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전 기사단장이 강제로 은퇴한 다음 날 에반이 다시 한 번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
어제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에반은 만족하며 그들에게 말했다.
“이번 한 번만 말한다. 나갈 사람은 지금 나가라.”
그 말에 몇몇이 갈등하는 것이 얼굴에 비춰졌다.
“지금까지 너희가 알고 있던 크라우스 기사단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난 내가 알고 있던 기사단으로의 탈바꿈을 시도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불만들이 터져 나와도 난 듣지 않겠다.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이 너희들이 이 기사단을 나갈 수 있는 기회이자 지옥 같은 훈련을 받지 않을 마지막 기회이다.”
에반의 엄포에 드디어 움직이는 사람이 생겼다.
몇몇의 기사들이 옆으로 슬쩍 빠진 것이다.
“더 없는가?”
에반의 말에 계속해서 눈치를 보던 기사들이 대거 빠져나갔다.
사실 그들은 크라우스 백작가에서의 소문을 듣고 기사가 된 케이스였다. 전 기사단장이 있을 때는 반란을 일으켜 데일을 가주 자리에 올리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졌었지만 머리가 단번에 잘린 지금은 그저 조용히 크라우스 백작가를 빠져나가고 싶었다.
잠시 후 더는 기사단에서의 이탈이 없자 에반이 말했다.
“그럼 이제 없는 것으로 알겠다.”
그렇게 말을 하는 에반이 슬쩍 데일의 옆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프타란 이가 데일에게 바짝 붙어 있었다.
‘저놈인가?’
에반이 어제 기사단장을 그렇게 만들어놓고 그 사건이 저택을 한차례 휩쓸면서 켈베스가 에반을 찾아왔었다.
-한 명을 보냈군요.
-무슨 뜻이지?
-사실 기사단에서 기사들에게 이상한 마음을 집어넣은 건 두 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 중 한 명이 기사단장이라는 거군.
-예.
-나머지 한 명은 누구지?
-프타라는 자입니다. 언제나 데일의 옆에 붙어 있습니다.
-그렇군. 그런데 그런 걸 잘 아는군?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전 백작가에 있는 유일한 마법사입니다. 기사들도 저에게 잘 보여야 하죠. 그런 와중에 이것저것 알게 되었습니다.
-뭐, 상관없나? 어차피 과거는 덮어두기로 마음먹었으니 말이야.
-감사합니다. 에반 님. 하지만 프타란 자는 과거의 망령으로 덮어두기에는 그 욕심이 큰 것 같습니다.
-왜지?
-예. 다른 기사들은 그저 선동에 넘어간 바보들이지만 프타는 직접 선동을 하는 머리 좋은 놈이니까요.
-알았다. 생각해 보지.
‘먼저 처리해야 할 자라.’
에반이 어제의 일을 생각하며 프타를 살짝 보다가 이제 분류가 끝났다고 생각하며 빠져나간 기사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지금 뒤도 돌아보지 말고 떠나라. 그 모습 그대로 말이다.”
“지금 이 모습으로 말입니까?”
“그래. 지금 이것이 내가 베풀 수 있는 자비의 한계다.”
몇 명이 발끈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렇다고 에반에게 한마디 쏘아붙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어제의 기억의 너무나 선명하게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들이 기사라는 작위는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리 뛰어난 기사들은 아니다. 오직 기사단장과 몇 명만이 정말로 기사에 어울릴 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 기사단장을 단 몇 번의 공방으로 눕힌 것이 에반이다. 그들의 마음에는 분노보다는 두려움이 더 큰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게이브.”
“예.”
“저들이 그대로 빠져나가는지를 보아라. 그리고 그 가족들도 모두 병사들을 시켜 내쫓아라. 또한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건 자신의 손에 들 수 있는 물건들뿐이라는 것을 명심시켜라.”
“알겠습니다.”
게이브가 조용히 나가는 기사들과 함께 나가고 에반은 이제 남은 이들을 바라보았다.
에반이 단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남아 있는 서른 명의 기사들의 주위를 거닐었다.
에반에게 그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들어온다.
어떤 이는 두려움이 있었고, 어떤 이는 기쁨이 있었다.
여기에 남은 자는 세 부류였다.
도태된 자, 약삭빠른 자, 그리고 정말로 크라우스가를 생각하는 기사.
하지만 에반은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크라우스의 권역 안에서 데일과 그를 따르던 기사들이 어떤 패악을 저지르고 다녔는지 에반도 어제 쥬드를 통해 들었다.
이미 오 년 전부터 데일은 온갖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하고 다녔는데도 쥬드의 귀에는 그런 소문이 단 하나도 들려오지 않았다.
위협을 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쥬드에게 그걸 알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었다.
그 말인즉 아무도 크라우스 백작을 무서워하지 않았고, 충성을 하지 않았다는 소리와 같았다.
정말로 충성심이 강한 게이브 같은 경우는 매일 쥬드의 곁에 있기도 했지만 기사단장이 언제나 감시를 통해서 그에게도 통제를 가했기 때문이다.
쥬드를 호위하는 두 명 중 한 명은 언제나 게이브였지만 또 다른 한 명은 기사단장이 심어놓은 기사였다.
그러나 그 외의 사람들 중 기사단장이 눈여겨보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그들 중 누구라도 쥬드에게 이야기를 했다면 되었을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그저 눈을 감고 언젠가는 크라우스가가 나아지겠지라는 생각만을 했다.
어차피 자신에게 피해가 오는 것도 아니고, 쥬드가 죽는 것도 아니다.
다만 크라우스가의 권역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약간 피곤해지고 기사들이 돈을 착취한다는 것인데 그 안에는 언제나 데일이 껴 있었기에 사람들이 눈을 감고 모른 척한 것이다.
에반은 그들의 그런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정신을 뜯어 고치고자 했다.
에반이 그들에게 말했다.
“난 크라우스 기사단이 필요할 뿐이다. 크라우스가의 기사가 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지금이라도 나가라.”
모두가 조용했다.
아니,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데일이었다.
언제나 자신감에 차 있던 그가 몸을 움츠리며 에반에게 묻고 있었다.
“넌 크라우스가의 사람이다. 너도 떠나고 싶은가?”
“그것이 아니라…… 아닙니다. 하겠습니다.”
데일은 무언가 말을 해보려다가 포기하고는 에반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만 해도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그러나 기사단장이 에반에게 처절하게 당한 후 이미 데일의 의지는 꺾여버렸다.
그들의 감언이설보다도 에반의 주먹이 더욱 무서웠다.
* * *
에반이 제대로 된 기사단을 만들 준비를 하려는 그 시간 브레프 남작은 팔로스 성에 도착해 있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집사의 물음에 브레프 남작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예. 바로 영주님을 뵙고 싶은데 괜찮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단장님이 오시면 바로 모시라 하였습니다.”
브레프 남작은 한시가 급한 듯 바로 팔로스 백작을 만났다.
“오, 그래. 잘 다녀왔는가? 그들이 뭐라 하던가?”
“좋지 않습니다. 영주님.”
팔로스 백작은 브레프 남작의 말에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라 하던가?”
“만약 그들을 원상태로 돌리고 싶다면 납골당으로 가는 길을 돌려달라고 하더군요.”
“뭐? 크라우스 백작이 미치기라도 한 건가? 그건 전하에 대한 도전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말이군.”
“이미 십오 년이 지났습니다. 전 크라우스 백작이 약속을 한 건 단 십 년이었습니다. 십 년 동안 자신의 영토 안에서 나오지 않고 왕국에 대한 일에는 끼어들지 않는다. 그것이 그의 선언이었습니다.”
“그래도 이미 망할 대로 망한 크라우스 백작가네. 이미 전하께서는 그들이 그 정도의 영토를 가지고 있는 것도 불쾌해하시지. 그런데도 그런 이야기를 꺼냈다는 건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크라우스 백작의 생각인지 아니면 그의 형의 생각인지 말입니다.”
“형? 지안 경을 그렇게 만든 자 말인가?”
“예. 그자가 저와 대화를 주도해 나갔습니다. 크라우스 백작은 그저 옆에서 구경만 하더군요.”
“흠! 아무리 유약하다지만 그렇게 큰 결정을 다른 사람의 입을 빌려서 한다?”
팔로스 백작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 크라우스 백작은 십 년의 칩거를 약속했고 잘 지켰다.
그동안 루드 왕은 크라우스 백작을 견제할 왕명을 내렸다.
백작이라도 영지가 없다면 기사들의 수를 백 명으로 제안했고, 또한 영지전을 참가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영지가 없는 귀족들이 영지를 가지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의 귀족들은 영지를 돈으로 사거나 다른 영주들의 영지전에 참여하여 약간의 영지를 받는 형태로 영지를 만든다.
영지전이라는 것이 명분만 있으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고, 또한 왕은 그런 영지전을 눈감아 주었고 승리자의 뜻에 따라 처분하게 했다.
그러던 것을 루드 왕은 귀족들에게 영지전의 참여를 막아버렸다. 귀족들의 힘을 제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크라우스 백작가 때문이었다.
그들을 그냥 없애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지금 왕국의 기사단은 공식적으로 세 개의 기사단이 존재하는데 그 중 최고의 기사단을 뽑으라고 하면 글로리 기사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왕국의 일뿐 아니라 타 왕국의 원조 요청에도 언제나 선두에 서서 전투를 해왔고, 그렇게 실전으로 다져진 그들은 최고의 기사단이라는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전 크라우스 기사단 소속이었다.
지금까지 최고의 기사단이라 불리는 이들이 본래는 크라우스 기사단의 소속이니 루드 왕이 함부로 크라우스 백작가를 건드리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크라우스 백작가는 엄밀히 말하면 십오 년 전 있었던 폰다 왕국과의 전쟁에서 크리프 왕국을 지킨 구국의 영웅이었다. 그것도 타 왕국이 쳐들어와도 철도 없이 싸우던 세 왕자를 대신해서 말이다.
그렇기에 아직도 은밀하게 크라우스 백작가를 지원하는 귀족들이 많았고, 그들을 적으로 돌리지 않으려면 크라우스 백작가는 겉으로 보기에는 건재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이니 루드 왕은 어떻게 해서든 크라우스 백작가의 부흥을 막고 싶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영지전 참여를 막아버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크라우스 백작가는 영지전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또한 재물도 없기에 절대 영지를 사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여기에 맹점이 있었으니 팔로스 백작은 그 맹점을 파고들어 가려 했다.
잠시 생각을 하던 팔로스 백작이 브레프 남작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영지전을 하면 어떻겠는가?
“그들은 영지전이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금지되어 있는 것이지 우리가 금지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 다만 우리가 공격해 들어갈 때까지 그들은 우리 영지를 밟지 못하네.”
“그렇군요.”
“하지만 그 전에 그들의 병력과 지금 상황을 제대로 알아야지. 자네가 보기에 크라우스 백작과 에반이 갈등을 일으키던가?”
“잘 모르겠습니다.”
“한 번 잘 생각해 보게. 그것이 아니면 어찌 그런 결정을 형이라 하지만 가주가 아닌 자가 했겠는가? 분명 무언가 그들 사이에 균열이 있었을 거야.”
팔로스 백작은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아무리 반듯함을 가진 기사라지만 아들이 아닌 이상 혈육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넘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럼 명분은 무엇으로 하는 겁니까?”
“내 영지에서 내 기사를 이상한 술수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어놓았네. 그리고 치료를 부탁하자 거절하며 영지를 가질 수 없는 귀족이 영지를 달라 했지. 이것보다 더 좋은 명분이 어디 있나?”
“알겠습니다.”
“그럼 난 전하께 이 사실을 보고하지. 이만 나가보게.”
“예.”
팔로스 백작은 브레프 남작이 나가자 나트레를 찾아갔다.
그는 침대에 누운 자신의 제자인 파보를 보고 있었는데 팔로스 백작이 찾아오자 예를 갖추며 인사를 했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얼굴이라도 비치지 그러나.”
“아닙니다. 제 제자가 이렇게 누워 있는데 어떻게 다른 곳에 가겠습니까?”
나트레의 제자 사랑은 아주 유명했다.
이번에 지안을 따라간 이유는 파보가 나트레와 친하기도 했지만 통신을 할 수 있는 마법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본래는 다른 마법사가 갔겠지만 파보가 나트레에게 간청을 하기도 하고 그에게 경험을 시켜주자는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나트레는 파보를 보냈다.
그 후 나트레가 볼 수 있는 건 말만 할 수 있는 송장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자책했고 그 다음에는 파보를 이렇게 만든 이에게 분노했으며 이제는 그저 치료만 되기만을 바라고 있는 나트레를 보며 팔로스 백작이 물었다.
“전하와 통신 연결이 가능한가?”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제가 듣기로는 기사단장이 돌아왔다는데요.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겁니까?”
“그쪽에서 조금 강경하게 나왔네. 그래서 영지전밖에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고 말이야.”
“안 됩니다. 제 제자를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지전이라니요?”
나트레가 눈을 크게 뜨며 팔로스 백작을 말렸다.
그러자 팔로스 백작이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영지전을 벌이는 이유가 그 때문이네. 자네의 제자를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으로서는 크라우스 백작의 형이라는 자가 최선의 선택인 것 같은데 그가 거부를 했다네. 그러니 영지전을 일으켜 그들을 힘으로 굴복시킨 다음 치료를 하게 해야지.”
팔로스 백작은 나트레에게 약간의 정보를 숨겼다.
크라우스 백작가가 영토를 원하고 있다고 한다면 나트레는 당장 그 영토를 줘야 한다고 열변을 토할 것이 뻔했다.
게다가 나트레는 루드 왕과 통신을 연결할 수 있는 마법사이자 루드 왕의 신임을 받는 마법사였다. 만약 팔로스 백작이 사실대로 말한다면 나트레는 그 특유의 화려한 언변으로 루드 왕을 꼬드겨 영지를 크라우스 백작가에 주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팔로스 백작은 숨길 수밖에 없었다.
팔로스 백작의 말이 나트레를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했다.
“그렇군요. 그럼 당장 전하와의 통신을 연결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잠시 후 팔로스 백작은 루드 왕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고 나트레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않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통신구에서 서서히 사람의 얼굴이 보이더니 선명해 진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며 팔로스 백작이 무릎을 꿇고 인사를 했다.
“크리프의 절대자이신 루드 모플로 전하를 뵙습니다.”
-그래. 잘 지냈는가?
조금은 친근함이 느껴지는 음성이 방 안을 울렸다.
하지만 오히려 팔로스 백작은 긴장했다.
루드 왕의 목소리는 사람들의 긴장을 놓게 하고 편안하게 한다지만 그의 측근들은 오히려 이런 목소리를 들을 때 더욱 긴장한다.
이런 목소리일 때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아야겠다는 뜻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예. 잘 지내고 있사옵니다.”
-그렇군. 그런데 짐이 이상한 소식 하나를 들어서 말이야. 팔로스 경도 알고 있는가?
“어떤 말씀이신지?”
-크라우스 백작가에 가주의 형이라 자처하는 남자가 나타났다고?
“예. 사실입니다.”
-흠. 그래? 그런데 왜 짐은 그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보고받지 못한 거지?
이제야 목소리가 변한 이유를 깨달은 팔로스 백작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었다.
“불충을 용서하십시오, 전하.”
-아니야. 아니야. 자네를 추궁을 하는 것이 아니라네, 그저 왜 이 소식을 듣지 못했을까 그것이 궁금해서 말이야.
“그것이…….”
팔로스 백작은 빠르게 이번 일을 루드 왕에게 모두 말했다. 나트레의 제자가 당해서 정신이 없었고 또한 에반을 제대로 조사를 하느라 시간이 없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그가 영토까지 원한다는 이야기까지 하자 루드 왕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팔로스 백작.
“예, 전하.”
-짐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이 뭐지?
“크라우스 가문입니다.”
-그래. 그놈들이 제일 싫어. 루크라는 놈이 영웅 대접을 받는 것도 싫고, 그놈의 기사단이 우리 왕국의 최고의 기사단이라는 것도 싫지.
루드 왕은 언제나 글로리 기사단을 가장 치열한 전쟁으로 보내 버렸다.
타 왕국으로부터 자신의 실리를 챙기면서 그들의 전력을 깎으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도 글로리 기사단은 언제나 그 인원에 변함이 없이 수많은 전쟁을 헤쳐 나갔다. 그들의 인원이 바뀌는 때는 단원이 은퇴를 할 때뿐이었으며, 그 이외의 전투에는 최고의 공적을 이뤄내면서도 전사자가 아무도 없었다.
자신에게 정말로 충성을 한다면 전쟁 속에서 그냥 죽어주면 될 텐데 어떻게 해서든 끝까지 살아남아 왕국의 이름을 드높인다.
루드 왕은 그래서 글로리 기사단이 더 싫었다.
왕국의 이름을 드높이는 글로리 기사단이 본래 어디의 기사단이었는지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말이다.
살짝 짜증을 부리는 루드 왕에게 황급히 팔로스 백작이 말했다.
“그렇기에 지금이 기회라 생각이 되옵니다, 전하.”
-하지만 그걸 다른 이들이 말리지 않을까?
“명분은 확고합니다. 영지가 없는 귀족이 사심 때문에 이상한 술수로 수하들을 병들게 했고 그걸 치료하기 위해서는 영지를 달라는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한 것이지요.”
-그렇군. 그래.
“또한 지금은 글로리 기사단도 저 북방으로 가 있지 않습니까? 지금처럼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말에 잠시 침묵을 하던 루드 왕이 이내 입을 열었다.
-알았네. 내 사람을 보내지.
“정말 훌륭하신 선택이십니다, 전하.”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다네, 팔로스 경.
“경청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크라우스 가문의 핏줄을 남겨서는 안 되네. 알겠나?
“명대로 하겠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다음에는 짐에게 기분 좋은 소식을 전해주게.
“꼭 그러하겠습니다.”
* * *
“크윽!”
“윽…….”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사들은 번쩍이는 갑옷을 벗고 손은 앞으로 무릎은 구부린 자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모두 옷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털썩!
“데일, 일어나지 못하겠나?”
에반이 또다시 쓰러진 데일을 보며 말했지만 데일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옆에 붙어 있던 프타가 자세를 풀더니 데일에게 다가가 그를 이리저리 살피는 척을 했다.
“단장님, 데일 님께서 기절을 했습니다.”
“기절?”
“예.”
에반이 서서히 그 앞으로 다가갔다.
이 꼼수는 에반도 예전에 많이 써먹던 수법이었다. 그리고 사부는 자신의 꼼수를 언제나 알아차리고 골탕을 먹이고는 했다.
‘이렇게 말이지.’
에반이 프타를 보며 물었다.
“정말 기절을 한 건가?”
“예. 정말입니다.”
“네가 어떻게 알지?”
“저 또한 기사입니다. 누가 기절을 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습니다.”
“그래? 정말 기절했다는 말이지?”
“예. 빨리 방으로 옮겨야…….”
“가만 있어봐. 정말 기절했다고?”
“예.”
프타의 표정은 정말로 큰일이 난 듯 보였다.
하지만 에반은 사람의 표정을 가지고 그 사람의 상태를 유추하는 이가 아니었다. 더 정확하고 간단하게 유추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 에반이었다.
에반이 물었다.
“넌 기절한 사람이 긴장한 듯 숨을 몰아쉬는 걸 본 적이 있나?”
“예?”
“일단 사람은 기절을 하면 이렇게 숨을 쉬지 않지. 그리고…….”
퍽!
“커헉!”
갑자기 날아든 발길질에 데일이 두 바퀴를 돌아 저쪽으로 날아갔다.
“이렇게 맞았을 때 저렇게 큰 소리로 아픔을 표현하지도 않아.”
그렇게 말한 에반이 다시 데일의 앞에 섰다.
데일은 눈을 꼭 감고 어떻게 해서든 숨소리를 안정시키려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런 데일에게 에반이 발을 들며 중얼거렸다.
“어디 다시 한번 차볼까? 이번에는 좀 아플 거다. 데일.”
그 말에 어쩔 수 없이 눈을 번쩍 뜬 데일이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아, 아닙니다. 깨어났습니다. 백부님!”
“그렇군. 깨어났어. 아니지, 처음부터 기절하지 않았으니 그냥 눈을 뜬 것뿐이지. 그렇지 않나?”
“마, 맞습니다. 백부님.”
“여기에는 내가 뭐라 부르라고 했지?”
“다, 단장님. 맞습니다, 단장님.”
“그래. 넌 그저 힘들어서 기절한 시늉을 한 것이다. 누가 시켰지?”
“예?”
“너는 절대 이런 짓을 할 아이가 아니니 누군가가 부추겼을 텐데 그게 누구냐는 말이다.”
데일이 에반의 말에 에반의 뒤쪽을 살짝 보았고 에반의 고개가 돌려졌다. 그곳에는 안색이 굳은 프타가 있었다. 에반이 그를 보며 말했다.
“너희 둘은 지금 날 기만하려 했다. 그 죄로 내가 알던 벌을 내리고 싶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벌을 받다가 죽을 것 같으니 오늘 밤새도록 그 자세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벌을 대신 하겠다.”
“으윽.”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를 흘렸던 데일은 에반이 바라보자 얼른 입을 다물었다.
“왜, 부족한가?”
“아닙니다.”
“그럼 열심히 해라.”
그때 집사가 연무장 안으로 들어왔다.
“에반 님.”
“응?”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쥬드가?”
“예.”
“그럼 가지.”
집사를 따라 쥬드를 만난 에반은 그의 얼굴을 보고는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슨 큰일이라도 난 건가?”
“예.”
“무슨 일이지?”
“팔로스 백작이 크라우스가에 영지전을 선포했습니다.”
“우리는 영지가 없지 않나? 게다가 이번 왕이 크라우스가를 위해 법까지 고쳤었다는 이야기를 너한테 들었었는데.”
“그렇기는 한데 저희가 아닌 영지를 가진 이들이 영지전을 걸 수는 있다고 합니다. 그것 때문에 왕실에 바로 연락을 취했더니 합법한 절차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뭐가 문제야?”
“예?”
“영지전이 일어났으면 막으면 되는 거 아닌가?”
“저희에게는 그럴 만한 병력이 없습니다. 기사의 수도 삼십 명가량이고 병사의 수는 채 천여 명밖에 없습니다. 그 병사들도 모두 자신의 마을을 지키는 자경대 수준이고요.”
“내가 배우기로는 전쟁은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니까 괜찮아.”
“그냥 그들을 치료해 주고 없었던 일로 하지요, 형님.”
“항복하자고?”
“예.”
“왜?”
“제가 다스리는 이들이 다치니까요.”
“흠.”
저번에도 말한 바와 같이 에반에게 삶과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생각이 멈추고 육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그건 소멸의 의미는 아니었다. 그 후 육체는 세상에 융화가 되어 더 큰 의미로 세상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그렇기에 그는 한 달 전 자신을 기습한 이들을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요 한 달간 많은 것이 바뀌었다.
분명 세상의 한 축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것보다는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삶을 살고 싶다는 욕구가 에반에게 완전히 자리를 잡은 것이다.
예전이라면 ‘그까짓 사람들이 죽어도 괜찮잖아.’라고 한 치의 생각도 없이 말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지금 에반이 고민을 하는 것이다.
고민을 하던 에반이 한참을 생각하다가 쥬드에게 물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너는 옳다고 보는 거냐?”
“예.”
“뭐, 네가 가주이니 네가 선택하는 거다. 네 말을 따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형님.”
크라우스 기사단의 위명을 떨치는 것보다는 쥬드의 부탁이 우선이었다.
다른 귀족들이라면 항복을 수치스럽다 여기겠지만 쥬드에게는 그의 그늘 아래 있는 사람들의 목숨이 명예보다 더욱 소중했다.
에반은 그걸 알아차렸고, 그의 의견대로 하기로 한 것이다.
그가 충성스럽고 강한 기사단을 만드는 것도 쥬드를 위해서였을 뿐이다. 언제나 제대로 된 가주의 권위를 내세우지 못하고 무언가 거대한 짐을 짊어지고 있는 쥬드를 위해 그의 든든한 아군을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크라우스 백작가는 쥬드의 말에 움직인다.
이게 에반이 원하는 그림이었다.
* * *
“항복을 하고 그들을 치료해 주는 선에서 마무리하자고 했다고?”
“예.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팔로스 백작은 방금 들은 보고로 인해 살짝 난처해졌다.
설마 크라우스 백작가가 바로 이렇게 굽히고 들어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어떻게 할까?”
“그냥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트레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그로서는 자신의 제자를 치료해 준다는 데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괜히 회의에 참석을 시켰군.’
이런 상황이 일어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기에 나트레를 회의에 참석시킨 것에 대해 괜히 자책을 했다.
하지만 곧 그런 생각은 없어지고 말았다. 나트레가 다음에 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만약 영주님이 크라우스가를 몰락시키고 싶으신 것이라면 그들을 치료하고 나서도 늦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좋습니다.”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일단 제 제자와 다친 이들을 치료하게 한 후 그를 억류시켜 놓고 명분을 다시 만들어도 된다는 소리입니다.”
“자네는 전쟁이 싫은 것이 아니었나?”
본래 나트레는 전투 마법사였다가 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은거를 했었다.
나중에 그의 스승의 부름으로 현 왕을 왕자일 때부터 지켰지만 그가 전쟁에 나서거나 그런 적은 없었다.
그것 때문에 예전부터 팔로스 백작과는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런 그가 이런 제안을 하니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저도 피를 보는 것은 싫지만, 복수라는 단어는 압니다. 제 제자를 저렇게 고통스럽게 했으니 그자 또한 그렇게 해야 하지요.”
“알았네.”
팔로스 백작이 나트레를 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