가주의 옆에서 조언을 하던 진정한 의미의 가신들이 십오 년 만에 본가로 돌아온 곳이다.

‘저들이 여긴 어떻게?’

노기사들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가신들은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본가가 있는 곳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지금도 본가가 아닌 여기에서 회의를 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게 피하려고 하던 자들이 스스로 찾아오자 월터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뭘 그렇게 얼어 있는 거야? 오랜만에 만났으니 인사는 해야지.”

“바, 반갑습니다. 레오폴트 경.”

레오폴트라 불린 노기사가 월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반가워. 그런데 여기에서 뭐 하고 있는 건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예. 그저 친한 이들끼리 모여서 한담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정말?”

“예. 정말입니다.”

“쯧. 챠벨 님이 있어야 이놈들 속을 속속들이 볼 텐데 말이야.”

“누가 아니래나.”

노기사들이 당황해하는 가신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챠벨은 베켓의 스승이었다.

그리고 삼대의 가주를 모신 사람이기도 했다.

그가 있었기에 크라우스 가문이 강해질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는 크라우스 가에서 중요한 사람이었다.

크라우스 가문이 많이 힘들어진 것도 쥬드가 가주가 된 후 몇 년이 안 되어 세상을 떠난 것 때문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는 본래 크라우스 가문에 자신을 대신 할 사람을 평생을 찾아다녔지만 그런 인재를 찾을 수 없었고 노후에 겨우 베켓을 제자로 들였다.

베켓이 챠벨이 생각하는 것만큼의 인재는 아니었지만 정보수집능력이나 판단력 등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왕가에서 크라우스 가문에 대한 견제를 시작하자 베켓을 데리고 가문에서 나와 밖에서 은밀하게 마우스를 키웠던 것이다.

그전에도 크라우스 가에 마우스라는 정보부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베켓의 십오 년간의 노력 끝에 그저 다른 가문에 있는 정보부와는 차별된 대륙의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그런 곳이 되었다.

이건 모두가 챠벨이 미래를 내다보고 베켓을 키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크리프 왕가가 어떻게 나올지도 생각하고 가문 밖으로 나갔기에 마우스는 심한 견제를 받지 않고 커나갈 수 있었다.

챠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가신들의 몸이 움찔했다.

사실 그들이 예전에 하는 일이라는 것이 챠벨이 무언가를 시키면 그저 따라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런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는 노기사들이 나타나자 가신들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래도 그때보다는 간이 커졌는지 월터는 질문을 했다.

“그런데 이곳에는 무슨 일들 입니까?”

“무슨 일이긴? 너희들을 보러 왔지.”

“그러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도 가주 덕택에 원로라는 감투를 썼거든. 소소한 일이라도 하고 싶으니 무언가 시켜달라고 하니 이런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힌 거야. 그런데 생각해보니 자리는 좋지만 딱히 할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 그때 가주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네. 아무 일이나 하라고 말이야. 원로라는 직책을 이용해서 가문을 일신하라더군.”

“그것이 저희를 찾아온 것과 무슨 상관입니까?”

“아주 상관이 많지. 우리는 크라우스 가문에 잘못된 곳을 바로 잡기 위해서 원로라는 힘을 써볼 생각이거든. 그리고 그 첫 번째가 비리와 부정부패를 잡아내는 거지.”

그러면서 탁자에 서류 하나를 던졌다.

꽤나 두꺼운 서류였다.

“무엇입니까?”

“읽어보게.”

월터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노기사들이 자신을 보고 웃고 있자 얼른 고개를 숙이고 서류를 읽어내려 갔다.

그리고 그걸 읽으면 읽을수록 얼굴이 창백해졌다.

월터가 떨리는 손길로 몇 장쯤 읽었을 때 레오폴트가 물었다.

“어떤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의 눈과 귀를 얕보지 말게. 오늘 네 속옷의 색깔도 있을 수 있는 곳이 크라우스 가문이야. 그러니 괜히 부정을 해서 나중에 더 크게 일을 벌이지마.”

“으윽.”

월터는 어떻게 빠져나가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딱히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미 자신들이 한 만행들이 저 서류 안에 다 적혀 있으니 어떻게 발을 뺄 수도 없었던 것이다.

레오폴트가 말했다.

“자, 그럼 호위호식하며 본가를 망하게 하는 데 일조한 너희들과 이야기 좀 해볼까?”

가신들의 얼굴이 더는 창백해질 수 없을 정도로 창백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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