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8 그녀의 요상한 판타지 (完) =========================================================================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굳어진 수화의 시선을 따라 성준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종현이었다.
"어…? 아, 그냥……" 종현의 말에 대답을 하려던 수화는 순간 굳어지고 말았다.
수화의 눈 앞에는 솔아를 가슴 가득 안고 있는 성준의 모습이 보였다.
'하성준…… 설마… 너… 나 보란듯이 그러는거니…? 정말… 유치하고… 잔인하다… 오늘 아침까지만해도 믿어달라고 했으면서……' 굳어있던 수화는 이내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수화의 눈에는 성준이 그저 질투심 유발을 하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동안 수화는 성준을 다른 남자들과는 다르게 성숙하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저렇게 유치하게 자신의 관심을 끌려고 애쓰는 성준을 보며 그간의 자존심이 모조리 무너져내리는 수화였다.
'…내가 저렇게 미성숙한 남자를 믿고 또 설렜었다니…… 하성준… 하지만 나…… 더 이상 예전에 바보같던 그 한수화가 아냐. 날 배신한 남자에게 또 버림받는 그런 약한 여자 아니라구……!!!'
수화는 조심스레 종현에게 팔짱을 꼈다. 그러자 당황하며 얼굴이 붉어지는 종현이었다.
"수… 수화야……"
"가자… 나… 배고파…." 조금 불편한 듯한 표정의 수화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어… 그래… 빨리 가자." 이내 감동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을 하고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종현이었다.
***
솔아를 가슴에 품은 채 옆에 있던 남자와 팔짱을 끼고 병원을 나서는 수화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는 성준.
"…성준아…." 성준의 품안에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솔아.
"이제 좀 괜찮아? 너 그래가지고 집에 갈 수 있겠어?" 이내 솔아를 품에서 밀어내는 냉정한 표정의 성준.
"…응… 나… 이제 괜찮아졌어……." 조금 아쉬운 듯한 표정이지만 그래도 감동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미소짓는 솔아.
"야… 너네 둘… 방금 그거 뭐냐? 설마… 내가 자고 있을 때… 뭔 일 일어났던 거 아니지? 그린라이트 켜진거냐?" 현승이 언제 술에 취했냐는 듯 눈을 번쩍이며 둘에게 물었다.
"장현승. 그런 거 아니거든?" 성준을 지켜내기위해 괜히 현승을 째려보며 말하는 솔아.
"현승아. 그러지 말고… 네가 솔아 좀 집까지 데려다 줘."
성준의 말에 현승은 솔아를 데려다주는 대신 다음에 스테이크를 쏘라고 장난처럼 말했고 성준은 귀찮은 듯 알았다고 대답했다.
병원 문 밖으로 사라지는 둘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성준. 솔아는 나가면서도 자꾸만 힐끗힐끗 성준을 돌아보았다.
"휴……." 혼자가 되고서야 비로소 로비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 성준.
멍하니 앉아 있던 성준은 이내 참아왔던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수화와의 만남은 짧았지만 많은 일들이 있었다. 힘든 과정을 겪으며 성준은 수화와 더욱 더 가까워지길 원했다. 하지만 결국 또 수화에게 상처를 주고 말았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드는 성준이었다.
'이제…… 정말…… 수화의 행복을 빌어줘야겠어…… 수화야… 다시는 상처받지말고…… 그 사람과 행복하길 바랄게…….' 수화와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소리없이 흐느껴 우는 성준이었다.
***
그 일이 있고 난 후, 한 주가 지났다.
수화는 성준과의 이별 후 처음 며칠간은 힘이 들었다. 밥맛이 없어 밥을 거른적도 많았고, 집에 틀어박혀 슬픈 영화를 보며 엉엉 울기 일쑤였다. 종현은 그런 수화를 지켜보다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매일아침 집 앞으로 찾아와 같이 운동하자며 수화를 불러냈고, 수화는 못 이긴다는듯 집 밖으로 나오곤 했다.
또 종현은 수화가 봉사활동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와서는 수화와 함께 한국대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기도 했다. 수화는 아직 종현이 남자로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힘들때면 자꾸만 찾아와주는 종현에게 점점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어두웠던 생각이 종현과의 만남으로 인해 점차 밝아지는 것을 느껴 마음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던 수화였다.
병원 밖 공원에서 테이크아웃 음료를 마시며 산책하고 있는 종현과 수화.
"아… 오늘은 여유로워서 좋다. 김주옥 할머니가 오늘처럼 매일 옆 병실에 있는 분들하고 모임가지면 좋겠다. 그러면 너랑 이렇게 매일 햇빛받으며 산책도 할 수 있구…" 행복한 표정으로 커피를 한 모금마시는 종현.
"…그러게……." 종현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수화였다. 최근 수화는 주옥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친근하게 손녀처럼 대해주던 주옥이 어느날부터 갑자기 무뚝뚝하게 대하고 예전처럼 따뜻한 말도 전혀 해주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불편해진 수화는 그러면 그럴수록 주옥에게 더욱 살갑게 굴려고 노력했지만 주옥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것처럼 냉랭할 뿐이었다. 수화는 대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영문을 몰라 그저 답답한 마음이었다.
그때 멍하니 생각에 잠겼던 수화가 발을 그만 헛디뎌 넘어지려하는데 종현이 빠르게 수화의 손을 잡아주어 다행히 넘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들고 있던 뜨거운 음료가 떨어지며 몇 방울 수화의 손에 튀었다.
"휴… 종현이 너 아니었음 넘어질 뻔 했어… 고마워……" 가슴을 쓸어내리고는 따끔한 듯 손등을 어루만지는 수화.
"다행이다. 근데 손은 왜 그래? 데었구나? 이리줘봐." 수화의 손을 잽싸게 가져가 자신의 두 손 사이에 넣는 종현.
"괜찮아. 몇 방울 밖에 안 튀었어. 진짜 괜찮아." 종현을 향해 웃어보이며 손을 빼내려는 수화.
"가만 있어봐. 뜨거운 것에 데었을때는 찬물에 넣고 있어도 괜찮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이렇게 사람의 체온에 대고 있는거래." 정성스럽게 수화의 손을 자신의 체온으로 감싸는 종현.
종현의 말에 수화는 피식 웃었고, 둘은 그렇게 잠시동안 서로의 체온을 손으로 나누고 있었다.
***
힘들었던 건 성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화와 그렇게 헤어지고 성준은 폐인처럼 하루종일 씻지도 않고 먹지도 않고 지냈다. 해외에서 돌아오신 어머니가 병원에 오셨을 때만 씩씩한 척을 했고, 어머니가 가시면 또 다시 티비를 끄고 조용히 슬픔에 잠기곤 했다. 그러던 와중에 솔아는 매일 성준을 찾아와 먹을 것을 챙겨주기도 하고 재밌는 책들을 잔뜩 가져와 성준을 즐겁게 했다. 헤어졌던 옛 연인 솔아에게 이미 마음은 떠났었지만 문득 자신의 마음이 솔아의 마음과 같진 않을까 동병상련의 마음이 느껴져 더 이상 찾아오는 솔아를 단호하게 거부할 수 없게 된 성준이었다.
솔아와 함께 병원 앞 공원으로 나오고 있는 성준.
"이제 대충 챙길 거는 다 챙겼으니까… 이따가 어머님이 오셔서 할 일은 없을거야." 성준을 보며 환하게 웃는 솔아.
"고마워 솔아야.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맨날 와줘서 고마웠어." 성준 역시 솔아를 보며 웃었다.
"성준아." 그 자리에 멈춰선 솔아.
"응?" 의아한 표정의 성준.
"난 그냥… 성준이 네가 다시 웃고 퇴원해서도 또 즐겁게 학교 생활하길 바래서… 그리고 난 누구보다 너의 행복을 바래서… 매일 찾아온 거였어. 성준이 네가… 나한테 부담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안 그래도 돼… 나 오늘 너 퇴원하구 이제 다시 연락안할거니깐." 울음을 참으며 활짝 웃는 솔아.
성준은 그런 솔아의 표정을 읽었다는 듯 그저 아픈 표정으로 솔아를 바라보았다. 그때 저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수화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수화는 그 남자와 손을 잡고 있었다.
성준은 순간 알 수 없는 마음으로 가슴이 두근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곧 이 마음이 수화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직까지 수화에 대해 강하게 반응하는 심장이 스스로 괘씸하게 느껴진 성준은 자신의 앞에서 울먹이고 있는 솔아의 손을 잡았다.
"성준아……." 그런 성준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솔아.
***
"이제 진짜 괜찮다니까… 손 놔도 돼." 자신의 손을 애지중지 감싸고 있는 종현을 보며 웃는 수화. 그때 성준이 솔아와 손을 잡고 자신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모습 보인다.
순간 또 다시 마음이 복잡해지는 수화였지만 이내 속으로 성준을 비웃고는 자신의 손을 놓으려 하는 종현의 손을 다시 꽉 잡았다.
"…아냐. 나 안 괜찮은 것 같아. 그러니까 계속 잡아줘." 자신을 못이겨 받아주는 듯한 수화를 보며 귀엽다는 듯 웃는 종현이었다.
수화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종현과 다시 웃으며 이야기를 하며 성준의 곁을 지나갔고, 성준 역시 수화를 보지 않는 척 했다.
수화가 자신의 곁을 스쳐지나가자, 이제 앞으로 다시 못 볼 수도 있을 것 같은 마음에 자리에 멈춰서는 성준이었다.
"솔아야. 잠깐만." 성준은 솔아의 손을 놓고는 수화에게 달려갔고 솔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성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화야." 성준의 부름에 멈춰서는 수화.
"…?" 아무렇지 않은 듯 뒤를 돌아 성준을 분명히 바라보는 수화.
"나… 오늘 퇴원해…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었어… 그리고… 수화 네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랄게…." 이야기를 마치고 종현에게 가볍게 '잘 부탁한다'는 듯 목례를 하고 돌아서는 성준이었다.
"저 사람… 누구야?" 종현이 성준의 뒷모습을 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냥… 병원에서 만난 사람." 성준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지켜보며 조금 쓸쓸하게 대답하던 수화는 이내 종현과 함께 다시 가던 길을 걸었다.
***
"수화 학생." 무뚝뚝한 표정으로 티비를 보던 주옥이 리모컨으로 티비를 끄며 말했다.
"…네?" 주옥의 눈치를 보며 물건을 정리하고 있던 수화.
"이제 다음주면 개강이지? 그래서 말인데… 이제 오늘까지만 나와줬으면 좋겠어." 수화의 눈을 보지도 않은 채 차갑게 말하는 주옥.
"네? 그래도… 약속된 날짜는 다음주까지인데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수화.
"내가 수화 학생이 불편해서 그래. 그래도 내가 담당자한테는 좋게 얘기해놓을테니까 봉사 점수에 대해서는 걱정하지말어."
"할머니… 혹시… 제가 뭐… 잘못한거라도 있었나요? 전 나름대로… 할머니께 잘 해드리려고 애썼는데… 혹시 불편하게 해드린 점 있었다면… 사과드릴게요……." 주옥의 말에 눈물이 찔끔나는 수화였다.
"그런 거 없어. 그저… 내가 그동안 수화학생을 내 손녀딸처럼 생각해왔지만 수화 학생은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었겠지. 생각해보니 나도 수화 학생의 할머니가 아닌데… 내가 그동안 학생에게 너무 부담스럽게 굴진 않았나 몰라." 헛기침을 하며 냉랭한 주옥.
주옥의 냉정한 말에 당황한 듯 아무 말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수화였다.
수화가 우는 것을 눈치챈 주옥은 조금 마음이 약해져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만 원짜리 세 장을 수화에게 주었다.
"내가 지금 현금 가진 게 이거밖에 없네. 적은 돈이지만 차비로 보태서 쓰든가." 그래도 그동안 자신을 위해 매일 아침부터 와서 수화가 했던 일들을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드는 주옥이었다.
"아니예요 할머니. 전 이런 거 바라고 한 적 없어요. 할머니가 부담스러우시다면… 그럼 오늘까지만 있을게요." 주옥의 손에 다시 돈을 쥐어주는 수화.
"수화 학생… 혹시 적은 돈이라서 안 받는거야…? 나도 그동안 고마웠어서 주는 거니까 그냥 받으라구…!!"
수화와 주옥은 돈을 서로에게 주기 위해 실랑이를 벌였고 결국 주옥을 못이겨 돈을 손에 쥔 수화는 침대 위에 올려져 있던 주옥의 지갑을 잽싸게 집어 그 안에 돈을 넣었다.
그런데 그때, 주옥의 지갑속에서 낯선 얼굴이 보였다. 그것은 주옥과 솔아가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할머니… 이 사람… 누구예요?" 사진 속 솔아를 가리키며 묻는 수화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려왔다.
========== 작품 후기 ==========
〈EasySys 독자님, 여포 봉선 독자님〉 출석체크 감사드립니다.
늦어서 죄송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