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장 (25/60)

제4장

사망자 백에 부상자 사백.

크라우스 백작가의 피해였다.

거기다 마을 세 개가 파괴당했으니 꽤나 큰 피해라 볼 수 있겠지만 이터널 용병단이 피해를 보자면 그리 큰 피해가 아니었다.

모두를 포로로 잡은 후 그들의 피해 상황을 알아보니 사망자만 천오백이 넘었다.

절반이나 되는 용병들이 죽은 것이다.

게다가 부상자들까지 헤아리면 더 많은 용병들이 피해를 입었다.

그걸 보고하는 베켓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대승입니다.”

“그렇군.”

쥬드도 만족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병사들도 그리 큰 피해가 입은 것은 아니었다.

부상자가 많은 것은, 처음 겪어보는 전투의 긴장감에서 해방되어 갑자기 일어난 통증 탓인 경우가 많았다.

모두가 만족하는 듯했지만 에반만은 달랐다.

“아직 멀었다.”

“예?”

“이미 저들은 싸우기 전 천여 명의 사상자가 있었다. 전면전에서의 사망자 수는 오백밖에 되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리고 우리는 백 명이나 되는 아까운 병사들을 잃었지. 좀 더 열심히 훈련에 임해야 한다.”

‘그 정도면 잘한 것이 아닙니까?’

이런 말이 목구멍 앞까지 치솟았지만 에반의 뒤에 이어진 말에 그 말이 쏙 들어갔다.

“게다가 팔로스 영지로 들어가야 하는데 오백여 명밖에 가용 병력이 없다는 것도 조금은 불안한 일이고 말이다.”

“예?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에반은 쥬드가 무엇에 놀랐는지 알았지만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제 팔로스 영지를 접수할 때라 하였다.”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형님.”

“지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직 영지전은 끝난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여기에서 멈춘다면 저들이나 왕가에서는 또다시 핑계를 만들어대어 우리 가문을 압박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더욱 심해질 것이다. 우리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는지 똑똑히 보았으니 말이다. 그러니 먼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이제는 팔로스 영지를 굴복시키고 그 후 왕가와 협상을 하는 거다.”

“그런데 우리가 영지전에서 이기더라도 그걸 왕가에서 인정할까요?”

베켓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했다.

그는 크리프 왕가가 크라우스 가문에 얼마나 증오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영지를 복속시키는 일밖에 없었다. 만약 여기에서 멈추었을 때 팔로스 영지에 은밀하게 왕가에서 힘을 실어준다면 어떻게 할 건가?”

“…….”

그 말에는 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쥬드가 물었다.

“그럼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왕가와 협상을 하여 가문이 안정을 찾게 만들 생각이다.”

“예?”

대체 에반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베켓이 반문했지만 에반은 그에 대해 가타부타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건 나중에 알게 될 테니 그만 물어봐라. 우선은 영지전에서 완벽히 승리를 해야 하는 시점이다. 그것만 생각해라.”

“예.”

하지만 여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에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두가 궁금했다.

* * *

“에반 님.”

“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켈베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무슨 일이지?”

“그게, 부탑주 문제입니다.”

“부탑주? 그게 누구지?”

에반이 켈베스를 보며 물었다.

켈베스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아무도 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난 지금 바쁘다.”

“예.”

켈베스는 화염의 마탑의 부탑주인 코임이 잠들어 있는 방으로 갔다.

오늘로 육 일째였다.

에반이 그를 기절시킨 후 켈베스는 그에게 마법을 걸어 깨어나지 못하게 했다.

영지전은 이긴다는 전제 아래 이자를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던 켈베스는 일찍 끝난 영지전으로 인해 바로 깨울 결심을 하고 에반을 찾아갔는데 에반은 그 일에 책임을 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에휴.”

아직 아무런 생각이 없지만 지금 깨워야 했다.

더 늦게 깨우면 깨울수록 더욱 사이만 안 좋아진다.

“부탑주님. 부탑주님.”

“으음.”

부탑주에게 걸었던 마법이 풀리고 그가 신음을 흘리며 일어났다.

“정신이 드십니까?”

“여, 여긴?”

“크라우스가입니다. 무슨 잠을 그렇게 주무십니까?”

“크라우스가? 잠?”

잠시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던 코임은 정신이 번쩍 났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이가 갈렸다.

마지막에 기억이 끊어지기 전 자신에게 다가오는 손을 기억해 낸 것이다.

그가 재빠르게 마나를 점검하고 메모라이즈된 마법을 준비했다.

켈베스는 그 광경을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보다가 물었다.

“무슨 짓입니까? 여기는 손님방이 아닙니까? 여기에서 마법이라니요.”

“손님방?”

그제야 코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처음 보는 방이었다.

당연히 기절을 하고 나서 배정된 방이니만큼 처음 볼 수밖에 없었다.

“무슨 꿍꿍이지?”

“꿍꿍이라니요? 부탑주님은 그저 절 보러 여기에 오셨다가 잠시 잠에 빠져드신 것 아닙니까?”

“아니…….”

아니라고 말을 하려던 부탑주가 입을 다물었다.

새파랗게 젊어 보이는 놈에게 한 대 맞고 뻗었다고 한다면 부탑주의 체면이 서지 않는 것이다.

“아닙니까?”

“마, 맞다.”

“그런데 가주님께 이상한 이야기를 하셨더군요.”

“이야기?”

“가문을 협박하셨다고요?”

“으음.”

그에 할 말이 없어졌다. 그 말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차피 없어질 가문 아닌가? 그 전에 자네를 풀어주는 게…….”

켈베스가 말을 끊었다.

“없어지다니요. 가문은 건재합니다.”

“하지만 영지전이 끝나면…….”

“이미 이터널 용병단은 우리가 포로로 잡고 있습니다.”

“뭐라고?”

“이터널 용병단과의 전투는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팔로스 영지를 접수하러 크라우스의 병사들이 진군을 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 돼.”

그가 아는 이터널 용병단은 쉽게 무너질 곳이 아니다.

“분명 사실입니다. 혹 궁금하다면 소문을 듣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시면 되죠.”

“그럼 대체 내가 며칠을 잔 거지?”

“별로 안 되었습니다. 오 일 정도니까요.”

정확히는 육일이었지만 하루라도 줄이는 것이 낫다는 생각에 켈베스가 줄여 말했다.

“오 일?”

“예. 무슨 잠을 그렇게 주무십니까? 설마 크라우스가를 협박한 후 손님방에서 그렇게 곯아떨어지실 줄은 몰랐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으으음.”

켈베스는 적절히 말을 섞어가며 코임이 반박이나 항의를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내 아직은 크라우스 가문이 이터널 용병단을 이겼다는 걸 못 믿겠네.”

“그럼 수소문해 보십시오. 다만…….”

“다만?”

“만약 그 일이 사실이라면 여기에서 일어났던 일은 불문에 부쳤으면 합니다. 오 일이나 잤다는 것은 말을 할 것이 못 되지 않습니까?”

코임이 켈베스를 노려보았지만 켈베스는 태연했다.

대마도사도 제대로 펼치지 못할 마법을 에반을 통해 펼쳐 보았다.

자신의 곁에 에반이 있는 한 코임 정도는 무섭지도 않았다.

“그래. 알겠네. 만약 크라우스 가문의 저력이 그 정도라면 내가 실례한 것이겠지.”

“예.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일단 나가보겠네.”

“이곳이 부탑주님의 방이니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괜히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어려 보이는 사람에게 맞을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네.”

코임은 속으로 울화가 치밀었지만 조용히 그 울화를 묻으면서 방을 나섰다.

“휴.”

코임이 나간 곳을 쳐다보던 켈베스가 한숨을 쉬었다.

그럭저럭 일이 해결이 된 것을 보니 안도하게 된 것이다.

* * *

영지전에서 팔로스 쪽에 참여한 이터널 용병단이 대패를 했다는 건 팔로스 영지에도 금방 알려졌다.

그건 당연히 그 안에서 사는 영지민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몇 개월 전 팔로스 성이 무너지고 전대 영주가 죽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여겼는데 다시 용병들을 데리고 와 전쟁을 일으키더니 그 전쟁에서마저 이기지 못하고 패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이번 영주가 악마 같은 흑마법사와도 연관이 있다고 하니 영지의 분위기는 매우 좋지 않았다.

본래 왕국의 국영지 안에서 왕국에서 내라는 세금만 내면서 편하게 살던 영지민들인지라 더욱 옛날을 그리워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흑마법사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던 십이사도 두 명의 귀에도 들어갔다.

“크라우스 백작가가 이겼다는군.”

레노의 말에 오트레가 살짝 놀라며 반문했다.

“정말이야?”

“그래.”

“싸웠던 상대가 이터널 용병단이라 하지 않았나?”

“맞아.”

“그런데도 그들이 졌다고? 용병단의 전력을 끌고 오지 않은 건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아. 단장인 벤트릭이 붙잡혔다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말이야.”

“호오. 그렇다면 이제 그쪽을 의심해 봐야 하는 것 아닌가?”

레노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오트레가 크라우스 가문을 조사해 봐야 한다는 소리를 한 건 이곳에 남겨져 있는 흑마법사에 대한 증거가 너무나 인위적이었기 때문이다.

꼭 누군가가 팔로스 영주를 모함하기 위해 만들어진 증거였기에 크라우스 가문에게 그런 의심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레노는 오트레의 이야기에 고개를 저었다.

오트레가 물었다.

“대체 그렇게 확신하면서 크라우스 백작가를 감싸는 이유가 뭐야? 거기에 혈족이라도 있는 거야? 솔직히 너라면 이미 크라우스 백작가를 의심했을 것 아냐?”

“그렇겠지.”

“그럼 네가 알고 있는 사실을 이제는 말해봐.”

“흠. 이건 기밀인데…….”

레노가 이야기해 줄 수 없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하지만 오트레는 바로 코웃음을 쳤다.

“흥. 네가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은 이미 퍼져도 상관없다는 이야기 아닌가? 이 수다쟁이 레노야.”

“하하. 그런가?”

오트레의 말에 객쩍게 머리를 긁적인 레노가 크라우스 백작가가 전에 다오를 위해 어떠한 일을 해주었는지를 이야기해 주었다.

“뭐? 저번에 프레스톤 제국에서 있었던 소탕 작전이 그들의 제보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그래. 게다가 아무도 모르게 탈출을 했지만 하스도 잡았었다고 하더군.”

“하스를 잡았었다고?”

오트레가 더욱 놀라버렸다.

하스가 누구인지는 그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흑마법사들이 언제나 희망이라고 말하는 이가 바로 하스라는 걸 말이다.

그런 그가 숨어 있었던 장소를 제보해 준 크라우스 백작가가 절대 흑마법사와 관련이 있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흑마법사 모두가 잡혀 들어가도 하스와는 맞바꾸지는 않은 거라는 걸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실이 있었으면서 나에게는 그냥 흑마법사의 지부 중 하나를 털었다고 이야기를 한 건가?”

오트레가 알 수없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적개심을 불태웠다.

레노가 그런 오트레의 어깨를 다독여주며 말했다.

“너무 그리 열 내지 말라고. 그도 이번 일을 쉽게 말할 입장은 아니었으니까 말이야. 만약 네가 십이사도가 아니었다면 나도 말을 못했을 거다.”

“그렇군.”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오트레는 이제는 이해를 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흑마법사 놈들이 차라리 크라우스가를 지우기 위해 이중 삼중으로 함정을 파놓았다고 보는 것이 올바르겠군.”

“맞아. 수하들 몇을 보내보았는데 역시나 크라우스 가문의 영역에도 흑마법사가 흘린 마기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고 하더군.”

“흥. 이미 조사를 다 해보았군.”

“그냥 그놈들이 의심이 들어서 말이야. 크라우스 가문에 무슨 수작은 부려놓지 않았는지 궁금했을 뿐이야.”

“하여간 지독한 놈들이네. 마기까지 뿌려놓다니. 그건 아예 망하라고 마법을 펼친 것과 마찬가지잖아.”

“그건 여기도 똑같아. 곳곳에 증거라도 남기듯 마기를 흘리고 다녔더군.”

오트레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레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레노?”

“왜?”

“이렇게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여기를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니는 이유가 뭐야? 이미 결론을 내린 것 아닌가?”

“그래. 결론을 내렸지.”

“그런데?”

“넌 이곳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

“제트로 팔로스란 귀족이잖아.”

“그래. 그는 팔로스라는 이름을 가지고도 있지만 미들네임에 워프스도 있지.”

“워프스? 그 워프스 말이야.”

“그래. 그 워프스.”

“허. 그래서 네가 그리 질질 끌었군.”

“워프스 족속들은 놀려야 제 맛이니까 말이야.”

“하하하. 그런가?”

“맞아.”

레노와 함께 웃던 오트레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워프스라는 성을 쓸 수 있을 정도의 귀족이 이 작은 왕국에 있는 거지? 워프스라는 이름을 쓴다는 것 자체가 능력이 있다는 소리 아닌가?”

“나도 거기에 대해서는 모르겠군. 그가 워프스의 이름을 쓴다고는 하지만 내가 그를 아는 건 아니었으니까 말이야.”

“그럼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크라우스 백작가에서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군. 그러니 이제는 마지막으로 워프스의 성을 쓰는 귀족을 약올리고 이곳을 떠야지. 이미 결론은 내렸으니까 말이야.”

“그래. 전쟁이 일어났는데 조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그들은 정말로 걱정이 없는 듯했다.

* * *

십이사도와는 다르게 정말로 심각한 이들도 있었다.

바로 십이사도의 대화에서도 등장했던 제트로였다.

“테판,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죄송합니다.”

“아니야. 이건 내 잘못이다. 이터널 용병단과의 힘 싸움을 위해 병력을 더 보태지 않은 건 내 실책이야. 크라우스 가문에 익숙한 이들을 몇 명 붙여주어야 했어.”

테판은 제트로의 말에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를 도와주기 위해 옆에 있었지만 이번 일은 자신이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기에 더욱 참담한 마음이었다.

잠시 침묵이 감돌던 방에 테판이 입을 열었다.

제트로가 처음 한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들은 영지전을 끝내기 위해서 이곳으로 병력을 밀고 들어올 겁니다.”

“그렇지.”

“이제 저희에게는 병력이 없습니다. 분명 각 봉토에 병사들이 아직도 있지만 아마 그들은 각자 자신들이 살 길을 찾을 겁니다.”

자신이 가진 조직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정보를 모으는 것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정보가 죄다 부정적인 것이라 더욱 죄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잠시 천장을 쳐다보던 제트로가 말했다.

“네 말은 이미 각 가신들의 마음은 떠났으니 우리도 이 영지를 벗어나자는 거군.”

“예. 이제는 팔로스라는 이름을 버릴 때입니다. 크리프 왕가에서도 이미 이터널 용병단의 실체를 파악했을 겁니다. 거기에 이기지도 못했으니 그들로서는 필히 저희를 내칠 것으로 보입니다.”

“싸워보는 건 어떨까?”

“…….”

테판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답을 찾은 제트로가 쓰게 웃었다.

“후후후. 알았다.”

“죄송합니다.”

테판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제트로는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뭐라고?”

“에반이라고 합니다.”

“그래. 에반. 그가 이번 일을 주도했다고?”

“병사들의 훈련부터 시작하여 전술과 전략까지 모두 그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랍니다. 이터널 용병단은 그 자 하나에게 당한 겁니다.”

“아마 켈베스라는 마도사와 같이 이 성을 방문했던 자였지?”

“예.”

“할아버님이 죽은 것도 그자의 술수일 확률이 크겠군.”

“그렇지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한 제트로가 테판에게 말했다.

결정을 내린 것이다.

“지금은 떠난다.”

“예.”

“그러나 할아버님의 복수는 분명 할 것이다.”

“전 제트로 님을 믿습니다.”

테판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 * *

“에반 님?”

“왜 그러지?”

“그래도 그건 좀 너무한 것 아닐까요?”

“우리 병사들은 절반이 부상을 당했다. 그들에게 줄 위로금이 없는 마당에 그자들에게서라도 충당을 했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나?”

“그래도.”

베켓이 다시 뭐라 말을 하려 했지만 에반이 단호하게 말했다.

“패자는 말이 없는 법이야.”

“예.”

베켓이 이렇게 우려를 표하는 것은 에반이 용병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수거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에반은 그들이 입은 옷을 빼고는 모든 것을 수거하여 그걸 백작가에 귀속시켜 버렸다.

그 때문에 몇 없는 가신들은 아직도 본가에서 갑론을박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승자라지만 너무한 것 아니냐는 토론을 벌이거 있는 것이다.

하지만 좀 더 깊이 파고들어 가자면 이번에 세운 공이 가장 큰 에반을 어떻게 해서든 견제하고 자신들에게 어떻게 해야 떡고물이라도 떨어질까 하는 생각해서 나온 행동들이었다.

이번 영지전을 치르면서 가신들은 도망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참전을 한 것도 아니었고 무언가를 내놓지도 않았다.

다만 그 전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있었는데 대승을 거두어 버리자 발등에 불이 떨어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번 일에 대해 성토를 하고 있는 것인데 에반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포로들의 모든 것을 빼앗고 임시로 만든 감옥에 모두를 가두어 버리고는 하루에 한 끼만을 먹이고 있었다.

베켓은 이제 시작되려는 알력 싸움에 우려가 되기도 하면서 에반이 한 행동을 이해하기도 했다.

‘하긴 돈을 쓸 데가 많긴 하지.’

켈베스가 감옥 곳곳에 만든 마법진으로 그들의 마나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구속하는 건 쉬웠지만 그래도 지출되는 비용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베켓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에반이 베켓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넌 왜 따라오는 거지?”

상념을 접은 베켓이 웃으며 대답했다.

“가문이 첫 승리의 모습을 이 눈에 담기 위해서지요, 게다가 팔로스 영지 곳곳에 마우스의 요원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들을 치하해야 하니 바쁩니다.”

“알았다.”

에반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병사들뿐 아니라 몇몇 가신들도 보였다.

본가에 남아 있는 가신들은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는 이들이고, 여기에 끼어 있는 가신들은 조금은 머리가 돌아가지만 에반의 계획을 전혀 모르는, 똑같이 상황 파악을 못하는 이들이었다.

그래도 나은 점은 모두의 표정이 밝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그때 베켓이 말해왔다.

“이제 멈춰야 합니다. 곧 시누 남작의 성입니다.”

에반이 물어왔다.

“시누 남작이 누구지?”

“전대 팔로스 백작에게 영지를 하사받은 후 은거에 들어간 자입니다.”

“은거에 들어가면서 성을 쌓나?”

“그는 전대 팔로스 백작에게 충성심이 많았답니다. 그래서 팔로스 백작이 크라우스 가문을 언제나 적개심을 띠고 바라보는 것을 알고는 일부러 크라우스 가문과 팔로스 영지의 경계선 부근에 마을을 만들고 성을 쌓은 겁니다.”

“그러면서 납골당도 가기가 어려워졌지.”

작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납골당으로 갔을 때 에반은 이 성을 통과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성문으로 지나가려 했지만 크라우스 가문에서 나왔다는 말에 철저한 검문검색을 했고 통과도 하지 못했다. 몰래 빠져온 터라 신분을 증명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었다.

그 때문에 그 당시 수고스럽게도 성벽을 넘어야 했고 그래서 이 성에 그리 좋은 감정은 없는 에반이었다.

“알 만한 사람이야.”

“저도 몇 번 보았지만 언제나 꼬장꼬장했지요.”

쥬드가 에반에게 말했다.

“그가 괴롭히지는 않았었나?”

“뭐, 어쩔 수 없지요. 납골당을 가야 하니 말입니다.”

“그렇군.”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쥬드의 말 속에는 은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뭐 이제 그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거다. 시작하자. 켈베스.”

에반이 쥬드에게 위로 같은 말을 해주고는 켈베스를 불렀다.

“예.”

켈베스가 음성 확장 마법을 썼다.

기초적인 마법이지만 여기에서 마법사는 켈베스밖에 없기에 그가 직접 하는 것이다.

“말해봐.”

“예.”

에반의 말에 쥬드가 목을 가다듬도 성을 향해 말했다.

“시누 남작, 오랜만입니다.”

아주 큰 목소리가 성을 향해 울렸다.

“오랜만이오, 크라우스 백작.”

그쪽도 마법사가 있는지 바로 대꾸를 해왔다.

이미 영지로 쳐들어올 것을 알고 있던 시누 남작은 병력을 모두 배치해 놓고 크라우스의 병력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사이에 벽이 더 높아졌습니다.”

“당신들의 무용담을 듣고 놀라서 더욱 철저하게 방비를 했지요.”

“그런 이유입니까?”

“예. 누군가 이빨을 들이대는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져서 말이지요.”

말 속에는 적의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쥬드가 그에게 말했다.

“저희가 바란 것은 아주 작은 거였습니다. 그것을 크게 받아들였던 것은 팔로스 백작입니다.”

“흥. 이제는 명분도 챙기려 하십니까? 그냥 여기도 팔로스 성처럼 그냥 날려버리지요.”

시누 남작은 말을 그렇게 하긴 했지만 마도사라도 절대 부술 수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 사건 이후 큰돈을 들여 마도사의 공격도 방어할 수 있는 마법진을 그려 넣은 것이다.

“그것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베켓은 시누 남작의 태도에 에반에게 말했다.

“무슨 말이지?”

“그가 켈베스 마도사님이 성을 무너뜨렸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돈을 들여 마법진을 새겼답니다.”

“별짓을 다 하는구나.”

처음부터 이 성벽을 무너뜨릴 마음이 없었던 에반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바로 움직일까요?”

게이브가 물었다.

그에 에반이 쥬드를 불렀다.

“쥬드.”

“예.”

“이제 바람을 좀 잡아라. 우리는 계획대로 들어간다.”

“알겠습니다, 형님.”

쥬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성에 대고 말했다.

“이제 날려버릴 겁니다. 조심하시오. 시누 남작.”

그러면서 쥬드가 손을 들자 기사들이 움직이고 병사들은 뒤에 있던 투석기를 조립하기 시작했다.

이 투석기는 이터널 용병단이 쓰던 것으로 그들의 것을 가지고 온 것이다.

시누 남작은 투석기가 보이자 약간 당황했다.

자신이 알기로는 크라우스 백작가에서는 투석기 같은 것이 없었는데 갑자기 없던 투석기가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빠르게 마음을 가라앉힌 시누 남작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화살을 쏴라. 기사들이 접근을 못하게 막아라.”

촤촤촤악.

기사들이 움직이려고 하자 위협사격을 하면서 투석기에 대비하기 위해 캐터펄트 사용을 허락했다.

아무리 크라우스 백작가에 공성병기가 없더라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대공성병기를 설치해 놓는 준비성을 발휘하는 시누 남작이었다.

하지만 지금 시누 남작은 상황을 잘못 짚고 있었다.

두 진영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이 은밀하게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에반과 오십여 명의 기사와 병사들이었다.

이미 베켓에게 그들의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듣고 인원을 꾸린 에반이었다.

“모두 들어가라.”

“예.”

위잉.

에반이 연 공간으로 기사들과 병사들이 익숙하다는 듯 들어갔다.

작년에 이곳에 왔을 때 성벽을 넘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 공간에 표식을 해놓은 것이 지금 이렇게 쓰이고 있었다.

프타도 그 안에 포함이 되어 있었는데 처음 공간의 문 밖으로 나온 프타가 마주친 것은 여인의 비명소리였다.

“꺄악!”

시누 남작의 주민들 중 싸우지 못하는 주민들은 모두 광장에 모여 있었고 그 광장 한가운데 갑자기 이상한 틈새가 생기고는 기사가 나왔으니 주민들로써는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쳇, 조용히 침투하기는 글렀군.”

프타가 중얼거리며 검을 뽑아들자 한층 광장은 소란스러워졌다.

무서워 보이는 기사가 검을 뽑자 두려움에 패닉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프타는 검을 휘두를 수 없었다.

그의 손을 잡는 다른 손이 있었다.

“그만 해라.”

“지금 날 막는 거냐? 게이브.”

자신의 손을 잡는 게이브를 매서운 눈빛으로 보는 프타였지만 게이브는 그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넘기면서 내려온 이들에게 말했다.

“단장님이 올 때까지 가만히 기다린다.”

“지금 주위를 보아라. 그들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들이 우리가 침투해 왔다는 것을 바로 알릴 것이다.”

프타의 말대로 몇몇은 빠져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게이브도 이럴 때는 한 명의 본보기라도 보여주어 공포심으로 군중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게이브는 요지부동이었다.

“무슨 상관이지? 어차피 이 병력으로는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시누 남작까지 제압할 수 없다. 그럴 자신이 없는 거냐?”

“뭐라고!”

프타가 화가 나는지 오러를 피워 올리려 할 때 공간의 틈새에서 에반이 나타났다.

그때는 이미 몇 명이 도망을 치고 있었는데 게이브의 말에 그들이 도망을 가도 막는 기사나 병사는 없었다.

에반은 그 둘의 대치를 보다가 물었다.

“무슨 일이지?”

“이곳에 떨어지자 많은 일반 주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처우에 저와 프타가 약간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 병력으로는 시누 남작이 알아도 상관없다. 그래도 불안하다면 내 옆에 붙어 있어라. 가자.”

“예. 단장님.”

게이브가 그제야 프타를 잡은 손을 풀고는 에반의 뒤에 붙었다.

‘저 교활한 놈.’

프타의 눈에는 게이브가 그렇게 보였다.

갑자기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

그의 눈에 재밌게 가지고 놀 수 있는 먹잇감들이 보였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검을 휘두르지는 않았다.

그는 에반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다.

아직은 조용히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래. 나중에 내 발 아래에서 고통 어린 신음을 흘리게 해주마.’

프타는 그렇게 다짐을 하며 그들을 쫓아갔다.

* * *

“뭐? 광장 안에 적이 들어왔다고?”

“예.”

시누 남작은 병사의 보고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성벽은 처음부터 자신이 직접 관리를 했다.

쪽문 같은 것을 만들지도 않았고 비밀 통로도 없었다.

이곳을 지나가려면 오로지 큰 성문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적이 들어왔다는 말에 믿기지 않는 시누 남작은 병사에게 재차 물어보았다.

“정말인가?”

“광장에 모여 있던 주민들이 찾아와 한 말입니다.”

‘설마 주민 안에 간자가 있는 건가?’

이곳에 있는 병력을 조금이라도 분산시키기 위해 누군가가 거짓 보고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잠시 후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시누 남작은 더는 병사의 말을 무시하지 못하고 비명이 들리는 곳으로 자신의 측근을 보내보기로 했다.

“한스, 네가 병사들을 데리고 내려가 봐라.”

“알겠습니다. 시누님.”

바로 뛰쳐나가려는 한스에게 시누 남작이 당부했다.

“처음부터 싸우지는 마라.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부터 파악해라. 만약 상대할 수 없는 병력이 있다면 몸을 피해 다시 이곳으로 와라.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시누 남작은 한스가 가는 것을 보다가 다시 성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열심히 투석기를 조립하는 병사들이 보였다.

그리고 몇몇 기사들이 움직이려고 하면 알아서 병사들이 화살을 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움직임을 보면서 시누 남작은 무언가 깨닫는 것이 있었다.

“아…….”

시누 남작은 멍하니 성 밖을 바라보다가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이제는 비명도 들리지 않았고 소란스럽지도 않았다.

대신 시누 남작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처음 보는 기사와 병사들이 자리해 있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정말 대단하구나.”

요란하게 보이면서 시선을 집중시키고 다른 곳에서 친다.

언뜻 보기에는 쉬워 보이는 전술이지만 막상 사용하려면 여러 요건을 알아야 한다.

게가다 병력 구성은 보니 자신을 속이고 침투를 한 것은 물론 그 병력의 수까지 맞춰 온 듯 보였다.

자신이 데리고 있는 기사의 수가 세 명인 데 반해 저기에 있는 기사의 수가 다섯이 넘는 것을 보며 그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갑옷에 묻어 있는 피를 보자, 허탈감을 분노가 밀어내고 가슴을 꽉 채우기 시작했다.

지금 저 기사들이 묻힌 피는 자신의 기사인 한스와 병사들의 피가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가만두지 않겠다.”

소드 오러가 일렁이는 검을 앞세우고 시누 남작이 다가오는 모습에 에반이 말했다.

“아무리 보아도 항복은 하지 않을 것 같군.”

“제가 나가겠습니다.”

게이브가 허락을 구했다.

에반의 고개가 끄덕여지는 걸 본 게이브가 검을 뽑고는 앞으로 나서 다가오는 시누 남작을 맞이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크크크. 그렇군.”

언제나 쥬드를 호위했던 게이브다.

시누 남작과는 여러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화악.

게이브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듯 처음부터 소드 오러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바로 땅을 박차며 시누 남작이 검을 내리쳐 왔다.

소드 오러를 발현하는 틈을 이용해 공격을 행한 것이다.

하지만 게이브에게는 에반에게서 배운 발놀림이 있었고 거센 공세를 발놀림으로 손쉽게 피해버렸다.

게이브는 그러면서 시누 남작에게 말했다.

“이제는 이 정도에 당하지 않을 실력을 길렀습니다. 남작님.”

몇 번 그와 대련을 한 적도 있던 게이브다.

그러나 지금 시누 남작은 가슴에 분노만을 품고 있었다.

“뭐라는 거냐!”

푸확.

검이 횡으로 움직이며 엄청난 힘을 보여주었지만 게이브는 또다시 그 공격을 가볍게 피하고는 오히려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이미 예전에 호기롭게 자신과 검을 마주했던 시누 남작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냥 끝내는 것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게이브의 마지막 배려였다.

시누 남작이 큰 동작으로 게이브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당연히 손쉽게 피한 게이브는 시누 남작의 허점이 보이자 그대로 찔러 들어갔다.

게이브의 검이 빠르게 시누 남작의 복부를 찔러 들어왔지만 시누 남작은 멍하니 그 검을 바라볼 뿐 막을 생각도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푹.

검이 살을 파고들며 파육음을 내었다.

그러나 비명은 없었다.

그저 하늘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 미소를 짓더니 게이브가 검을 빼자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전대 팔로스 백작의 최고의 충신이 조금은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게이브는 그에게 기사의 예로 인사를 하고는 에반에게 다가갔다.

에반이 말했다.

“네가 마무리를 해라.”

“예.”

“모두 무기를 버려라. 버리는 자에 한해서 목숨을 살려주겠다.”

많은 이들이 숨어서 시누 남작과 게이브의 대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나오자 전의를 상실하고 멍하니 있었다.

그들이 지금까지 싸울 마음이 있었던 것은 시누 남작의 다그침 때문이었다.

그런 이가 없으니 당연히 살길을 찾아 무기를 버리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 *

아무런 피해 없이 첫 마을을 공략한 크라우스 백작가는 파죽지세로 승승장구를 했다.

시누 남작은 크라우스 백작가를 경계하여 성벽을 세웠지만 그 이후의 마을들에서는 성벽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계속 팔로스 성을 향해 나가면서 봉토를 받은 다른 가신들도 만났지만 그들의 저항은 아주 미미했다.

그리고 반 정도 영지를 점령했을 때 드디어 팔로스 백작에게서 전령이 왔다.

“가주님을 뵙고 싶습니다.”

잠시 쉬며 숨을 고르고 있던 그들이기에 전령을 부담 없이 맞이했다.

테판은 바로 쥬드를 볼 수 있었다.

‘저자가 에반인가?’

테판은 평범한 복장을 하고 쥬드의 옆에 앉아 있는 자를 보았다.

일견하기에는 정말 평범해 보였다.

표정이 지나치게 없는 것을 빼고는 그에게서 느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테판은 그를 에반이라 확신했다.

이상하게 그를 보자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그때 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무슨 일인가?”

그제야 자신이 여기 있는 이유를 생각해 낸 테판이 공손히 쥬드에게 인사를 했다.

“백작님의 서찰을 전하러 온 테판이라 합니다.”

오른쪽에 서 있던 사내가 바로 쥬드에게 말했다.

“현 팔로스 백작의 그림자라고 불리는 자입니다.”

‘나를 알고 있다?’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랐고 자신의 앞에서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 것을 보며 또 한 번 놀랐다.

자신은 전면으로 나선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상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는데 자신은 그가 누구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대체 누구지?’

자신은 정보 조직을 운용한다.

물론 그것이 제국 쪽으로 더욱 뻗어 있었지만 크리프 왕국에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상대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패배감마저 들었다.

테판은 얼굴의 표정을 애써 수습하면서 쥬드에게 서찰을 건네었다.

그 서찰을 모두 읽은 쥬드가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뜨면서 테판에게 물었다.

“당신이 팔로스 영주의 그림자라면 잘 알겠군. 이 서찰을 보낸 저의가 뭐지?”

“다른 뜻은 없습니다. 영주님께서는 정말로 영지전을 그만 하시길 원하십니다.”

“여기에서 멈추자는 건가?”

“아닙니다. 전면적으로 영지를 포기하시겠다는 겁니다.”

그 말에 쥬드가 살짝 놀란 얼굴이 되었다.

설마 이렇게 쉽게 영지를 포기하겠다는 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때 옆에 있던 에반이 끼어들었다.

“시간을 벌면서 재물을 빼돌린 건 그 이유 때문인가? 완전히 이 영지를 포기하기 위해서?”

“예?”

테판은 자신도 모르게 대꾸했다.

설마 그것도 알고 있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계속 당황스러운 상황이 연출되면서 제대로 얼굴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테판이었다.

에반이 그런 테판을 보며 말했다.

“아직 재물을 모두 옮기지는 않았지만 한 가지 물어보지.”

“무, 무엇입니까?”

“너희는 우리에게 잡힌 포로들을 포기하려는 건가?”

“아, 아닙니다.”

“그럼 재물로 포로들을 사야 하는데 왜 그 재물들을 어렵게 옮기고 있는 거지?”

“그, 그건.”

테판은 사실 영지를 포기하겠다는 걸 확실히 전하고 그 대가로 포로의 신원을 확보하려고 했다.

그런데 에반이 이렇게 나오자 할 말이 없었다.

“설마 영지를 포기한다는 말 한마디를 전해주면서 포로들을 양도해 주길 원하는 건 아니겠지? 이제 가신들 몇 명만 처단하면 곧 팔로스 성이다. 너희가 성을 비우지 않는 것이 어쩌면 더 좋은 상황이다. 지긋지긋하게 십오 년 동안 옆에서 괴롭히던 귀족 하나를 지워버릴 수 있으니까 말이다.”

“…….”

에반이 말을 하지 못하고 있는 테판에게 말했다.

“이미 영지는 우리 것이나 다름이 없다. 만약 포로들을 구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다른 대가를 가지고 와야 할 것이다.”

“대가라니요?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

“네 주인이 빼돌린 재물의 일부 말이다. 우리는 포로의 양도와 함께 승리에 대한 보상을 받고 싶을 뿐이다.”

“으음…….”

영지도 모자라 재물까지 달라는 에반의 말에 테판은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잠시 그를 보고 있던 에반이 물었다.

“네게 그걸 결정할 권한까지는 없는가?”

잠시 생각하던 테판이 물었다.

“만약 우리가 포로를 사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우리에게는 밥만 축내는 포로는 필요 없다. 그렇다고 적을 풀어줄 수는 없지.”

지금 담담하게 모두를 죽인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테판은 에반을 보며 섬뜩함을 느꼈다.

‘일반적인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난 자다.’

지금까지 많은 군상들을 봐왔지만 에반은 달랐다.

그에게 생명의 무게는 깃털보다 가벼워 보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테판이 물었다.

“며칠 말미를 주실 수 있습니까?”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이야기인가?”

“예.”

“뭐, 시간을 주겠다.”

에반의 말에 테판의 안색이 밝아졌다가 뒤이은 말에 다시 흐려졌다.

“우리가 팔로스 성에 도착할 때까지 결정하면 되는 사안이니까 말이다.”

계속해서 병력을 움직이겠다는 소리였다.

‘병사를 움직였어야 하는가?’

이런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저항이라도 해보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병사들을 끌어다 모으면 그들의 병력보다는 배는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을 곧 지웠다.

아무리 병사들을 끌어 모은다고 하더라도 이길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볼 수 있는 이터널 용병단도 이들에게 당했다.

그런데 전투라고는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병사들로 전쟁을 하라면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테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대한 빨리 알려야 한다.’

지금 테판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뿐이었다.

이미 포기해 버린 영지가 공격을 받는 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결말을 잘 지어야 후에 행동을 하기가 편했다.

제국에서 다시 재기를 하려면 그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테판은 제트로를 어떻게 해서든 설득하리라 마음먹었다.

* * *

테판이 다시 에반을 찾아온 것은 네 개의 마을에 더 항복을 받은 후였다.

영지를 포기하고 붙잡힌 포로를 산다는 결정을 내리고 그에 대한 권한을 테판에게 쥐여 주어 보낸 것이다.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베켓의 주도하에 빠르게 포로 교환이 시작되었고 그 전에 영지를 완전히 크라우스 가문에 넘긴다는 서류를 쓰게 만들었다.

이미 제트로는 영지에 대해 모든 마음이 떠나 있었다.

봉토를 가진 가신들이 산발적으로 저항을 하고는 있었지만 그건 자신과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쯤 다오에서 나온 두 명의 십이사도들도 흑마법사의 농간이라는 결론을 지으며 제트로의 구속 아닌 구속을 풀었다.

제트로가 밖으로 나다니고 싶어도 지금까지 꼼짝을 못한 것은 이들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며칠 후 조사관이 도착했다.

영지전에 하자가 없는지 조사를 했고 모든 것이 왕국법 내에서 허용되는 안에서 영지전을 치렀다는 결론이 나자 크라우스가에 대한 승리를 정식적으로 공인했다.

조사관은 영지를 떠나기 전 쥬드에게 왕명을 전했다.

“승전을 기념하여 왕궁에 들러라.”

이런 내용의 말을 아주 길게 풀어서 한 조사관이었다.

쥬드는 조사관에게 팔로스 영지에 대한 일이 모두 마무리된다면 왕을 뵙겠다고 말을 했다.

그건 핑계가 아니었다.

영지전이 완전히 끝나자 쥬드는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바빠졌다.

가문이 가졌던 땅보다 족히 세 배가 넘는 땅을 삼켰다.

그에 배탈이 나지 않는다면 그것이 정상이 아니다.

물론 이 영지를 삼킬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불안한 영지민이나 춘곤기에 들어서 끼니를 제대로 때우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할 일이 많았다.

게다가 민란도 걱정을 해야 했다.

갑자기 바뀐 영지 주인 때문에 딴마음을 품은 이들이 봉기를 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쓸데없는 염려였다.

크라우스의 병력이 팔로스 영지로 들어왔을 때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은 시누 남작의 병력뿐이었다.

게다가 주민들에게는 털끝만큼의 상처도 없었다.

그 이후로는 변변한 저항이 없이 마을을 복속시켜 나갔기에 팔로스 영지의 영지민들에게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팔로스 백작의 가신들이 문제였는데 그것도 곧 해결이 되었다.

그들이 숨은 장소를 영지민들이 솔선수범해 고발을 한 것이다.

십오 년 전까지 그저 국영지에서 세금만을 내고 살아온 그들로서는 가신들이 가지고 가는 돈이 고혈을 짜낸다고 생각되어 그리 좋은 시선으로 그들을 보지 않았었다.

그런데다가 크라우스 가문은 아직도 나라를 구한 영웅의 가문이었다.

팔로스 영주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생각에 최대한 협조를 하며 아무런 마찰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 * *

제트로는 팔로스 영지나 크라우스 영지가 아닌 그 밖에서 포로들을 모두 받고 길을 떠났다.

그것이 사흘 전이었는데 아직도 벤트릭은 포로 신세였다.

“이게 무슨 짓이오?”

벤트릭이 자신을 꿇려놓은 제트로를 무섭게 쏘아보며 물었다.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들을 위해 싸워줬는데 이런 대접을 받고 있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특별하게 크라우스 가문에서 산 단단한 마나 구속구를 차고 있는 벤트릭은 평소보다 더욱 기운이 없었다.

마나라는 것이 인간의 몸에 언제나 머물러 있어 그 마나로 힘을 얻는 것이기에 마나가 아예 없다면 좀 더 쉽게 지치고 피곤해지는 건 당연했다.

“많이 지쳐 보이는군.”

“흥. 이런 꼴로 사흘을 걸었소. 지치는 것이 당연하지.”

“그렇군.”

“그런데 무슨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거요? 그런 질문을 할 시간에 어서 이걸 풀어달란 말이오.”

쥬드가 벤트릭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이건 쓸데없는 질문도 아니도 아직 구속구를 풀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무슨…….”

하지만 벤트릭은 말을 하다 말고 자신도 모르게 제트로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제트로의 오른손에는 녹색의 반지가 끼어 있었는데 그 반지가 움직이는 대로 고개가 돌아가고 있었다.

“제대로 된 것 같군.”

그걸 본 제트로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반지를 벤트릭의 눈앞에 갔다 대고는 말했다.

“매혹의 반지여, 그 모습을 드러내어라.”

번쩍.

제트로의 말에 반응한 반지에서 녹색의 빛이 나오며 벤트릭의 눈을 몽롱하게 만들어 버렸다.

눈동자 속으로 들어온 빛이 벤트릭의 뇌리에 박히면서 그의 머리 깊숙한 곳에 봉인되어 있던 어떤 것을 깨웠다.

“크으으윽.”

벤트릭이 아픔을 느끼는지 신음을 흘렸다.

그의 고개가 숙여지고 몸을 배배 꼬는 것도 잠시, 갑자기 벤트릭이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예전의 매서운 눈이 아니었다.

약간은 풀어진 벤트릭의 눈을 바라보면서 제트로가 물었다.

“너의 주인은 누구인가?”

“팔로스 백작님이십니다.”

그 말이 나오자 제트로는 미소를 지었다.

“성공하셨군요.”

테판이 숨죽이고 있다가 축하를 해주었다.

제트로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군, 이자가 지금 섬기고 있는 사람이 할아버님인지 나인지 잘 모르니까 말이야.”

“아마 공자님일 겁니다.”

“나라고?”

“예. 제가 알기로 저 녹색의 반지는 피의 맹약이 새겨져 있는 마법물품일 겁니다. 그리고 피의 맹약은 혈족 중 가장 진한 피를 가진 분을 따릅니다.”

“그런가?”

제트로가 웃었다.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다른 용병들을 데려오게. 먼저 내 수하로 만드는 작업을 여기에서 끝마쳐야겠어.”

“알겠습니다.”

나가려는 테판을 제트로가 불렀다.

“테판.”

“예?”

“그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겠지?”

약간은 자신감이 꺾인 제트로의 목소리였다.

예전 처음의 자신만만한 감정은 다 사라졌다.

이제 예전의 세상물정 모르는 애송이가 아니라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고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기에 그런 것이다.

그렇다고 위축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도약을 위해 조금은 몸을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테판은 현재 제트로가 어떤 상태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마음의 틈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할 일은 그 틈을 메워주는 것이다.

테판이 확신 어린 어투로 말했다.

“분명 공자님의 발아래 그들은 무릎을 꿇을 날이 올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믿는다.”

제트로가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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