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제1장 (32/60)

제1장

에반은 벨을 따라 나서기로 했다.

파르테스 공작이 더 머무르기를 원했지만 에반은 정중히 거절하며 나중에 다시 방문한다는 말을 남겼다.

타 왕국이라면 절대 이렇게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소드 마스터에 근접하다고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자를 보내는 것보다는 회유를 하거나 회유를 하지 못하면 어떻게 해서든 죽이려 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이곳은 제국이었고 파르테스 공작령이었다.

소드 마스터인지 아닌지 아직 파악도 제대로 안 된 귀족을 위해서 모든 힘을 쏟지는 않는다.

다만 인연을 만들어 놓을 뿐이었다.

“베켓.”

“예.”

“너는 나와 함께 가지 않는다.”

“예? 어떻게…….”

베켓이 반대를 하려 할 때 에반이 그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따라오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네가 뒤에서 좀 더 상황을 파악하여 움직이라는 말이다.”

“알겠습니다.”

에반의 말뜻을 이해한 베켓이 고개를 끄덕였다.

베켓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이 마차가 하나 다가왔다.

끼익.

마차의 문이 열리면서 벨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이쪽으로 타시지요.”

“잘 다녀오십시오.”

베켓의 인사를 받으면서 에반이 마차에 탔다. 벨은 베켓이 따라가지 않는 것을 의아하게 잠깐 바라보았지만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자신이 상관할 것이 아니었다.

마차의 문이 닫히자 에반이 벨에게 물었다.

“그곳까지 얼마나 걸리지?”

“본점 말씀입니까?”

“그래.”

“그렇게 멀지는 않습니다.”

“멀지 않다고?”

“예. 본점은 유타시라는 제국의 위성 도시에 위치해 있습니다. 마차로 가면 십 일 정도 걸릴 겁니다.”

“흠. 알았다.”

고개를 끄덕인 에반이 의자에 느긋하게 몸을 실었다. 벨에게 십오 년 전의 이야기를 들을 시간은 충분하다 생각했다.

벨은 그런 에반의 생각도 모르고 웃으면서 에반의 옆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 * *

파르테스 공작령을 떠난 지 칠 일 정도가 흘렀을 때 벨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와 있었다.

에반이 서두르는 바람에 본점으로 향하는 길은 많은 인원을 꾸리지 못했었다.

그곳까지 가면서 요리할 하인 한 명과 상단에 속한 용병 셋, 그리고 벨과 에반이 지금 본점으로 가는 모든 인원이었다.

하인이 없는 데다가 에반과 같이 탄 사람은 벨 혼자뿐이었기에 에반이 시키는 일은 벨이 모두 다했다.

오랫동안 허드렛일이라고는 하지 않았던 자신이 에반이 시키는 잡일을 모두 한다는 건 정말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본래부터 루크 백작을 닮은 에반을 좋아하지 않았던 벨은 폭발하려는 화를 가라앉히기 위하여 화풀이를 할 대상을 하나 찾아야 했고 지금 그의 앞에 있는 바위가 에반을 대신하여 화풀이를 당하고 있었다.

“내가 저런 놈을 왜 대접해야 하는 거야! 난 유타 상단의 간부 중 한 사람이라고!”

스악!

오러가 실린 검이 바위의 윗부분을 매끈하게 갈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지 재차 바위에 검을 휘두르는 벨이었다.

“죽어! 죽어! 이 개새끼야, 죽어!”

팟 팟

검을 휘두를 때마다 깎이는 바위를 보며 희열을 느끼고 있을 때 벨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날 모시는 게 그렇게 화가 날 일이었나?”

벨이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리고 에반이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아, 아니. 에반 님이 어떻게…….”

하지만 에반은 그의 말을 무시하며 벨에게 다가오더니 바위를 가리켰다.

“저 바위가 나인가?”

“아니 그것이…….”

“이 바위처럼 내 머리를 쪼개고 몸을 난도질 하고 싶나 보군. 그렇지 않나?”

벨은 에반의 말에 당황했다.

“왜? 아닌가? 아무리 보아도 그런 것 같은데?”

당황하며 말을 못하고 있던 벨의 눈빛이 한순간 변했다. 그렇지 않아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 자신을 비꼬기까지 하자 화가 난 것이다.

벨이 에반에게 목소리를 낮게 깔면서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 내 심정이다.”

주위에는 목격자가 없었고 그를 죽여도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를 데리고 가지 못하면 문책을 당하긴 하겠지만 상단주는 자신을 절대 쫓아내지 않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을 했을 때 벨의 기분이 갑자기 좋아졌다. 아니, 나빠졌다.

분명 감정이 폭발하듯 올라오고 있기는 하지만 정확이 이 감정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에반을 보자 그는 에반이 아닌 루크 백작으로 보였다.

벨의 눈이 돌아갔다.

“너, 넌 루크 백작이었었나?”

“그래. 나다.”

“크흐흐. 지금까지 날 속이고 있었군.”

“그렇지.”

“에반, 네가 여기에 온 줄 아는 사람은 있나?”

“없다.”

벨이 횡설수설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다시 루크 백작을 보았다.

그러자 다시 화가 났다.

‘아! 난 저놈을 죽이기 위해 여기 있었지.’

벨이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는 그대로 몸을 박찼다.

“그럼 죽엇!”

팟!

벨이 기습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루크가 놀란 얼굴로 몸을 비틀었지만 벨의 검은 그를 베고 지나갔다.

촤악.

“크윽.”

루크의 가슴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고 그걸 보는 벨이 괴소를 터뜨렸다.

“크흐흐흐. 그래. 이런 거야. 난 네 놈을 이렇게 죽이고 싶었어.”

벨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루크가 피가 흐르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물었다.

“그 정도로 날 좋아하지 않았나?”

“좋아하지 않았냐고? 흥. 난 너를 증오했어. 네 놈이 하는 일이 날 너무 역겹게 했지.”

“그래서 날 죽이기 위해 독약을 탔고?”

“독약? 그렇지. 흐흐흐. 그때는 내가 힘이 없었기에 너에게 독약을 먹였었지. 응? 그런데 넌 어떻게 살아 있지? 아니, 여긴 어디지?”

벨은 갑자기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되는지 표정이 일그러졌다.

루크가 혼란스러워 하는 벨을 보면서 말했다.

“역시나 너였군.”

“응?”

벨은 어느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상황을 제대로 직시할 수 있었다.

루크 백작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루크 백작이 아니라 그 아들인 에반이었고 또한 베었다고 생각했는데 에반은 상처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뭐, 뭐야?”

벨은 조금 전 상황을 똑똑히 기억을 하고 있었다. 절대 꿈은 아니었다.

에반이 벨이 질문에 대답했다.

“확인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약간 술수를 부렸지.”

에반은 공무를 이용하여 벨이 감정을 폭발시키도록 하는 한편 그에게 환상을 보여주었고 벨은 거기에 보기 좋게 걸려들어 에반에게 모든 사실을 토해놓은 것이다.

“크윽.”

벨은 자신이 이상한 술수에 걸려 절대 입에 담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것임을 깨달았다.

이제는 정말 에반을 죽여야 했다.

“죽어!”

다시 한 번을 검을 내질렀다.

소드오러가 실린 강맹한 검격이었다.

에반은 그 검을 보면서도 피할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

벨이 미소를 지었다.

“어리석은 놈.”

검에서 오러가 일렁이며 빠르게 에반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응?’

분명 강맹한 일격이었는데 검이 더는 앞으로 나가지를 않았다.

에반의 목을 향해 찔러 넣은 검이 무엇인가에 막힌 듯 더는 앞으로 가지를 않고 있었다.

“이익!”

벨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면서 자신의 모든 힘을 쏟아내었다.

힘을 쓴 덕분일까?

드디어 손이 앞으로 조금씩 나갔다.

하지만 곧 앞을 바라본 벨의 눈은 더는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지며 소리쳤다.

“뭐, 뭐야?”

자신의 힘 때문에 검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검이 에반과 일정거리를 두고 서서히 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있었기에 검이 움직인 것처럼 느꼈던 것이다.

“으으으으.”

스스스슥.

그걸 본 벨은 손을 멈추고 싶었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강력한 흡입력이 존재하듯 검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제 곧 자신도 형체를 잃어가는 검처럼 가루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머리가 공포로 물들었다.

“멈춰! 멈추라고?”

소리를 질러보지만 자신의 손은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고 있었다.

“으아아악…….”

이제 검신은 모습을 감추었고 검병과 손만 남자 벨은 떠나가라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흡입력이 사라졌다.

“헉. 헉.”

손을 뒤로 빼고 거칠게 숨을 쉬고 있는 벨의 눈에 안도감이 어려 있었다.

“너를 그리 편하게 죽이는 것은 정말로 바보 같은 짓이겠지. 공포를 느꼈으니 이제 고통이 뭔지를 느껴봐라.”

덥썩.

말을 하면서 에반이 벨의 손을 잡았다.

우득. 우드득.

그리고 손을 잡은 부분부터 뼈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벨에게 고통이 찾아온 건 한순간이었다.

“크악!”

어떻게 해서든 에반의 손아귀를 빠져나가고 싶지만 자신의 몸은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해야 해.’

“크아아악!”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 벨이 비명을 더욱 크게 질렀다. 지금 이곳은 야영한 장소에서 조금 떨어져 있긴 했지만 이 정도의 비명이라면 누구라도 희미하게나마 들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에반은 그가 비명을 크게 지르건 말건 그의 뼈들이 서서히 뒤틀리는 걸 보고만 있었다.

희망을 가지고 비명을 지르던 벨도 서서히 고통에 잠식되어 들어갔다. 고통 때문에 어떠한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크큭…….”

더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하게 되었을 때 에반이 벨의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조금 전처럼 비명을 크게 질러 보아라. 그래도 아무도 오지 않을 테니까.”

“흑… 흐흑…….”

눈물이 흘렀다.

이제는 아까 전에 그냥 검과 함께 가루로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마저 들었다.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자는 악마였다. 희망을 사라지게 하고 자신의 마음속에 절망만을 심어주고 있었다.

그리고 몸에 있는 절반의 뼈가 뒤틀려 느낌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에반이 손을 떼었다.

털썩.

에반의 손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되찾았지만 도망칠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도망은커녕 앞으로 한걸음 나갈 힘도 없었다.

에반이 쓰러져 있는 벨의 앞에 몸을 숙이며 물었다.

“우선 십오 년 전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차라리 모든 것을 털어놓고 죽고 싶었다.

아직 말할 힘이 있는지 벨이 입을 열렸다.

* * *

“이제 절 죽여줄 겁니까?”

벨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모두 말한 후 물었다.

“아니, 아직은 널 죽이지는 않아. 너는 나를 상단주에게 데려가 줘야 하니까 말이야.”

그러면서 에반이 다시 손을 잡자 마비가 되었던 몸에 다시 고통이 찾아들었다.

“크아아악!”

우두둑두둑.

뒤틀렸던 뼈가 제자리로 찾아가면서 또다시 벨은 비명을 질렀다. 오히려 뼈가 본래대로 원상복귀 되면서 신경을 건드리는지 더욱더 고통스러웠다.

모든 뼈가 붙었을 때 벨의 정신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지만 에반의 말에 없는 정신도 차려야만 했다.

“정신을 차리고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다시 고통이 무엇이라는 걸 알려주지.”

“저, 정신을 차렸습니다.”

벨이 고개를 어떻게 해서든 들어서 에반을 보려 했다.

“좋아. 바로 그 자세야. 이제 네가 할 일을 알려주겠다.”

“예. 예.”

“넌 유타 상단에 도착할 때까지 이제와 똑같이 지낸다. 주눅 든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안 되고 나를 보며 놀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안 된다.”

“알겠습니다.”

“아니, 아직 실감을 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내가 제대로 알려주지.”

그러면서 에반이 옆에 있는 나무로 다가가 거기에 손을 박았다.

푸욱

“만약 다른 사람들이 너를 이상하게 생각한다면 이렇게 해주지.”

벨이 눈을 크게 뜨고 에반을 바라보았다.

나무가 생기가 빨리듯 빠르게 생기를 잃고 앙상하게 말라가는 모습은 정말 공포스러웠다. 잠시 후 생생하던 나무는 앙상한 고목나무가 되었고 그걸 벨은 똑똑히 바라보았다.

고통이 사라지자 다시 한 번 생에 대한 갈망이 생긴 벨에게는 정말 무서운 광경이었다.

‘악마. 저자는 정말 악마다.’

자신이나 루크 백작을 죽이라고 사주한 유타 상단주는 그저 악당이었다.

그리고 그저 그런 악당인 자신과는 달리 에반은 악마였다.

사람을 죽이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고통과 절망, 그리고 살고 싶다는 의지까지 빼앗아가는 악마로 벨의 눈에는 보였다.

벨은 악마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저, 절대 그런 낌새는 보이지 않겠습니다.”

“그래.”

에반이 뒤로 돌았다.

벨도 이제 상단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몸을 일으키고자 하는데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때 에반이 말했다.

“우선 몸을 추스른 후 씻고 와라. 지금 네 모습은 너무 추해.”

벨은 에반의 말에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상의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하의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온 분비물로 인해 더렵혀져 있는 상태였다.

“흑. 흐흑. 끅끅.”

괜스레 울음이 나왔지만 어떻게 해서든 참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강가로 몸을 움직였다.

에반의 말처럼 일단 씻어야 평소의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벨에게 있어 지옥 같은 밤이 지나가고 아침이 되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마차가 출발했다. 벨은 죽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 아무도 모르게 자연스레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벨의 노력으로 아무도 그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었다.

마차는 순조롭게 이동했고 며칠이 지나자 드디어 위성도시인 유타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유타시가 유타시라는 이름을 가진 이유는 바로 유타 상단 때문이었다.

본래 제도 안에 본점이 있던 유타 상단이었다.

그러던 것이 백오십 년 전 마탑의 도움으로 하나의 건물이 세워지면서 유타 상단은 제도와는 반나절 거리인 이곳을 유타 상단의 본점으로 정했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대지였지만 마탑이 만든 건물이라는 상징성과 절대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건물이 마음에 들어 본점을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그 후 유타 상단은 점점 성장을 하기 시작했고 본점이 있는 이곳 또한 성장을 했다.

본점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생기면서 규모가 마을이 되고 마을이 도시 급으로 발전이 되었다.

그렇게 하나의 도시가 생기자 황실에서는 이곳을 위성 도시로 인정을 해주고 도시의 장을 유타 상단의 단주에게 넘겼다.

본래라면 영주나 귀족이 이곳을 다스려야 하지만 제도에서 너무나 가깝게 붙어 있어 귀족들에게 맡기기에는 부적합하다고 생각을 한 황실에서는 작위가 없는 유타 상단주에게 시를 맡겨 상업의 도시로 인정을 해준 것이다.

이 사건으로 자금의 여유가 있는 상단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도 하나의 도시를 가지기를 원하게 되면서 황제파의 귀족들에게 수많은 로비를 하기 시작했다.

상업도시라는 것이 지금까지 영주의 수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상인들에게는 하나의 구명줄이라 상인들은 느낀 것이다.

또한 영세 상인들도 그렇게 만들어진 상업도시로 모이게 되었다.

대부분의 상업도시는 세금이 없었다. 도시의 장이 상단주이기에 그가 일정한 돈을 황실에 바치는 걸로 세금은 면제가 되었다.

일정한 돈을 바치는 상단주는 그 돈을 다른 상인들에게 걷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상단 안에서 자체적으로 해결을 했기에 세금을 걷는 상업 도시는 극히 드물었다. 다만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내는 돈이 있긴 하지만 영주들에게 내는 세금보다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도시에 내는 돈이 더욱 적었고 이런 상업 도시의 특성상 상인들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상인들이 세운 도시라 그런지 아주 화려했지만 에반은 일절 관심도 두지 않고 벨을 따라 여관에 짐을 풀었다.

본점 건물은 단주를 포함한 간부들이 거주하는 것만으로도 포화 상태에 이르렀기에 손님들이나 약간 직급이 낮은 상단의 상인들은 주위의 여관이나 집을 구입해 지내고 있는 실정이었다.

여관방 안에서 에반의 몇 개 없는 짐을 손수 풀어준 벨이 에반의 옆에 시립했다.

에반이 그런 벨에게 물었다.

“내가 언제 상단주를 만날 수 있지?”

“아, 아직 마, 만나지 못합니다.”

“흠, 그렇군.”

에반은 이미 예상을 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벨은 그런 그의 모습이 더욱 무서웠는지 재빨리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 만날 수 있게 해보겠습니다.”

에반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지금은 만나지 않는 것이 좋아. 그럼 나는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지?”

“시옵이라는 부단주가 대신 나올 것 같습니다.”

“그자는 어느 정도 위치지?”

“부단주들은 모두 같은 위치입니다.”

에반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벨이 그 뒤로 섰다.

“이미 연락을 받았겠지?”

“아래로 내려가면 벌써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래? 그럼 내려가자.”

“예.”

벨이 얼른 방문을 열었고 에반은 방을 나와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벨의 말처럼 누군가가 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에반이 내려오는 것이 보이자 시옵이 일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시옵이 정중히 에반에게 인사했다. 상업 도시의 시장을 비롯해 간부들은 귀족이 아니다. 준귀족처럼 대우를 받지만 상업 도시를 운영하는 대신 작위를 주지를 않았다.

“에반 크라우스라 한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크라우스 자작님. 시옵이라 합니다.”

시옵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에반에게 인사를 했다.

“이리 앉으십시오.”

“그러지.”

“먼 곳에서 이곳까지 오셨습니다.”

“아니다. 여기 있는 벨 때문에 그리 지루한 여행은 아니었다.”

그 말에 벨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그 때문에 지옥을 경험했었기 때문이다.

“벨님이 그 정도로 사교성이 좋았다니 처음 알았습니다.”

“아는 사이인가?”

“단주님의 총애를 받고 있는 분이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군.”

“그나저나 크라우스 자작님께서는 엘프와도 인연이 있다면서요.”

“어떻게 하다가 그렇게 되었다.”

“그래요?”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에반은 지금 유타 상단에서도 관심을 두고 있는 인물이다. 이터널 용병단을 패퇴시킨 장본인이자 엘프와도 인연이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의를 끈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과 인연을 맺어둔다는 건 절대 손해가 아니었다.

그렇게 밤이 깊을 때까지 그 둘은 본심을 숨긴 채 이야기꽃을 피워나갔다.

* * *

“그럼 나중에 다시 보지.”

“예. 크라우스 자작님도 편히 쉬십시오.”

오랜 시간 동안을 자신과 대화를 했다. 시옵은 에반이 자신에게 호의적이라 느꼈다.

시옵이 여관을 떠나고 에반이 쉬고 싶다면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벨도 하인인 양 그를 따라 들어갔지만 다른 사람들을 그걸 보지 못했다.

에반이 벨이 문을 닫자 물었다.

“아마 지금이 상단주가 간부들과 회의를 할 시간이지?”

“예. 맞습니다.”

자신이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이미 에반은 알고 있었다.

그것에 소름이 돋았다.

만약 자신이 잘못된 정보를 알려주면 바로 자신을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처절한 고통 속으로 몰아넣을 것만 같았다.

벨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에반이 물었다.

“간부들이라면 모두 중요한 인물들이겠지?”

“그렇습니다. 지부에 나가 있는 사람들을 빼고는 가장 중요한 이들이 바로 이곳에 있습니다.”

“그럼 가자.”

“예?”

의문을 드러내는 벨의 옷깃을 잡고는 그대로 창문을 통해 허공을 날았다.

“헉!”

벨이 경악성을 토해내든 말든 에반은 허공을 날아 높이 솟아오른 탑처럼 생긴 건물로 향했다.

이곳이 바로 물의 마탑이 만들어 준 유타상단의 본점이었다.

마탑을 만드는 형식으로 만든 유타 상단의 본점이 마탑처럼 생긴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에반이 한 걸물의 위에 벨을 내려주며 말했다.

“잘 봐라. 이곳이 무너지는 모습을 말이다.”

팟!

벨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에반은 그 말을 남기고 상단 본점으로 향했다.

휘리리릭

마탑과 마찬가지로 마법을 쓸 수 없게 마나를 불안정하게 해놓았지만 에반은 그에 상관하지 않고 본점 꼭대기로 올라갔다.

에반이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밤이 찾아온 지 한참이 되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지금 건물을 오가는 사람들 중에는 유타 상단과 관련이 없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반은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그들의 운이라고 생각했다.

‘너희의 불운이라고 생각해라.’

잠시 아래를 바라보던 에방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돌아보았다.

베켓이 말한 대로 몇 군데가 눈에 보였다.

유타 상단의 본점은 철골에 의해 지탱이 되는 구조라 했다.

철골들을 약하게 만들고 지반을 무너뜨린다면 아무리 마탑이 만든 건물이라도 무너질 것이라는 것이 베켓의 추측이었다.

스스슥!

결정을 한 순간 에반의 신형이 그대로 철골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는 철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면서 철골과 철골을 지탱하고 있는 벽을 부식시켰다.

그렇게 꼭대기에서부터 본전의 지하까지 파고 들어갔던 에반이 다시 움직여 또 다른 철골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에반은 그 작업을 계속했다.

* * *

우르르릉!

“응? 무슨 일이지?”

회의를 하고 있던 상단주는 미세한 떨림을 느끼고는 간부들에게 물었다.

간부들도 그것을 느낀 듯 잠시 가만히 있다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어디서 실험을 하다가 폭발이 일어난 건 아닐까요?”

“그런가?”

상단 본점에서는 여러 가지 물품들의 실험도 겸하고 있었다.

본래 마법사들의 실험에는 많은 위험성이 따르지만 그렇다고 실험으로 인해 마탑이 무너졌다는 소리는 없다.

그건 모두 마탑이 실험에 의한 폭발도 견뎌낼 정도로 튼튼하기 때문이었고 그것과 같은 설계로 만들어진 이곳도 실험을 하기에는 최상의 조건이라는 생각에 위험한 실험은 모두 이곳에서 하고 있었다.

상단주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럼 다시 시작하지.”

“예.”

하지만 곧이어 이어지는 큰 흔들림에는 모두가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드드드드득.

갑자기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회의실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 정도의 흔들림이 느껴진 것은 모두가 처음이었다.

“대, 대체 무슨 일이야?”

누군가가 놀란 듯 소리쳤다.

그리고 그 말에 사람들이 서로를 돌아보는 순간 갑자기 그들의 몸이 허공을 떠오르며 굉음이 사방에 울려 퍼졌다.

콰콰콰콰쾅.

“으앗.”

쿠쿵.

간부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허공으로 올라간 솟구치는 몸에 주위에서 터지는 굉음이 그들에게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울림과 동시에 모두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으윽. 대, 대체 무슨 일이…….”

모두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고 있을 때였다.

“놀랍군.”

상단주는 옆에서 또렷한 말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으음?”

그리고 낯선 자를 발견했다.

상단주는 갑자기 나타난 그를 보며 물었다.

“누군가?”

하지만 에반은 상단주를 보는 대신 주위를 둘러보며 감탄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철골을 약하게 하고 지반을 무너뜨리면 베켓의 말대로 당연히 건물이 무너질 줄 알았다.

하지만 무너지기는커녕 약간 흔들리는 것으로 끝이 나자 베켓의 말이 사실이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했다.

하지만 곧 철골을 점검을 해본 에반은 약하게 만든 철골이 아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철골을 볼 수 있었다.

다시 철골을 약하게 하고 확인한 후에야 마탑에서 철골이 부식되지 못하도록 술수를 펼쳐 놓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술수가 무엇인지 에반은 샅샅이 뒤졌고 철골 아래에 새겨진 마법진을 찾았다. 마법진은 교묘하게 철골의 아래에 새겨져 있어 만약 에반처럼 마음대로 벽을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로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마법진을 부수고 철골을 부식시키고 나서야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상단 본점이 무너졌건만 상단주와 간부들이 회의를 하던 회의실만은 멀쩡했다.

상단주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재빨리 회의실로 들어왔건만 아주 멀쩡한 회의실을 보고는 에반은 감탄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온갖 마법이 그 회의실에 새겨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에반이 먼저 마나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스슥.

그러자 회의실 벽에 감춰져 있던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내었고 에반은 그 마법진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그극.

마법진이 지워지자 회의실은 보통의 방이 되었고 곧이어 천장에 금이 가더니 그대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위에 쌓여 있는 건물의 잔해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으아아악!”

쿠쿠쿵

간부들의 비명이 굉음에 파묻히는 사이 상단주 또한 자신을 향해 거대한 돌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죽음을 예상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어떠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자 눈을 떴고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에반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너는?”

“네가 바로 유타 상단의 상단주인 루에트인가?”

루에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반이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아직은 죽으면 안 되지.”

에반의 미소에 루에트가 몸을 떨었다.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가 절대 호의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