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데일은 처음 낯선 청년을 쥬드가 데리고 왔을 때는 또 누구를 데려왔나 하는 생각을 했다.
쥬드는 언제나 아들의 교육을 철저히 했고 그만큼 많은 선생들이 데일을 거쳐 갔다. 그런 선생들을 데일은 교묘한 방법으로 그만두게 만들었는데 그런 와중에도 쥬드는 계속해서 데일을 가르칠 만한 선생을 데리고 왔다.
데일이 저택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이유 중 하나가 이 때문이기도 했다.
“제 아들인 데일이라 합니다.”
“데일이라 합니다.”
일단 데일은 겸손히 인사했다.
자신의 아버지 앞에서만큼은 그 안하무인의 성격을 감추고 있었다.
하지만 에반의 대답이 살짝 데일의 기분을 나쁘게 했다.
“그래. 반갑다.”
‘초반부터 반말이라. 뭐지?’
아무리 선생이라도 크라우스 백작자의 소가주를 담당해야 한다는 것은 꽤나 부담이 된다. 그렇기에 언제나 선생들은 데일을 보면 하대가 아닌 존대로 인사를 했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그것도 지금까지 본 그 누구보다도 더 젊은 선생이 자신에게 하대를 하자 당연히 기분이 상한 것이다.
“아. 예.”
약간은 떨떠름하며 데일이 대답을 할 때 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형님이시다. 이미 내가 한 이야기는 들었으리라 생각한다.”
아주 기쁜 듯 그를 소개하는 쥬드를 정말로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돌려 데일이 바라보았다.
“아버지, 지금 뭐라고……?”
“내 형님이라 했다. 왜, 뭐가 잘못되었느냐?”
“그것이…….”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다고 생각은 했지만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쥬드가 데일에게 다른 말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예상치 못한 일을 겪어 이렇게 젊은 모습이지만 분명한 내 형님이다. 그러니 넌 백부로서 모시도록 해라.”
“아……. 예. 알겠습니다, 아버지.”
데일이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방을 나가고 에반이 쥬드를 보았다.
“저 아이를 소개시키기 위해 온 것이냐?”
“아닙니다. 언제 크라우스 납골당에 가실지 물어보기 위해 온 것입니다. 제 아들을 보여준 것은 저택에 아들이 온 김에 한번 보여주려고요.”
그러면서 웃는 쥬드에게는 뿌듯한 감정이 얼굴에 담겨 있었다.
아직은 그런 감정을 잘 읽지 못하는 에반은 그냥 넘어가며 말했다.
“이제 가야지. 그런데 넌 너무 크게 일을 벌였더구나.”
“무슨 말입니까?”
“내가 돌아온 것을 알렸다면서?”
“예. 왜 안 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 말에 어제 켈베스가 찾아와서 한 말이 생각이 났다.
잘하면 가주 자리에 오를 수도 있다는 말을 하며 아부를 하던 그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내가 아무리 세상과 격리되어 살아왔다지만 눈이 있고 귀가 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넌 괜찮은 것이냐?”
쥬드는 에반의 물음에 진지한 눈으로 에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형님, 전 십오 년간 맞지도 않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 거추장스러운 옷은 언제라도 훌훌 털어버리고 싶은 것이 제 마음입니다.”
“내가 어제 들은 말로는 권력이란 혈육의 정도 무시하게 한다더구나.”
“형님!”
쥬드가 화가 났다는 듯 에반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난 그저 들은 이야기를 너에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고 말이야.”
에반은 어제 그 이야기를 하는 켈베스에게 물었었다.
권력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그리고 그는 권력이란 부와 명예를 가져다준다고 설명했다.
손가락으로 사람을 부리고 언제나 호화스러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이곳 백작가의 권력이라 말했다.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했던 에반도 오늘 아침 가져온 식사를 먹으며 깨달았다.
만약 자신이 이런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걸 말이다.
그제야 켈베스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한 에반은 지금 자신 때문에 크라우스 백작가의 상황이 꽤나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서 에반은 직설적으로 쥬드에게 물어보았고 쥬드는 화를 내었다.
쥬드가 진지한 눈으로 에반을 쳐다보며 지금까지 숨겨왔던 자시의 마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형님, 전 언제나 아버지의 유언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형님을 찾지 못한 것을 한으로 간직한 채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저더러 어떻게 해서든 형님을 찾으라 하셨습니다. 그 유언은 저에게는 커다란 짐이었습니다. 아직 한창 혈기가 왕성할 시절에는 제 가문을 보고 욕심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형님이 안 계신 지금이라면 이 큰 가문이 내 것이 되는구나라는 생각에 웃음이 나오기도 했고, 변해가는 자신을 보며 두렵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가 되고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알자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이 백작 가문을 겨우 이어나갈 수 있지만 그것이 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유언을 남기며 저에게 이 백작 가문을 맡기자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었는지 마음 깊숙이 깨달았습니다. 가주가 되고 나서야 제가 얼마나 유약한 사람인지 알게 된 겁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형님을 찾고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사 일 전 처음 응접실에서 형님을 보았을 때 그것이 형님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지만 틀림없이 형님의 혈육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기억의 형님의 모습과 닮았었으니까요.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이제야 내가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말입니다. 아마 그때가 가주가 된 후 가장 마음이 편해졌다라고 하면 이해하시겠습니까?”
잠시 에반을 바라보던 쥬드가 말을 이었다.
“형님, 저는 지금 덩치가 큰 혼자서는 절대 감당하지 못할 괴물 같은 이 가문을 필사적으로 넘기려고 하는 겁니다. 저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되지 않는 이곳을 말이죠.”
그렇게 말을 하는 그의 눈에는 슬픔과 부끄러움이 보였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오는 슬픔과 함께 그런 마음으로 에반을 본다는 부끄러움이 교차되고 있었던 것이다.
에반도 쥬드의 눈에서 그 감정을 읽었다.
복잡하지 않는 단순한 기쁨이나 슬픔 부끄러움 같은 감정은 에반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에반은 쥬드를 끌어안았다.
와락.
생겨나는 흰머리가 그리고 조금씩 보이는 얼굴의 주름이 쥬드는 절대 어린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에반에게는 눈을 빛내며 자신을 쳐다보는 어린 꼬마일 따름이었다.
“네가 많은 고생을 했구나.”
“형님…….”
쥬드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다가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의 품은 정말 따뜻했다.
* * *
쥬드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을 무렵 데일은 켈베스를 찾아가고 있었다.
에반을 데리고 온 것이 켈베스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켈베스!”
“무슨 일이오? 소가주?”
자신의 실험실에 무턱대고 들어오는 데일에게 살짝 인상을 쓰기 했지만 담담하게 묻는 켈베스였다.
이미 데일이 안하무인이라는 것을 아니 무슨 짓을 하더라도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는 내성이 생긴 것이다.
“켈베스가 에반이라는 작자를 데리고 왔다며?”
데일에게 에반은 백부가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들려 하는 나쁜 놈인 듯했다.
“그렇소.”
“켈베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그런 놈이 있으면 켈베스가 그전에 어떻게든 싹을 잘랐었어야지. 그런 놈을 가문으로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소.”
‘너 같으면 마족에게 달려들겠냐?’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담담하게 말했다.
“어쩔 수 없었다고?”
“그렇소.”
“왜? 네 마법 한 방이면 그냥 골로 가게 생겼더만.”
‘이 미친놈.’
데일은 사람을 죽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물론 켈베스가 그런 데일의 인성 때문에 속으로 욕을 퍼붓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진짜 에반을 공격했다가는 죽는 것은 고사하고 영혼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 영원히 고통받는 상상을 한 것이다.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떤 켈베스가 데일에게 말했다.
“그 사람의 몸은 마법이 통하지 않소.”
“뭐?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니 무슨 말이야?”
“낸들 알겠소? 내가 공격을 해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공격이 통하지 않았을 뿐이오. 그래서 그에게 굴복하고 백작가로 데려온 것이오.”
하지만 그 말에 데일은 더욱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게 무슨 말도 되지 않는 소리야? 혹시 우리 가문을 벗겨먹으려는 수작을 부리는 건가?”
“허! 이미 내가 소가주의 생각을 알고 소가주가 내 생각을 아는데 어떤 수작을 부린단 말이오? 그리고 가주께서 내 수작에 넘어올 정도로 호락호락한 사람도 아니잖소?”
“흥. 그런 것치고는 내가 한 일에 대한 소문은 잘도 막고 있잖아?”
“그거야 나는 조금 도와주는 것이고 대부분은 기사단장과 프타의 공이 더 크지. 난 그저 실험실에 박혀서 연구를 할 수 있는 돈만 있으면 되는 사람이오.”
물론 그것보다 더 큰 목적이 있긴 했지만 에반이 이곳으로 데려온 날 켈베스는 모든 것을 버렸다.
그 마족이 크라우스 백작가를 어떻게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자신은 그저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리라 이미 다짐을 했다.
“뭐?”
데일은 어이가 없었다. 켈베스의 여성 편력이라든지 그가 얼마나 돈을 좋아하는지를 아는 데일에게 지금 그가 하는 말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켈베스는 절박했다.
“그렇게 알고 나가주시오. 지금은 굉장히 중요한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오. 내 소가주께서 오실 줄 알고 실험실에 락을 걸지 않았던 것뿐이었지만 이제 내 생각을 전했으니 이 백작가에서 일어나는 일은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 알아주길 바라오.”
“어어?”
쾅!
데일이 켈베스의 말에 화를 낼 찰나 켈베스가 먼저 손을 써 데일을 실험실 밖으로 밀어버리더니 문을 닫았다.
데일이 매섭게 문을 바라보았지만 섣불리 문을 건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농을 던지고 자신과 어울리기는 하지만 일단 켈베스는 고서클의 마법사였다.
문에다 어떤 수작을 부려두었는지 솔직히 겁이 났다.
그렇기에 그저 노려보는 것만으로 자신의 감정을 전할 뿐이었다.
* * *
켈베스를 만난 후 더는 마법사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에 데일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에반을 처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데일이 에반을 처리하고 싶은 마음에 고민하고 있을 때 그 기회가 찾아왔다.
쥬드가 에반이 있는 자리에 자신을 부른 것이다.
“네가 가문의 납골당으로 네 백부를 안내해 드려라.”
“그곳으로 말입니까?”
“그래. 네 백부께서 꼭 가고 싶다고 하니 네가 조용히 안내해 갔다 오면 되겠다 싶어 그런 것이다. 무슨 다른 일이 있느냐?”
“아닙니다. 제가 그런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도 저택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또 내보내다니 미안하구나.”
“괜찮습니다. 아버지. 그럼 언제 출발하면 될까요?”
“네 백부께서 이미 준비를 마쳤으니 네가 준비가 된다면 바로 모셔서 가면 된다.”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빨리 준비하고 오겠습니다.”
에반은 데일이 나가면서 보여준 표정이 살짝 거슬렸다. 이상하게 자신의 기분을 좋지 않게 하는 표정 변화였다.
그래서 물었다.
“넌 왜 이상하게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거냐?”
“전 일을 복잡하게 만든 적이 없습니다.”
“그럼 왜 혼자 가도 될 것을 이렇게 번거롭게 만들려고 하지?”
“이건 형님을 번거롭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입니다만.”
“번거로워? 내가 번거로울 이유가 있나?”
“있습니다. 크라우스가의 납골당을 뺀 그곳 일대가 현재 본가의 권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에반의 물음에 쥬드가 한숨을 쉬며 지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크라우스 백작가는 본래 오래전부터 국영지 안의 땅을 다스리고 있었다.
비록 정식 영지보다는 못할지언정 마을 네 개와 소도시 하나를 가지고 있으니 크다면 크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주위가 모두 국영지인 탓에 영지전이 일어날 염려도 없었고 세금이 비싼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십오 년 전 일어난 내전으로 인해 새롭게 급부상한 귀족이 생기면서 문제가 생겼다. 땅은 한정이 되어 있었고, 그들에게 마땅히 줄 땅이 없었던 것이다.
폰다 왕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꽤 많은 땅을 확보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 이유는 내전이 일어나 한 세력이 승리하면 본래 그 세력을 빼고는 모두 숙청을 당하는 것이 보통의 내전의 형태였다. 죽이지는 않더라도 영지를 빼앗아 버리는 것이 관례인데 이번 내전은 마지막이 너무나 흐지부지했다.
크라우스 백작가의 눈치를 보느라 세 왕자의 세력은 처절한 전투가 아닌 대리인을 내세워 소규모의 전투를 했고 이긴 세력이 진 세력을 고스란히 흡수하며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썼다.
싸움의 양상이 이렇다 보니 일왕자와 삼왕자는 전쟁에서 졌는데도 귀족들 중 전쟁에서 진 귀족은 별로 없었다.
본래의 세력에서 끌려 나와 강제로 이왕자의 세력에 합쳐지면서 명목상으로 그들도 승리의 주역이 된 탓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땅은 모자랐고 땅을 줄 귀족들은 넘쳐났다.
그래서 루드 왕은 국영지의 반을 귀족들에게 주었는데 그 중 크라우스 백작가가 교묘하게 걸쳐버린 것이다.
이제는 국영지가 아닌 팔로스 백작의 영지 안에 있는 땅이지만 크라우스 백작의 땅이기도 했다.
아마 루드 왕은 그걸 염두에 두고 충신인 팔로스 백작에게 크라우스 백작의 땅이 포함된 영지를 주었을 것이라 쥬드는 생각했다.
“이렇게 되어서 가문의 권역과 약간 떨어져 있는 납골당을 가려면 팔로스 백작의 영지를 지나가게 되어버렸습니다. 평소에도 그쪽에서 우리 가문이 납골당을 가려면 마찰이 좀 있어 형님 혼자서 가기에는 힘들 것이라 보고 제 아들을 같이 보내는 겁니다.”
“알았다.”
에반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려는 생각으로 동생에게 말했던 에반은 일이 커지고 사람들이 많아져 오후가 되어서야 출발을 할 수 있었다.
병사 다섯과 기사 셋 그리고 데일이 에반의 안내를 맡았다. 거기다 그들의 시중을 들어줄 하인들까지 합세하니 스무 명가량이 되었다.
에반은 사람들이 늘어난 것은 개의치 않았지만 생글거리며 웃는 데일의 모습은 눈에 거슬렸다.
‘마음에 안 들어.’
이 세계로 넘어오느라 힘을 쓴 까닭에 현재 공격이나 차원을 넘나드는 쪽으로 공무를 쓰지 못하더라도 그의 힘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공무는 공간과 시간을 지배하는 힘이다.
에반이 이제 갓 소성을 이루었다지만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주위의 공간을 장악하고 활용할 수 있다.
아직 자신의 스승처럼 자신의 공간 안에 있는 생물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니라도 자신의 공간 안에 들어온 사람이 무슨 감정은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비록 에반이 너무나 격리된 생활을 하여 아는 감정이 한정이 되었더라도 나쁜 생각을 한다는 것과 좋은 생각을 한다는 것 정도는 구별할 수 있었다.
이 세계로 넘어와 켈베스를 만났을 때에 그의 말에 따른 것도 그가 좋은 방향으로 상황을 이끌어 가려 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잠자코 그의 말에 따라 거짓말을 한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최근에 깨달은 걱정한다라는 감정을 쥬드가 자신을 향해 풍기고 있었기에 그의 말에 따라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같이 갈 생각을 한 에반이었다.
그런 능력을 지닌 에반이니 쥬드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데일이 나쁜 마음을 가진 것은 물론 자신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도 이렇게 겉으로는 정중하게 자신을 대하니 그 겉 다르고 속 다른 데일의 모습이 에반의 심기를 계속 자극하고 있었다.
만약 적의만을 가지고 겉으로 적의를 표출한다면 그냥 웃으며 넘어갈 수 있었다.
어차피 자신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다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속마음을 숨기며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그의 빌어먹을 스승을 떠올리게 했기에 에반은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반이 데일을 보며 그를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고 있는 와중에 드디어 납골당으로 가는 일행이 출발을 했다.
데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한 번의 위기를 넘긴 것이다.
* * *
스무 명가량의 사람들이 천천히 걷고 있었다.
짐은 모두 말에 매여 있으니 힘든 건 없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불만이었다.
모두가 탈 수 있는 마차를 마련한다는 말에도 그걸 거절하고 그 길을 굳이 걸어간 에반 때문이었다.
“좋군.”
에반이 주위의 풍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오랜 시간 동안을 한곳에서만 살아온 에반으로서는 이렇게 걸으며 보는 모든 풍경들이 신기하고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이런 감정을 가진 것도 에반은 새삼스러웠다.
‘정말 많은 감정을 느끼는구나.’
에반도 어릴 적에는 수많은 감정들을 자신의 사부 앞에서 쏟아내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오직 한 공간, 한 사람과 살아가면서 감정이 메마르고 생각조차 메말랐다.
인간이라면 그런 상황 속에서 당연히 미칠 수밖에 없지만 그 단계를 사부로 인해 그냥 벗어나버리고는 혼자 고요하게 세계를 바라볼 수 있는 단계에 들면서 에반은 감정을 잊어버렸었다.
두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낄 수 있는 몇 가지 감정을 빼고는 모두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 세계로 넘어와서 단 오 일 만에 정말 많은 감정들을 느끼고 깨달았다. 처음에는 자신의 머리로 거침없이 밀려들어오는 감정의 홍수에 당황도 했지만 이내 그걸 모두 받아들였다.
어차피 자신의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거라는 걸 에반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에는 자신의 안으로 스며든 감정들을 차근차근 자신의 것으로 배우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느껴지는 여러 사람의 짜증도 기분 나쁘지 않게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는 에반이었다.
“에반 님.”
“응?”
“여기서 잠시 쉬었으면 합니다.”
“그러지.”
자신을 프로테라고 소개한 기사의 말에 에반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람들이 능수능란하게 쉴 자리를 만들었다.
마차로 한나절 만에 갈 수 있는 거리를 걷다 보니 어제 오후에 출발했던 에반 일행은 이틀의 예정으로 갈 수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 한 시간마다 한 번씩 쉬어 가자 이제는 아주 능숙하게 자리를 만들고 능숙하게 자신의 자리를 찾아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에반은 자신이 쉴 곳이 마련되자 그 자리에 앉아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계속 비슷한 풍경이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에반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는 까닭이었다.
데일은 그런 에반의 눈치를 보다가 기사들이 있는 곳으로 조용히 움직였다.
에반의 시선이 닿지 않은 곳에 자연스레 데일과 세 명의 기사가 모였고 데일이 기사들에게 조용히 물었다.
“연락이 왔다고?”
“예. 소가주님. 여기에서 얼마 안 되는 거리에 매복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 그나저나 계획은 다 세워 놓았나?”
“예? 계획이라니요?”
“설마 기습을 해서 저 작자만 죽이고 도망가려는 생각은 아니지?”
그 말에 기사들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들이 세워놓은 계획이기 때문이다.
데일은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다가 말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저 작자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야 가장 자연스레 처리할 수 있는가야. 무슨 뜻인지 이해가 돼?”
한바탕 욕이라도 퍼붓고 싶지만 일단 이들을 믿고 일을 진행해야 하기에 화를 참으며 조용한 어조로 말하는 데일이었다.
그리고 데일의 설명에 기사들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빨리 연락해. 대충 하인들 몇 명도 같이 죽고 병사들이나 너희들도 상처를 입는다면 완벽해질 거야. 알았지?”
“알겠습니다, 소가주님.”
* * *
소리는 한곳에 머물지 않고 공중으로 퍼진다.
그렇게 퍼진 소리는 점점 파장은 미약해지고 이내 사라지는데 에반은 자신이 구축한 공간의 영역에 들어온 미약한 소리들을 본래대로 복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 조용하게 대화를 나눈다지만 에반은 그 옆에 있는 듯 생생하게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권력은 혈육의 정도 무시한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군.’
이틀 전 켈베스가 자신을 찾아와서 한 말이 자신의 조카에게는 적용이 된다는 점이 에반의 입 안을 껄끄럽게 만들었다.
‘이게 씁쓸함이라는 건가?’
또 하나의 감정을 제대로 느끼며 피식 웃으며 에반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명색이 백부인데 저 작자라고 표현하다니 정말 버릇이 없는 것 같구나.”
데일이 자신에게 그런 호칭을 쓰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에반이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해야 할까?”
이미 출발하기 전부터 데일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에반이었기에 저들이 자신을 죽이는 공모를 한다는 것 자체에는 별로 감흥이 없었다. 다만 가족을 가족으로 대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죽이려고 하는 데일에 대한 씁쓸함과 함께 그를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 고민을 했다.
그때 한 병사가 에반에게 다가왔다.
“이제 출발을 하려 합니다.”
“그래?”
에반이 병사의 말에 일어나자 병사는 자리를 떴고 잠시 부산스러워지더니 곧 출발 준비가 되었다.
쉬기 전까지만 해도 호위랍시고 에반의 주위에 얼쩡거렸는데 이제는 그런 것이 사라지고 살짝 떨어져 걸어가는 기사들이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기습을 받게 하고 어떻게 해서든 우연을 가장하여 자신을 죽게 놔두는 것이 저들의 목적인 것 같았다.
그리고 에반은 그들을 보며 저들과 자신을 공격할 이들을 살려둘 필요가 없다 느꼈다.
사실 지금까지도 에반으로서는 많은 양보를 한 것이다.
자신의 사부에게 배우기로는 만약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하는 적이 있다면 미리 그 위험을 없애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하였다.
만약 자신의 가문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음모를 꾸민 기사들은 이미 산목숨이 아니었을 거였다.
에반은 세상의 진리를 엿본 자였다.
탄생과 소멸이 둘이 아니며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계속해서 그 형태를 바꿀 뿐 순환을 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죽음이라는 것에 두려움이 없었으며 죽음을 내리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는 에반이었다.
그가 마음속에서 결정을 내렸을 즈음 숲 속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매복을 하고 있는 곳에 다다른 것이다.
‘우선 저들부터.’
에반이 그렇게 생각하며 사람들과 살짝 떨어졌다.
자신을 공격하기 쉽게 해주려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매복해 있던 적들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슈슈슉!
먼저 화살이 에반에게로 매섭게 날아들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이었지만 에반은 아주 쉽게 화살 세례를 피하며 숲을 노려보았다.
매복해 있던 적들은 화살 공격을 너무나 손쉽게 피한 에반 때문에 당황하여 나갈 타이밍을 놓쳤다.
화살을 퍼부은 이유는 그 화살을 맞아서 죽이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부상을 유발시켜 자연스럽게 죽이려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정을 하고 날린 화살을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피하자 매복해 있던 적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데일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그래도 상황 판단이 빨랐다.
데일이 소리쳤다.
“적이다. 기사와 병사들은 일행을 보호하라!”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린 것은 일행들뿐 아니었다. 잠시 당황을 하며 어떻게 할지 정하지 못하던 습격자들도 일제히 숲 밖으로 튀어나왔다.
총 열 명의 습격자들 중 세 명만 기사와 병사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일곱이 에반을 공격했다.
쉬익!
에반을 공격한 습격자는 에반을 분명 죽일 수 있을 거라 확신했지만 그건 그의 바람일 뿐이었다.
깡!
쇠와 쇠가 부딪치는 금속성이 울리면서 습격자가 물러났다.
습격자들은 어리둥절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 빈손이었던 에반의 손에 하나의 검이 들려 있었던 탓이다.
“어떻게?”
이해할 수 없는 일에 습격자가 자신도 모르게 에반에게 물었지만 에반은 그에 답하는 대신 그에게 접근했다.
“어헉!”
갑자기 자신의 앞에 나타난 에반 때문에 놀란 습격자가 황급히 검을 휘둘렀지만 에반은 그 공격을 유유히 피하며 왼손으로 습격자의 목을 움켜쥐었다.
우드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습격자의 머리가 꺾였다. 그대로 즉사를 한 것이다.
에반을 둘러싸고 있던 나머지 여섯 명의 습격자들은 설마 이렇게 쉽게 자신의 동료가 죽을지는 몰랐다는 듯 멈칫했다.
그 순간 에반이 파고들었다.
오른손으로는 습격자들을 베고 왼손으로는 그들의 몸을 두드렸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 에반에게 몰려들었던 습격자들이 모조리 바닥에 누웠다.
갑자기 화살이 날아온 후 데일이 주위를 환기시키고 습격자들이 에반에게 쓰러지는 것은 정말로 한순간이었다.
너무나 엄청난 광경에 기사와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던 세 명의 습격자들조차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주위에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정적이 일었다.
에반이 손을 들었다.
“처리 안 하나?”
그 말에도 기사들은 우물쭈물했다.
본래 계획은 에반을 죽이면 기사들을 공격했던 습격자들을 자연스레 퇴장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이렇게 에반이 습격자 일곱 명을 쓰러뜨리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내가 하지.”
그렇게 말한 순간 에반은 이미 기사들과 습격자들이 싸우던 곳에 와 있었다. 에반이 오른손을 몇 번 휘두르자 몸이 굳어 있던 습격자들이 모두 쓰러졌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에반이 자신의 옆에 있는 병사에게 물었다.
“적들을 모두 쓰러뜨리면 어떻게 처리하나?”
“어, 어떻게 처리를 하다니요?”
병사는 에반의 말을 일순간 알아듣지 못하고 반문했고 동시에 얼굴이 새하얘졌다.
순식간에 습격자들을 쓰러뜨리는 무위를 보인 이에게 반문을 하는 불경스런 태도를 자신이 취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병사의 얼굴이 새하얘지건 말건 에반은 개의치 않고 다시 말했다.
“저들을 그냥 저 상태로 내버려둬도 괜찮냐고 물어본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바로 이동하자.”
그제야 에반이 무엇을 묻고 있는지를 깨달은 병사가 급히 말했다.
“죽은 자들은 묻고 살아 있는 자들은 결박해서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실토를 하게 만들면 됩니다.”
“그렇다면 모두 묻고 가자.”
“예?”
에반의 말에 병사가 또다시 반문했다.
그리고 그 병사의 얼굴은 정말로 새파랗게 질렸다. 한번 한 실수를 또 되풀이해서 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에반은 병사의 그런 행동에 그리 상관하지 않고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설명했다.
“모두 죽었으니 묻고 출발하자는 말이다.”
그 말에 반응을 한 것은 기사들이었다. 특히 그 중에서 프로테의 안색이 변했다.
에반의 말에 세 명의 기사들은 급히 습격자들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숨을 쉬는지 쉬지 않는지를 확인하고 심장에 귀를 대어본 후 그제야 습격자들 중 아무도 살아 있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에반을 돌아보았다.
“왜? 무슨 문제가 있는가?”
에반은 세 기사가 자신을 쳐다보자 태연히 물었고 그에 프로테가 눈이 뒤집혀 에반을 공격했다.
“죽어!”
탓!
이미 검은 뽑혀 있는 상태였기에 그대로 허리를 동강낼 듯 매섭게 휘두른 일격이었지만 에반은 자신의 검으로 다가오는 검의 검면을 막아 프로테의 손에서 검을 놓치게 했다.
그러고는 그의 목에 검을 대고 물었다.
“이들의 정체를 아는가?”
“그래, 이 자식아!”
“누구지?”
“이들은…….”
프로테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던 기사 한 명이 그대로 프로테의 등을 찔렀다.
더 말하면 자신들이 꾸민 음모가 드러날 것 같자 입을 다물게 할 심산에서였다.
하지만 그 공격도 결과적으로는 무위로 돌아갔다.
에반이 프로테의 등 뒤로 다가오는 검을 보고는 그대로 프로테를 쳐서 옆으로 이동시켜 버린 것이다.
서 있는 사람이 미끄러지듯 옆으로 이동하는 장면은 눈으로 보고도 신기했지만 그것보다는 기사가 같은 기사를 공격했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안색이 변하며 뒤로 물러났다.
습격자들과 기사들 사이에 자신들이 모르는 뭔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사이 에반은 찔러 들어온 검의 끝을 잡고는 그대로 당겨 프로테를 죽이려 했던 기사를 자신의 앞에 오게 하더니 자연스럽게 검을 빼앗아 뒤로 던지고는 물었다.
“너도 관여가 되어 있는 건가?”
잠시 상황을 이해 못하고 어리둥절하던 기사가 어떻게 된 일인지를 깨닫고는 안색이 변하여 소리쳤다.
“아, 아닙니다. 적이 내부에도 있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급조한 변명치고는 꽤나 그럴듯했지만 이미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에반은 그를 더욱 추궁했다.
“정말 없는가? 나는 지금 일어난 일은 그냥 넘길 생각은 없다. 가문으로 돌아가는 즉시 이번 일을 가주에게 말해 공론화시킬 것이다.”
그 말에 기사들이 움찔했다.
그건 데일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살짝 눈을 굴리던 데일이 눈을 번뜩이더니 에반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당연히 그래야죠, 백부. 크라우스 가문의 행사를 방해한 자들을 찾아야 하죠. 암요. 저희가 어떤 가문인데요.”
데일이 그렇게 말하며 다가와도 에반은 쳐다보지 않았다. 계속 프로테와 프로테를 찌르려던 기사만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에반이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데일은 소매 속에서 슬며시 단검을 꺼내더니 그대로 에반을 찔렀다.
‘죽어라!’
지금껏 데일은 살인을 해본 적은 없다.
언젠가는 한 번 해봐야지 생각하면서도 마땅히 기회도 없었고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지금 기회가 왔고 꺼려지는 것도 없었다.
아주 자연스레 에반을 찌르면서 살 속으로 들어가는 파육음을 생각하며 웃던 데일은 분명 깊숙이 찔렀는데 찌른 느낌이 들지 않자 당황했다.
“어?”
자신도 모르게 데일이 의문을 토하며 자신의 손을 보았고 자신이 들고 있던 단검이 손 안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에반이 뒤로 돌아서며 말했다.
“이걸 찾나?”
어느새 에반의 손에 들려 있는 자신의 단검을 보고 데일은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인지하지도 못하는 사이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빼앗겼다는 데에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두려움은 사람의 생각을 마비시키고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게 한다.
지금까지 두려움을 모르고 자란 데일은 더욱 그러했다.
“이, 이 새끼를 죽여!”
데일은 사람들이 듣든 말든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기사들은 데일의 외침에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그의 명령을 따랐다.
어차피 여기에서 에반과 에반을 죽이려 했다는 비밀을 아는 병사들과 하인들을 모두 죽이지 않는다면 자신들이 크라우스가에게 죽을 상황인 것이다.
먼저 검을 빼앗긴 기사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자신이 에반의 몸을 붙잡아 못 움직이게 한 다음 다른 기사들이 에반을 찌를 수 있게 하려고 몸을 날린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계획은 에반의 한마디에 무산되었다.
“그만.”
단 한마디였을 뿐인데도 다가들던 그의 몸이 정말로 멈췄다.
그리고 뒤를 이어 멍하니 있다가 데일의 말에 에반에게 달려든 프로테가 몸을 멈추었다.
두 사람이 에반에게 달려드는 자세로 멈춰 있는 기괴한 광경 때문에 도리어 이 상황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그런 생각이 마지막 남은 기사가 에반에게 달려들 수 있는 힘을 주었다.
하지만 곧 세 번째 기사는 에반의 손에 들린 단검에 자신의 검이 관통당하는 장면을 보았다.
‘신검인가?’
세 번째 기사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기사의 검에 단검을 꽂아 넣은 에반은 그대로 단검을 뒤로 당겼고 세 번째 기사마저 검을 빼앗겼다.
그리고 뒤로 신형을 돌린 에반이 데일을 바라보았다.
“으으으!”
데일은 정말로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그저 에반이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공포를 느꼈다.
데일이 느끼는 권력이라는 것은 기사들에게 나오는 것이었다.
언제나 자신을 보좌하는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에게 명령하면 어떠한 일들이라도 그들이 해내기에 그들만 있다면 자신은 신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낀다.
그런데 그런 기사들이 한순간 모두 당해버리자 데일은 패닉 상태에 빠져버렸다.
권력을 유지해 주는 도구가 사라진 것이다.
“넌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인 거냐?”
“무, 무슨?”
“왜 날 죽이려 했는가 궁금하다는 뜻이다.”
에반은 동생이 슬퍼할 것 같아 차마 데일에게 손을 쓰지 못했다.
그들의 계획을 알고도 에반이 움직이지 않은 것은 데일이라는 존재가 에반을 망설이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에반은 일단 데일이 왜 이번 일을 꾸몄는가에 대해 궁금증을 풀기로 했다.
데일은 에반의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떨림이 멈추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다 너 때문이야!”
“난 네 백부다. 말을 함부로 하지는 말아라.”
“흥! 백부? 네가 네 백부란 말이냐? 지금 네 모습을 봐라. 그게 어떻게 내 아버지보다 더 나이를 먹은 사람의 모습이냔 말이냐. 난 널 인정할 수 없어. 그리고 너를 인정하는 아버지 또한 인정할 수 없어.”
데일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에반은 그런 데일을 잠시 보고 있다가 머리를 살짝 건드렸다.
“자고 있어라.”
털썩!
쓰러진 데일을 놔두고 신형을 돌린 에반이 아직도 멈춰져 있는 세 사람을 보았다.
그들을 잠시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던 에반은 마음속에 옅게 일었던 분노나 흥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들 또한 데일처럼 잠재워 버렸다.
그제야 뒤로 물러났던 병사들과 하인들이 에반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에반이 없다면 자신들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자신의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에반이 말했다.
“출발하자.”
에반이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출발을 하자고 하자 다들 멍하니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병사 한 명이 물었다.
“이분들은 어떻게 하고 출발을 합니까?”
“알아서 가문으로 돌아가든지 말든지 하겠지. 이제 내 상관 할 바가 아니다.”
그 말에 사람들은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머뭇거렸다.
그냥 갈 수는 없는 노릇인데 그렇다고 에반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용기 있는 자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계속해서 에반과 대화를 했던 병사가 나섰다. 만약 이대로 간다면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있는 용기 없는 용기를 쥐어짜 낸 것이다.
“에반 님, 이렇게 갈 수는 없습니다.”
“응? 어째서?”
“저분들이 만약 깨어나 가문으로 돌아가서 사건을 조작한다면 에반 님뿐 아니라 저희까지 죽습니다.”
“예, 맞습니다.”
“에반 님, 제발 살려주세요.”
하인들이 엎드리며 자신들을 살려 달라 외쳤다.
‘이놈들이 가문으로 돌아가면 왜 죽는다고 하는 거지?’
에반은 저들의 절박한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만약 데일이 가문으로 가 자신을 해코지라도 하려고 음모를 꾸민다 하더라도 이미 데일이 한 일은 여기에 있는 이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
병사들과 하인들이 알고 자신이 알고 있는데 무엇이 걱정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물었다.
“너희가 왜 죽는다는 거냐?”
“예?”
“난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 지금 너희들이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데 어째서 너희들이 죽는다는 건지 모르겠다.”
“그, 그거야 사람들은 소가주님의 말을 믿지, 저희들의 말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뭐?”
에반은 병사의 말에 확실히 기분이 상했다.
크라우스 가문은 절대 그렇게 허술한 가문이 아니다.
그의 아버지 루크 크라우스 백작은 모든 일을 공정하게 처리했다.
기사가 잘못을 했으면 그 기사가, 자신의 가신이 잘못을 했으면 그 가신이 벌을 받았다.
만약 그 와중에 죄를 뒤집어씌운 흔적이 나온다면 그 사람은 바로 벌을 받고 가문의 권역 내에서 축출을 당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크라우스 백작가를 칭송한다.
에반이 일곱 살 때쯤 아버지가 아끼던 물건을 부순 것을 숨기려다가 걸려 혼날 때 그 당시 집사가 해준 이야기였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자신의 가문을 믿지 못하고 자신들이 죽을 거라 외치니 에반의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너희들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에반의 물음에 애원을 하던 모두가 입을 다물고는 눈치를 보았다.
에반은 오히려 그런 모습에서 백작가와 그곳에서 일하는 이들의 거리감을 느꼈다.
자신이 어렸을 적만 해도 하인들을 기사들이라고 해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이 잘못한 점이 있으면 하인들이 조용히 타이르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점이 현재의 크라우스가에는 없었다.
자신을 보아도 황급히 피하는 것은 물론이고 여기까지 오면서 데일과 기사들이 하인들과 대화를 하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이미 예전과 같은 소통은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그제야 평소대로 돌아온 에반이 자신을 붙잡았던 병사에게 물었다.
“네 이름은?”
“카, 칼입니다.”
“그래. 칼. 그렇다면 넌 어떻게 하면 좋겠나? 이들을 데리고 납골당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나?”
“아, 아닙니다.”
“그럼?”
“지금은 우선 저택으로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저택? 여기까지 와서 다시 돌아가자고?”
“그, 그것이…….”
칼은 귀찮은 듯한 음성으로 자신에게 묻는 에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말 모르는 건가?’
현재 일어난 일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혈족을 가문의 기사들을 이용해 죽이려 한 패륜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도 에반은 처음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의 표정을 짓고 있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을 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인 것이다.
이미 가주의 형이 이렇게 젊어 보이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지만 일단 가주가 인정한 이상 이 사람은 가주의 형이었고 고용인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래도 지금 같은 상황이 일어나고 보니 에반이라는 사람이 이상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에반이 다시 자신에게 물었다.
“왜 돌아가야 하는지 정확히 말해라. 만약 타당한 이유라면 돌아가지.”
그 말에 칼은 침을 한 번 삼키더니 자신이 머리를 굴려 이야기를 했다.
“제, 제가 아무리 배운 것 없는 사람이라지만 조카가 백부를 죽이려 하는 것은 아주 큰일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큰일이라고? 난 죽지도 다치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큰일이 될 수 있지?”
그 말에 칼이 혼란스러워했다.
정말로 담담하게 에반이 자신에게는 아무런 일도 없다고 하자 정말로 아무런 일이 아닌가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귀족의 생리를 생각해 내고는 다급히 말했다.
“에반 님께서 아무리 상처도 없이 저들을 제압했다고 하지만 일단 저들이 일을 저지른 것은 확실합니다. 이건 가문의 법으로 처리할 일입니다. 그러니 에반 님이 납골당으로 가는 문제보다 더 우선시돼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문의 일이라…….”
사실 칼이 크라우스의 가문의 법이 무엇인지 알 리가 없었다.
그래도 이 패륜이 에반이 납골당으로 가는 일보다는 중요하고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목숨이 달려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떻게 하든 말을 짜 맞추려 노력하는 칼이었다.
그런 칼의 진심이 통했는지 에반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다.
“너희들도 같은 생각인가?”
“예. 에반 님.”
“같은 생각입니다.”
그들의 말에 에반은 납골당까지 반나절의 거리를 두고 다시 가문으로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