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장 (34/60)

제3장

사실 루드 왕은 요 몇 달 사이 고민이 아주 많았다.

그는 스미트 후작이나 노드에르 백작을 통한 보고를 듣는 것 말고도 다른 정보계통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십오 년 전 왕자이면서도 크라우스 기사단에게 잡힌 후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곁에 두는 측근이라고 하더라도 그가 가진 정보계통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그들이 전해주는 정보를 보고 받으면서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전해주는 바깥의 세세한 일들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다.

자신이 만든 정책들이건만 그것들이 조금씩 바뀌어 제정이 되는 모습들을 보며 스미트 후작이나 노드에르 백작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이제는 자신이 직접 만든 정보원들도 믿지 못하게 되면서 아예 사람을 믿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그건 모두 크라우스 가문 때문이었고 절대 마주치지 않고 싶은 그들이었다.

그런 가문의 가주가 갑자기 영지전에 승리하고도 통째로 그 알짜배기 영지를 넘기니 당연히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정보원들을 풀어 하나의 단서가 나올 때까지 조사를 했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고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그 고민이 처음에는 그놈이 왜 이럴까에서 내가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가로 바뀌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들지 않았다.

수많은 고민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현재의 상황을 한순간 깨달았다.

그랬다.

루드 왕은 한순간에 지금 왕국이 너무도 잘 돌아가고 그것이 자신 때문이 아니라 스미트 후작과 노드에르 백작의 헌신 때문이라는 것도 인정했다. 또한 지금까지 자신이 너무나 외골수적으로 파고들었다는 것도 인정했다.

그 당시의 일이 그에게는 악몽이 되어 지금껏 떨치지 못했는데 이상하게 지금은 그저 한때의 추억이 되어 있었다.

‘나도 늙은 건가?’

허허로웠다.

마음에서 쥐고 있던 무언가를 놓으니 세상이 달라보였다.

예전의 신경질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만 세상을 보던 루드 왕이 이제는 세상을 바르게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너무나 바쁘게 달려왔고 이런 고민을 할 겨를조차 없었던 루드 왕이 이제야 사색을 하면서 옛날의 그림자를 떨쳐버리고 있는 것이다.

정원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그를 누군가가 불렀다.

“전하.”

“음?”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그런가?”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이 잠겼을 때가 중천에 태양이 떴을 때이니 굉장히 많은 시간이 지나가긴 했다.

“이제 가지.”

“예.”

루드 왕이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푹.

“큭…….”

갑자기 뒤에서 무언가가 들어오는 느낌과 함께 굉장한 고통이 느껴졌다.

루드 왕이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조금 전 자신에게 말을 걸었던 시종이 있었다.

‘그런데 누구지?’

생각해 보니 오늘 처음 보는 시종이었다.

“누, 누구냐?”

“죄송합니다. 전하.”

시종은 루드 왕에게 차가운 미소를 흘리면서 그의 몸에 꽂아 넣었던 검을 비틀어 빼내었다.

“으윽…….”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가운데 다시 한 번 시종이 루드 왕에서 검을 들이대는 순간 곳곳에서 감시를 하고 있던 호위들이 나와 그를 막았다.

이곳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잠복하고 있다가 이제 왕이 움직이자 긴장이 풀렸고 그 순간을 시종이 노렸기에 아무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공격까지 막지 못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챙!

검 하나가 단검의 진로를 막았다.

시종은 검격에 못 이겨 뒤로 물러나더니 단검을 위로 올렸다.

그 사이 호위들은 빠르게 시종과 루드 왕을 떼어놓고 포위를 했다.

한 호위가 소리쳤다.

“이놈 무슨 짓이냐!”

시종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한 번 알아봐.”

그렇게 말하고는 시종은 위로 올린 단검을 그대로 자신의 목에 그었다.

푸슉!

털썩.

피가 튀어 오르면서 그가 쓰러졌지만 그를 포위하고 있는 호위들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냐?”

갑작스럽게 정원 안에서 고성이 오가자 밖에서 지키고 있던 친위대들이 들어왔다.

그들을 보면서 호위가 말했다.

“빨리 스미트 후작님과 신관님을 모셔 와야 합니다.”

“헉! 전하.”

그 사이에 있었던 친위대장인 위릭 자작이 깜짝 놀라면서 급히 루드 왕 곁으로 다가왔다.

호위 한 명이 빠르게 지혈을 한 상황이라 더는 피가 나오지 않았지만 입에서는 피거품이 올라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게 대체…….”

혼자 있고 싶다던 루드 왕의 말에 자신이 곁에서 떠난 것이 잘못이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비밀호위들이 있지만 말 그대로 비밀호위이니 바로 곁에서 지키는 자신과는 조금 위험성이 있었지만 설마 무슨 일이 생길까란 생각에 루드 왕의 말에 따른 것이다.

호위 한 명이 물었다.

“이 시종을 아십니까?”

“그래. 시종장이 아끼는 자였다. 설마 저놈이 범인이냐?”

“예.”

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을 하더니 친위대들을 보았다.

“설마.”

“왜 그러십니까?”

“전하께서 피습을 당하셨다면 왕자님들도 안전하진 않을 것이다.

“확인해 보고 오겠습니다.”

몇몇 기사들이 빠르게 정원 밖으로 나갔다.

“제길.”

이건 호위 이전에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다.

만약 이대로 루드 왕이 죽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목숨이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가 위험해진다. 왕세자가 아직 정해져 있지 않은 지금 십오 년 전 있었던 그 악몽이 되풀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제발 그런 일은 없어야 해.’

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밖을 향해 외쳤다.

“왜 신관이나 스미트 후작님은 보이지 않는 건가?”

“지금 연락을 하러 간 상태입니다.”

그 또한 호위가 정원 밖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지금 루드 왕을 보니 정말 기식이 엄엄했다.

그는 루드 왕이 죽지 않기를 빌고 또 빌었다.

* * *

위릭 자작의 생각대로 정말로 대대적인 습격이 있었다.

유타 상단주가 죽었지만 이미 계획의 날짜는 잡혀져 있었고 그들은 그대로 감행을 한 것이다.

그건 지금 습격을 하는 이들이 유타 상단과의 모든 관계를 끊어놓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잡히더라도 배후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철저하게 훈련을 받은 암살자라고 할 수 있었다.

창!

“크윽.”

아그나르가 그대로 암살자 한 명을 더 베었다.

식사를 하기 위해 이동을 하고 있다가 일어난 일이기에 일왕자를 지키고 있는 호위들이 평소보다 부족했다.

만약 아그나르가 없었다면 갑자기 공격해 온 암살자들에게 일왕자가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었다.

“컥.”

마지막 암살자까지 아그나르의 검에 쓰러지자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국의 왕궁에 버젓이 이렇게 많은 수의 암살자 나타날 줄은 그 또한 몰랐다.

주위에 더는 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아그나르가 일왕자를 바라보았다.

“저하, 괜찮으십니까?”

“경 덕분에 나는 괜찮소.”

하지만 말을 하는 일왕자의 안색은 창백했다.

사냥을 나가 동물은 죽여 보았지만 이렇게 사람이 죽은 것을 보는 것은 이십 평생 처음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그나르도 사람을 죽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담담할 수 있는 이유는 수많은 훈련을 소화하고 마음가짐을 굳게 가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그도 검을 쥔 손이 약간은 떨리고 있었다.

“다행입니다.”

“아니오. 경이 있어 든든하오.”

창백한 얼굴에 약간의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를 보자 예전 크라우스 기사단의 무용을 보는 것 같아 상기가 된 것이다.

호위들이 아그나르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할 때 누군가가 일왕자에게 다가왔다.

“저하, 정말 괜찮으십니까?”

“그래. 난 괜찮다.”

그는 일왕자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채드라는 자였다. 십 년 동안을 일왕자 곁에서 그의 수발을 들어오던 시종이었다.

그때였다.

아그나르가 갑자기 검을 일왕자에게 찔어 넣었다.

“헉!”

갑작스러운 상황에 일왕자는 어떻게 할 생각도 모르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검을 바라본 채 굳어버렸다.

푹!

“무슨 짓이냐!”

일왕자의 호위들이 아그나르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들이 보기에 아그나르가 일왕자를 공격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위들의 검을 이리저리 피하며 뒤로 훌쩍 물러난 아그나르가 일왕자에게 말했다.

“저하,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태연하게 일왕자에게 말을 건네는 아그나르를 향해 눈을 부라릴 때 갑자기 채드가 쓰러지면서 피를 흘렸다.

그의 옆에는 단검이 하나 떨어져 있었는데 일왕자는 다친 곳 없이 채드를 떨리는 눈길로 보고 있었다.

“채, 채드. 네가 어째서…….”

그제야 제대로 상황을 파악한 호위들이 놀란 얼굴로 빠르게 그 둘을 떼어 놓았다.

아그나르가 일왕자에게 말했다.

“손을 쓰지 못하게 한 후 기절만 시켰을 따름입니다. 나중에 그에게 이야기를 들으십시오. 저하.”

상황을 완전히 파악한호위들이 머쓱해하며 말했다.

“고, 고맙소.”

“아닙니다. 저는 그저 단검을 보아 막았을 뿐입니다.”

자신들은 모두 상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그에게 검을 휘둘렀는데 아그나르가 괜찮다고 하자 더욱 미안해졌다.

그때 멀리서 기사 한 명이 달려왔다.

“일왕자 저하, 무사하십니까?”

호위들은 잠시 경계를 했지만 그 기사가 왕의 친위대라는 걸 깨달고는 호위 한 명이 물었다.

“저하는 안전하십니다. 그런데 크룬 경께서 여기서 어쩐 일이십니다.”

크룬은 쓰러져 있는 암살자들을 돌아보다가 물음에 답하였다.

“전하께서 피습을 당하셨습니다.”

그가 침통한 어조로 말하자 일왕자의 안색이 더욱 안 좋아졌다.

“아바마마께서 말인가?”

일왕자는 가장 아끼던 채드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기 전에 루드 왕이 피습 당했다는 말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만 같았다.

“예. 전하.”

크룬의 얼굴에 죄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친위대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바마마께서는 무사하신가?”

“저는 왕자님들이 괜찮으신지 곧바로 뛰어오는 바람에 상황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신관님과 스미트 후작님을 모시러 갔다고 알고 있습니다.”

비틀.

그 말을 듣고는 일왕자가 신형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비틀거리자 아그나르가 재빨리 그의 몸을 붙잡아주었다.

“저하, 정신을 차리십시오. 지금은 전하께서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할 때입니다.”

“아. 아.”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드는 일왕자였다.

말 그대로 왕국의 일왕자인 자신이 이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바마마의 상세를 보러 가자.”

“예. 저하.”

크룬이 신형을 돌려 일왕자를 모시고 정원 쪽으로 달려갔다.

아그나르가 그 뒤를 따라갔다.

* * *

대륙에서도 이름난 유타 상단의 본점이 갑자기 무너지고 시체는 찾지 못했지만 상단주가 죽은 것이라는 추측이 나돌고 있었다.

하지만 크리프 왕국은 그런 소문에 대해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크리프 왕가에 큰일이 생긴 것이다.

갑작스러운 암습으로 인해 루드 왕이 중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고 있고 왕자들과 공주 또한 마찬가지로 습격을 받았다.

그 중 사망자가 없긴 하지만 루드 왕은 아직도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왕자들 사이에서 불온한 움직임이 포착이 되기도 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에반이 왕국 안으로 들어왔다.

그랜드 크로스를 따라 마차가 달리는 터라 일주일 만에 크라우스 본가에 도착한 에반 일행은 쥬드의 환영을 받았다.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아니다. 그런데 조용하구나.”

왕국 안으로 들어오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었다. 만약 왕이 죽는다면 또다시 십오 년 전의 사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귀족들은 몸을 사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이득을 얻기 위해서 일을 꾸몄다는 소문이 도는 와중에 많은 귀족들이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는 탓이었다. 다만 아직까지 왕가에서 그걸 대놓고 조사를 하지 않는 것은 딱히 왕과 대립하고 있는 귀족파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참 이상한 구조였지만 그건 십오 년 전 있었던 크라운 전쟁 때문이었다. 그 당시 전쟁이 일어나고 대부분의 귀족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왕자들을 지원했다. 그러면서 중립파만 남기고 모든 귀족들이 왕자들을 따르는 상황 속에서 크라우스 가문의 개입 때문에 크라운 전쟁은 이상하게 끝이 난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바로 타왕자들을 지원하는 귀족들이 항복이 아닌 당시 이왕자였던 루드 왕의 아래로 들어가면서 충성을 맹세하는 형식으로 귀족들과 피를 흘리지 않는 상황에서 마무리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자 귀족들은 이왕자가 왕이 되기 이전에 충성을 맹세한 것이 되어버렸고 그건 그들이 왕과 대립을 하지 못하는 족쇄가 되어버렸다. 그래서 크리프 왕국은 귀족파는 없고 국왕파와 중립파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중립파라는 말도 크라우스 가문만을 빼면 대부분 힘이 없는 귀족들이었기 때문에 중립파는 있으나 마나한 것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딱히 왕국에서 조사할 세력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수 있는 귀족가가 있었으니 바로 크라우스 백작가였다. 지금까지 크라우스 가문이 왕가에 당한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에반이 본 크라우스 백작가는 아주 조용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형님께서 일왕자에게 붙여주신 아그나르 경 때문에 저희는 괜찮을 수 있었습니다.”

스미트 후작은 일왕자를 살린 것이 아그나르라는 에반의 기사라는 것을 알자 크라우스 가문을 보호해 주었다. 본래부터 일왕자를 지원해 주고 있는 스미트 후작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구해준 보답이었고 또한 일왕자를 지켜준 것을 보면 절대 크라우스 가문이 한 짓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제국으로 넘어가기 전 자신에게 왕가가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남기기도 했었다. 그때는 무슨 말이냐며 무시를 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에반의 경고를 듣지 않은 자신을 자책하고 있는 스미트 후작이었다.

“그런데 왕은 좀 위험한가?”

“신관이나 스미트 후작도 고칠 수 없는 극독이랍니다. 그 때문에 귀족들은 몸을 사리는 와중에도 후계 싸움을 염두해 두고 있습니다.

“그걸 스미트 후작이나 노드에르 백작이 그냥 보고만 있다고?”

“그들의 힘이라도 모든 귀족들을 진정시키는 것은 무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에반이 쥬드에게 물었다.

“어떤가?”

“무엇이 말입니까?”

“그가 죽기를 바라나?”

쥬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닙니다.”

“그래?”

에반으로서는 의외였다. 지금까지 당한 것이 많은데도 쥬드가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쥬드가 웃으면서 설명했다.

“하하하. 그가 딱하다거나 걱정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저 제가 생각하기에는 아직 저희 가문의 힘이 모자랍니다. 다시 일어날 크라운 전쟁이 문제가 아니라 타 왕국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힘을 아직까지 저희가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에 말을 한 겁니다.”

“그렇군.”

쥬드의 생각을 들은 에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왕을 치료할 거다.”

“형님이요?”

“그래. 아마 지금이라면 다른 사람의 몸에서 독을 빼낼 수도 있을 것이다.”

쥬드는 무조건 에반의 말을 믿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를 믿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형님을 믿을까요?”

에반은 치료사도 아니고 신관도 아니며 마법사도 아니다. 그러니 그가 치료한다고 나선다면 오히려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다.

“나를 믿지 않아도 좋아. 내가 전면에 나서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예? 그럼 누구를?”

“지금 본가에 들어온 엘프들이 있지 않나?”

“아. 예. 있습니다. 형님이 초대를 했다고…….”

갑자기 나타난 네 명의 엘프 때문에 굉장히 놀랐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다가 베켓에게 엘프들과 인연을 맺었다는 보고가 떠올랐고 에반이 초대를 했다고 하자 본가에 머물게 배려를 해주었었다.

“엘프들의 치료술은 신비한 점이 많다고 하지. 아마 엘프가 치료를 한다고 한다면 혹시 하는 마음이라도 치료를 허락할 것이다.”

“그렇겠군요. 그런데 엘프가 도와줄까요?”

“그들은 내 말에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

“아무튼 믿어봐라.”

“저야 언제나 형님을 믿지요.”

“그럼 가봐야겠군. 엘프들은 어디 있지?”

“네 번째 객실과 다섯 번째 객실을 주었습니다.”

그곳은 약간 비밀스러운 만남을 할 때 주어지는 객실이었다. 다른 손님방과도 마주치지 않고 가주의 명령 없이는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럼 잠시 뒤에 보자.”

“예.”

어차피 에반이 온다고 해서 나온 사람은 쥬드 혼자였다. 가신들은 에반을 꼴 보기 싫어했고 기사들이 나왔다면 에반은 훈련을 하라며 잔소리를 했을 것이 뻔했다.

에반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쥬드가 옆에 축 늘어진 누군가를 메고 선 베켓을 돌아보았다.

쥬드는 잠시 그 누군가를 보다가 물었다.

“벨인가?”

쥬드도 이미 모든 상황을 보고를 받았다. 그렇다보니 그의 목소리는 약간의 분노마저 담겨 떨리고 있었다.

베켓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렇군.”

“어디로 데려갈까요?”

“가장 위층으로.”

“예.”

베켓이 미소를 지었다. 크라우스 가문의 저택에서 가장 무서운 곳이 있다면 아마 가장 윗층일 것이다. 그곳은 아주 특별히 만들어진 곳이었다.

그리고 쥬드가 가주가 된 후 처음으로 그곳을 쓰려 하고 있었다.

* * *

“에반 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세요.”

하녀의 말에 방 안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녀가 자신은 문도 열지 못한다는 듯 뒤로 빠지자 에반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방 안에서 다른 엘프들과 함께 있는 시에라가 에반을 반갑게 맞이했다.

“에반 님. 어서 오세요.”

그 뒤로 세 명의 엘프가 주춤주춤 일어났다.

에반이 물었다.

“이 엘프들은?”

“제 부모님과 동생이에요.”

어느 곳에서도 후드를 쓰고 다니는 그들은 시에라의 손짓에 마지못해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어두운 색의 피부를 가진 다크엘프들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모두가 다크엘프였지만 생김새를 보자면 시에라와도 닮아 있긴 했다.

“가족들이 모두 다크엘프인가?”

“예.”

시에라가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의 부모가 부정한 존재가 된 것은 그녀가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처음에는 갑자기 달라져 엘프 마을의 어두운 곳으로 쫓겨나는 부모님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 후 어쩔 수 없이 몰래 몰래 부모님을 만나러 다니던 시에라에게 동생이 생겼다. 하지만 그 또한 부정한 존재였다. 부정한 존재에게서 부정한 존재가 태어난 것이다.

그때부터 시에라는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마기에 침식당하지 않은 상황에서 엘프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부정한 존재가 되면 엘프 마을에서도 멀리 쫓아내지는 않고 그들이 어두운 곳이라 부르는 구역에서 살게 해준다. 하지만 그 외의 부정한 존재는 모두 추방이다. 자신의 동생이 추방을 당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는 걸 안 시에라는 일족의 장로들이 시키는 일은 모두 다 했고 자신의 힘을 키웠다.

어느 정도 장로들도 시에라의 동생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말에 기꺼이 따르는 시에라를 보면서 눈을 감아주었고 그렇기에 더욱 일족의 일에 열성적이게 되었다.

모두 자신의 동생을 그리고 부모님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에반이 찾아왔다.

그리고 일족의 장로가 자신마저 부정한 존재로 만들려 했다. 희생의 대가는 일족의 품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게 해주겠다는 것이었으니 거절조차 못했다.

하지만 에반은 힘으로 그들을 몰아내었고 이적마저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이적 하나만을 믿고 여기에 가족들과 일족을 버리고 온 것이다.

에반은 시에라를 보면서 왜 그녀가 그때 절박했는지를 알긴 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의문이었다.

“엘프들도 가족들 간의 정이라는 것이 있나?”

“저희도 생명체에요. 어찌 자신을 태어나게 해준 분들과 타인처럼 지내겠어요? 항간에 떠도는 엘프에 대한 소문은 모두 꾸며낸 것이에요.”

“꾸며낸 것?”

“예. 대륙 한가운데서 살아남기 위해 꾸며낸 이미지에요. 저희는 숲에서 살기를 좋아할 뿐 그 외에는 인간과 많은 점이 다르지 않아요.”

“그런데 왜 그런 소문을 낸 거지?”

“말 그대로 살아남기 위해서였지요. 저희들은 약해요. 엘프들은 마법을 배울 수 있고 정령을 다룰 수도 있지만 어차피 인간들의 마법사에 비해서 크게 웃도는 수준이 아니에요. 그런데 인간들만한 번식 능력도 없고 그들처럼 동족에 대한 유대감이나 결속력이 있는 것도 아니죠.”

“유대감이 없다고?”

“예. 엘프 숲에는 수많은 일족들이 있어요. 그들은 서로를 다르게 부르지요. 인간들은 엘프라고 뭉그러뜨려 부르지만 저희는 타 일족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아요. 그저 엘프숲에 사는 다른 이들 뿐이에요. 일족이라는 것도 사실 알고 보면 인간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모인 계약 관계일 뿐이죠.”

“그런 것 치고는 너는 일족을 위해 희생을 하려 하더군.”

“시에라가 그런 것은 저희들 때문입니다.”

남자 엘프가 나섰다.

“알타니엘이라 합니다.”

“그들이 당신들을 가지고 그녀를 협박한 건가?”

“그렇습니다.”

에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 궁금증을 최대한 자세하게 풀어주려고 노력하는 태도를 보아도 알 수 있겠군. 거래를 할 텐가?”

에반의 물음에 시에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성공을 한다면 그 어떠한 것이라도 들어 드릴게요.”

“마음에 드는군. 그럼 성공한 후에 내 조건을 말하지.”

“예. 그렇게 하세요.”

나중에 조건을 말한다는 말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조건이나 무조건적으로 수용을 하겠다는 태도였다.

에반이 알타니엘을 보며 말했다.

“그때 보니 고통이 심할 수도 있다.”

“상관없습니다. 부정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저에게는 더 큰 고통입니다.”

“그럼 당장 시작하지. 당신이 남자이니 당신부터.”

“알겠습니다.”

겉으로는 당당했지만 긴장이 되는지 침을 삼키는 알타니엘이었다.

부정한 존재가 된 지도 벌써 백 년이 넘게 흘렀다. 그 사이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일들 중에는 절대 좋다고 할 만한 일들은 아무것도 없었다.

알타니엘은 어떻게 해서든 다시 평범한 엘프가 되고 싶다는 마음만이 가득 차 있었다.

“내 앞에 서봐.”

“예.”

에반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냥 보기만 해도 그의 몸 상태를 체크할 수 있지만 그것보다는 이렇게 매개체를 잡는 것이 더욱 빠르고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음.’

에반이 속으로 침음을 흘렸다.

사에르라는 장로와는 다른 형태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마기를 그녀에게 보내어 팔이 부정한 존재로 변할 때는 팔 전체가 마기에 물들었다. 그런데 알타니엘은 심장 안에 자리한 이상한 결정체가 피에 마기를 섞어서 보내고 있었다. 그 결정체가 알타니엘을 계속해서 다크엘프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만약 그 결정체를 없앤다면 그는 다크엘프가 아닌 엘프가 될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 결정체가 심장 안에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어떻습니까?”

에반이 손을 떼자 알타니엘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만 생각을 좀 해보고.”

‘어떻게 하지?’

심장과 일체가 된 듯 보이는 결정체를 떼고 그를 살리는 건 현재 에반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마기를 다른 기운으로 바꾸면 되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혈맥으로만 마기가 흐른다. 그때 장로와는 달리 피부에 마기가 침투한 것이 아니야.’

생각해 보니 어쩌면 에반에게는 더욱 쉬운 일이었다. 그저 마기의 결정체를 다른 기운으로 바꾸어 주면 되기 때문이다.

“가능할 것 같다.”

알타니엘의 표정이 밝아졌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언제 가능하겠습니까?”

“지금 바로 하지. 침대에 누워.”

“예.”

알타니엘이 눕자 에반이 그의 심장 쪽에 손을 대었다.

두근두근.

그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며 왼손으로 목 부위의 한 부분을 건드렸다. 굉장한 고통이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이기에 신경을 약간 차단한 것이다. 완전하게 신경을 차단 한다면 후에 다른 문제점이 생길 수 있는 일이기에 완벽하게 차단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한 번 해볼까?’

에반이 눈을 감고 알타니엘의 심장을 보았다.

심장 안에 붙어 있는 결정체가 계속해서 피에 마기를 싣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가 결정체가 무엇을 느낀 듯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자신에게 기분 나쁜 일이 생길 것을 예감한 듯했다.

에반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대로 마기의 결정체에 목기를 집어넣었다.

마기가 퍼진 숲은 마기를 없애도 생기로 대체를 했지만 지금 알타니엘의 심장 속에 있는 마기는 결정체를 이루고 있었다.

저 결정체를 생기로 바꾼다면 저런 결정체를 이룰 수 없는 생기는 마기가 완전히 생기로 대체되는 순간 결정체가 깨어지고 한꺼번에 생기를 방출할 것이다.

생기가 아무리 모든 것을 살아가게 하는 기운이라도 그것이 과하다면 독이 될 수밖에 없다. 절대 알타니엘로서는 그 생기를 견뎌낼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엘프들과 상성이 잘 맞는 목기로 결정체를 바꾼다는 것이었다.

마기의 결정체는 몸을 떨다가 갑자기 자신의 속에 다른 기운이 들어오자 기겁을 하며 그 기운을 쫓아내려 했다. 하지만 마기가 목기에 대항하기 위해 목기가 들어온 쪽으로 힘을 쏟는 순간 결정체의 다른 부분이 약해졌고 그곳의 마기를 재빨리 목기로 바꾸어 버렸다.

마기를 바로 목기로 바꾸지 않고 목기를 집어넣어 이목을 끈다는 작전이 맞았다. 바로 마기를 목기로 바꾸면 마기가 어떠한 형태로 반항을 할 줄 몰랐기에 에반이 이런 수를 썼고 그것이 맞아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다른 부분마저 다른 기운이 느껴지자 마기는 갈팡질팡하며 자신을 주최하지 못했고 그대로 마기를 양쪽으로 덮치면서 마기를 목기로 변화시켰다.

파앗!

그 순간 알타니엘의 심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그 빛은 서서히 온몸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에반이 심장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나며 이상하다는 듯 그를 보았다.

아무리 마기의 근본인 결정체를 없앴다고 하지만 에반 자신의 다른 도움 없이 다크엘프를 벗어나는 알타니엘의 모습에서 이상함을 느낀 것이다.

에반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를 지켜보고 있는 가운에 알타니엘의 몸을 빛이 완전히 둘러싸기 시작했고 그의 몸에서 자연의 향기가 묻어나기 시작했다.

향기가 난다고 생각하는 순간 빛이 갑자기 사라졌고 그의 모습이 제대로 보였다.

그는 검은 피부를 벗어던지고 본래의 하얀 피부의 엘프로 돌아와 있었다.

알타니엘이 눈을 뜨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느꼈다.

“이건…….”

“지극한 존재.”

알타니엘이 뭐라 말하기 전 시에라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믿기 어렵다는 듯 중얼거렸다.

“지극한 존재?”

에반이 무슨 뜻이라는 듯 물었다.

한참을 자신의 아버지를 보고 있던 시에라가 겨우 정신을 차리며 에반의 물음에 대답을 해주었다.

“인간 세상에서는 하이 엘프라 부르는 존재에요.”

엘프들이 아무리 개인적이라 해도 그들에게도 믿고 따르는 존재가 있으니 그들이 바로 하이엘프였다.

가족단위의 삶을 사는 엘프가 엘프숲이라는 곳에서 살게 된 건 하이엘프가 엘프들을 설득했기 때문이다.

엘프 한 세대에 한두 명만이 존재한다는 하이엘프는 엘프들의 지도자의 역할을 맡는데 현재도 살아 있는 하이엘프인 글라리엔은 인간들 중 마탑주들과 합의를 하여 엘프숲이라는 곳을 만들었다. 마탑주들도 인간들이 엘프들을 잡아 노예로 만들면서 그 수가 점점 감소를 하자 그것을 보다 못해 글라리엔의 뜻에 따른 것이다.

그러면서 마탑은 하나의 선물로 글라리엔에게 저주의 마법을 하나 알려주었다. 저주의 마법의 효용은 엘프들을 보는 순간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거북하다는 느낌을 주게 하는 것이었고 그건 엘프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글라리엔은 엘프숲에 엘프들을 모아놓고 나이가 많은 엘프들에게 그 마법을 주니 그들이 한 일족의 장로가 되었다.

그리고 앨프숲에 모인 엘프들은 각각 흩어져 일족을 이루고 살게 된다.

그 후에 마탑의 입김으로 제국에 엘프법이 만들어졌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인간들이 종종 엘프들을 사냥을 하기 위해 엘프숲에 침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족의 테두리 안에만 있으면 저주 마법을 받을 수 있어 그 마법으로 인해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은 그대로인데 거부감을 느껴 차츰 엘프들을 노예로 만드는 귀족들이 줄어들었고 요즘 제국에서는 엘프를 사냥하는 엘프 사냥꾼은 자취를 감추었다.

엘프 숲이 아닌 다른 왕궁에서 사는 엘프들은 그 저주마법의 혜택을 받지 못해 타 왕국에서는 아직도 엘프들을 노예로 잡고 있었지만 엘프숲에 사는 엘프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고 그렇게 엘프들은 종족을 보존하는 최소한 장치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글라리엔은 늙어갔고 그가 늙어 가는데도 하이엘프가 탄생할 생각을 하지 않자 일족의 장로들이 자신의 마을 안에서 힘을 휘두르게 되었다.

저주 마법이라는 엘프들에게 꼭 필요한 마법을 담보로써 일족을 좌지우지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시에라의 부모님도 다크엘프가 되었고 시에라는 그런 부모님과 동생을 위해 일족을 위해 희생을 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저주마법을 회수해 가더라도 부모님을 꼭 본래의 모습으로 돌려놓고 싶었고 일족에서 추방을 당해 저주마법이 풀려 위험한 상황인데도 에반을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에반의 마법 같은 치료로 자신의 아버지가 지극한 존재가 되었다.

시에라가 믿기 힘들다는 듯 에반에게 물었다.

“어떻게 부정한 존재인 저희 아버지가 지극한 존재가 된 것이죠?”

“난 그저 그를 본래대로 돌리려 노력을 한 것뿐이다.”

“지극한 존재는 태어날 때부터 지극한 존재에요.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그렇지 않죠. 에반 님은 그걸 깬 것이에요.”

그러면서 시에라가 기대어린 눈으로 에반을 바라보았다.

“혹시 제 어머니와 동생도 지극한 존재가 되는 건가요?”

“그건 모를 일이다.”

에반이 확신을 하지 않았다.

“그럼 확인은 해볼 수 있나요?”

“한번 해보지.”

에반이 두 모자 엘프의 곁으로 다가가 그들의 손을 잡았다.

마기의 결정체가 목기의 결정체로 바뀌어 하이엘프가 된 것 같으니 그들도 마기의 결정체를 가지고 있다면 하이엘프가 될 것이다.

그런 판단을 하고 두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그들은 그 어디에도 마기의 결정체 같은 것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두 사람의 상태는 알타니엘과도 달랐으며 또한 서로가 다르기도 했다.

“이들은 하이엘프가 될 수 없다.”

그 말에 알타니엘과 시에라가 실망의 빛을 띠었다.

“하지만 본래의 엘프로 돌아갈 수는 있어.”

“전 그것이면 충분해요.”

시에라의 어머니인 아르넬리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 어린 엘프는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무슨 뜻이죠?”

“대충 설명을 하자면 너희와 이 어린 엘프의 상태가 다르다.”

“자세히 좀 설명 해주세요.”

“저 둘은 피 안에 마기가 섞여 돌아다니는 거지만 이 어린 엘프는 온몸이 마기로 뒤덮여 있다. 만약 목 위 부분까지 마기로 물들어 있었으면 내가 이야기로 들은 그런 다크엘프가 되었을 것 같다.”

그 말에 모두의 안색이 변했다.

엘프들이 말하는 부정한 존재도 두 가지로 분류가 된다.

하나는 마기가 몸 안으로 침투를 하여 되는 것과 엘프가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지 않아 부정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분명 그 상황부터 다르지만 둘 다 부정한 존재라 칭하는 것은 둘 다 마기가 몸 안에 존재한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다만 약속을 어겨 부정한 존재가 된 엘프는 이성이 남아 있는 반면 마기가 침투해 부정한 존재가 된 엘프들은 대부분 이성을 잃고 날뛰다가 스스로 죽음에 이른다.

자신들의 자식이 그런 상태였다는 말에 안색이 변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이 어린 엘프는 조금 시간을 두고 천천히 치료를 해야 할 것 같아.”

“그래도 부탁드려요.”

“그러지. 그럼 두 사람은 나중에 치료하기로 하고 우선은 원하는 걸 말하지.”

“뭔가요?”

“알타니엘, 당신이 나와 함께 왕궁에 가자.”

“그것이 다입니까?”

“이건 알타니엘 당신을 치료해 준 대가입니다.”

시에라가 에반의 말을 파악하고는 물었다.

“그럼 어머니와 동생에게도 조건을 붙일 생각인가요? 저에게 도요?”

“당연하지 않나?”

“그건 불공평해요. 제게 대가를 바라면서 다른 분들까지 대가를 바라다니요?”

“그렇다면 저 너에게 붙일 조건은 빼지. 되었나?”

시에라는 한 가지로 조건을 줄여달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런 협상이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건 이미 처음 만났을 때 깨달은 것이다.

게다가 사실 다시 엘프로 돌려준다는 건 정말 크나큰 은혜였다. 생각해 보면 큰 은혜에 작은 대가를 바라는 것이니 앞에 불공평하다고 말한 건 너무 몰지각한 말이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시에라가 부끄럽다는 얼굴로 에반에게 말했다.

“그렇게 할게요. 제가 너무 제 생각만 했네요.”

“말이 통해서 좋군. 그렇다면 나도 그냥 가기는 뭐 하니 네 어머니를 치료해 주지.”

“지금 말인가요?”

“그래.”

에반은 시에라가 현재 어떤 생각을 하는지 느끼자 호의를 베풀어 주려 하는 것이다.

그 말에 나르넬리가 에반에게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고통스러울 테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알타니엘은 결정체만 목기로 바꿔주자 몸이 저절로 다시 엘프로 돌아왔다.

하지만 몸 안에 결정체가 없는 나르넬리는 피에서 마기를 없애고 생기로 변환하는 작업을 하기 때문에 굉장히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관없어요.”

그러면서 나르넬리가 침대에 누웠다.

“그럼 시작하지.”

에반이 그녀의 심장이 아닌 손을 잡았다.

심장에서 마기가 생기는 것이 아니니 어디에서 시작을 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마기가 서서히 손에서부터 생기로 바꿔지자 나르넬리는 고통 어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악!”

신경을 차단하고 마기에서 변한 생기가 그녀의 몸을 보호하는 데도 굉장한 아픔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녀의 비명에 모두가 안절부절못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말 영원 같은 시간이 흐르고 마지막으로 발끝의 마기까지 완전히 없앤 에반이 손을 떼었다.

그녀는 더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자 눈을 뜨고 에반을 바라보며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되었나요?”

“되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에 미소가 어리고 곧 기절을 했다.

지금까지 다시 엘프가 될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참고 있던 그녀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말을 듣자 그대로 마음을 놓아버린 것이다.

“나르넬리.”

알타니엘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갑자기 힘없이 고개가 꺾이자 놀란 것이다.

“기절을 했을 뿐이다. 걱정하지 마라.”

“고맙습니다.”

“대가를 받고 하는 치료일 뿐이야.”

그렇게 말한 에반이 이제는 시에라의 동생을 바라보았다.

“네 이름은 뭐지?”

“슈이엔이에요.”

“그래. 슈이엔. 넌 지금 네 어머니보다 더 큰 고통을 겪을 것이다.”

“상관없어요. 전 견딜 수 있어요.”

검은 눈동자에 강한 결의가 느껴졌다.

그걸 본 에반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꼭 치료를 해주마.”

한참을 슈이엔의 머리를 쓰다듬던 에반이 알타니엘에게 말했다.

“이제 나랑 함께 가야 될 시간이다.”

그 말에 나르넬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면서 시에라에게 말했다.

“네가 잘 부탁한다.”

“알겠어요.”

“그럼 가지.”

“알겠소.”

알타니엘은 왜 자신이 왕궁에 가야 하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에반을 따라나섰다. 아무리 그가 대가를 바라고 자신을 다시 엘프로 만들어 주었다지만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을 부정한 존재에서 다시 엘프로 만들어주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도 될 만한 일이었다.

그깟 한 가지 대가 가지고 갚을 수 없는 은혜인 것이다.

인간과 일족의 욕심 많은 장로들과 많이 부딪치며 살아간 시에라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는 될 수 있으면 에반의 곁에서 그를 도와주며 살고 싶었다.

그것이 현재 알타니엘의 마음인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