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장 (6/60)

제5장

시간은 아주 조용하고 빠르게 흘러갔다.

그 사건이 있은 뒤로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갔지만 크라우스 백작가는 조용했다.

그렇다고 변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가주 모르게 패악을 일삼던 데일이 저택에 틀어박혀 보이질 않았다. 쥬드가 데일을 감금시킨 것이다.

자신의 형이자 데일에게는 백부가 되는 사람을 죽이려 한 것은 물론이고, 그 사건을 조사하면서 쥬드가 밖에서 했던 일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쥬드는 정말 큰 배신감을 맛보고 있었다.

사실 일이 그렇게 심각하게 흘러가는 것을 보고 쥬드는 무언가 조치를 취하려 했었다.

하지만 데일이 일으키고 다닌 일에 연관된 이들이 너무 많고, 또한 그들 중 대부분이 가문의 기사들이라는 점에서 한 달 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팔로스 백작가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어서 오시오.”

“크라우스 백작님을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브레프 남작입니다.”

“음. 팔로스 영지의 기사단장이 여기까지 웬일이오?”

브레프 남작이라면 차기 소드 마스터라고도 불리는 기사였다.

팔로스 백작의 친우였던 이의 아들로 친우가 크라운 전쟁 중 죽자 팔로스 백작은 가족을 모두 잃은 그를 거두었다.

본래는 브레프 남작을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려 했었던 팔로스 백작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아들로 남고 싶다고 팔로스 백작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 당시 이미 두 아들의 아버지였던 팔로스 백작은 브레프 남작의 거절에 어쩔 수 없이 그를 자신의 아들로 입양하는 것을 포기했지만 후일 브레프 남작을 아들로 거두어들이지 못한 것에 많은 후회를 했다.

브레프 남작이 점점 자라면서 검술에 굉장한 소질이 있는, 아니 천재라고 불릴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고 수많은 명사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내리면서 왕국 내에 최연소 소드 마스터가 될 수도 있다는 말까지 나돌았기 때문이다.

브레프 남작은 팔로스 백작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그의 기사단을 맡고 있지만 언제인가는 떠날 사람이다.

만약 그가 자신의 아들이 되었다면 자신의 가문의 이름을 빛낼 사람이자 팔로스 백작가에 언제나 남아 있었을 사람이 되었을 것이기에 팔로스 백작은 후회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쥬드는 그런 이를 이곳에 보낸 팔로스 백작의 저의가 궁금했다.

“그것이…….”

브레프 남작은 직설적으로 물어오는 쥬드의 물음에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팔로스 백작가의 기사단장으로서 지금 끄집어내려는 이야기는 너무나 부끄러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결심을 한 듯 브레프 남작이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저번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기사들 때문입니다.”

“음? 그때 일은 이미 끝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잘못 안 것이오?”

칼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에반이 팔로스 백작의 기사들을 모조리 쓰러뜨렸다는 말에 쥬드는 그 사건의 정확한 정황을 파악했다.

다행히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것처럼 죽은 것은 아니었고 모두 제압만 당했다는 사실에 안도와 동시에 미소를 지은 쥬드는 그 당시 있었던 일을 팔로스 백작과의 서신으로 이야기를 끝냈다.

팔로스 백작의 입장에서도 시비를 걸기 위해 지안을 보냈고 어찌 보면 시비를 제대로 걸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곳에 있었던 기사만 여섯이었는데 그 여섯이 단 한사람에게 생채기도 입히지 못하고 제압을 당했다는 것은 정말로 수치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이 모두 인사불성으로 실려 왔을 때 팔로스 백작은 속으로 화를 삭이며 상방 간의 오해가 있었으니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자는 서신의 적힌 글에 동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 생겼고 어쩔 수 없이 브레프 남작을 보냈다.

그라면 아무리 쥬드 백작이라도 이야기를 들어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아닙니다. 그때의 일은 이미 주군께서도 잊어버리셨습니다. 다만…….”

또다시 말을 끄는 브레브 남작에게 쥬드가 물었다.

“제대로 이야기해 보게, 남작.”

아무리 브레프 남작이 왔다고 하더라도 팔로스 백작과는 사이가 좋을 수 없는 쥬드의 음성은 조금은 차가웠다.

‘좋은 이야기는 듣지 못하겠구나.’

브레브 남작은 크라우스 백작의 태도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지금은 자신이 굽힐 때였다.

브레프 남작이 마음을 먹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작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갑자기 일어난 브레프 남작 때문에 그 뒤에 시립해 있던 기사들이 긴장했지만 브레프 남작이 일어서자마자 고개를 숙이자 긴장을 풀고 눈을 살짝 치켜떴다.

브레프 남작의 자존심이 하늘을 찌른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인데 그가 자신의 주군의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쥬드 백작에게 고개를 숙이자 놀란 것이다.

“왜 이러나?”

그건 쥬드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브레프 남작이 설마 허리를 굽힐 줄을 몰랐기에 순간 당황한 쥬드가 일어서서 그의 상체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한 번 숙인 브레프 남작의 허리는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일단 무슨 일인지 이야기를 해야 도와주지 않겠나?”

도와주겠다는 소리가 쥬드의 입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그는 귀족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얼마나 중한지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함부로 약속 같은 건 하지 않았다.

브레프 남작도 그걸 깨달았는지 일단 허리를 펴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 브레프 남작을 보며 쥬드도 앉으며 말했다.

“그래. 그럼 이야기를 해보게.”

그때였다.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에반이 들어왔다.

“나 때문인가?”

“형님.”

쥬드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에반을 바라보았다.

팔로스 백작가에 가장 숨기고 싶은 사람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니 표정 관리를 못한 것이다.

브레프 백작은 거침없이 들어온 에반을 보며 놀랐다.

이미 에반이 크라우스 백작의 형이라는 것은 그 사건 이후 조사를 통해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십대로밖에 안 보이는 에반을 향해 사십대의 크라우스 백작이 형님이라고 하니 혼란이 온 것이다.

에반은 쥬드가 놀라건 말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그들 때문에 온 것인가?”

“그렇소.”

“흠. 신관이나 마법사들이 그들을 고칠 수 없었나 보네?”

“…….”

에반의 말에 브레프 백작이 입을 다물었다.

사실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기절을 했을 것이라 생각했던 기사와 병사들이었다.

그런데 그 중 파보라는 마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그의 스승이 팔로스 백작에게 보고를 했다.

분명 깨어는 있는데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백작가가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파보의 스승이자 5서클 마법사인 나트레가 먼저 나섰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날 때까지 아무런 차도가 없자 팔로스 백작은 어떨 수 없이 신관을 불렀다.

그러나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도저히 어떤 증상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이십 일 정도를 버리고 나서야 이걸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이렇게 만든 당사자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렇다고 아무나 크라우스 백작가로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 기나긴 회의가 끝나고 브레프 남작이 크라우스 백작가를 방문해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결론이 났고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브레프 남작이 있는 것이었다.

“대체 무슨 이야기입니까? 형님.”

쥬드는 자신이 알아듣지를 못할 소리를 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에반에게 물었다.

“괜히 시비를 걸어오는 놈들이 있어서 그놈들을 제압했는데 내가 한 금제를 풀 수 있는 이들이 아무도 없었던 것 같군.”

“음…….”

정확한 상황을 모르겠지만 한 달 전 일어난 사건으로 브레프 남작이 찾아왔다고 생각한 쥬드는 입을 다물고 에반을 보았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

에반은 쥬드의 시선을 받고는 그렇게 말하며 브레프 남작을 쳐다보았다.

그에 브레프 남작이 쥬드를 쳐다보았는데 그런 브레프 남작을 보며 쥬드가 말했다.

“아직 제대로 소개를 하지 않은 것 같군. 내 형님인 에반 크라우스네.”

“반갑소. 브레프 드 로토 남작이오.”

“에반이다.”

작위가 없긴 하지만 어차피 둘 다 귀족이다. 그리고 남작의 작위는 아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작위이기에 같은 귀족이라면 남작에게 존대를 해주는 일은 드물었다.

“형님과 이야기하게.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닌 것 같으니.”

브레프 남작은 굳어진 얼굴로 에반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제자 같은 이였다.

벌써 삼십대에 들어설 나이가 되는 브레프 남작은 자신이 이곳을 떠나면 기사단장 직을 잇게 할 후계로 지안을 찍었었다.

그가 익스퍼트 최상급의 기사이면서도 아직까지 남작의 작위에 머물러 있는 것은 그가 팔로스 백작의 곁에 있다는 이유가 컸다.

아무리 팔로스 백작이 현 국왕의 측근이라지만 세상일은 알 수 없는 것이기에 그 곁을 떠날 때까지는 제대로 된 작위를 받을 수 없게 많은 방해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브레프 남작도 자신의 가문을 부흥시키기 위해서 이제는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를 대신해 지안을 팔로스 백작의 곁에 있게 하려 했다.

그런 이가 갑자기 산송장이 되어 실려 왔으니 브레프 남작의 마음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그런데 지안을 그렇게 만든 이가 이렇게 젊어 보이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자 이상하게 투기가 치솟았다.

‘대체 어떤 짓을 한 것이지?’

몸이 움직이지 않은 지 얼마 후부터는 그나마 말은 할 수 있게 되었던 터라 그 당시 상황을 들을 수는 있었다.

다만 너무나 빠르게 제압을 당한 터라 자신들이 왜 누웠는지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브레프 남작이 에반을 바라만 보고 있을 때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그 시선에 약간 짜증이 난 에반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할 말이 없는 건가?”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린 브레프 남작이 황급히 말했다.

“아니오. 잠시 어떻게 말을 꺼낼지 생각을 했을 뿐이오.”

“그래? 그렇다면 이야기가 쉽겠군. 무엇을 주겠나?”

“무슨 말이오?”

뜬금없이 무언가를 내놓으라는 말에 브레프 남작이 물었다.

“설마 치료를 그냥 해달라는 말은 아니겠지?”

그렇다, 라고 대답이 튀어나오는 것을 간신히 막은 브레프 백작은 에반을 노려보았다.

“지금 일어난 일은 당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오.”

“난 시비를 걸어오는 놈들을 처리했을 뿐이다.”

“시비라니? 분명한 이유가 존재했소.”

“왜? 당신도 내가 흑마법사라고 생각하나? 그래서 내가 그때 그들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하려고 하나?”

“으음…….”

이번에도 그렇다, 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현 시점에서 에반의 신분은 크라우스 가문에서 가장 높다고도 할 수 있다. 가주의 형이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당신은 흑마법사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그건 크라우스 백작가를 모독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아무리 미래의 소드 마스터라고 하더라도 크라우스 백작가에서 그런 소리를 할 수는 없었다.

브레프 남작은 에반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일단은 그들을 제대로 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먼저였다.

“알겠소. 그럼 무엇이 필요하오?”

“크라우스 가문의 납골당으로 가는 길을 내준다면 고맙겠군.”

“지금 팔로스 가문의 영지를 달라는 말이오?”

순식간에 응접실이 긴장으로 가득 찼다. 브레프 백작의 기세가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에반은 태연했다.

“지금 이게 뭐하자는 거지?”

“당신이 내 화를 돋우고 있소. 계속 이렇게 나온다면 참지 않겠소.”

브레프 남작은 크라우스 백작에게 고개를 숙이는 건 참을 수 있었지만 에반에게까지 그러지는 못했다.

그는 너무 젊어 보였고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너무나 보기 싫었다.

“참지 않는다라. 쥬드, 어떻게 생각하는가?”

“저도 저의를 알 수 없군요.”

“그렇지? 한 가문의 가주가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기운을 이렇게 흘리다니 말이야.”

‘아차!’

그제야 이곳에 크라우스 백작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기세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내뿜었던 기세가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자신에게 허리를 굽힐 때만 해도 무엇이 문제이건 들어줄 수 있는 건 들어주자라는 생각을 하던 쥬드였지만 브레프 남작은 금세 선을 넘어버렸다.

브레프 남작은 자신이 왜 이렇게 쉽게 흥분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당황한 브래프 남작은 자신의 기세를 받고도 태연한 에반과 쥬드를 제대로 살펴볼 겨를이 없이 사과를 했다.

이미 주도권은 완전하게 에반에게 넘어와 있었다.

“지금 당신이 도를 넘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알고 있소.”

“부탁을 한 처지에 기운을 흘리며 협박을 하려 하다니 너무한 것 같은데.”

계속되는 에반의 비아냥에도 브레프 남작이 할 말은 없었다.

“…….”

“오늘은 이만 하지. 지금은 다른 말은 할 수 없겠군.”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에반을 쳐다보았던 브레프 남작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정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 * *

브레프 남작이 떠나간 후 쥬드가 에반을 찾았다.

“형님,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냥 죽이기 귀찮아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해놓았다.”

그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쥬드가 물었다.

“대체 그런 건 어디에서 배운 겁니까?”

“모르겠다. 삼십 년간 실험을 당했더니 내 지식이 아닌 것까지 섞여들어 왔다고 생각한다.”

“으음. 알겠습니다.”

그것 가지고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쥬드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걸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분명 자신의 형이었고 그렇기에 그가 하는 말은 믿자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미 이 가문을 이끌어오는 시간 동안 쥬드는 지쳐 있었다.

그가 감당하기에 크라우스 백작가는 괴물 같았고 그걸 자신의 아들에게 물려주지 말자는 이기심도 있었다.

그렇기에 에반이 돌아온 것을 공식적으로 알렸고 은밀히 그가 가주가 되게 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나저나 고민은 사라졌습니까?”

“고민? 무슨 고민?”

“훗! 형님께서는 고민이 생기면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방 안에서만 있었지 않습니까?”

“내가 그랬나?”

“예.”

에반은 쥬드의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아직까지 예전의 습관이 자신에게 남아 있다는 것이 즐거운 것이었다.

한 달 동안 방 안에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을 하던 에반은 한 달간의 고민보다 방금 브레브 백작과 쥬드와의 대화에서 실마리를 찾았다.

분명 브레브 백작을 화나게 한 것은 자신이 의도한 상황이었지만 선조의 납골당으로 가는 길을 돌려달라는 말에 화를 내는 것은 솔직히 크라우스 백작가를 우습게 본다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게다가 쥬드의 주름이 있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떻게 해서든 크라우스 백작가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또 뒤에서 뭐라 수군거리든 상관하지 않고 하나의 목표를 놓고 달려가다 보면 괜찮은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아무튼 브레프 남작이 다시 온다면 나를 불러라.”

“그들은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허락하지 않아도 괜찮다. 어떻게 해서든 받아낼 테니까.”

“게다가 이걸 빌미로 저희에게 시비를 걸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 시비는 받아주지. 오늘 브레프 남작을 보아라. 그가 무섭더냐?”

“무섭지 않군요.”

에반이 브레프 남작의 기세가 쥬드에게 가는 것을 어느 정도는 차단했기에 쥬드는 그가 기세를 뿜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거기에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래. 그는 무섭지 않아. 그런데 뭐가 문제지?”

“저희가 문제입니다, 형님.”

“어떤 점에서?”

“이런 말을 하면 부끄럽지만 솔직히 가문의 기사들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쥬드는 기사단장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기사들이 데일의 행동을 눈감아주고 자신의 귀에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며 여태껏 지냈다는 걸 설명했다.

“그게 가문의 기사들이 한 행동이라고?”

“예.”

그가 자신을 기습한 기사들을 모두 죽인 건 그들이 백작가에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설마 대부분이 그런 태도로 크라우스 백작가의 기사임을 자처했다는 건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쥬드, 네가 처리할 수 없는 일이냐?”

“좀 버겁습니다. 기사단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요.”

“그럼 내쫓아라.”

“그들이 나가겠습니까?”

“가주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그들은 어쩌면 제 아들을 가주 자리로 앉히려 할 수도 있습니다.”

“음.”

에반의 표정이 굳어졌다.

자신이 어릴 때 자라면서 보아왔던 크라우스 기사단은 정말 동경의 대상이었다.

언제나 자신의 아버지에게 충성하며 자신들에게는 친구 같지만 그럼에도 엄격한 느낌이 아스라이 에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가 알던 기사들은 모두 크라우스 백작가를 떠난 거냐?”

“예. 그들은 모두 왕실 소속이거나 은퇴를 했습니다.”

“은퇴한 이들은?”

“크라우스 백작가에 자리를 잡으면 안 된다는 왕명이 있었지요.”

“그렇군.”

“그럼 지금 있는 이들은 그 후에 들어온 기사들인가?”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물론 전에 있던 이들의 추천을 받아서 들어온 기사들도 존재합니다.”

“네가 말한 대부분의 기사들이 지금 크라우스 백작가를 망치고 있는 거구나.”

“예.”

“그래. 네 아들은 지금 어디 있지?”

“방에 감금을 시켜놓았습니다.”

“그를 데리고 와라. 그리고 기사단을 모이게 해라.”

“어쩌실 작정입니까?”

“일단 고름은 짜내야겠지. 그래야 주위가 썩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에반이 쥬드의 말을 끊었다.

“쥬드.”

“예, 형님.”

“넌 크라우스 기사단이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냐?”

“어찌 그들을 잊겠습니까?”

쥬드는 크라운 전쟁 때 그들이 싸우는 모습까지 지켜보았다.

자랑스러운 크라우스 기사단은 정말 무적처럼 보일 정도로 대단했고 그들은 충심으로 아버지를 모셨다.

또한 아버지의 명령에 불복한 이들을 빼고는 모두 왕실 소속이 되었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은퇴한 기사들은 크라우스 백작가에 뼈를 묻고 싶어했지만 그마저도 못하게 왕은 막았다.

그것이 십오 년 전의 일이었다.

그리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고 기억이 희미해질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때의 쥬드는 아버지의 곁에서 그의 영광을 지켜보았고 자신도 그렇게 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크라우스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는 자신이 보였다.

그러자 갑자기 에반이 미워 보였다.

그 영광과 오욕의 세월을 모르니 이렇게 손쉽게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는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형님, 그때와 지금은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많이 것이 바뀌었다면 다시 그걸 올바르게 바꿀 수도 있는 법이다.”

“말은 쉽지요.”

“그러니 내게 맡겨라.”

“예?”

“내게 모든 걸 맡겨라. 그리고 지켜봐라. 난 크라우스 백작가가 어느 정도의 위명을 떨쳤는지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더욱 그 시절이 어땠는지 느끼고 싶다. 그걸 내가 이루어주겠다.”

‘아버지.’

그렇게 말을 하는 에반에게서 쥬드는 아버지의 그림자를 보았다.

괜히 눈시울이 붉어지는 쥬드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한번 형님이 그렇게 만들어보십시오.”

“그러지.”

에반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 * *

“기사단장은 어디 있지?”

“지금 나올 겁니다.”

에반의 물음에 광택으로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떤 이는 흑색의 어떤 이는 회색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통일된 복장이 아닌 것이다. 그들이 크라우스 백작가의 기사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왼쪽 가슴에 새겨진 크라우스 백작가의 엠블럼밖에 없었다.

에반은 그들을 보며 분노를 느꼈지만 조용히 삭였다.

아직은 분노를 터뜨릴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기사단장이 들어왔다.

그의 옆에는 언제부터 감금되어 있었냐는 듯 아주 말끔한 데일이 서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들어올 때부터 에반이 서 있는 곳을 힐끔거리고 있었는데 데일로선 한 달 전 있었던 일로 에반의 그때 그 모습이 뇌리에 꽉 박혔고 그 모습 때문에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모두 모인 건가?”

“그렇습니다.”

에반의 옆에 있는 기사가 대답했다.

그는 언제나 쥬드의 호위를 맡고 있는 기사 중 하나였다. 또한 전 기사단장이 추천한 인물이기도 했다.

오십여 명의 기사들을 한번 훑어본 에반이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참의 침묵 후 한 기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모릅니다.”

“큭큭큭.”

“하하.”

그 대답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에반의 응징이 있었다.

퍽! 털썩.

장난으로 대답을 했던 기사가 갑자기 쓰러지자 기사들이 조용해지며 쓰러진 기사를 보았다.

대체 어떤 수법으로 기사를 쓰러뜨렸는지는 모르지만 에반이 손을 들자 기사가 쓰러졌으니 에반이 한 일이라는 건 짐작이 갔다.

조용해진 그들에게 에반이 태연히 말했다.

“크라우스 기사단의 기사이면서 나를 모른다니.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지. 그럼 다시 묻겠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가?”

“이게 무슨 짓입니까?”

이번에는 모른다는 대답 대신에 불만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으로 데일과 함께 온 기사단장이었다.

“자네는 이름이 무엇이지?”

“흥. 내 이름도 모르면서 자신을 모른다고 사람을 제압하다니 아무리 귀족이라도 기사에게 그럴 권리는 없소.”

“항명인가?”

“당신이 무엇인데 항명이 되는 것이오?”

“난 현 가주의 형이면서 크라우스 기사단의 새 단장이지.”

“그건 또 무슨 소리요?”

“오늘 기사단이 모인 건 그 때문이다. 내가 새 단장으로 취임하고 그대는 물러나기 때문에 이 자리가 마련 된 것이다. 데일도 못 들었는가?”

“듣지 못했습니다.”

데일이 고개를 가로젓는 것을 보며 에반이 다시 기사단장을 보며 물었다.

“이제 내가 왜 저 기사를 쓰러뜨렸는지 알았으니 다시 묻지. 자네 이름이 무엇인가?”

“그럴 수는 없다. 난 크라우스 기사단에서 십여 년 동안 단장직을 맡아온 사람이다. 나를 감히 잘라?”

그것이 전 기사단장의 실책이었다.

확!

에반의 신형이 불가사의할 정도로 빠르게 앞으로 쏘아지더니 기사단장의 앞에 내려섰다.

“헛!”

기사단장은 헛바람을 들이켜며 검을 뽑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그보다 에반의 손이 빨랐다. 검을 뽑으려는 기사단장의 오른손을 그대로 왼손으로 움켜쥔 것이다.

우두둑!

“으읏!”

기사단장이 고통 어린 신음을 흘리며 왼발을 들어올렸다.

어떻게 해서든 에반과 거리를 벌리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에반은 도리어 기사단장에 바싹 붙으며 이번에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옆구리로 다가오는 왼쪽 무릎을 그대로 쳤다.

그그극!

“으악!”

무릎에 차 있던 철보호대가 우그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보호대가 기사단장의 살 속으로 파고들어가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그러고는 에반이 슬쩍 기사단장의 오른발을 걸자 기사단장은 더는 서 있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그대로 쓰러졌다.

쿠웅!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공방은 그렇게 끝났다.

“끅! 끄윽!”

에반이 고통 어린 신음을 흘리는 기사단장의 눈을 바라보았다.

“크라우스 백작가는 그 충성심만큼 대우를 해준다. 그건 가문의 오래된 전통이지. 넌 그것을 배웠는가?”

하지만 기사단장은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그의 목을 누르는 에반의 발이 기사단장의 의식을 흐릿하게 만들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반도 대답을 들으려 한 것은 아닌 듯 자신이 할 말을 계속 이었다.

“난 그 말을 아주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랐다. 그리고 크라우스 기사단은 나의 동경의 대상이었지. 그때를 생각한다면 기사단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너 같은 건 사실 죽여도 마땅하다. 하지만 가주의 부탁에 따라 이 정도의 벌로 마무리하는 것이니 가주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더는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아라.”

그렇게 말을 한 에반이 발을 기사단장의 목에서 치웠다.

“컥! 컥!”

기사단장의 기침 소리만이 장내를 울리는 가운데 모두가 에반을 두려운 눈으로 보았다.

데일은 그 당시의 생각이 나는지 에반을 쳐다도 보지 못하고 한 기사의 뒤에 숨어 떨고만 있었다.

에반이 그들에게 말했다.

“여기서 내가 기사단장직을 맡는 데 반대를 표할 사람이 있는가?”

아무도 손을 들지 못했다.

크라우스가의 전면에 에반이 화려하게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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