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장 (23/60)

제2장

“크크큭.”

벤트릭은 썰렁한 마을의 전경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또다시 기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움직였던 것이 너무나 허망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르가 웃음을 터뜨리고 있는 벤트릭에게 물었다.

“마을을 샅샅이 뒤져라.”

“예.”

잠시 후 벤트릭이 있는 곳에 천막이 다 세워졌을 즈음 자르가 돌아왔다.

“함정이나 사람은?”

“없습니다.”

“확실한가?”

“예.”

“현재 우리 병력 중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이 몇 명이지?”

“이천 명입니다.”

“저들의 수는?”

“그들이 보내온 정보에 의하면 천 명입니다.”

“그것도 확실한가?”

“그렇습니다.”

“으음.”

벤트릭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들이 너무나 나댄 결과이기도 했지만 오늘 이동하던 중 팔로스 백작의 전령이 와서 전해준 서찰이 그를 짜증나게 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조심해야 할 장소들과 크라우스가의 병력 구성 그리고 향후 크라우스가의 계획에 대해서 쓰여 있었다.

그들의 뜻은 명백했다.

이제는 믿지 못하겠으니 우리가 보내준 정보를 토대로 움직이라는 것이다.

“내가 너무 자신감에 차 있던 걸까?”

“아닙니다. 단장님. 단장님께서는 평소와 다름없이 병력들을 지휘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 모양이냔 말이지.”

벤트릭이 쓰게 웃었다.

자르는 그런 벤트릭에게 자신이 생각했던 바를 말했다.

“아마도 바스트 제국과 이곳의 전술 차이가 한몫했을 겁니다.”

자르의 말대로 크리프 왕국과 바스트 제국의 전술은 꽤 많은 점이 달랐다.

크리프 왕국이 수비라면 바스트 제국은 공격이었다.

언제나 외세의 침투가 많았던 크리프 왕국은 수비 위주의 전술로 발전을 했으며 침략을 많이 했었던 바스트 제국은 공격 위주의 전술로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그래?”

“예. 그걸 읽지 못한 제가 잘못입니다.”

“네가 용서를 구할 일이 있나? 그런 것도 조사를 시키지 않고 내가 너무나 편안하게 생각한 것이 잘못이지.”

다른 전투에서도 이터널 용병단이 아군을 잃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많은 수의 팔로스의 아이들을 잃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것 때문에 벤트릭이 흥분을 많이 한 경향이 있었다.

팔로스의 아이들을 많이 잃었다는 생각에 인 분노와 흑마법사의 서커 주문이 만나자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건 자르도 마찬가지여서 이터널 용병단의 머리를 책임지고 있는 그는 그들의 기습을 막고 역습을 할 생각보다는 보이는 이들을 격파할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그 사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그런데 이 서찰의 내용이 사실일 것 같은가?”

“그럴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팔로스 영지에서 오랜 시간 크라우스 백작가를 연구해 왔습니다. 저희가 저들의 도움을 받지 않았던 것은 저들과의 관계에서 좀 더 우위에 서보고자 했던 마음 때문이지 팔로스 백작을 믿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래. 그랬었지.”

분명 이건 자르와 며칠 전 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오늘 너무 많은 일을 당하자 그 이야기가 아주 오래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럼 정말로 저들이 우리와 전면전을 치를 생각이라고?”

“예. 그럴 겁니다.”

벤트릭이 처음에 병력의 수를 물어본 것은 그 이유 때문이었다.

자신들에게 기습적으로 뒤에서 덤벼도 모자랄 판에 절반 수준의 병력으로 전면전을 치른다는 건 벤트릭의 시선으로는 어처구니없는 짓이었다.

“믿지 못할 일이야.”

“이곳에 와서는 생각도 못할 일이 연달아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그런 일이 일어나도 아무런 의문이 들지 않을 겁니다.”

“그런가?”

“예. 그리고 저들에게는 마도사가 있으니 그것도 한몫을 하겠지요.”

“하지만 병력의 구성을 보면 마도사 혼자뿐이다. 우리는 마법사만 백 명이 넘는다고. 아무리 마도사라지만 백 명의 마법사와 겨룰 수 있을까?”

“아마 안 될 겁니다.”

자르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자르는 그 앞에 아마라는 말을 달았다.

그도 영지전을 치르면서 적으로서 마도사를 만난 것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마도사의 전력을 수치상으로 잴 수 없었다.

벤트릭은 더는 나눌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모두 자리를 잡고 쉬게 해라.”

벌써 해가 지고 있는 시간이었다.

그들은 마을을 세 개를 거쳐 왔다.

그 거리가 절대 짧지 않았으니 굉장한 강행군을 한 셈이다.

거기에 많은 일이 일어나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들지 않을 이가 없었다.

그렇기에 이제는 조금이라도 쉬게 해줘야 한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출발은 언제 합니까?”

잠시 벤트릭은 생각에 잠겼다가 물었다.

“적 병력이 있는 곳까지 얼마나 걸리지?”

“걸어서 두 시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는 하루를 완전히 쉰 후 모든 체력을 회복한 후 간다.”

“알겠습니다.”

벤트릭은 자신이 아직도 흥분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우선 이런 흥분부터 가라앉혀야 했다.

또한 이번에는 함부로 돌격하지 않고 우선 작전을 짤 시간도 필요했다.

그리고 작전을 잘 짜려면 정보가 더 필요했다.

벤트릭의 속마음을 바로 꿰뚫어 본 자르가 물었다.

“좀 더 정보를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벤트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만들어진 막사로 들어갔다.

자르는 지금 벤트릭의 마음을 모르지 않기에 그가 편히 쉬도록 배려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마지막에 날아온 화살로 입은 피해가 너무 컸다.

뒤에서 모르는 사이에 공격을 당했기에 수많은 이들이 무방비로 화살을 맞았고 처음의 화살로 사망자가 너무 많았다.

지금 이렇게 사기가 떨어진 것도 그 이유가 컸다.

잠시 침울해 있는 그들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만으로는 그들의 사기를 끌어올려 줄 수가 없었다.

벤트릭의 지도력이 필요한 때였지만 그건 오늘은 해줄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가라앉은 사기는 내일 끌어올릴 수밖에.’

아무리 그것을 못한다고 하더라도 자르 자신이 할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할 일이 무척 많았다.

자르가 움직였다.

* * *

“과연 되겠습니까?”

하루를 푹 쉬고 안색이 정상으로 돌아온 에반을 보며 켈베스가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걱정하지 마라. 그나저나 정말 제대로 작동은 되는 거지?”

“예.”

지금까지 켈베스를 데리고 다니면서도 쓰지 않은 건 이곳에 새겨진 마법진 때문이었다.

거기에 켈베스는 곳곳에 마우스들만으로는 어려운 감시체제를 만들기 위해 이곳저곳을 뛰어 다녀야 했다.

지금까지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정보를 모을 수 있었던 이유는 크라우스 가문의 정보부인 마우스가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고생을 하면서 사람이 없어도 감시를 할 수 있는 마법물품을 만든 켈베스의 공이 컸다.

그리고 이제 전면으로 나서는 켈베스는 불안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마법진을 만들기는 했지만 진짜로 그게 작동될지는 미지수였다.

“믿을 수 없나?”

“예? 아, 아닙니다.”

“믿어라. 내가 도와주면 마법진을 활성화시킬 수 있을 거다.”

“알겠습니다.”

켈베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했던 하루가 지나고 새벽녘에 팔로스군이 아침을 먹고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에 에반은 켈베스와 함께 설치한 마법진을 보고 다니고 있었다.

그때 베켓이 다가왔다.

“모두 처리했습니다.”

“소란은?”

“몇몇이 반항은 했지만 미비했을 뿐 대부분이 조용히 잡혔습니다.”

“알았다.”

에반이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베켓의 얼굴은 시종일관 굳어 있기만 했다.

사실 그는 에반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자신이 그걸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죄책감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에반은 베켓의 말을 들으면서 좀 더 걸어갔다.

켈베스가 앞서 가서 마법진을 살펴보고 있는 곳이었다.

에반이 켈베스의 앞에 갈 때쯤 켈베스가 허리를 폈다.

“이제 다 했나?”

“예.”

“여기가 마지막이었지?”

“맞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되돌아가자.”

에반의 신형을 돌리고 먼저 본진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 뒤를 따르는 두 사람의 얼굴은 그 와중에도 펴질 줄 모르고 굳어 있기만 했다.

* * *

“오늘이야?”

“그렇다나 봐.”

옆에서 검을 닦고 있는 데일의 귀에 병사들의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하더라도 그건 모두 기습뿐이었고 이제는 정면에서 맞부딪친다.

지금까지 전쟁이라고는 모르고 지내온 병사들이다.

십오 년 전 전쟁을 겪어본 노병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소수였고 그들은 모두 후방이었다.

앞서서 싸우는 건 지금 불안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젊은 병사들인 것이다.

데일도 예전 같으면 지금 병사들의 말에 동참하여 자신의 불안감을 내비치든가 아니면 병사들에게 이유 없이 짜증을 내고 있었을 거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 마음이 평안했다.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현재 상태가 신기한 데일을 누군가가 불렀다.

“데일.”

데일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다가 그것이 아버지란 걸 알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버지.”

정말 오랜만에 아버지와 대화를 나눈다.

예전에는 자신이 일부러 피한 것이라면 에반이 온 후로는 시간이 맞지 않아 아버지와 대화가 없었다.

“걱정이 되지 않느냐?”

“괜찮습니다.”

예전처럼 겉으로만 정중한 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행동에 무게가 있는 데일이었다.

그 이유는 마음가짐에 있었다.

예전처럼 실력이 늘지 않는 자신 때문에 실망하고 좌절하지 않으니 마음이 곧게 서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데일을 보는 쥬드는 자랑스러웠다.

애써 무시했던 예전의 데일의 태도와는 완연히 달라진 진정한 데일의 모습 때문이었다.

정말 자식의 성장이 아버지로서 뿌듯했다.

“그래. 크라우스 가문의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패기는 가지고 있어야지.”

아버지의 말에 데일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인정하는 아버지의 말에 마음속에 있던 찌꺼기까지 모두 털어내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쥬드의 말은 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네가 크라우스가의 혈족이라면, 이 가문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거기에서 멈추면 안 된다.”

“예?”

아버지의 말의 진의를 깨닫지 못한 데일이 반문했다.

하지만 쥬드는 가타부타 말을 하는 대신 불안해하는 병사들에게 시선을 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아버지가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며 그 뜻을 생각하던 데일은 마지막 아버지의 시선이 병사들에게 갔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데일의 눈에 불안한 표정의 병사들이 보였다.

“아!”

그리고 알아차렸다.

자신이 크라우스 가문의 혈족이라면 해야 할 행동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데일은 깨닫는 순간 일어나 병사들 쪽으로 다가갔다.

병사들은 데일이 자신들에게 오는 것을 보고 분분히 일어서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는 기사이기 이전에 가주의 아들이다.

정식으로 소가주는 아니지만 소가주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데일이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는 병사에게 말했다.

“고개를 들어.”

“예. 데일 님.”

그들이 고개를 들자 물었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

병사들이 데일이 무엇을 묻는지 모른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데일이 다시 물었다.

“살고 싶지 않은가?”

무엇을 묻는 건지는 감이 잡히지 않지만 그 물음에는 답이 있었다.

“사, 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움직여라. 그들이 오기 전까지 가지고 있는 기술을 익혀라. 단장님께서는 우리에게 강해지는 비전을 전수해 주셨다. 그 비전을 알면서도 그저 불안해 떨고만 있을 건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비법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 잘 알고 있군. 알고 있다면 움직여라.”

“예.”

병사들은 새벽녘에 자신의 동료 몇 명이 끌려가는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팔로스 영지에서 보낸 세작이라는 사실도 들었다.

그 때문에 병사들은 한층 자신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전장에 대한 공포가 마음속에 스며들었었다.

그런 불안한 상황 속에서 데일이 다그치자 그들은 일어났다.

그리고 움직였다.

병사들은 살기 위해 배운 것을 연습했고 그 옆에 있는 병사들도 그들을 따라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점점 불안한 마음을 잊기 시작했다.

창에 실리는 그리고 검에 실리는 힘이 자신을 안전하다고 믿게 하고 있었다.

데일은 그것을 보며 쥬드가 들어간 막사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이제는 절대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은 이미 버렸다.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보다는 더욱 열심히 노력하여 예전의 죗값을 치르는 게 나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데일은 병사들이 움직이는 곳 옆에서 자신도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결전의 날이 밝아왔다.

* * *

“정말이군.”

벤트릭은 정보와 일치하자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라는 생각을 가지며 새벽녘에 출발하여 이곳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본 것은 대열을 정비하고 있는 적들이었다.

숫자를 봐서는 정말 전면전이었다.

그들이 전면전을 선택하리라고는 지금 보고 있는 와중에도 거짓말 같았다.

아직도 배는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자신들은 둘째 치더라도 전쟁이라는 것을 겪어보지 못한 병사들을 가지고 자신들과 맞부딪치려는 생각을 하는 그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을 농락하면서 용병단의 힘을 빼놓았던 이들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 의혹과 이제 이길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정보가 맞았다는 여러 가지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표정이 애매해져 버린 것이다.

“저희에게는 호조입니다.”

애매한 표정을 직고 있는 벤트릭에게 자르가 마음을 다 잡으라는 듯 말했다.

“그렇긴 하군. 그런데 주위는 살펴보았나?”

“예. 마법사들과 함께 팔로스의 아이들을 보내보았습니다.”

“어떤가?”

“그것이 조금 의문입니다.”

“의문?”

“예.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분명 마법사들이 살펴보았나?”

“예.”

“그런데도 없다고?”

“그들이 재차 삼차 확인을 했습니다. 그들의 보고로는 마나의 유동이나 마법진의 흔적 같은 것이 전무하답니다.”

“그래?”

마법진이라는 것은 아무리 마나를 불어 넣지 않더라도 마나의 유동이 있는 법이다.

벤트릭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적들은?”

“정보대로 천여 명 정도로 보입니다.”

“으음. 그렇다면 정말 이상하군.”

마도사가 마법진도 설치하지 않았고 자신들에 비해 절반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전면전이라니 벤트릭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도 저번에 말한 바와 같이 더는 그들이 물러날 곳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보입니다.”

“그렇지?”

더는 제대로 기습을 펼칠 만한 지형이 없다는 것과 성이 없다는 것이 이 상황을 이해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벤트릭은 묘하게 무언가가 자신의 마음 한 부분을 거스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계속 고민을 하는 벤트릭에게 자르가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그래. 가자.’

본래라면 이런 의심이 들면 몇 번을 더 확인을 하겠지만 지금은 서커의 마법이 아직도 풀리지 않은 상태였다.

하루를 쉬었던 것이지만 온몸에는 힘이 넘쳐흐르고 사기는 가만히 있어도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그런 상황이니 의심이 들더라도 애써 무시하고 피를 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앞서 있었던 것이다.

벤트릭이 자르에게 말했다.

“출발한다.”

“예.”

자르가 고개를 숙였다.

* * *

평야라고는 하지만 그리 넓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곳이 평야라고 불리는 이유는 크라우스 가문의 영역 안에서 이 정도로 넓은 땅 중 논밭이 아닌 지대는 여기밖에 없는 탓이었다.

이곳보다 넓은 곳에서는 모두 곡식이 자라고 있었고 그 외에는 숲과 산이었다.

크리프 왕국이 예전에 국영지임에도 이곳을 크라우스 가문에 선뜻 내어준 이유는 너무나 쓸모가 없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하사한 것이었다.

본래 크라운 전쟁이 있기 전까지 크리프 왕국 곡물의 소출량 중 오 할이 이곳 왕국의 직영지에서 나왔다.

그렇기에 수많은 외세 침입과 많은 변란에도 왕권을 굳건히 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소중한 땅이었던 만큼 크라우스 가문에 하사한 땅은 정말로 쓸모 있는 땅이 거의 없는 버려진 땅을 주었었다.

그 후 크라운 전쟁이 터지고 모자란 영지 때문에 국영지의 일부를 귀족들에게 나누어줘 이제는 전체 소출량의 삼 할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때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왕가에서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런 쓸모없는 땅에서 유일하게 있는 평야 부분에 양쪽의 병력이 대치해 있었고 그렇기에 더욱 꽉 차 보였다.

드문드문 갈대밭과 지형이 평평하지 않은 곳이 몇 군데 존재하기는 했지만 벤트릭은 상관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저들을 모두 전멸시키고도 힘이 남아돌 것 같은 기분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움직일까요?”

화살이 닿지 않을 조금 먼 거리에 자리를 잡은 벤트릭은 자르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전면전이니 우선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것이 맞겠지.”

“정말입니까?”

“그래. 한번 얼굴을 보고 싶지 않나?”

“누구 말입니까?”

“우리가 묻었던 인물 말이다. 그가 살아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지 않나?”

“그렇군요.”

“그럼 전해라. 앞에서 만나자고.”

“예.”

자르가 고개를 숙이면서 물러났다.

벤트릭은 곧 소식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소식이 없었고 더는 참지 못할 정도로 시간이 흘렀을 무렵 자르가 돌아왔다.

“어찌 된 거지?”

“저쪽에서 거절을 해왔습니다.”

“거절을?”

본래 전면전을 치르기 전에는 몇 가지 협약을 하거나 조율을 한다.

전면전이라는 것이 쌍방에 큰 피해를 줄 수도 있기에 어느 정도 조율을 하지 않는다면 승리한 쪽이나 패배한 쪽이나 손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면전 전에 만나서 협상을 하지 않는 경우는 두 가지뿐이었다.

끝까지 항전을 할 때나 전력상 완벽한 우위에 있을 때였다.

그리고 벤트릭이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바로 전자였다.

“끝장을 볼 생각인가?”

“그렇다면 피해가 크겠습니다.”

“어떻게 할까?”

“팔로스의 아이들은 뒤로 뺄까 합니다.”

자르는 용병과 팔로스의 아이들을 나누어서 불렀다.

팔로스의 아이들은 지금까지 십수년간 함께한 이들이었고 용병들은 제국에서 용병단을 창단한 후 들어온 이들이었다.

공식석상에서는 같이 용병단원이라고 불렀지만 동고동락한 이들과 함께 있을 때는 그들과 차이를 두고 불렀다.

“그러는 것이 좋겠다. 어차피 용병들은 소모품이니 말이야.”

“그렇죠. 그럼 다시 명령을 내리고 오겠습니다.”

“그래.”

자르가 나가고 벤트릭이 눈을 감았다.

그에게 있어서도 팔로스의 아이들의 목숨이 더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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