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5 그녀의 요상한 판타지 (完) =========================================================================
"어…? 수화야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우연한 마주침에 조금 놀란 듯한 표정으로 수화에게 인사를 건네는 종현이었다.
"아… 응! 진짜 오랜만이야… 근데 병원엔… 무슨 일로 온 거야?" 종현이 반가웠지만 순간 동아리 때의 일이 플래시가 터지듯 불현듯 떠오르는 수화였다.
"나 아는 분이 여기 입원하셨거든. 그래서 잠깐 병문안 온 거야. 수화 넌 여기 무슨 일인데?" 이내 태연한 태도를 보이는 종현.
"나 여기서 봉사활동 하고 있거든. 다들… 잘 지내지? 참… 혜련이랑은? 아직도 잘 만나?" 기대하는 표정으로 흐뭇하게 종현을 보는 수화.
"아… 그게… 나 혜련이랑 헤어졌어. 저… 수화야 우리 이렇게 만난 것도 반가운데… 저기 앉아서 잠깐 얘기할까?"
종현의 말에 조금 망설이던 수화는 이내 "그러자"고 대답했고 둘은 로비 앞 소파로 향했다.
"자, 여기 따뜻한 캐모마일 티." 종현이 병원 내의 작은 커피숍에서 주문한 음료를 수화에게 내밀며 말했다.
"우와. 나 허브티 되게 좋아하는데. 고마워." 수화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예전에 잠깐 들은 적 있었어. 너 카페인 마시면 심장이 쿵쾅쿵쾅 거린다구… 그래서 나름 고민하고 골라온거야." 씨익 웃으며 수화의 옆에 앉는 종현이었다.
둘은 이내 최근 근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혜련이랑은 어떻게, 언제 헤어지게 되었으며… 이번 일로 동아리는 잠시 휴식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하지만 종현은 수화에게 상처주지 않기 위해 일부러 창호와 진아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아무튼… 유감이다. 혜련이랑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아쉽다는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마시는 수화.
"……그러게……." 종현은 머쓱하게 웃으며 그런 수화의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실 종현은 혜련과 사귈 마음은 없었다. 종현이 처음부터 좋아했던 사람은 수화였다. 그러나 수화의 마음은 언제나 창호에게 향해 있었고, 종현이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
수화의 연락을 받고 집으로 부리나케 쫓아갔던 날, 무책임해 보이는 창호에게 주먹을 날리고 싶었지만 수화를 생각해서 꾹 참았던 종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동아리 엠티와 여러 동아리 모임에서 매번 같은 테이블에 앉아 친해진 혜련이 종현에게 연락을 하며 점점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고 때마침 외로웠던 종현은 그런 혜련을 받아주었다.
처음엔 혜련과의 만남이 유쾌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배려심 없이 멋대로 행동하는 혜련이 그저 철없고 귀여운 후배로만 보이기 시작한 종현이었다.
종현은 혜련이 상처받지 않게 잘 타이르며 다시 예전처럼 지내자고 말했고 혜련은 속상했지만 오빠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며 좋게 헤어졌다.
"참, 이번 수강 신청은 잘 했어?" 잠시 동안의 적막을 깨며 종현이 물었다.
"아… 거의 성공하기는 했는데 진짜 듣고 싶었던 교수님 강의가 이미 꽉 차버렸더라구… 워낙 인기가 많은 강의라. 그래두 정정기간을 한 번 노려보려구."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한 채 싱긋 웃어보이는 수화.
종현은 지금 수화가 옆에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또한 이제 수화는 완전히 혼자가 된 상태였다.
종현은 수화 언니가 지금 외롭고 힘드니 오빠가 옆에 있어준다면 분명히 큰 힘이 될 것이라는 진아의 말에 기대감을 가지고 병원에 왔다. 처음에는 왠지 모르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수화와 얘기를 나누며 자신의 선택이 백 번 옳았다고 생각하는 종현이었다.
"그래. 정정기간에는 기다리면 꼭 자리나더라.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마. 잘 될 거야." 수화의 어깨를 자연스럽게 토닥이는 종현이었다.
"고마워… 종현아." 자신을 위로하는 종현의 눈을 보니 누군가의 진심이 오랜만에 느껴져 눈물이 글썽여지는 수화였다.
***
엘리베이터 안.
"성준아… 기분 좀 풀어… 그리구 있잖아… 손 잡고 있었다는 건… 사실 내가 잘 못 본 것일수도 있어. 멀리서 본 게 다거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성준의 눈치를 보던 솔아는 성준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알아. 수화는 그런 애 아냐…… 아무튼… 오늘 두 번이나 도와주러 와줘서 고마워." 힘 없는 목소리의 성준이었다.
어느새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했고 성준은 솔아를 배웅해주기 위해 병원 정문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로비에 앉아있던 수화와 성준의 눈이 마주친다. 당황하는 표정의 두 사람.
'그래… 하성준… 그 여자하고… 잘 살아… 그 여자가 널 많이 좋아하더라. 제발… 내가 받았던 상처… 주지 않고 잘 사귀길 바랄게…….' 종현의 위로에 마음이 노곤노곤해져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는데 성준과 그 여자가 같이 있는 모습을 보니 어이없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픈 수화는 애써 흘러나오려는 눈물을 참고 있었다.
솔아를 그 자리에 둔 채로 수화에게 다가가는 성준.
'수화가 솔아랑 나 사이를 또 오해할지도 몰라. 아니라고 얘기해줄거야. 그리고 솔아도 옆에 있으니까… 이번 기회에 오해를 제대로 풀어야겠어.'
수화에게 저돌적으로 다가가는 성준의 뒷모습을 보며 초조해 입술을 깨무는 솔아는 그 자리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서 있었다.
"종현아…" 진지한 말투와 표정의 수화.
"응?" 영문모른 채 수화를 바라보는 종현.
"나… 한 번만… 안아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고개 숙여 말하는 수화.
"…어?" 수화의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한 종현은 이내 수화를 살며시 품에 안는다.
수화가 어떤 남자와 포옹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선 성준.
수화는 종현의 품에 안겨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종현은 수화가 많이 힘들었나보다… 생각하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부드럽게 수화의 등을 토닥여주기 시작한다.
갑작스러운 수화의 행동을 보며 조금 당황하던 솔아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멍한 성준의 팔을 끌고 병원 밖을 나선다.
성준이 사라지자 곧바로 종현의 품을 떠나는 수화.
"고마워… 종현아. 위로해줘서…" 고개 숙인 채 눈물을 닦는 수화.
"가자, 내가 데려다 줄게… 나도 집에 가는 참이었어." 여전히 안쓰러운 눈빛으로 수화를 바라보는 종현이었다.
"종현아… 우리… 술 한 잔 할래?" 종현을 따라 일어선 수화가 조심스레 말했다. 종현은 수화의 제안에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오케이를 외쳤다.
***
신화여대 앞 맥주집.
분위기는 어두컴컴하고 조용한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다.
테이블이 오픈되어 있지 않고 칸막이가 되어 있어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프라이빗한 느낌이다.
"자아, 산책 동아리 사람들끼리 건배에!!!" 수화가 살짝 혀 꼬인 목소리로 술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술도 약한 애가. 적당히 좀 마셔." 종현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수화를 바라보았다.
"종현아… 나 있잖아… 동아리 들어와서 되게 즐거웠다? 여대에서는 막 예쁘다 예쁘다~ 해주는 것두 없구… 나한테 관심도 없구… 근데!! 나 동아리 들어와서 대학 생활중에서 정말 즐거운 추억 많이 만든 것 같애… 그리구… 너같이 좋은 친구도 만났구……헤헤……" 술에 취해 볼이 발그레 달아오른 수화가 웃으며 말했다.
종현은 이내 수화의 말에 얼굴이 빨개졌고,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래…? 나도… 수화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좋은 감정이었어… 근데……"
종현은 수화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보려 용기를 내고 있었다.
"흑…흑흑…… 근데…… 난… 행복할 자격이 없나 봐…… 난… 기다리구… 또 기다리구… 내 감정에 솔직하게 행동해왔는데… 왜 나한테는… 자꾸 이런 일만 일어나는걸까…? 종현아… 나…… 더는 이렇게 살고싶지않아…… 흐엉엉……"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토해내는 수화였다.
울음이 터진 수화를 보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수화의 옆으로 가 안아주는 종현이었다.
"수화야… 너한테만 이런 일 일어나는 거 아냐… 나한테도 나쁜 일이 일어나고…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 도 다…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냐… 그런 말도 있잖아…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지금 이렇게… 많이 슬퍼했으면 다시 환하게 웃을 수 있는 날이 곧 올 거야. 내 말 믿어 수화야… 응?"
종현은 내가 옆에서 힘이 되어 주겠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에서는 자꾸만 진부한 위로만 쏟아지고 있었다.
"흑…… 흑…… 종현아……" 종현의 품에서 마음껏 눈물을 흘리는 수화였다. 지금은 수화에게 어떤 말이든 다 좋았다. 이렇게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수화에게는 큰 힘이 되는 종현이었다.
***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걸어 어느새 수화의 집 앞에 도착한 성준.
병원복에 패딩만 걸친 수척한 모습이다.
성준은 수화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아까 그 남자는 누군지, 언제부터 만났는지… 하지만 성준은 수화가 몇 호에 살고 있는 지 몰랐다.
"수화야!!!! 수화야!!!!" 하는 수 없이 건물 앞에 서서 수화의 이름을 불러보는 성준이었다.
그때 막 골목길로 들어오는 남자의 말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어두워서 누구인지 파악이 안 되는 성준은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자의 말에 재빨리 어둠 속에 자신을 숨기는 성준이었다.
"수화야. 이제 집 앞 다 왔어. 에휴… 그러니까 술을 왜 그렇게 마셨어."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수화를 보는 종현이었다.
"……음. 난… 괜차……나. 헤헤……" 종현의 품에서 나와 괜찮다는 걸 보여주려던 수화는 이내 다시 종현의 품에 쓰러지고 말았다.
한숨을 쉬며 수화를 안고 1층 현관문을 열고 빌라로 들어가는 종현이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성준은 당장 달려가 당신 누구냐며 남자의 멱살을 잡고 싶었지만 병원에서 수화가 안겨있던 모습을 생각하니 섣불리 행동할 수는 없었다.
***
수화를 안은 채로 겨우 집에 도착한 종현.
수화는 뭐가 그리 좋은 지 종현의 품에서 실실 웃고만 있다.
그런 수화를 침대에 눕히고는 한숨 돌리는 종현.
"에휴… 내가 힘이 약해진 건가, 아님 수화 니가 강해진건가. 그때보다 왜 더 힘든 것 같지?" 누워 잠이 들어 있는 수화를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종현은 수화와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수화는 지금처럼은 아니지만 술에 취해 종현의 부축을 받으며 집에 도착했었다.
그때를 생각하니 괜시리 웃음이 나는 종현이었다.
종현은 이불을 대충 덮어주고는 막 수화의 곁을 떠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때 수화가 떠나려는 종현의 손을 붙잡았다.
"…준아.…… 준아……." 잠결에 성준을 부르는 수화였다.
종현은 웅얼거리는 수화가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손을 꽉 쥐고 있는 수화의 고사리 같은 손을 보며 그녀를 지켜주어야만 할 것 같은 책임감이 드는 종현이었다.
========== 작품 후기 ==========
〈EasySys독자님〉 출석체크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