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장 (17/60)

제6장

“작전을 허락해 달라고?”

“예.”

“흠.”

에반이 잠시 생각했다.

그러다가 수정구를 다시 한 번 보았다.

거기에는 몇 시간 전 일어난 다오 조직이 흑마법사를 학살하는 장면이 들어 있었다. 베켓이 수정구를 보며 화면을 저장한 것이다.

에반이 말했다.

“우리가 상관할 필요가 있나?”

그 말에 당황을 한 건 베켓이었다.

사람이라면 이런 장면을 보면 일단 화를 내거나 다오 조직에 대해 욕을 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에반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은 물론 한술 더 떠서 왜 상관하느냐는 듯한 어투로 베켓에게 말하고 있었다.

“예?”

베켓이 당황한 표정이 완전히 드러난 얼굴로 묻자 에반이 그에게 말했다.

“어차피 저들이 당하는 건 우리와 상관이 없다. 오히려 작전을 펼치다가 가문의 사람이 다칠 수도 있는데 왜 수고를 하려 하지?”

에반의 머릿속에는 분명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이 가문의 사람과 가문의 사람이 아닌 사람.

그가 가문의 부흥을 생각할 때부터 가문의 권역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돌봐주어야 할 사람이라고 정했다.

기사들 중 세작들이 많은데도 그들을 내버려 둔 건 에반은 충분히 그들을 크라우스 가문의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그런 것 때문에 베켓은 에반이 세작에게도 관대한 사람이고 속은 따뜻한 사람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해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에반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베켓에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번 겨울이 끝난다면 전쟁을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에서 마우스들을 다른 곳에 쓸 수 있는 여력이 있나?”

마우스는 크라우스의 정보부를 일컫는 말이었다.

에반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하던 베켓이 말했다.

“없습니다.”

“그래. 그런데도 우리가 나서야 할 필요가 있나?”

“예.”

베켓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말해봐.”

“저희는 이번 겨울이 끝나면 힘든 전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도 아군이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좋은 아군이 되어줄 겁니다.”

“내가 이곳에 와서 들은 이야기 중 가장 많이 들은 말이 흑마법사나 흑마법사와 관련된 자들은 모조리 없애버려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런데도 그를 구할 생각을 하는 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본가를 위해서입니다.”

“무엇이 본가를 위해서라는 말이지?”

“만약 저희가 하스란 자를 구할 수 있다면 흑마법사들은 저희들을 도와 영지전을 방해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흔적이 남겠지?”

“남기지 않겠습니다.”

“안 돼. 분명 흔적이 남는다.”

“그렇다면 작전은 없는 겁니까?”

“아니.”

“예? 무슨…….”

베켓은 에반의 부정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내가 한다.”

“아니 그것이…….”

“나를 못 믿는가?”

“그게 아니라 그곳까지는 굉장히 먼 거리입니다. 세 개의 나라를 거쳐야 하고 말을 타고 한 달이 넘게 걸리는 거리입니다.”

“어차피 너희들은 작전을 하려고 하지 않았나?”

“그곳에 있는 이들로 꾸리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상관없다. 그들에게 말해놓아라. 내가 바로 간다고.”

“에반 님.”

베켓이 난처하다는 듯이 그를 보았다.

“어차피 내일부터는 병사들이 그들의 수하들에게 내가 알려준 동공을 가르쳐야 한다. 나에게 십 일 정도의 시간이 있다는 소리이지.”

“십 일로는…….”

“모자라다고?”

“예.”

“내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지.”

에반의 말에 베켓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 * *

화아악!

유성이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 유성은 계속해서 하늘로 올라가다가 어느 순간 느려지더니 하늘 위에서 멈추어 버렸다.

그리고 거기에 모습을 보인 것은 에반이었다.

“흠. 오랜만인걸.”

사부에게 공무를 배우고 자신의 영역 안의 공간을 활용하는 방법을 익혔을 때 이렇게 날아다녔다.

그때 처음으로 사부가 있던 세계는 네모난 것이라는 걸 알았고 절대 이어지지 않았어야 할 네모난 세계가 이어져 있다는 것도 알았다.

-다른 세상들은 대부분 둥글다.

그것이 사부가 처음으로 하늘을 난 후 에반이 내려왔을 때 한 말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것을 실감했다.

하늘 높이 오르자 이 세계가 푸른색으로 뒤덮인 둥근 모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에반은 잠시 어두운 하늘과 파란 대지를 보다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찾았다.

“저기인가?”

지도가 실제와 비교했을 때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디인지 대충 감은 왔다.

그리고 에반이 그곳으로 쏘아져 내려갔다.

한참을 떨어지며 에반의 주위로 불꽃이 튀어 올랐다.

대기와 부딪치며 발화가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에반에게 침투하지는 못했다. 에반이 그 사이의 공간에 공기를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바람조차 통과하지 못하는 불덩어리 안의 에반은 머리카락 한 올도 흔들리지 않으며 지상으로 내려왔다.

쿠쿵!

산이 들썩였다.

거대한 구덩이가 파인 자리로 에반이 나왔다.

“여기가 마물의 숲인가?”

몇몇 몬스터들이 자신의 영역 안에 생긴 신기한 현상을 두려운 눈으로 보다가 거기에서 인간이 나오자 날뛰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에반이 구덩이를 빠져나오자 그 주위에 몬스터는 싸그리 사라진 상태였다.

에반의 무서움을 본능적으로 느끼며 도망을 간 것이다.

숲 속에 공터가 생기고 햇빛이 들어오지 않던 곳에 햇빛이 비추었다.

에반이 하늘을 보았다.

태양이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각인 것이다.

그걸 보며 중얼거렸다.

“별로 걸리지 않았군.”

한 달이 걸린다는 거리를 단 몇 시간 만에 온 에반이 한 소리였다.

* * *

-어… 어떻게 그곳에 계… 계신 겁니까?

베켓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난 갈 수 있는 거리라고 분명 말했는데.”

그렇게 말하기는 했다.

하지만 절대 믿지는 않았다.

한 달이 걸리는 거리를 몇 시간 만에 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그건 마법사들도 미쳤냐라는 소리를 할 거리였다.

텔레포트는 거리에 비례해 마나의 소모가 결정이 되는데 만약 크리프 왕국에서 프레스톤 제국까지 텔레포트를 하려면 8서클의 마나가 필요하다.

한마디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마나석을 사용하여 텔레포트 진을 만들고 구동만 하게 하는데 마나석이 싼 건 아니다.

마나석 자체가 소모를 한다고 다시 마나가 저장이 되는 것도 아니기에 일회용으로밖에 쓰지를 못하는데 그 마나석의 가격이 비싸니 아주 다급한 상황이 아니면 그런 식으로 낭비하는 마법사는 없다.

요즘 들어 마나석보다는 약간 마나의 질이 떨어지는 레트리아 광석 연구가 진행된다지만 아직은 활용화되는 시점이 아니었다.

레트리아라는 사람이 어떤 광석을 가지고 실험을 한 결과 그 광석에 든 마나를 쓰면 다시 저장된다는 것을 밝혀내었고 그 광석은 레트리아 광석이라고 명명되어 현재 마법사나 학자들에 의해 활발히 연구가 진행 중이었다.

-텔레포트로 간 것입니까?

“난 마법을 할 줄 모른다니까.”

-켈베스 마도사님이시라면.

그렇게 말을 해놓고서도 다시 고개를 젓는 베켓이었다. 켈베스라도 그 정도 거리는 이동시키지 못한다는 걸 아는 것이다.

“아무튼 나만의 방법이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이미 계획은 세워놓았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더는 할 이야기가 없겠군.”

-예. 그곳에 있는 마크에게 들으십시오.

“마크?”

“제가 마크입니다.”

마우스의 정보원인 마크가 긴장한 목소리로 답했다.

설마 몇 시간 전에 수정구로 본 사람을 직접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던 마크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 버린 것이다.

-그럼 그에게 들으십시오. 저는 이만.

수정구의 사용도 마나석을 사용하기에 오랜 시간의 사용은 자제했다.

에반이 마크를 쳐다보자 마크가 그대로 굳었다.

“다른 이들은?”

“작전 지역 부근에 있습니다.”

“철수시킬 수 있나?”

“철수 말입니까?”

“그래. 그곳에는 나 혼자 들어간다.”

“그, 그건 안 됩니다.”

“왜 안 된다는 거지?”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다면 그곳을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기에 오는 일보다 더욱 불가능한 일인가?”

“그, 그건…….”

“그것이 아니라면 모두 불러들여라. 그리고 그곳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하기 바란다.”

“알겠습니다.”

마크는 일단 대답을 했다.

작전 지역에 있는 사람 중 몇 명은 자신보다 직급이 높다. 그들이라면 이 막무가내인 에반을 말릴 수 있으리라 생각이 된 것이다.

* * *

“조심하십시오.”

네이트가 에반에게 말했다.

그걸 보는 마크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아무리 자신보다 상급자라 하더라도 에반은 말릴 수 없는 것이다.

에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에 보이는 저택으로 걸어갔다. 바로 프레스톤 남부에 위치한 다오의 지부였다.

‘무슨 방법이 있나?’

마크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어? 어?”

좀 먼 거리에서 에반을 지켜보고 있던 정보원들이 놀라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었다.

에반이 너무나 거침없이 정문을 향해 걸어갔기 때문이다.

“말리지 않을 겁니까?”

네이트는 당황하며 가만히 있다가 마크의 말에 재빨리 일어섰다.

“막아야지.”

그렇게 말을 하고 일어난 네이트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분명 정문으로 걸어가던 에반의 모습이 사라진 것이다.

네이트가 모두를 바라보았다.

다른 정보원들도 서로를 바라보았다.

“내 눈이 이상한 거 아니지?”

네이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한 거지?”

평생 놀랄 것을 오늘 다 놀라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마크가 피식 웃으며 모두에게 말했다.

“저분은 우리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분이니 그냥 기다리죠.”

“그러자.”

“아무튼 정말 흔적을 남기지는 않겠군.”

모두가 그 말에 동의를 할 무렵 에반은 정문을 통과해 공중으로 떠올라 저택의 꼭대기로 갔다.

꼭대기의 중앙 부분에 창문이 나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간 그는 창문을 통해 누가 있는지 확인을 한 후 조심스레 창문을 열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의 마지막 층이었기 때문인지 인기척은 없었다.

에반은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아래로 내려가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갑자기 주위로 마나가 일렁이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마나는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런 곳에서 격렬하게 움직이지는 않는다.

누군가가 마나에 간섭을 해야만 이런 움직임이 생긴다는 걸 알고 있는 에반이 멈추고 주위를 자세히 보았다.

‘마법진인가?’

계단의 시작 부분 벽 사이에 희미하지만 무언가가 그려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 한은 제대로 식별도 되지 않는 크기였지만 그곳을 모르고 지나칠 때는 알람이 울리도록 설계가 되어 있는 마법진이었다.

에반은 그것까지는 모르지만 일단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기에 조심스레 그곳을 지나쳤다.

그런 마법진은 계단의 사이사이에 있었는데 삼층으로 내려가자 마법진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다만 거기부터는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에반이 움직였다.

자신을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감이 좋다면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는 조금은 생각을 하면서 움직여야 했다.

그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 에반의 눈에 들어왔다.

에반이 그 둘 옆으로 다가가자 그들은 에반이 온 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누었다.

“그나저나 오늘 어땠어?”

“몰라. 이번에는 남자들밖에 없었다고.”

“남자들밖에?”

“그래. 다 도망을 갔는지 여자들이 보이지 않았다고. 쳇! 모처럼만에 회포를 푸나 했더니만.”

“큭큭큭. 남자 엉덩이에라도 들이대지 그랬냐?”

“웨엑. 더러운 흑마법사들의 엉덩이는 어디에 쓰게?”

“그래도 오늘 끌려온 흑마법사는 제법 괜찮던데?”

그 말에 흑마법사의 은신처를 공격했던 남자가 살짝 뒤로 물러나며 물었다.

“너 남색을 하냐?”

“흥. 어차피 귀족들은 다 하는 거 아니야? 우리라도 못할 것이 뭐가 있는데?”

“으윽. 그래도 남자를 상대로 어떻게… 너 이제부터 말 걸지 마. 그리고 저기 흑마법사가 갇혀 있는 방에 갈 생각도 하지 말고.”

뒤로 물러난 남자는 한 곳을 가리키며 말하고는 그대로 돌아서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어이. 이봐.”

그런 그를 또 다른 남자가 뒤따라가는 것을 보며 에반이 다시 움직였다.

남자가 가리킨 방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너무나 돌아다녀 함부로 문을 열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문 앞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방금 전까지 도망친 남자와 이야기를 하던 남자였다.

그의 눈은 번들거렸고 침을 삼키는 모습이 심상치가 않았다.

끼익.

그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아도 그것을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에반은 문을 닫기 전 그 방으로 같이 들어갔다.

쿵!

문이 닫히고 방이 어두워졌다.

“으으으.”

하스의 신음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남자가 서서히 그에게 다가가 그의 얼굴을 들어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역시나 반반해.”

그는 정신을 못 차리는 그를 보며 흉소를 뱉어내었다.

“흐흐흐. 네가 남자든 여자든 나에게는 상관이 없다. 넌 그냥 나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면 그만인 거야.”

그렇게 말한 남자는 아무도 없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허리춤을 풀고 바지를 내렸다.

“일단은 가볍게 즐겨볼까?”

그렇게 말한 남자가 하스의 양 볼을 움켜쥐고 억지고 입을 벌린 순간 남자는 자신의 불끈거리던 하체가 갑자기 허전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으헉.”

철그렁!

남자가 놀라 뒤로 물러나며 하스를 놓치자 쇠사슬에 매달려 있던 하스가 축 늘어졌다.

“내, 내 물건이…….”

남자는 눈을 비비고는 다시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하체에 있던 물건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크윽!”

그때 생살을 찢는 통증이 그를 덮쳤고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유령같이 나타났다.

“누, 누구…….”

나타난 에반이 남자를 보며 말했다.

“자연의 섭리에 맞지 않은 짓을 하려는 것을 보고 내가 친히 자연의 섭리에 맞춰주었으니 고맙게 알아라.”

‘너는 누구야!’

남자가 공포 어린 시선을 에반에게 던지며 말을 하려 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너무나도 공포스런 상황에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기절을 했고 그때서야 에반이 하스를 돌아보았다.

잠시 어떻게 할까 생각을 하던 에반은 쇠사슬을 부숴버리는 것이 아닌 단단히 잠겨 있는 부분을 손쉽게 풀고는 하스를 내려놓았다.

그런 후 기절한 남자의 마혈을 짚어 깨어나도 몸부림치지 못하게 한 후 그를 쇠사슬에 묶어 하스와 비슷하게 머리를 밑으로 내렸다.

“되었군.”

작업을 마친 에반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하스를 들었다.

“음? 이건.”

에반이 쇠사슬에 묶인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하군. 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렇더라도 언젠가는 그럴 여지가 있었으니 너무 억울해하지는 마라.”

그렇게 말한 에반이 방 문 앞으로 다가갔다.

“여기부터가 문제인가?”

닫힌 방문을 열면 복도를 거닐고 있는 이들이 알아챌 가능성이 많았다.

게다가 창문이 없는 방인지라 밖으로 뛰어내리지도 못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에반이 조심스레 손을 앞으로 뻗었다.

우우웅!

주위가 미세하게 떨리며 벌이 우는 듯한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으윽.’

에반의 얼굴이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공간에 구멍을 만드는 일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확대와 수축을 반복하던 구멍이 조금씩 커지더니 사람이 나갈 정도가 되어서야 커지는 것을 멈추게 되었다.

에반이 땀을 흘리며 그곳을 통과해 갔다.

공간은 계속해서 원형을 유지하기 위해 닫히려 했고 그걸 강제로 벌린 에반은 계속해서 힘을 소모해야만 했다.

이건 크리프 왕국에서 프레스톤 제국으로 날아가는 것하고는 차원이 다르게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공간을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게 왜곡까지 하느라 더욱 힘이 드는 에반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완전히 통과하자 공간은 빠르게 구멍을 메웠고 에반은 어느새 방 밖에 서서 땀을 훔쳤다.

“으음.”

“무슨 소리지?”

에반이 긴장했다.

살짝 방심을 하는 사이 하스가 흘린 신음 소리가 밖으로 퍼져 나갔고 그걸 들은 이가 방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에반이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어차피 방 안에는 쇠사슬에 걸려 있는 이가 있다.

그걸 보더라도 아직까지는 의심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방문을 열어보지도 않았다.

지금 쇠사슬에 묶여 있는 이와 대화를 했던 남자로 그가 방 안에서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다고 생각을 한 듯했다.

“변태 같은 놈.”

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 에반은 이미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빠르게 마지막 층으로 올라온 에반은 창문으로 뛰어올라 지붕으로 올라섰고 아래로 천천히 뛰어내렸다.

그리고 담마저 넘은 에반은 완벽하게 저택을 빠져나왔다.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아무런 소란 없이 성공을 한 것이다.

* * *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헉!”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마우스의 정보원들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에반이 누군가를 손에 들고 서 있었다.

“어, 어떻게…….”

네이트는 그렇게 말하면서 오늘 가장 많이 쓰는 단어라 생각했다.

“내가 말했지 않나? 나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라고.”

“으음.”

“이제 끝난 건가?”

“예? 예.”

“그럼 흑마법사와는 어떻게 연락을 할 텐가?”

“저자를 깨워서 그냥 보내면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이자를 구한 것은 측은해서가 아니다. 요구할 것이 있기 때문이지. 너도 그렇게 알고 있어라.”

“예?”

네이트가 멍하니 대답을 할 때 에반이 손을 놓아버렸다.

하스는 바닥에 처박히는 대신 중심을 잡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에반을 쏘아보며 물었다.

“다, 당신들은 누구지?”

하스는 그러면서 손에 마나를 모으려 노력을 했다. 그러나 기력이 너무 상한 하스의 손에는 한 줌의 마나도 모이지 않고 있었다.

그런 하스에게 에반이 말했다.

“너희의 은신처를 밀고한 사람이다.”

“에, 에반 님.”

네이트가 놀라며 에반을 불렀다.

“왜 내 말이 틀렸나?”

“그, 그것은 아니지만…….”

하스 또한 그 말에 놀랐지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이잇…….”

“너무 화를 내지는 마라. 이건 너희가 자초한 일이니까.”

“우리가 자초를 했다고? 그게 무슨 말이냐?”

“내 이름은 에반이다. 어디에서 들어본 적이 없는가?”

“에반?”

잠시 생각을 하던 하스가 몬테리얼을 떠올리는 건 순간이었다.

“누군지 알았나 보군.”

“크라우스 가문에 돌아온 가주의 형.”

“그래. 그것이 나다. 그렇다면 알겠지. 너희가 우리 가문에 어떤 소문을 내었고 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으음.”

에반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은 하스였다. 그 일을 명령을 한 건 자신이었으니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저 소문을 낸 것이었다면 그냥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너희는 내 가문의 사람들을 세뇌를 하려 했더군.”

몬테리얼은 몰래 하인들을 흑마법으로 세뇌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만약 에반이 몬테리얼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몇몇은 정말로 세뇌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이미 많은 곳에서 본가를 주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너희 때문에 더욱 많은 곳에서 우리에게 껄떡거리기 시작했지. 난 받으면 돌려주는 성격이라서 그런 것은 참지 못한다. 그러니 억울해하지 마라.”

너무나 일목요연하게 설명을 하는지라 하스는 화도 내지 못했다.

에반이 계속 말했다.

“하지만 다오에서 하는 꼴이 내가 보기에도 과한 감이 있어 일단 널 구해주었다. 네가 흑마법사의 구원자라고?”

흠칫!

그 말에 하스가 놀랐지만 이내 표정을 고치고는 물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

“모르는 척해도 소용없어. 이미 너희와 다오 간의 싸움이 저장된 수정구가 있으니까. 거기에서 너를 제압한 놈이 너를 계속 구원자라고 부르더군.”

“으득. 라우웰.”

에반 때문에 라우웰이 생각이 났는지 하스가 이를 갈았다.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 네가 잡혀 있는 것을 알면 흑마법사들은 어떻게 할까? 함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부나방처럼 달려들겠지. 본가 때문에 흑마법사들의 희생이 생긴 건 알지만 그 대신 너를 구해줘 더 많은 희생을 막았다. 이 정도의 은혜면 하나 정도는 부탁해도 되는 것 아닌가?”

“으음.”

에반의 말이 맞기에 하스는 잠자코 있었다.

그러다가 물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우리는 겨울이 끝나면 전쟁을 한다.”

“혹시 우리보고 도와달라는 말은 아니겠지?”

그것처럼 멍청한 짓은 없었다. 영지전에서 승리하려다가 전 대륙의 공적이 되어버릴 수가 있었다.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으니 걱정 마라. 그런 멍청한 짓을 할 거였으면 너희들이 낸 소문에 이미 본가는 산산조각 났겠지.”

계속해서 그 일을 상기시키는 에반이었다.

입을 다문 하스에게 에반이 말했다.

“그건 내가 말할 문제가 아니니 잘 아는 사람과 상의해 보도록. 아 참. 한 가지.”

하스가 에반을 돌아보았다.

“만약 다시 한 번만 더 본가에 위해를 가할 생각을 하면 내가 나서서 흑마법사를 이 세상에서 지워주지.”

주춤!

하스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에반에게 분명 아무런 기세가 뻗어나오지 않았건만 무서웠다.

왜 무섭다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냥 무서웠다.

* * *

쾅!

“사라졌다고!”

라우웰이 책상을 치며 일어나자 앞에 있는 조직원이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지?”

“그게 다른 사람이 그곳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누가?”

“우리 조직원 중 한 명이…….”

“멍청한… 나가!”

“예, 옙.”

“어이, 넌 뭘 한 거야? 마법을 깔아두지 않았어?”

금발의 청년이 심각하게 굳은 얼굴로 라우웰을 쳐다보며 말했다.

“깔아두었었다.”

“그런데 그놈이 어떻게 빠져나갔냐고?”

“한번 봐야겠군.”

금발의 청년이 나가고 라우웰도 잠시 생각을 하다 일어났다.

누군가 그를 데려간 것이라면 자신들을 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누구지?’

라우웰이 방을 빠져나오자 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물었다.

“어디를 가십니까?”

“잠시 나갔다 오겠다. 일단 너희는 저택을 샅샅이 뒤지도록 해.”

“알겠습니다.”

남자에게 말을 해놓은 라우웰이 저택을 빠져나가 빠르게 마물의 숲 쪽으로 말을 타고 갔다.

마물의 숲은 혼자 들어간다면 정말 무서운 곳이지만 라우웰은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실력에 확실한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을 달려 마물의 숲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져 있었다.

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어둠이 내린 밤이 본래 그가 있었던 시간이었다.

빠르게 마물의 숲을 올라가던 라우웰이 멈칫했다.

“음?”

누군가가 마물의 숲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흑마법사인가?’

사람이라고 확신한 라우웰이 모습을 감추려는 순간 그쪽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숨지 말고 나와라.”

“쳇. 들켰나?”

라우웰은 자신이 있다는 걸 상대방이 알자마자 숨는 걸 포기했다.

그 누가 되었든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음? 그 시끄러운 놈이군.”

자신을 보자마자 하는 소리에 라우웰이 미간을 좁혔다.

자신은 처음 보는 청년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이 기분이 나빴다.

“날 아나?”

“오늘 아침에 알게 되었지.”

“오늘 아침?”

아침이라면 흑마법사들을 습격하고 저택으로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계속해서 말을 타고 갔었기에 만난 사람은 없었다.

“도대체 모를 말만 하는군.”

“몰라도 돼. 그나저나 나와 볼일이 있나?”

“네가 나오라고 한 것 같은데.”

“갑자기 쥐새끼처럼 숨으려고 하니까 짜증나서 부른 것이다. 이제 누구인지 알았으니 그만 가라.”

“그럴 수는 없는걸?”

“어째서?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가?”

“했지. 나에게 쥐새끼라고 한 것도 잘못이고 날 오라 가라 한 것도 잘못이고. 그리고…….”

“그리고?”

“네 그 잘난 면상이 마음에 안 들어!”

파앗.

라우웰이 그대로 주먹을 날렸다.

칼을 꺼내 들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피에 미친 놈이지만 그렇다고 적이 아닌 자를 베는 완전한 미친놈은 아니었다.

하지만 라우웰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퍼퍽!

“컥!”

라우웰은 고통 어린 신음을 토하면서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감을 잡지 못했다.

털썩.

“뭐, 뭐야.”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 다리가 후들거려서 도대체 일어날 수조차 없었다.

“이 새끼야, 무슨 짓을 한 거야!”

“내가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는가?”

“뭐? 너 대체 뭐하는 놈이야!”

“네가 먼저 나에게 덤벼놓고 그런 걸 묻다니 진짜 이상한 놈이군.”

“이익!”

잠시 씩씩거리던 라우웰이 서서히 일어났다. 다리가 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에게 달려들었다.

“이얍!”

퍽!

그리고 다시 한 번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크윽.”

이번에도 또 일어나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맞았는지조차 몰랐다.

‘대체 뭐지? 어떤 기술이야?’

라우웰은 평생을 싸움에 미쳐 살아온 이였다. 아니 피에 미쳤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는 어릴 때 아이들과 싸우고 처음 싸운 상대의 피를 본 순간 희열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는 완전한 다른 사람이 되었다.

언제나 싸움에 끼어들어 싸우고 싸우는 곳이 있다면 기꺼이 몸을 움직였다.

시간이 흐르고 그런 그를 눈여겨본 이가 그를 데려다가 암살자로 키웠지만 그는 사실상 암살자와 맞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암살자가 자신에게 맞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이 년도 가지 못했다.

암살자는 화려한 피를 보는 이들이 아닌 은밀하게 피를 보지 않고 죽이는 것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암살자 길드를 나왔다.

그 당시 그 길드에서 두 번째로 실력이 높았던 그를 당연히 보내주지 않으려 했고 그는 자신의 싸움을 했다.

주위에 살이 찢기고 피가 튀는 걸 느끼면서 진정한 자신을 느꼈다.

그리고 흘러흘러 다오라는 조직에 들어왔다.

그곳에서는 대부분을 싸움으로 보내었다.

그것도 자신이 원하는 싸움들뿐이었다. 그곳에서 수많은 비전을 엿보고 기술을 터득하면서 그는 점점 강해졌다.

그런 라우웰이었지만 에반이 행한 일격은 보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넌 대체 누구야!”

“알고 싶나?”

“그래.”

“흠.”

그는 잠시 생각했다.

생각 외로 괜찮은 놈이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라우웰을 보면서 잔인한 놈이라거나 인정이 없는 놈이라 하겠지만 그의 시각은 달랐다.

그것이 라우웰을 그냥 재워두고 다시 본가로 돌아가는 걸 망설이게 하고 있었다.

‘이름을 알려주고 떠나자.’

“내가 누구인지 정말 궁금한가?”

“그래. 정말 궁금하다.”

“날 찾아올 생각인가?”

“흥. 넌 여기서 못 떠나. 내가 못 떠나게 하니.”

“아니. 난 갈 것이다.”

그와 이야기를 하면서 켈베스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는 먼저 자신의 이름을 밝혔었는데 지금은 자신의 이름을 숨기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절대 생각 못 할 상황이었다.

‘사부가 날 잘못 가르친 거지.’

사부의 말과 다른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세상은 절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라우웰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왠지 친근감이 생겼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말해주었다.

“내 이름은 에반, 에반 크라우스다. 잘 기억해 두도록. 그리고 잘 찾아오도록.”

“에…….”

라우웰은 에반의 말에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그것보다는 에반이 그를 재우는 것이 빨랐다.

털썩!

라우웰이 쓰러지고 에반이 하늘을 보았다.

서서히 에반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이제 이곳에 왔을 때와 반대로 가면 되는 것이었다.

파앗!

또다시 유성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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