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장 (26/60)

제5장

“그래서 포기하겠다는 겁니까?”

베켓이 조금은 불만 어린 눈으로 에반을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큰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대부분 베켓의 심정과 같았다.

그때 쥬드가 나섰다.

“그럼 우선 포기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들은 손을 들어보시오.”

쥬드의 말에 사람들이 머뭇거렸다.

“망설이지 말고. 추궁을 하자는 것이 아니오.”

그 말에 에반과 쥬드를 제외한 모든 인원이 손을 들었다.

이렇게 큰 영지를 가지고도 그걸 포기하겠다고 하니 너무나 아까웠다.

에반은 손을 든 사람 중 한 명을 가리켰다.

“너.”

“예?”

가신이다.

분명 존경을 받을 만한 지위다.

하지만 에반에게는 그냥 너였고 그 가신도 그걸 받아들이고 있었다.

에반이 그에게 물었다.

“전 팔로스 영지는 크라우스 가문의 영역보다 몇 배가 넘은 거대한 영지이다. 그걸 어떻게 관리할지 설명을 해봐.”

가신이 잠시 생각을 하다 대답했다,

“사람을 쓰면 됩니다.”

“어떤 사람을 말하는 거지?”

“외부에서 일을 잘하는 사람을 뽑아서…….”

“벌써 이목을 끌고 우리 가문이 이제 다시 힘을 키우려 한다고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내고 다닐 셈이냐?”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이목을 끈다.

그 말이 사람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언제나 원치 않는 주목을 받아왔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큰 관심을 보내는 이는 이 왕국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왕이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적대적인 눈으로 주목을 하는 것이라면 절대 반갑지 않았다.

에반에게 지목 당했던 가신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자 다른 가신이 대신 나섰다.

“그게 아니라면 팔로스 영지의 본래 관리였던 사람들을 쓰면 됩니다.”

“그들은 대부분 전 영주를 따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제대로 쓸 수 있을까? 그들을 누가 통제하지? 네가 다 할 건가?”

“아, 아닙니다.”

“또한 영지민을 보지 못했나? 우리가 팔로스 영지의 가신들을 모두 잡을 수 있었던 건 영지민들이 고발을 해서였다. 그들이 고발을 왜 했는지 생각을 해봐라. 그들은 절대 관리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그 말에 나섰던 가신이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자, 지금 난 단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그것도 아주 평범한 질문이었다. 관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원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제대로 대답을 못했다. 이런 평범한 문제도 해결을 못하는데 다른 산적해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어디 입이 있으면 말을 해보아라.”

“그냥 에반 님의 말에 따르겠습니다.”

베켓이 나서서 말했다.

처음 불만을 제기한 사람이 그이니 그 말을 철회하는 것도 자신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야지. 그리고 너희는 내가 한 질문을 잘 생각하고 만약 갑자기 영지가 생긴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당황하지 나에게 말할 수 있게 준비해라. 또한 그렇게 이 영지를 만들어라. 지금은 영지를 넘기겠지만 다음번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니 다음번에는 이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들은 에반의 말을 이해했다.

아직은 힘을 기를 때였고 힘을 보여준 후를 준비할 때였다.

무언가를 급하게 먹을 때는 아니라는 걸 이해한 것이다.

“그렇다면 가주께서는 왕도로 언제 출발을 하실 겁니까?”

“이야기가 잘 마무리되었으니 내일 출발하게 될 것이오.”

“아직 제대로 준비도 하지 못했습니다.”

“어차피 간단하게 다녀올 생각이오. 그러니 그리 신경을 쓰지 마시오.”

“그래도 크라우스 가문의 가주이십니다.”

“그러니 더욱 단출하게 나가는 것이오.”

“그럼 이번에도 예물은 준비하지 않는 겁니까?”

쥬드가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어디를 방문을 하든 예물을 가져가는 것이 왕국의 풍조였다.

그러나 크라우스 가문은 단 한 번도 예물을 다른 곳에 가져간 적도 없었고 예물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건 크리프 왕국의 문화가 아닌 제국의 문화에서 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고집스러운 점들이 다른 곳에서 접근하는 다른 귀족들을 밀어내고 고립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한 예로 예물만 보더라도 이런 고집을 부리면서 예물을 준비하지 않으니 제국에 밉보이지 않을까 전전긍긍하여 크라우스 가문과 거리를 두는 귀족들도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최대한 단출하게 준비하겠습니다.”

가신들이 어떻게 하고 보내야 할지 머릿속으로 열심히 계산을 하고 있었다.

* * *

크라우스 본가에서 왕도까지는 말을 타고 이틀의 거리였다.

본래부터 국영지에 자리 잡고 있는 가문인 만큼 왕도가 가까운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사실 본가가 이렇게 가까우면서도 중앙에 진출하지 않는 것이 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아마 그건 모두 크라우스 가문의 가풍 때문일 것이다.

“오랜만이군.”

외성을 지나 왕도의 모습을 창문으로 보며 에반이 말하자 쥬드가 그 말을 받았다.

“예.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의 음성에는 애환이 깃들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마지막에 이곳에 왔을 때가 아버지가 아직은 살아 계실 때였기 때문이다.

“어디에 머물 것이냐?”

이제 감정의 변화를 능숙하게 캐치하게 된 에반이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면서 베켓에게 물었다.

여기에서 잡일 담당은 모두 베켓이 다 했다.

“이게 곧 도착합니다. 아주 뛰어난 여관입니다.”

“마우스들과 관련이 있나?”

“아닙니다. 아직 저희는 그렇게 큰 여관을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조금 안면이 있는 정도입니다.”

“형님, 형님이 이곳에 온 이유에는 무슨 다른 이유가 있었습니까?”

“그래.”

“무엇인지 물어보아도 되겠습니까?”

“나중에 상황이 진척되면 알려주겠다.”

“알겠습니다.”

쥬드는 궁금증을 표하지 않았다. 에반이 이야기해 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잠시 후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리자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대한 건물이 보였다.

거기에는 마르뜨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에반과 쥬드가 내리고 뒤에서 말을 타고 왔던 아그나르와 게이브 그리고 몇몇 병사들이 내리자 여관의 점원인 듯한 인물이 재빨리 다가와 인사를 했다.

“어서 오십시오.”

“크라우스 가문의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네.”

베켓이 점원에게 말하자 점원은 더욱 크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점원은 그들이 들어갈 때까지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고 있다가 모두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에 고개를 들고는 마차와 말을 끌고 마구간으로 향했다.

에반이 잠시 문 뒤쪽을 보며 베켓에게 물었다.

“고개를 제대로 들지 않는군.”

“살아가는 한 부분이겠지요.”

베켓이 에반의 말에 대충 대꾸했다.

“그래?”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에반은 방금 그 점원이 칼과도 겨룰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때문에 다른 이들도 한 번 살펴보았지만 그만한 힘을 가진 다른 이는 없었다.

‘상관없나?’

아까 본 점원이 강하든 말든 에반에게는 사실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자신과 자신의 친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말이다.

마구간에 말을 가져다 놓으러 갔던 토토는 등 뒤로 축축해진 식은땀을 느끼면서 한숨을 쉬었다.

‘대체 누구였지?’

에반이 내리는 것을 보는 순간 이성보다는 더 빠르게 본능이 먼저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그에게 자신의 얼굴을 보이지 않게 본능적으로 가린 것이다.

저절로 자신의 정체를 숨기게 하는 사람은 지금 자신의 마스터 이외에는 보지 못했던 토토는 방금 본 그를 떠올렸다.

그러나 바로 얼굴이 굳었다.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의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한 번 보면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기억력을 가진 그에게는 정말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 주위에 있던, 그저 스쳐 지나가며 보았던 얼굴들을 모두 다 생각이 나는데 정면에서 마주친 그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는 건 정말 이상했다.

‘분명 크라우스 가문이라고 했다. 지금 우리가 벌이고 있는 일에는 크라우스 가문이 끼어 있지 않겠지?’

제발 그러기를 토토는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 * *

여관에서 짐을 풀고 식사를 하자 곧 밤이 찾아왔다.

그리고 에반은 베켓과 함께 여관에서 초대받지 않는다면 갈 수 없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척.

한 장정이 앞장서서 걷고 있는 베켓을 막아섰고 베켓은 하나의 패를 꺼내들었다.

그 패를 유심히 보던 장정이 베켓에게 그 패를 돌려주더니 어둠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베켓이 다시 움직였다.

“너무 조심성이 많군.”

“정보를 다루는 만큼 적이 많은 법입니다.”

하지만 에반에게는 그들의 행사가 짜증이 났다.

벌써 네 번 멈추고 베켓은 똑같이 그들에게 패를 내밀었다.

아무리 보지 않으려 해도 뻔히 보이는 은신술을 펼치면서 앞을 가로막자 에반으로서는 당연히 짜증인 날 수밖에 없었다.

베켓의 말에 에반이 물었다.

“그런 너도 적이 많겠군.”

“하하. 저는 적이 별로 많지 않습니다. 전 정보를 파는 것이 아닌 모으기만 하기에 제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이지요. 아마 제가 누구인지 정확한 정체를 아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일 겁니다. 그런 비밀은 중요 인물들만 알 수 있는 법이지요.”

베켓의 크라우스 가문에서의 직책은 대외비였다.

사람들은 그가 다른 사람과의 조율이 필요할 때 도맡아하거나 자신의 몇몇 되지 않는 수하들을 이용해 크라우스 영역 안의 정보를 가져온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가 대륙 곳곳에 요원들을 배치해 놓고 그들에게서 대륙의 정세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정보를 얻는 굉장하다면 굉장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정말 별로 없었다.

“그럼 지금 만나러 가는 자도 네 정체를 알고 있으니 중요 인물이라는 소리인가?”

“예. 이 왕국에서 둘째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큰 정보 길드의 수장이니 말입니다. 아, 이제 다 왔습니다.”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동안 통로가 끝나면서 철문 하나가 나타났다.

그리고 예의 은신술을 쓰고 있던 이가 모습을 드러내 베켓이 가진 패를 확인했다.

그는 패를 확인한 후 지금까지 만난 이들과는 다르게 고개를 숙이면서 베켓에게 인사를 했다.

“마우스의 수장을 만나 뵈어서 영광입니다.”

“나도 코버트 길드의 후계자인 화이트를 만나서 반갑군.”

그 말에 화이트라 불린 이가 씩 웃더니 철문을 향해 말했다.

“마스터, 베켓 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모시거라.”

“예.”

화이트는 문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에 하나의 열쇠를 꺼내 철문에 꽂아 넣고는 그 위에 달린 구슬에 손을 얹었다.

지잉.

잠시 붉은빛이 감돌던 구슬에서 색이 차츰 흐려질 때 저절로 철문에 꽂아 넣은 열쇠가 움직이더니 문을 열었다.

철컹.

“들어가시지요.”

에반이 들어가면서 철문을 한번 바라보았다.

‘이게 가장 나은 방법이군.’

처음 이 여관에 왔을 때 보았던 점원의 실력 정도라면 이 문 앞까지 오는 데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 말은 이 철문을 빼고는 실력자들에게는 이런 배치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오히려 그런 불편함이 그를 손쉬운 상대로 보이게 했다.

그러나 베켓의 말을 들어보면 그가 이 정도의 기관으로만 자신의 몸을 지키고 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가 베켓 정도의 꼼꼼함을 가지고 있다면 말이야.’

이런 생각을 하면서 들어간 철문 안의 풍경은 꽤나 화려했다.

그리고 그 중앙의 탁자에 얼굴을 두건으로 숨기는 것도 모자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를 볼 수 있었다.

에반은 그를 본 순간 깨달았다.

‘그런 것인가?’

베켓이 탁자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군. 엠.”

“오랜만이야. 베켓.”

인사를 하는 듯 손이 살짝 움직인다.

그 모습을 보며 에반은 두 사람에게 관심을 거두고 방을 둘러보았다.

음침한 지하로 들어왔다고는 믿을 수 없는 화려한 방이었다.

척 보기에도 값비싼 물건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방의 풍경은 눈의 즐거움을 위해 있는 것 같았지만 에반은 그런 것들을 보는 것이 아닌 색다른 것을 눈을로 쫓고 있었다.

그때 베켓이 에반을 불렀다.

“에반 님.”

“응?”

“이쪽이 바로 코버트 길드의 길드 마스터인 엠입니다.”

“가명인가?”

“예. 이쪽 세계에서는 진짜 이름을 쓰는 사람은 별로 없지요.”

‘그렇다면 베켓이라는 이름도 가명인가?’

에반이 베켓의 말에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엠이 베켓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이 왕국에서 일어나는 어떤 정보든 모두 구할 수 있는 엠이라 합니다.”

특이한 소개에 에반이 물었다.

“정보만 사고파나?”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묘한 말이었다.

하지만 에반은 별 관심이 없는지 궁금한 걸 물었다.

“나를 직접 보고 싶다고 했다고?”

“예.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이기에 대면이라도 하고 싶었습니다.”

“대면이라…….”

엠의 말을 곱씹어 본 에반이 그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어떤가?”

“하하. 뭐, 그렇지요.”

하지만 엠은 그에 대한 대답을 살짝 피했다.

그걸 보면서 에반은 자신이 하고 싶은 진짜 질문을 했다.

“이제 날 보았으니 내가 물을 질문에 답을 해주는 게 순서겠지.”

“예. 그렇지요.”

“그럼 그는 어디에 있는가?”

“그를 찾기 어려운 이유가 있더군요. 그는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왕궁 안에서만 생활을 하니까요. 그리고 그가 한 명의 공주님을 모시고 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공주를 모시고 있다고?”

“예. 그녀의 기사가 되어 그녀의 곁을 떠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는 그 어떤 활동도 하지 않아 행방이 묘연했던 겁니다.”

“그렇군. 그럼 그에게 갈 수 있는 길은?”

에반의 물음에 잠시 침묵을 하던 엠이 말했다.

“너무 위험한 걸 물어보시는군요.”

“왜? 이제야 본전 생각이 나나?”

“본전 생각이라니요?”

“이 방을 마법 물품으로 가득 채워 넣고는 날 관찰하려한 자네의 꿍꿍이를 내가 못 알아볼 것 같았는가?”

“예?”

“마법 물품으로 날 파악하려 했지만 아무것도 작동도 되지 않고 나에 대해 알지도 못하니 이제는 그런 정보를 그냥 넘기기 아깝다는 생각이 든 것이지. 왜? 내 말이 틀렸나?”

“아, 아닙니다. 제가 그럴 리가요.”

“흠. 정말 믿을 수 없는 자군.”

에반이 약간 화가 났다는 걸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통해 알아차린 베켓이 나섰다.

엠이 정말로 에반의 말대로 했다면 괘씸하지만 그래도 그는 이 왕국의 정보를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창구였다.

에반의 분노에 의해 사이가 틀어지면 고달파지는 건 베켓 자신이었다.

“자자, 두 분 모두 그만하시고 진정들 하세요. 그리고 엠. 너는 정말 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줄 수 없는 거냐?”

“가르쳐 줄 수야 있지만 만약 그 사람이 죽기라도 한다면 분명 왕가에서는 내가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오를 거라고. 그런 일은 사양이야. 내가 그런 일에 휘말려 책임을 지게 만드는 사태가 오는 건 싫거든.”

“걱정하지 마라. 마탑에 책임을 지게 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

에반의 뜬금없는 말에 갑자기 엠이 침묵했다.

베켓도 깜짝 놀랐지만 표정을 숨기고 가만히 있었다.

엠이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자 에반이 덧붙여서 말했다.

“어차피 이미 왕가에서는 사람을 보내어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가 이곳에 머문다는 걸 알고 있으니 만약 그자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너보다는 나를 먼저 의심하게 될 것이다.”

“아, 알겠습니다.”

엠은 에반이 그냥 넘어가자 자신도 말을 하지 않았다.

누가 그런 이야기를 알려주었는지도 묻지 않았다.

만약 거짓이라면 부정이라도 했을 텐데 사실이니 부정도 하지 못하고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실수였다.

정말로 그냥 넘어가려면 마탑이 자신과 관련이 되었다는 걸 어떻게 해서든 부정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고 에반이나 베켓은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아직도 이야기해 주지 않을 건가?”

가만히 있는 엠에게 에반이 물었다.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엠은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지만 그렇기에 더욱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손으로 탁자의 모서리를 눌렀다.

지잉.

엠이 탁자의 모서리를 누르자 갑자기 탁자의 중앙이 푹 꺼지더니 거기에서 종이 한 장이 튀어나왔다.

에반이 종이를 집어 들며 물었다.

“이건가?”

“예.”

“확실한 거지?”

“왕국의 설계도에 있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그럼 다시 볼 일이 없길 바란다.”

“저도 그러는 것이 좋겠습니다.”

엠이 손짓을 하자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그대로 열렸다.

두 사람이 나가고 그들이 계단 위로 올라갈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그는 화이트를 불렀다.

“화이트.”

“예. 마스터.”

“방으로 들어와라.”

“알겠습니다.”

화이트가 안으로 들어오며 철문을 닫았다.

이 철문을 닫는다면 이 방은 완벽하게 방음이 된다.

절대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았다.

“화이트.”

“말씀하십시오.”

“네가 크라우스 가문에 관련된 정보를 알고 있지?”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럼 크라우스 가문에 왕궁과 관련된 자가 있는가?”

“몇 명 있습니다.”

“그 중에서 에반과 접점이 많은 자가 누구지?”

“켈베스 마도사와 프타라는 기사입니다.”

“둘 다 이미 왕궁과의 인연은 끊어진 것 아닌가?”

“맞습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엠이 물었다.

“켈베스는 왕궁에서 몇 년을 일했지?”

“그리 오래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크라운 전쟁 때 도와주고 보상을 받았다고만 알고 있습니다.”

“켈베스…….”

하지만 켈베스가 마도사가 된 일은 이제 겨우 반년이 채 되지 않았다.

십오 년 전에 그가 특급 기밀에 대한 접근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화이트에게 말했다.

“켈베스에 대해서 조사해 봐라.”

“그는 마탑의 마도사입니다.”

화이트가 살짝 난색을 표했다.

마탑이라는 이름이 가진 무게는 결코 일개 정보 길드가 짊어질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엠은 그걸 무시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할 것이 없으니 조사에 착수해!”

“예. 마스터.”

어차피 그걸 마탑에서 알아도 자신이 피해를 입는 것이 아니라 엠이 피해를 입는 거라 생각한 화이트는 엠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화이트가 명령을 받고 나가고 홀로 남은 엠이 중얼거렸다.

“크라우스 가문이라…….”

절대 얕볼 수 없는 가문이라는 것이 새삼 와 닿았다.

* * *

“대체 그런 고급 정보를 어디에서 얻은 겁니까?”

이미 그걸 사실이라는 걸 아닌 베켓이 그곳에서 벗어나자마자 물었다.

“무슨 이야기지?”

“정보길드가 마탑과 관련이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거야 켈베스가 알려주었지.”

“켈베스 마도사님이요?”

자신이 정보 길드와 알고 지낸 지 벌써 십 년이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자신이 크라우스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갑자기 자신이 노출이 될까 불안해졌다.

“마탑과 연관이 되었다면 왕가와도 연관이 된 것 아닙니까?”

보통 마탑은 정계와 연관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언제나 서로 상부상조를 한다.

어떤 마탑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마탑에서 정보 길드를 운영하는데 그 왕국의 왕가와 연관이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겠지. 켈베스가 그 사실을 안 것이 십오 년 전 왕궁에서 일하고 있을 때라고 했으니까 말이다.”

켈베스가 정보 길드의 배후를 안 건 그가 크라우스 가문으로 가기 직전이었다.

그때도 이미 5클래스 마스터였던 켈베스였지만 자신의 실력을 숨겼다.

만약 에반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마도사의 자격을 받지 않았을 정도로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사는 걸 최선으로 아는 켈베스였다.

그 당시 왕궁을 돕고 있던 켈베스는 그 당시 바람의 마탑의 마법사에게서 하나의 쪽지를 건네받았었다.

본래 마탑들은 서로가 긴밀히 연관이 있었고 마법사들은 같은 마법사라면 어떻게든 도와주려 하기에 바람의 마탑의 마법사가 켈베스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 마법사는 왕의 측근에게 그 쪽지를 가져다주기를 원했고 켈베스는 승낙을 했다.

그리고 쪽지에 마법이 걸려 있다는 걸 안 켈베스는 호기심이 일었다.

5클래스에 오른 켈베스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래도 작은 쪽지에 5클래스 마법이 걸려 있었으니 당연히 호기심이 인 것이다.

켈베스는 그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마법을 해체해 보았고 그 안에 담긴 내용을 볼 수 있었다.

그 내용은 간단했다.

이제 새롭게 왕이 된 루드 왕을 도와주고자 바람의 마탑에서는 정보 길드 하나를 세우려고 하니 도와달라는 서신이었던 것이다.

뭔가 좀 더 은밀한 이야기가 적혀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켈베스는 실망을 하고 다시 마법을 건 후 그걸 왕의 측근에게 가져다주고는 지금까지 잊고 지냈다.

그러던 것이 정보 길드에서 에반을 만나고 싶다는 말에 혹시 마탑에서 에반이 마족이라는 걸 알아보지 않을까 하는 착각을 하며 그에게 그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처음에는 마족이라는 것을 들통 나게 해 마탑과 싸우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곧 그 생각을 접었다.

마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워프를 하고 수많은 마법에 적중당해도 끄떡없는 에반이 일개 마탑에게 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마탑을 멸하고 자신을 죽이러 올 것 같아 바로 이런 생각을 한 것 자체를 자책했다.

에반이 조금이라도 자신의 실력을 감추었다면 켈베스는 절대 마족이라는 오해에서 벗어났을 것이지만 첫인상과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에반을 보면서 이제는 마족이 아니라 마왕이 아닐까라는 생각까지 하는 켈베스였다.

베켓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물었다.

“그럼 왕궁의 모든 정보는 길드와 왕가 사이의 협약에 의해 알려질 공산이 큰 것 아닙니까?”

“그렇게 볼 수 있지.”

“그럼 조금은 불안하지 않습니까?”

“대체 뭐가 불안하지?”

“제 신상내력은 물론 크라우스 가문에 대한 것이라면 이미 왕가에서 샅샅이 알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래서?”

“예?”

“그래서 어떻다는 거지?”

“그거야…….”

에반의 말에 베켓이 할 말이 없었다.

왕가에서 그런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어차피 언제나 주목을 받아왔기에 생각해 보니 별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노출이 되었지.’

언제나 노출되기를 꺼리던 베켓은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잠시 말없이 걷던 베켓이 에반에게 물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그를 찾아가야지.”

“언제 가는 겁니까?”

“지금.”

“아. 예.”

어떻게 찾아갈지 궁금한 베켓이었지만 그 관심을 끊었다.

같이 데려가 달라고 해도 절대 같이 가지 않을 에반이었고 어떻게 갈 것인지 말해달라고 해도 이야기를 해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베켓이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다였다.

* * *

크리프 왕성.

고대 제국의 별궁이 있었던 장소로 그 별궁을 계속 증축하여 완성된 곳이 바로 크리프 왕성이었다.

증축을 하면서 본래 처음 있었던 별궁의 양식을 따라 했기 때문인지 대륙에서도 굉장히 아름다운 왕성 중 하나로 뽑히고 있었다.

게다가 지리적으로 인하여 많은 침탈을 당해온 크리프 왕국이지만 이 왕성만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적들에게 침략을 당하지 않아 수백 년 전 만든 왕궁의 모습이 정말 흠집 하나 없이 보존이 되어 있었다.

그런 왕궁이 한눈에 보이는 하늘 위에 한 사람이 떠 있었다.

아무리 왕성 안에 경계가 삼엄하다고 하더라도 하늘에 떠 있는 사람을 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에 그 누구도 그 존재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왕성의 하늘은 마나를 불안정하게 하여 마법사들이 플라이 마법을 쓰지 못하게 해놓았지만 에반과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는 마나가 아무리 불안정하더라도 허공에 몸을 띄우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에반이 한참을 엠이 건넨 종이를 대조해 보며 왕궁을 바라보다가 한 곳을 뚫어지게 보았다.

“저곳인가?”

에반이 서서히 하늘에서 하강했다.

그자가 있는 곳을 찾았으니 이제는 그를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아무런 소리 없이 내려오는 에반을 발견하는 병사들은 없었다.

공간을 왜곡하여 자신의 모습을 숨겨 그들이 절대 알아차릴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땅에 내려선 에반이 한 건물을 바라보았다.

일견하기에도 굉장히 허름한 가옥이었다.

이 아름다운 왕성과도 어울리지 않는 가옥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 옆에 굉장히 화려한 별궁이 있으니 이 가옥은 더욱 초라해 보이기도 했다.

아직 불이 밝혀져 있는 모습을 확인한 에반이 거침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누가 함부로… 헛!”

갑자기 들어온 불청객에게 불빛 아래 앉아 있던 사십대의 중년인이 한소리 뱉으려다가 에반의 얼굴을 보고는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물었다.

“에반?”

“날 아나?”

에반이 자신을 한눈에 바라보는 그를 보며 물었다.

“역시 에반이었군. 나다. 내가 생각이 나지 않나?”

“누구지?”

“네가 매일 여자 이름 같다고 놀리던 리즈다.”

오랜 전 자신과 함께 놀던 친구가 생각이 났다.

“리즈… 리츠?”

“그래. 본래 이름은 리츠이지. 이제야 제대로 내 이름을 불러주는구나.”

에반은 예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직 어렸을 적 자신과 언제나 같이 놀던 아이.

자신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언제나 자신이 놀리면 울음부터 터뜨리던 아이였다.

“그 울보 리즈냐?”

리츠는 에반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날 제대로 기억하고는 있구나. 조금은 다르게 기억해 주기를 바랐지만 말이다.”

“그래. 어쩐지 낯이 있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지.”

“그런데 네가 여기에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내가 가지 못할 곳은 없다.”

“그렇지. 네가 가지 못할 곳은 없지.”

에반의 말에 리츠는 아련한 추억이 생각이 났다.

예전 놀면서 에반이 매일 하던 말이었다.

에반은 언제나 저택 곳곳을 나다녔는데 가주가 가지 말라는 곳까지 저런 말을 하며 언제나 들어갔었다.

‘그래서 혼나기도 많이 혼났지.’

리츠가 에반을 바라보았다.

만약 그때의 에반이 커서 청년이 된다면 꼭 지금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의 아들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정보를 들었던 리츠는 그가 에반 본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정말 흑마법사에게 붙잡혀 있었던 거냐?”

“말하자면 긴 이야기다.”

“그렇겠지. 그래도 다행이다. 살아 있어서 말이야.”

“난 절대 쉽게 죽지 않다.”

“그리고 부러워. 아직도 그렇게 어려 보이니 말이야.”

“그런가?”

“그래. 그런데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나인지도 몰랐는데 들어왔다면 무슨 용건이 있었을 것 같은데.”

“그래. 널 보러 왔다.”

“왜지?”

“난 아버지의 임종을 보지 못했다. 그러니 복수라도 성대하게 해주는 것이 자식 된 도리라 생각한 것이다.”

리츠는 에반이 하는 말을 바로 이해했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그때의 범인을 찾고 있는 것이냐?”

“그래.”

“만약 찾는다면 성대하게 복수를 하겠다는 것이고?”

“그런 이야기다.”

리츠는 더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왕가와 관련이 되어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어보려던 리츠는 그가 이미 아무도 모르게 왕성 안에 들어왔다는 것이 깨달았다.

어떻게 한지는 모르지만 이곳을 아무도 모르게 들어올 실력에 정말로 복수의 마음을 먹었다면 그것이 설사 왕이라 해도 에반은 그 복수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넌 내가 따라갈 수조차 없게 만드는구나.”

에반은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린 나이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예측을 할 수 없는 아이였다.

또한 언제나 당당했고 솔직했다.

그를 따라 하려다가도 그의 너무나 예측할 수 없는 행동에 뒷모습만 보았다.

매일 그의 뒷모습을 쫓아다니면서 에반의 장난에 꽤나 많은 골탕도 먹었지만 그건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굉장히 소중한 추억이기도 했다.

“아무튼 너에게 물어보지. 넌 그 일에 가담을 했나?”

“내가?”

“그래. 측근 중에 기사단을 그만두고 또한 행방이 묘한 기사는 너를 포함해서 단 세 명뿐이다.”

“그래서 날 의심하는 건가?”

“의심이 아니라 셋 중에 분명 범인이 있다. 그것이 너일수도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아버지의 죽음을 사주한 곳 중 가장 의심스러운 곳이 바로 크리프 왕가인데 너는 이 왕궁에 자리를 잡았으니 의심을 할 수밖에.”

“그렇게 말을 하니 정말 의심받을 만하군.”

“그래서 네가 범인인가?”

“내가 아니라고 한다면 믿어줄 건가?”

“난 상대방이 거짓말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 다 알 수 있다.”

“하하하. 너라면 그럴 수 있지.”

“그래서 진실은?”

리츠가 진지하게 에반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아니다.”

“그렇군.”

에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돌아섰다.

“뭐 하는 거지?”

“네가 아니니 이제 볼일은 없다.”

“어? 내 말을 믿는 거야?”

“네가 믿지 못하겠지만 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넌 진실을 말하고 있지.”

“그래서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데도 그냥 가겠다는 거냐?”

“무슨 할 말이 있나?”

“그냥 푸념이다. 변명이기도 하고. 크라우스가에 뼈를 묻고 싶었던 기사였지만 어쨌든 기사단을 나왔으니 그 가문의 혈족에게 왜 그래야 했는지는 변명해야지.”

에반이 그의 말에 리츠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이야기해 봐라.”

리츠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별궁을 보면서 말했다.

“저 별궁이 보이나?”

“그래.”

꼭 창문으로 별궁을 보려는 듯 창문은 별궁이 다 보이게 만들어져 있었다.

“저 별궁은 제니스라는 공주의 처소이다.”

“그런데?”

“그녀는 내 딸을 너무 닮았어.”

“딸?”

“그래. 내 사랑스러운 딸. 십오 년 전 세상을 떠난 딸 말이야.”

리츠는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그는 열아홉에 아름다운 아내와 결혼을 하고 그 다음 해에 딸을 낳았다.

그들은 정말로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자 전쟁이 일어났고 그는 크라우스 가문이 왕국을 위해 하는 행동에 동참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리츠의 딸은 병을 얻었다.

그리고 전쟁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집으로 돌아온 그는 죽음을 앞두고 있는 딸을 볼 수 있었다.

“그때 그 아이의 눈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하지.”

그가 그 때문에 괴로워할 때 아내 또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게다가 리츠가 없는 동안 홀로 아이를 키워야 했던 그녀는 기력이 쇠했고 마음의 병을 얻자 더는 생명의 끈을 이을 수 없었다.

그때가 루크 크라우스 백작이 독에 의해 쓰러져 있을 때였기에 리츠는 아내를 정말로 극진히 간호했지만 결국 그녀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정말로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자신이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무의미한 세상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았다.

그리고 리츠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왕궁에 있었다.

왕궁의 기사단이 되어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이유는 바로 제니스 공주 때문이었다.

그녀는 정말로 자신의 딸아이와 닮았었다.

신께서 자신에게 다시 한 번의 기회를 준 것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서 그녀를 위해 기사단을 그만두고 여기에 남은 건가?”

“그래. 본래는 기사단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지만 기사단은 언제나 국외로 돌아다니기에 공주님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만두고 왕에게 간청을 했지.”

“왕이 그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그래.”

“그런데 왜 이런 곳에서 지내는 거지?”

“그것도 다 왕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있겠나?”

그러면서 리츠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밝은 미소였고 지금의 에반은 짓지 못하는 그런 미소였다.

“그래도 너를 이렇게 홀대를 하다니 어이가 없군.”

“본래 크라우스 기사단은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기사단이니 어쩔 수 없지.”

“너 같은 실력자가 이런 대우라니…….”

에반 자신이 이 세계에 와서 본 중 가장 강자가 지금 바로 앞에 있는 리츠였다.

신체를 보고 어느 정도의 힘을 쓰고 어떤 검술을 쓰는지 예상을 할 수 있는 에반은 리츠를 바로 파악한 것이다.

처음 켈베스를 만났을 적에는 그가 약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자신이 생각한 만큼 크라우스 기사단이 강하지도 않았었고 자신이 생각하는 강함의 척도에 옛날에 잘나가던 크라우스 기사단의 기사들도 미치지 못한다는 걸 말이다.

이제는 세상에 대한 시각을 주관적이 아닌 객관적인 기준을 볼 수 있는 에반은 앞에 있는 리츠가 객관적인 시각에서 강자라고 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에반의 그런 눈초리를 받으면서 리츠는 피식 웃었다.

자신을 평가하는 듯한 눈초리를 받으면 투지가 일어나야 하는데 도저히 투지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건 두 가지 중 하나였다.

그가 실력이 아예 없거나 자신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지전에서 보여주었다는 그의 모습에서 유추를 하면 에반은 후자에 속했다.

“역시 소문이 사실인가 보군.”

“무슨 소문?”

“네가 소드 마스터라는 소문 말이다.”

“난 듣지 못했는데?”

에반은 자신의 소문이 돌고 있다는 말에 그에게 물었다.

“이곳에 있으면 듣지 않으려 해도 들려. 그리고 거기에는 크라우스 가문의 소문이 종종 등장하지. 대부분 뜬소문이지만 말이야.”

“그럼 내가 소드 마스터라는 소문은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나?”

“글쎄… 그런 건 생각해 보지 않아서.”

“음…….”

아무리 뜬소문이라고 하지만 그런 소문이 난다는 것 자체가 에반을 고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에반에게 리츠가 물었다.

“정말 찾을 생각이야?”

범인을 말함이었다.

“그래.”

“가주께서는 가문을 위해 그 일을 덮어두라 하셨었지.”

“그리고 현 가주는 이제 복수를 원해.”

“왕가의 힘은 그때와 비교해 더할 나위 없이 강해졌어. 만약 그들과 상대를 해야 한다면 조심해야 할 거다.”

“그렇게 강한 왕가의 사람들도 크라우스 가문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 그 이유가 뭘까?”

“크라운 전쟁에서 보여준 우리의 모습 때문이지.”

“그래. 왕가가 이 일에 관련이 되어 있다면 이제는 우리를 보고 두려움에 떨어야만 할 거다.”

“자신만만하구나.”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난 생각한다.”

“그래. 크라우스 가문은 언제나 이런 모습을 보여주어야지.”

리츠가 환하게 웃었다.

“그럼 이제 가보지.”

에반이 일어서서 몸을 돌렸다.

리츠가 에반을 불렀다.

“에반.”

“왜 그러지?”

“만약 누가 가주님께 독을 탔는지 알아낸다면 죽이지 마라.”

“왜?”

“일단 복수를 시작한 이상 복수는 너 한 사람의 몫이 아니야. 아마 다른 기사들도 나와 같은 생각일 것이다.”

리츠가 말하는 기사들은 전 크라우스 기사단이었다.

“알았다.”

에반이 짧게 대답했다.

탁.

에반이 집을 나서고 리츠가 습관적으로 창문 너머의 별궁을 바라보았다.

“제니스. 난 어쩔 수 없이 너와 다른 길을 가게 될지도 모르겠구나.”

별궁은 낮보다 더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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