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어떻게 되었나?”
“속속 도착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팔로스 백작이 된 제트로는 자신의 그림자와 같은 테판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생각하고 있지?”
“일단 명령이니 모이고는 있는 듯합니다.”
테판의 음성에는 가시가 돋쳐 있었다.
자신은 그들이 팔로스 백작을 떠날 시기에 백작가에 몸을 담았었다.
당연히 충성심은 그들이 더욱 좋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안하무인적 태도를 백작가의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좋게 보지 않는군.”
“솔직한 이야기로 만약 저희에게 병력이 있다면 그들을 배제해 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이터널 용병단으로 활동하기 이전 팔로스 백작은 십여 년 동안 온 전력을 다해 그들의 실력을 키우는 데 매진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검술과 마법으로 일정한 경지에 오를 수 있었고 그런 정예병을 팔로스 백작은 오백여 명을 키워내었다.
그 후 실전이라는 명목 아래 바스트 제국으로 보내졌고 그들은 오백 명의 인원을 가진 용병단으로 시작을 했다.
그 후 오 년간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며 이제 제국에서 이터널 용병단이라고 하면 누구나 알 법한 거대 용병단이 되었고 그 단원들도 오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크리프 왕국 같으면 절대로 오천여 명의 용병단이 만들어지지 않겠지만 제국은 최대 만여 명으로 이루어진 용병단이 있는 만큼 큰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에게 문제가 생겼다.
그들은 십여 년을 그들을 위해 쏟아 부었던 팔로스 백작의 은혜는 외면한 채 용병단에서 벌어들이는 일부분의 수익을 가져가는 팔로스 백작에 대해 투정을 부리기 시작하더니 지금에 와서는 백작가에서 사람이 와도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테판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그들을 찾아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들이 얼마나 안하무인인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실력은 좋지만 인성을 제대로 키워놓지 않은 팔로스 백작의 실책이었다.
그러나 이미 제트로는 복수를 천명했고 테판은 그 복수를 도와주기로 했으니 그들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백작가의 사람이 조건을 걸고 움직인다라…….”
제트로가 중얼거렸다.
사실 그가 제국에 있을 때 그들을 만나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용병단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벤트릭이 수도에 올라왔을 때 가끔 아카데미를 나가 몰래 만나보고는 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그들은 자신을 극진히 대했었는데 그런 그들이 지금은 돌변했다는 이야기에 제트로는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팔로스 백작가로 오는 대신 달마다 백작가에 보내던 자금의 이 할을 줄이겠다는 조건을 건 것은 그들이 백작가와의 인연은 끊을 수 없으나 계약관계로 가겠다는 심증을 비춘 것이라고 볼 수 있엇다.
그리고 제트로는 그들의 조건을 거절하지 않았다.
솔직한 말로 십 년간 들였던 자금은 그들의 오년간 용병생활로 이미 모두 채워졌기 때문이다.
팔로스 백작의 계획은 몇 년간 용병생활을 시킨 후 현재 왕자들 중 한 명을 고르는 순간 그들을 백작가로 화려하게 복귀시킬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이미 용병 생활에 맛들어 버린 그들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어떻게 생각하지?”
그들의 처우에 대해 테판에게 물었다.
그러나 테판이라고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일단은 이번 영지전이 끝난 후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그들에게 걸었던 제약을 확인해 봐야 하니까요.”
“그런가? 그럼 작전은?”
“그들이 알아서 하겠답니다.”
“하긴 그들은 수많은 영지전으로 실전을 다졌으니까.”
“그렇지요.”
분명 이길 수 있는 영지전이었지만 제트로의 표정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충성을 원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계약 관계였다. 그렇다면 자신도 그들을 수하가 아닌 진짜 계약관계로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 *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러지?”
에반이 갑자기 산에 올라온 베켓을 보며 물었다.
두 드워프들을 시켜서 폴로냐 산에 연무장을 만든 에반은 기사들과 병사들을 여기에서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겨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주위는 따뜻했다.
모두 드워프들의 기막힌 솜씨 때문이었다.
“전 팔로스 백작의 손자인 제트로 팔로스 백작이 용병을 모으고 있습니다.”
“용병?”
“예. 설마 그들이 이터널 용병을 끌어들일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좀 더 설명을 해봐라.”
에반의 말에 베켓이 간략하게 설명을 했다.
“그들은 바스트 제국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용병단입니다. 그들이 참여한 영지전은 단 한 번도 패배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스트 제국은 영지전이 자주 일어나나?”
“중앙집권이 완벽하게 이룬 바스트 제국의 황제는 귀족들에게 미끼를 던졌고 귀족들은 그 미끼를 물고는 하루가 멀다 하고 영지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터널 용병단이라고 하면 서로 데리고 가려는 용병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용병단이 이 왕국의 팔로스 백작을 도와주러 온다는 거지?”
“제 생각에는 아마 그 용병단이 팔로스 백작가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연관?”
“예. 십오 년 전 팔로스 백작은 영지로 내려가는 것을 선택하면서 수도의 생활을 접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꽤 많은 사람들이 은밀하게 사라졌었는데 당시에는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게다가 영지에 정착한 후 십 년간 많은 돈을 썼는데 그 돈의 출처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 년 전부터는 돈이 빠져나가지 않고 오히려 불어나기 시작했고 그때가 바로 이터널 용병단이 출현한 때와 일치합니다.”
“많이 알고 있군.”
“본가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왕국의 정세를 놓친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영지전을 벌일 것 같나?”
“예. 올겨울이 끝난 후 영지전을 시작할 것 같습니다.”
“그래?”
에반은 베켓의 예상만큼의 놀라움을 보여주지 않았다.
“안 놀라십니까?”
그의 놀란 얼굴을 보고 싶었던 베켓의 물음이었다.
“왜?”
“저희는 그들을 막을 힘이 없습니다.”
“그건 싸워봐야 아는 것 아닌가?”
“그들은 지금까지 실전을 겪어온 용병입니다. 그 수가 무려 오천 명입니다. 저희 영지의 병력이라고 해보았자 천 명에 약간 못 미칩니다.”
“괜찮다.”
“예?”
“너희들은 어떤가?”
에반은 베켓과의 대화를 듣고 있던 기사들과 병사들에게 물었다.
“자신 있습니다.”
제대로 배운 지 한 달이지만 그들은 정말 자신이 있었다.
드워프들이 만든 무구와 에반이 알려준 크라우스 공법은 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그래. 너희는 겨울이 끝나기 전 준비가 될 것이다.”
그렇게 말한 후 에반이 베켓을 보았다.
“이들은 괜찮을 것이다.”
“정말입니까?”
“너는 그들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나 살펴보아라.”
“아, 알겠습니다.”
너무나 담담한 에반의 말투 때문에 베켓의 급박했던 심장 박동이 떨어지며 냉정해졌다.
‘내가 너무 수선을 떨었나?’
이런 생각까지 드는 베켓이었다.
“그리고 여기는 그 누구라도 금역이다. 그러니 들어오지 마라.”
“예, 에반 님.”
베켓이 고개를 숙이며 에반에게 인사를 한 후 내려갔다.
에반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기사와 병사들의 훈련을 시켰다.
* * *
“이제 가봐야겠습니다.”
“어디를 간다는 것이오?”
“또 다른 것이 남았습니까?”
켈베스의 말에 부탑주가 머뭇거렸다.
솔직한 이야기로 그를 막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화염의 마탑에서 마도사는 꽤나 중한 존재였다.
화염의 마법에 마도사는 총 삼십 명이 있는데 그건 다른 마탑에 비해서는 너무 미미한 숫자였다.
게다가 그 불같은 성질 때문인지 마찰이 두드려져 화염의 마도사 중 마탑에 제대로 붙어 있는 이가 없다.
마도사를 키우려고 해도 키워줄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켈베스가 마도사가 되었고 마탑에서 생활한 기간 동안 그가 모나지도 않고 성격이 불같지도 않은 것을 보며 탑주와 부탑주는 그가 다른 마법사들을 잘 가르칠 거라 보았었다.
그리고 실제로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였다.
그런 그가 간다고 하니 어떻게 해서든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부탑주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현재 크라우스 가문의 상황은 아시오?”
“다오라는 조직에서 제 마나의 맹세를 믿지 못하고 다녀갔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크흠! 그건 좀 유감이오.”
“그렇습니까?”
켈베스는 정세를 알지 못하는 마법사가 아니었다. 오히려 왕궁 마법사였던 만큼 정치적인 상황을 제대로 꿰고 있었다.
그가 크라우스 가문으로 간 후 왕궁에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면서 많은 마법사들이 직업을 잃었었다. 그 당시 수석 마법사의 교체가 이루어진 때였기에 켈베스는 일찌감치 그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크라우스 가문으로 간 것이다.
그러니 도아가 크라우스 가문에 갈 수 있었던 것도 화염의 마탑의 양해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그 마족이 정말 화가 나면 어떻게 하려고.’
지금 에반이 하는 것을 보면 그냥 유희였다.
그러나 언제 마족의 특성을 보여줄지 몰랐다.
그는 에반이 이렇게 유희를 즐기다가 그냥 조용히 사라줘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꼭 그래야만 해.’
“그럼 이건 어떻소?”
켈베스가 에반을 생각하고 있을 때 부탑주가 말했다.
“무엇이 말입니까?”
“지금 그곳으로 이터널 용병단이 가고 있다오.”
“이터널 용병단요?”
“아, 켈베스 마도사는 바스트 제국의 사람이 아니니 잘 모르겠군.”
부탑주가 켈베스에게 그들을 설명해 주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점점 켈베스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마쳤을 때 켈베스가 물었다.
“그들이 어찌 그곳을 향한다는 말입니까?”
“내가 듣기로는 팔로스 백작을 도와주기 위해서라고 알고 있소?”
“그들이 왜요?”
“그거야 그들만의 사정이지 않겠소?”
“그러면 더 빨리 가봐야겠군요.”
“그들이 움직이면 그런 조그마한 가문은 하루아침에 사라질 것이오. 그래도 가겠소?”
켈베스는 정확히 말하자면 가장 우선순위를 자신의 목숨으로 놓고 그 다음이 마법 연구였었다.
그런데 켈베스의 삶에 에반이 끼어들게 되면서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영혼의 존재를 믿는 그로서는 죽은 후에 마족에게 자신의 영혼이 놀잇감이 되지 않도록 에반을 가장 우선순위로 놓은 것이다.
그것을 모르는 부탑주는 켈베스가 서둘러 떠나는 것을 잡지 못하고 멀거니 쳐다보았다.
그때 그의 옆에 나타난 이가 있었다.
“쯧쯧. 잘 타일러서 마탑에 붙어 있게 하라고 했더니 더 빨리 가게 만들었구나.”
“타, 탑주님. 그것이 아니라…….”
“듣기 싫어. 대체 잘하는 것이 뭐냐?”
나이는 별로 차이가 나지 않지만 탑주는 자신의 사부와 사제지간이었다.
마탑의 탑주들은 대대로 크루세스의 마법서의 파편에서 전해 내려오는 지식을 얻어 대마도사가 된다.
기본적으로 7서클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7서클의 대마도사가 된다면 다른 이들과는 달리 생명이 늘어나고 나이에 비해 젊어진다. 그러니 제자들을 빨리 들이지 않게 되고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하게 되어 언제나 탑주와 부탑주의 사이는 사숙관계가 되었다.
게다가 규율이 엄격한 마탑답게 나이가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아도 깍듯하게 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마법사인 줄 알았는데…….”
부탑주는 자신의 목숨을 제일로 챙긴다.
켈베스 또한 그러리라 생각하여 영지전의 이야기를 꺼낸 것인데 설마 그가 이렇게 가버릴 줄은 몰랐다.
동지를 잃고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켈베스 또한 자신의 목숨을 최우선으로 친 것이 맞다. 하지만 위협의 관점이 달랐을 뿐이다.
“아무튼 어떻게든 해봐. 지금 우리 마탑의 마도사 중에 연락이 되는 놈들이 없잖아.”
‘그거야 다 너 때문이잖아.’
사실 탑주의 괴팍함에 질린 많은 마법사들이 마탑을 자주 찾지 않는 실정이다.
대부분의 마도사들이 탑주와 동년배 정도이기에 더욱 심했다.
거의 반평생을 탑주와 지내면서 시달렸는데 마도사가 되어서도 부탑주처럼 시달리기는 싫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성격이 불같아서 자신들을 괴롭히는 탑주에게 대들다가 맞은 원한도 있어 그게 풀리지 않아 돌아오지 않은 마도사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마음 속일 뿐이었고 부탑주는 입으로는 절대 그런 말을 내뱉지 않았다.
“왜 말이 없어? 어떻게 할 거야?”
“제가 한번 수를 써보겠습니다.”
“그래야 할 거야. 우리 마탑에 마도사의 수가 너무 적잖아. 깨달음을 얻으려면 방금 경지에 올랐던 켈베스 같은 마도사가 적격이니 어떻게든 데려와.”
“예.”
탑주의 잔소리에 부탑주는 대답을 하며 그를 데려올 생각을 짜낼 수밖에 없었다.
* * *
펑!
“공격해!”
“크악!”
“기습이다. 다오 놈들이 기습을 해왔다.”
“파이어 월.”
“다크 파이어.”
화르륵!
곳곳에서 마법이 난무하고 비명이 일대를 덮었다.
하지만 배는 많은 병력으로 갑작스러운 기습을 하자 흑마법사들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잠을 자고 있던 하스도 갑작스러운 마나의 떨림에 눈을 떴다.
“이것은?”
바로 그때 하스의 방으로 한 흑마법사가 들어왔다.
“하스 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기에 마법을 난사하고 있는 것이냐?”
“다오에서 급습을 해왔습니다.”
흑마법사의 말에 안색이 변한 하스는 그에게 물었다.
“정말 다오인가?”
“예.”
“그들이 여길 어떻게?”
이곳은 흑마법사들이 생각할 때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 중 하나였다.
프로스톤 제국의 마물의 숲은 그 악명이 자자해 사냥꾼들도 들어오기를 꺼려하여 인적이 아예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가끔 다오의 조직원들이 이런 곳을 둘러보기는 하지만 그것도 그저 보여주기 위한 모습일 뿐 자신들이 있는 깊숙한 곳까지는 다오의 조직원들이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다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하스는 더는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에게 물었다.
“여자들과 아이들은?”
“이미 대피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걸릴 것 같나.”
흑마법사의 안색이 흐려졌다.
“너무나 급작스러운 습격에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적어도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은 있어야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킬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내가 막을 것이다.”
그 말에 놀란 흑마법사가 하스를 말리기 시작했다.
“안 됩니다. 하스 님이 돌아가신다면 후에 더욱 우리가 살길이 없어집니다. 하스 님은 그냥 몸을 피하십시오.”
“내가 어떻게 또다시 혼자 몸을 피하겠나? 그런 짓은 한 번이면 족하다.”
“하스 님.”
하스가 로브를 걸쳐 입으며 속에 있는 무언가를 뱉어내듯 말했다.
“예전에 난 한 번 내 목숨이 아까워서 도망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도망칠 때 다른 이들이 말했지. 내가 살아난다면 더욱 흑마법사들이 부흥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그때 죽은 아이들과 흑마법사들을 생각하면서 난 아직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난 흑마법사를 부흥시킨다는 일념이 아니라 그저 내 목숨이 아까워서 도망을 쳤던 것뿐이니까.”
“하스 님…….”
“지금도 마찬가지다. 난 두려워. 그리고 만약 또다시 도망친다면 그건 흑마법사의 부흥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와 똑같이 나를 위하기 때문이다. 더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자신이 나에게는 없다.”
“하지만…….”
“그만.”
하스가 그의 말을 막으며 말했다.
“이번만큼은 내 말을 따라주길 바란다.”
그렇게 말한 하스가 그를 지나쳐 비명이 들리는 곳으로 나갔다.
“크하하하. 죽어라!”
“크악!”
대검을 든 기사가 또 한 명의 흑마법사를 그대로 베어 쓰려뜨렸다.
흑마법사들은 벌써 십여 명을 쓰러뜨린 그의 무위에 겁을 먹기보다는 오히려 마법을 난사했다.
“이 악마 같은 자식! 죽어라. 다크 애로우.”
파팟!
하지만 화살처럼 빠르게 날아온 마법을 간단하게 피한 기사는 그대로 자신을 공격한 마법에게 짓쳐들어갔고 놀란 흑마법사의 가슴에 대검을 박아주었다.
“아, 악마 같은 놈. 쿨럭.”
흑마법사의 입에서 피가 터져나오며 기사의 갑옷을 적셨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대검에 박힌 흑마법사를 보며 말했다.
“크크크. 악마들은 너희지 내가 아니다. 이 자식들아.”
쑤욱!
검이 뽑히며 피분수가 솟구쳤지만 그는 그걸 맞으며 오히려 웃음을 터뜨렸다.
“크하하하. 피의 축제를 즐겨보자!”
“이놈! 라우웰!”
화악!
거대한 어둠의 덩어리가 라우웰을 덮쳤다.
라우웰도 이번 마법은 피하지 못한다는 걸 아는지 대검을 곧추세우더니 어둠의 덩어리가 가까이 오자 아래로 내려 그었다.
부와와왁!
모든 걸 집어삼킬 것만 같았던 어둠의 덩어리가 두 조각이 나 라우웰을 지나쳐 양옆에서 터졌다.
“크아아악!”
라우웰의 뒤에서 흑마법사를 상대하고 있던 다오의 조직원 둘이 어둠의 덩어리를 맞고 그대로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라우웰은 자신에게 마법을 쏘아낸 자를 쳐다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호, 하스가 아닌가?”
“라우웰!”
하스의 눈이 붉게 번뜩이며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의 살기에도 라우웰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몇 년 전 만났을 때는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을 가더니 이제는 전면에 나서는구나. 이제 넌 흑마법사의 희망이 아닌 건가?”
그 말에 하스의 눈썹이 꿈틀거리며 옆구리가 쓰려왔다.
도주를 했던 자신을 끝까지 쫓아오며 자신을 비웃었던 인물이 라우웰이었다.
그에게 옆구리를 내주었었지만 그의 방심을 틈타 겨우 도망을 갔고 지금까지 살았다. 자신의 죄책감을 더욱 부채질하는 이가 자신의 앞에 있다는 사실에 하스는 더욱 전의가 불타올랐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로 다오의 조직원들을 상대하고 있던 흑마법사들은 그를 보며 놀라 외쳤다.
“하스 님!”
“어째서 하스 님이 이곳에…….”
“하스 님,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십시오.”
그 광경을 보며 라우웰이 재수없는 미소를 날리며 말했다.
“호, 아직까지 흑마법사의 희망인가 보지? 배신자 주제에 말이야.”
“크윽! 누가 배신자란 말이냐!”
“하녀의 아들로 태어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귀한 핏줄을 이어받은 주제에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아서 브릴리언 가문을 배신한 거지?”
“난 배신한 것이 아니라 내 운명을 찾으러 간 것뿐이다.”
“하, 그 운명이 바로 흑마법사란 말이냐?”
“예전에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싶진 않군.”
“후. 그래, 브릴리언 가문에서는 수치스러운 핏줄이지만 여기에서는 고귀한 사람이기 때문인가?”
라우웰은 계속해서 하스를 도발했다.
그리고 하스는 라우웰의 도발에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
흑마법사의 마지막 예언자인 라나이엘의 예언을 받고 그는 흑마법사의 찬란한 영광을 이끌 구도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불철주야 노력을 하며 진정으로 흑마법사를 이끌려고 흑마법사의 마스터의 옆에서 노력을 했고 그건 오늘날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감추고 싶은 과거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브릴리언 가문이었다.
흑마법사의 천적이자 다오 조직을 이끌어 가는 곳 중 하나인 가문.
그곳에서 가주의 아들로 태어난 하스는 미천한 핏줄이라는 핍박을 받으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나중에 라나이엘의 예언에 따라 그를 데리러 온 마스터의 손에 이끌려 흑마법사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브릴리언 가문보다는 자신이 흑마법사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런 그에게는 이제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아닌 브릴리언 가문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죽도록 싫었다.
하스가 메모라이즈되어 있는 마법 하나를 시전했다.
“페인 데스.”
하스의 마법이 라우웰을 감싸안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빨리 뒤에 있던 다오의 마법사 두 명이 하스의 마법을 차단했다.
파캉!
마법이 깨어진 찰나 라우웰이 하스에게 뛰어들었다.
하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몇 년 전에 실수를 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스가 다시 한 번 차분하게 마법을 영창하기 시작했고, 그 사이 다른 흑마법사들이 다오의 마법사들을 방해를 하며 하스의 마법을 캔슬할 수 없도록 했다.
“크하하하! 넌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라우웰은 하스가 다시 마법을 시전하건 말건 검을 다시 휘둘렀고 라우웰의 눈과 마주친 하스가 마법을 시전했다.
“블라인딩 라이트.”
화아악!
“큭.”
너무나 밝은 빛에 일순간 눈이 먼 라우웰이 고개를 숙인 순간 하스는 자신에게 날아온 검을 피한 뒤 영창이 되어 있는 두 번째 마법을 날렸다.
“파이어 버스트!”
콰쾅!
“크윽.”
파이어 버스트는 대인 마법이 아니라 범위 마법이다.
대인 마법이었다면 일시적으로 눈이 먼 라우웰이라도 본능적으로 쳐내었을 테지만 범위마법이기에 그 앞에 가는 순간 하스의 의지대로 마법이 터졌고 라우웰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하스는 뒤로 완전히 물러난 라우웰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마법을 준비했다.
그때였다.
“퍼지.”
화아악!
라우웰의 한마디에 갑자기 갑옷에서 빛이 나더니 불에 그을린 자국부터 해서 피가 마른 자국까지 모두 없어졌다.
하스가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평정심을 가지며 마법을 시전하려 했지만 갑자기 라우웰이 자신이 아닌 다른 곳으로 달려가자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하스야, 침착해지자.’
하스는 스스로 세뇌하듯 그렇게 생각하며 입으로는 마법을 영창을 했고 영창이 끝났지만 끝내 그걸 시전하지는 못했다.
갑자기 옆으로 튀어나간 라우웰이 다른 다오의 조직원들과 싸우고 있던 흑마법사들을 무차별적으로 베어냈기 때문이다.
하스의 눈에 한 흑마법사의 머리가 허공으로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라우웰!”
그 모습에 영창해 놓았던 마법이 사라지고 분노가 머리를 뒤덮었다.
하스가 라우웰에게 마법을 난사했다.
“하하하! 그런 걸로 날 잡을 수 있을 거 같나?”
하지만 라우웰은 즉시 시전을 하는 기초적인 마법에는 맞지 않고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그에 이런 마법으로는 절대 그를 죽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하스가 고위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둠의 기운을 부여받은 마나여, 세상을 파멸로 이끌 힘을 가진 어둠이여, 네게 바라노라. 이제는 파멸의 힘을 보여줄 때가 왔으니…….”
하스가 기나긴 영창을 시작했다.
그리고 라우웰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라우웰이 오른쪽 토시에 누르면서 말했다.
“헤이스트.”
그러자 토시에 살짝 빛나며 라우웰의 스피드가 빨라졌고 하스가 반응할 사이도 없이 하스의 앞에 나타났다.
하스의 눈이 더없이 커질 때 라우웰이 말했다.
“멍청한 놈.”
퍽!
“커헉!”
파멸의 노래를 영창하던 하스가 복부에 박힌 라우웰의 주먹에 신음을 토하며 허리를 굽혔다.
퍽!
“컥!”
라우웰의 무릎이 이번에는 지상으로 향해 있던 얼굴로 날아들어 꽂혔다.
그 후 계속해서 라우웰은 구타를 했고 한 방 한 방을 맞을 때마다 하스는 신음을 흘렸다.
라우웰은 손과 발을 쉬지 않으며 그에게 말했다.
“크크크. 전투는 이렇게 하는 거란다. 이 멍청한 놈아.”
하스는 그 말에 비겁하다 말하려고 했지만 입에서 토해져 나오는 건 신음과 핏물뿐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흑마법사들이 놀라 자신을 공격하는 다오의 조직원들은 도외시한 채 하스를 구하려 했다.
그 낌새를 눈치챈 라우웰이 빠르게 검을 하스의 목에 대었다.
“어? 어? 누가 움직이려 하는 거지?”
흑마법사들이 모두 그 자리에 멈추었다.
라우웰은 마지막 예언자 라나이엘이 예언한 흑마법사의 구원자. 그가 자신들 때문에 죽으면 안 된다.
흑마법사들은 모든 걸 멈추고 가만히 서 있었다.
라우웰은 그걸 보며 웃었다.
“오, 이거 끝내주는데. 모두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멈추었잖아.”
그러면서 그가 검을 좀더 하스에게 가져다 대었다.
하스의 목에서 배어 나온 피가 검을 타고 흘러내리자 흑마법사 한 명이 소리쳤다.
“우리는 항복하겠어. 그럼 되잖아.”
하스는 그 흑마법사에게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에서는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 서 있는 것도 라우웰이 자신의 옷깃을 잡고 있기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일 뿐 이미 자신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이, 어떻게 하지?”
라우웰이 저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누군가에게 소리쳤다.
그는 금발의 잘생긴 청년이었는데 라우웰의 물음에 조용히 손을 들어 목을 자르는 시늉을 했다.
“크크크크. 좋았어. 그래야지.”
혼자 잠시 웃던 라우웰은 하스의 머리를 잡아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하더니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어이, 좋은 구경 잘하라고.”
그렇게 말한 라우웰이 손을 든 순간 다오의 조직원들이 일제히 흑마법사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컥!”
“크윽!”
하스가 그 광경을 두 눈을 부릅뜨며 지켜보았다.
흑마법사들은 하스에게 짐을 덜어줄 생각인지 죽는 순간에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하스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하스의 눈에 새겨진다.
오히려 그냥 저주를 하며 한탄을 내뱉으며 죽느니만 못했다.
그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줄수록 하스의 가슴에 그들의 모습이 깊게 새겨질 뿐이었다.
더욱 무거운 죄책감이 하스의 가슴을 짓누르는 가운데 얼마 후 장내는 적막해졌다.
모두가 죽은 것이다.
“모두 죽었군. 그럼 마지막을 장식해 볼까?”
라우웰이 검을 높이 치켜들었고 하스는 눈을 감았다.
복수심이 불타오르는 것보다 여기에서 이들과 그냥 같이 죽고 싶었다.
온 세상을 떠받드는 것보다 더욱 무거운 죄책감을 더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잠시만.”
하지만 그런 하스의 희망은 금발의 청년 때문에 날아갔다.
“왜?”
어느새 이쪽으로 다가온 금발의 청년이 그에게 말했다.
“지금 죽이는 것보다는 미끼로 살려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라우웰은 그런 그의 목소리에 무덤덤했다.
“그래?”
“지금 봤잖아. 이자의 목숨을 가지고 위협을 하자 모두가 자신의 죽음을 도외시하는 것 말이야.”
“하긴 그렇군.”
“이자가 있다면 오히려 우리의 일이 편해질 수도 있어.”
“그럼 데려가자.”
“그래. 그리고 안에 남아 있는 이들이 있는지 확인해야지.”
“아차. 잊어버리고 있었군.”
라우웰이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치더니 몇 명에게 명령을 내렸다.
“어이, 거기. 너. 너. 너. 세 명 안으로 들어가봐.”
호명을 받은 이들 중 한 명이 물었다.
“질문 있습니다.”
“뭐야?”
“안에 여자가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여자?”
“예.”
“몰라. 너네들 마음대로 해라.”
그 말에 선택된 세 명이 희희낙락하는 가운데 금발의 청년이 라우웰에게 말했다.
“그렇게 해도 되나? 그래도 우리의 이미지를 생각해야지.”
“크크크크. 이미지? 이미 흑마법사나 우리나 동급으로 두려움을 주는 존재로 바뀐 지가 언제인데 그런 걸 따져?”
“그렇다면 상부에는 뭐라고 보고할 거지?”
“그냥 죽였다고 하면 되는 거야. 어차피 몇 년 전에도 그랬어. 그때도 별 탈 없이 넘어갔으니 이번에도 넘어가겠지. 그런데 뭘 그리 꼬치꼬치 묻는 거야? 어차피 여자들은 흑마법사들의 동조자들이라고. 걱정할 대상이 아닌 거지. 그리고 죽으면 어차피 그냥 썩어서 흙이 될 텐데 오늘 고생한 이놈들에게 몸보신이라도 시켜주면 그것이 저들에게는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거라고.”
그 말에 금발의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쯧. 넌 애가 너무 딱딱해서 탈이야.”
“어이. 이거 받아.”
지금까지 하스를 들고 있던 라우웰이 그렇게 말하며 조직원에게 하스를 던졌다.
갑자기 날아온 하스를 제대로 받지 못해 하스가 땅에 뒹굴었지만 하스에게서는 아무런 신음소리도 나지 않았다.
자신을 미끼로 쓴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미 그 울화를 어쩌지 못하고 기절을 한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안으로 들어갔던 세 사람이 나왔다.
그들의 표정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아무도 없나 보구나.”
“모두 도망간 것 같습니다. 쫓을까요?”
“내버려 둬. 어차피 저놈 하나면 얘 말대로 줄줄이 다 꿰일 것 같으니까. 그럼 모두 철수.”
그 말에 모두가 그곳을 빠져나갔다.
모두가 가고 주위가 조용해졌을 때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무섭군. 그리고 역겨워.
그는 수정구 하나를 들고 있었는데 그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베켓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저들을 따라가라. 저들이 저자를 어떻게 이용할지 봐야겠지.
흑마법사의 은신처를 알린 것은 바로 베켓이었다.
그가 몬테리얼을 취조해 이곳을 알아낸 것이다.
그리고 다오와 흑마법사의 은신처를 알려주는 조건으로 크라우스 가문에서 눈을 돌리기로 약속을 했다.
하지만 오늘 참사를 지켜본 베켓은 사악한 흑마법사라기보다는 악독한 다오 조직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수정구가 끊기고 잠시 생각을 하던 베켓이 중얼거렸다.
“에반 님께 보고를 해야겠군.”
베켓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