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3 그녀의 요상한 판타지 (完) =========================================================================
"어제 내가 안 나온 이유를 말해주면… 이제 더 이상 날 잡지 않는다고 약속해줄래?" 이내 성준의 눈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수화였다.
"수화야… 우리 다시 얘기 잘 해보기로 했던 거 아니었어? 왜 갑자기 또 이러는 거야…" 조금은 답답한 표정의 성준이었다.
"그래서 그 이유… 얘기해준다잖아." 건조하고 분명한 눈빛으로 성준을 보는 수화였다.
"그래… 알았어. 그 이유 들으면… 잡지 않는다고 약속할게." 완강한 수화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대답하고마는 성준이었다.
수화는 할머니를 병실에 데려다 드리고 올테니 이 곳에서 기다리라고 말했고 성준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후 수화가 문을 열고 테라스로 들어오자 성준은 자신도 모르게 수화를 보며 웃었다. 성준의 웃는 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는 수화였다.
"어제… 왜 안 나온 거야…? 혹시 무슨 일…" 이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수화를 보는 성준.
"성준아." 성준의 말을 가로막는 수화.
"응?"
"…많이 생각해봤는데… 나… 널… 이제 못 믿겠어." 기운 빠진 표정으로 성준이 아닌 다른 곳에 시선을 두며 말하는 수화였다.
"…뭐? 왜… 왜 갑자기 그래… 우리 잘 해보기로 했었잖아. 아무리 그래도… 내가 해명할 기회는 줘야지." 답답해하는 성준.
"널 더 이상 못 믿겠다는데… 해명이 무슨 소용이겠어… 네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 상처받은 마음이 치유되는 건 아냐." 체념한 듯한 말투의 수화였다.
"수화야. 난 정말 억울해. 내 마음은 언제나 너한테 향해 있었고, 네가 오해하던 그 날도… 난 너 만날 생각에 들떠 있었단 말야… 너한테 상처 줄 마음도, 의도도 전혀 없었다구." 억울함에 눈물을 흘리는 성준이었다.
성준의 눈물에 잠깐 흠칫하던 수화였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수화는 마음을 더욱 차갑게 단련시키려 노력했다.
"성준이 네가 무슨 오해한 모양인데… 우리 사귀던 사이도 아니었잖아. 그러니까… 네가 그 상황에 대해서 나한테 미안해 할 필요도, 해명할 필요도 없어. 죄책감 가질 필요도 없구."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하는 수화의 말이 비수가 되어 꽂히는 성준이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니…… 수화 너한텐… 내가 그 정도밖에 안 되었던 거야……? 난… 널 만난 이후로… 네 생각밖에 안 했어. 아니 지금도 널 좋아하는 마음은 변함 없어. 정말 하늘에 맹세하지만… 너에 대한 내 마음… 거짓인 적 한 번도 없었고… 너에게 상처주려고 함부로 행동한 적 한 번도 없었어……" 흐느끼며 울기 시작하는 성준이었다.
'하늘에 맹세한다구…? 하성준… 정말 너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거니….' 함부로 맹세를 운운하는 성준이 가볍게 느껴지는 수화였다.
"어쨌든… 네가 어떤 말을 해도… 내 마음은 안 변해. 뭐…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구… 내가 널 좋아하는 것두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말 하기도 좀 그렇지만."
수화의 말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은 성준이었다.
"수화 너… 날 정말… 단 한 번이라도… 좋아한 적 없었어? 정말… 내가 다쳐서… 동정심에 그동안 병원에 찾아와줬던 거야…?" 눈물이 맺혀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수화를 똑바로 쳐다보는 성준.
"그래. 미안하지만… 그건… 우정으로서의 동정심이었던 것 같아. 근데 나… 이제 들어가봐야겠어. 할머니가 기다리시거든… 그럼."
울고 있는 성준을 두고 뒤돌아서는 수화였다. 수화는 동정심이란 얘기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별의 원인 제공을 한 상대에게 자신도 냉정하게 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렇게라도 행동함으로써 잘못을 해놓고도 앞에서는 아무 잘못이 없는 척 시치미를 뚝 떼는 성준이 조금의 죄책감이라도 느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성준은 멀어져 가는 수화의 뒷모습을 보며 이제는 정말 그녀와 완전히 끝났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성준의 가슴 한 켠에 남아있는 응어리는 더욱 단단해 지고 있었다.
***
병실에서 웃으며 통화를 하고 있는 주옥.
"응. 오늘 그 학생이 나한테 작은 콘서트도 열어주구… 아주 감동이었어. 그렇게 좋은 학생 소개시켜줘서 고마워." 주옥은 아직도 감동이 가시지 않았다는 듯 울먹이는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저도 다른 병실에 있는 어르신들한테 소문 들었어요. 아, 수화 학생이 연주하는 걸 직접 봤어야 했는데… 너무 아쉽네요. 아참, 할머니. 제 주변에 진짜 괜찮은 남자분이 있는데 수화 학생이 참하고 얼굴도 예쁘니까 소개 좀 시켜주고 싶어서요… 근데 저는 수화 학생이랑 잘 모르는 사이니까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할머니가 소개시켜주는 거라고 하고 소개팅 주선해주시는 거 어떠세요?] 진아가 음흉한 미소로 말했다.
"뭐어? 소개팅? 나야 좋지. 안 그래두 수화 학생 남자친구 없다고 그래서 얼마나 안타까웠다구. 뭐 지금? 그래 알았어. 내가 한 번 자리 마련해볼게."
주옥이 막 전화를 끊는데 수화가 풀이죽은 듯한 얼굴로 병실에 들어왔다.
"왔어? 오늘 콘서트 고마워. 너무 감동이었어." 주옥이 눈물을 글썽이며 수화의 손을 잡고 말했다.
"할머니가 좋으셨다면 저도 기분이 좋아요. 다음에는 더 멋진 곡 연습해서 들려드릴게요." 이내 주옥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는 수화였다.
"아참. 저기 있잖어… 지금 내가 아는 아이가 한 명 여기에 와 있는데… 나랑 좀 같이 가자. 응?" 수화를 보며 활짝 웃는 주옥.
"그 분… 실례지만 누군데요? 그리구 할머니… 멀리 나가시면 안 돼요." 걱정되는 눈빛으로 주옥을 보는 수화였다.
"병원 1층에 카페 있잖어. 거기야. 가면 알게 될 거야." 누런 이를 드러내며 그 어느때보다 더 환하게 웃는 주옥이었다.
수화는 그런 주옥을 보며 의아해 했지만 의심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
병원 후문에서 어떤 남자에게 봉투를 내미는 진아.
"여기 약속한 돈이예요. 살갑게 웃으면서 스킨쉽도 조금씩 해주는 거 잊지마세요." 회심의 미소를 짓는 진아였다.
"걱정마세요. 그런 건 제 전문입니다. 제가 이래봬도 이 업계에서 일 잘한다고 더블팁까지 받는 사람이예요." 진아의 말에 씨익 웃으며 대답하는 사람은 185cm정도로 보이는 키에 날라리같이 보이기도, 모범생 같이 보이기도 하는 묘한 매력을 풍기는 남자였다.
진아는 아직도 수화에게 목을 매고 있는 성준을 보며 짜증이 났다. 그것은 수화에 대한 질투심이었다. 진아는 아직 한수화가 하성준에 대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는 방법을 바꿔 수화옆에 남자를 붙여주어 그 모습을 보게 될 하성준을 단념시켜 둘을 영영 떨어뜨려 놓을 작정을 했던 것이다.
사실 진아가 이렇게 심부름센터를 시켜 수화에게 남자를 붙여주려 했던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원래는 더 일찍, 수화가 병원으로 봉사활동을 오기 시작할 때로 계획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생각지 않게 너무나도 빨리 수화와 성준이 오해의 실타래를 풀게 되었고, 그래서 작전을 잠시 접어두었었는데 다시 찬스가 와 이번 기회에 두 사람 사이에 제대로 못을 박아버릴 참이었다.
진아는 남자에게 다시 한 번 성준과 수화의 사진을 보여주었고, 남자는 문제없다는 듯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는 병원 내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
카페에 들어선 수화와 주옥. 남자는 수화를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수화씨. 은지훈입니다."
남자가 밝게 웃어보이자, 수화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학생. 나는 이만 가볼게. 잘 혀봐." 수줍은 듯 재빨리 휠체어를 밀며 떠나가는 주옥이었다.
"할머니!!! 어디가세요!!! 할머니!!" 이 상황이 도대체 뭔가 싶어 할머니만 애타게 불러보는 수화였다.
"수화씨. 저… 얘기 못 들으셨어요? 할머니께서 저랑 수화씨랑 소개팅 시켜주시려구 불렀는데…" 수화의 뒤로 바짝 다가와 머쓱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지훈.
"아… 그래요? 전 그것도 모르구……" 초면인데 자신의 몸에 가까이 밀착해 있는 지훈에게 불편한 미소를 짓는 수화였다.
지훈은 웃으며 의자를 빼 주었고, 수화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얼떨결에 자리에 앉았다.
"할머니께 얘기 많이 들었어요. 엄청 참하구 예쁘다구… 근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미인이신데요?"
선수 티를 내지 않으려 적당한 칭찬을 하는 지훈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웃으며 대답하지만 왠지 목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 같은 수화는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물만 홀짝홀짝 마셔댔다.
지훈은 계속해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능숙하고 적절한 질문을 수화에게 던졌고 수화는 마지못해 웃으며 대답을 이어나갔다.
"저… 말씀중에 죄송한데요… 제가 사실… 지금 소개팅할 준비가 안 되었거든요. 지훈씨 참 좋은 사람인 것 같은데… 저보다 더 좋은 분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수화는 그 말을 남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지훈은 조금 당황했지만 곧장 수화의 뒤를 따라나섰다.
"수화씨 잠깐만요. 전… 이렇게 만난 것도 다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당장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수화씨가 지금 어떤 마음의 상처가 있어서 마음을 닫고 계신 건지는 모르겠는데요. 저… 무뚝뚝한 사람이지만 내 사람은 끝까지 지킵니다. 사실 할머니께서 전에 사진을 보여주셨었지만 첫 눈에… 수화씨께 반했습니다." 수화의 눈을 분명하게 바라보는 지훈이었다.
진심어린 지훈의 눈을 보자 어쩐지 마음이 동요됨을 느끼는 수화였다.
"고마워요… 근데…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아직 누군가를 만날 시기가 아닌 것 같아요. 그리고 전 지금 봉사활동 중이라서 할머니께 가봐야겠어요." 이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는 수화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어요. 정중하게 말씀해주시는 수화씨 마음이 참 여리고 따뜻하신 것 같네요. 참, 가기 전에 수화씨한테 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지훈은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여 진아가 준비한 종이꾸러미를 꺼냈다. 거기에는 김주옥 할머니가 좋아하는 음식, 음악, 노래 등등의 정보가 적혀있었다.
지훈에게 건네 받은 종이를 읽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수화였다.
"우와아… 이거 직접 다 작성하신 거예요? 할머니에 대해서 정말 많이 아시네요." 지훈을 보며 대단하고 놀랍다는 듯 웃는 수화였다.
지훈 역시 활짝 웃으며 수화를 바라보았다. 활짝 웃을때 눈이 작아지며 눈가에 인디언 주름이 잡히는 게 지훈의 매력이었다. 지훈 역시 자신의 그러한 점이 여자들에게 충분히 어필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 누워 있는 성준. 그때 핸드폰 벨소리 울려온다.
벌떡 일어나 확인해보면, 솔아였다.
실망한 성준은 처음엔 전화를 안 받으려 했지만 솔아에게 미안한 감정이 남아있어서 그냥 전화를 받기로 했다.
"여보세요…?" 힘 없는 목소리의 성준.
[성준아 나야. 나 집에 갔다가 너 도와주려고 다시 왔어. 근데 있잖아…]
다급한 솔아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성준이었다.
성준은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갔다.
1층에 도착한 성준은 이내 그 자리에서 들고 있던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저 멀리에는 어떤 남자와 다정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수화가 있었다.
========== 작품 후기 ==========
〈EasySys독자님〉 출석체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