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7 그녀의 요상한 판타지 (完) =========================================================================
"그게… 넌 몰라도 되는… 그런 게 있어. 근데 방금… 설마… 질투한 건 아니지?" 성준은 수화의 마음이 진심이길 바라며 넌지시 물었다.
"뭐, 뭐? 질투라니… 난 그냥… 아냐. 됐어." 조금 당황한 듯 대답하는 수화였다.
"수화야…" 당황해하는 수화의 눈높이를 맞추려 몸을 낮추는 성준이었다.
"으…응?" 성준과 눈이 마주치자 시간이 멈춰버린 듯 얼어버린 수화.
"…내 욕심인 건… 알겠는데… 나… 너랑 그때 그렇게 연락하고나서… 수화 네 생각이 계속 났어… 꿈에서도 너랑 나랑 행복했던 시간들… 다시 재생되었고… 널 위해서… 잊어야 돼. 잊어야 돼… 그렇게 자꾸 다짐했는데… 생각처럼… 잘 안되더라…." 성준이 눈물을 글썽이며 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성준의 눈을 당황스럽게 바라만 보고 있는 수화였다.
"수화야… 내가… 안 그래도 힘들었을 너한테… 부담스럽게 하고… 힘들게 했다면… 정말… 미안해……." 성준이 눈물을 애써 참으며 말을 이어갔다.
성준의 눈물에 잠시 마음이 약해지는 수화였지만, 이내 냉정한 마음을 되찾기 시작했다.
"하… 이런 말은… 끝까지 안 하려고 했는데… 미안하다면… 다야…? 그리고… 꿈에서 난… 왜 나오는데? 이미… 너한테는 다른 사람이 있는데… 잊어야 돼 하며 다짐할 게 또 뭐 있어? 성준이 너한테 정말… 실망이다." 수화는 성준의 말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 다른 사람이라니…?" 언제 울었냐는 듯 당황한 표정의 성준이었다.
"그건… 네가 더 잘 알텐데. 아무튼… 앞으로는 나한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수화는 성준의 말에 대답하고는 곧장 뒤돌아 가기 시작했다.
"수화야. 잠깐!! 지금 네 말…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심각한 표정의 성준이 수화를 붙잡으며 말했다.
"이거 놔. 너 지금 이러는 거… 나한테 더 상처야." 성준의 팔을 강하게 뿌리치며 돌아서 가버리는 수화였다.
수화의 '나한테 더 상처야.'라는 말에 더 이상 잡지 못하고 수화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는 성준이었다.
'다른 사람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수화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
***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수화. 갑자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그 자리에 멈춰 서 소매로 눈물을 닦기 시작했다.
"흑흑……"
'하성준… 네가 그런 애인 지… 정말 몰랐어… 넌 믿었었는데…….'
수화는 갈수록 성준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이해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수화였다. 그저 성준을 창호와 같은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면 됐지만, 성준이의 눈빛은 진실만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 혼란스러운 그녀였다.
그렇게 한참을 울던 수화는 김주옥 할머니가 갑자기 생각나기 시작하자, 허겁지겁 빠른 걸음으로 어느새 605호 병실 앞에 도착했다.
병실 앞에서 눈물을 닦고 아무일도 없던 듯 연기하려고 서 있는 수화.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병실로 들어간다.
"할머니… 좀 늦었죠…. 죄송해요. 자판기가 고장이 나서… 여기요. 할머니가 말씀하신 한라봉 주스요." 웃으며 주옥에게 주스의 뚜껑을 따 건네는 수화였다.
"으응… 괜찮아. 아니, 자판기로 주스 뽑으러 간 애가 무슨 일 있나 걱정했다니깐. 고마워. 잘 마실게." 주옥은 주스를 한모금 마시고는 맛있는 지 수화를 보며 활짝 웃었다.
"아, 할머니. 창틀도 지금 먼지도 많구… 청소 좀 해야겠어요. 창문 좀 잠깐 열어놓을게요."
수화는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는 환기를 시켰고, 걸레를 빨아다 창틀 먼지와 병실 구석구석을 열심히 청소하기 시작했다.
주옥은 시키지 않아도 먼저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수화에게 깊은 감동을 느끼기 시작했다.
수화는 봉사활동으로 오긴 했지만 몸이 불편하고 외로운 할머니를 위해 더 깨끗한 곳에서 쾌적한 생활을 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일단 작은 청소라도 해드리자는 마음이 있었다. 게다가 성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 청소를 하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청소를 밀어붙였던 것이었는데 그녀의 생각은 현명했다.
어느새 병실은 깨끗해졌고, 후련한 듯 밝은 표정을 지으며 주옥을 바라보았다.
"할머니. 병실이 좀 더 넓어진 것 같지 않아요? 일단 잘 안 쓰실 것 같은 물건은… 침대 아래쪽에 놓아뒀어요. 혹시나 찾으시는 물건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가 다시 할머니가 편하신 대로 놓아 드릴게요."
"응. 그러네…병실이 더 넓어진 것 같애. 빤딱빤딱 빛도 나는 거 같구… 내가 물건을 잘 못 버려. 근데 수화 학생이 어찌 딱 알구 꼴도 보기 싫은 건 다 침대 아래에 박아놨네. 그래서 더 후련한 것 같어. 고마워." 주옥 역시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수화의 가슴 한 켠에는 여전히 성준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아팠지만, 행복해하는 주옥을 보며 수화 역시 행복함을 느꼈다.
***
병원 근처 커피숍에서 초조해하며 앉아 있는 솔아.
곧 진아가 들어오더니 솔아를 발견하고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다가갔다.
"솔아씨. 왜 그렇게 떨고 있어요?" 위로하는 눈길로 솔아를 바라보며 자리에 앉는 진아.
"진아씨. 어떻게 해요… 아까 성준이랑 그 여자가 같이 있는 거 봤는데… 성준이 표정이… 진심인 것 같았어요… 그 여자한테 제대로 홀린 것 같아요…!!" 솔아가 이내 눈물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런… 솔아씨. 진정해요. 아직 좌절하기엔 일러요. 솔아씨랑 성준씨는 같이 지내온 추억들이 있잖아요. 절대로 그 여자한테는 못 이긴다구요. 그렇다고 방심하면 안 되지만." 솔아를 진정시키는 진아였다.
"진아씨. 제가… 제가 여기서 어떻게 해야 성준이 마음을 저한테 향하게 할 수 있죠…?? 이러다… 성준이 마음이 아예 그 여자한테 가버릴 까봐… 겁이 나요……"
"휴…… 이런 말… 꺼내긴 미안하지만… 솔아씨를 보니… 희망고문 주기 싫어서 솔직하게 얘기할게요. 성준씨… 이미 그 여자한테 빠졌어요. 그래서… 이대로는 다시 솔아씨한테 못 돌아갈 거예요."
진아의 냉정한 말에 모든걸 다 잃은 듯한 표정의 솔아였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죠. 성준씨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면… 그 여자를 성준씨 곁에 못 오게 하는 거죠." 진아가 솔아를 농락하듯 여유롭게 미소지으며 이어서 말했다.
"성준이 곁에… 못 오게요…? 어떻게요? 어떻게… 못 오게 할 수 있을까요??" 솔아가 간절한 눈빛으로 진아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글쎄요. 이제는 모든 게 솔아씨 손에 달린 것 같은데요? 안 되겠어요. 솔아씨. 따뜻한 차라도 드세요. 뭐 드실래요?" 솔아가 온 몸을 부르르 떨자 진아가 걱정하는 척 하며 말했다.
"아, 아녜요. 진아씨가 절 도와주는데… 제가 사야죠." 솔아는 눈물을 닦으며 지갑을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그러자 진아는 자신의 착한 모습을 보여 솔아가 자신을 더 믿게하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솔아를 뒤따라 갔다.
"아녜요. 솔아씨. 제가 사드릴게요. 지금 마음도 힘드신 분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는 솔아의 손을 막는 진아였다. 그런데 그때, 솔아의 손에서 지갑이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바닥에는 솔아의 카드와 명함들이 흐트러졌고 바쁘게 줍는 솔아의 옆에서 진아도 함께 줍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런데 진아의 눈에 솔아의 가족 사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왠지 낯익은 얼굴이 있는 것 같아 사진을 줏어서 자세히 보는 진아였다. 그러자 갑자기 손이 떨려오기 시작하는 진아였다. 웃고 있는 솔아의 옆에는 주옥도 함께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뭐지…? 이 할머니가 왜……'
"아… 그건 저희 가족 사진이예요." 사진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진아의 옆에서 솔아가 웃으며 말했다.
"아… 그래요? 이… 할머니두…요?" 진아가 확실히 하기 위해 솔아의 얼굴을 보며 넌지시 물었다.
"네… 저희 할머니예요… 사진보니까 우리 할머니 보고싶네요. 어디서 뭘 하시는 지… 소식이라도 알면 좋겠어요…" 솔아가 쓸쓸히 웃으며 말했다.
"왜… 소식을 모르세요? 할머니면… 자주 만나지 않으세요?" 진아가 떨리는 마음을 숨기며 물었다.
"…저희 엄마랑 삼촌, 그리고 이모들이… 할머니 모시는 것에 대해서 한바탕 다퉜었거든요. 근데 그걸 할머니가 우연히 듣게 되신거예요. 그래서 할머니께서 나 혼자서도 잘 살 수 있으니까, 걱정말라고 하시더니… 그 날 이후 어딘가로 사라지셨어요. 그래서 저번에 친척집에 갔던 것두 할머니 때문이었어요." 솔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 그래서 친척 집에 가셨던 거였구나… 안 됐네요… 할머니를 빨리… 찾으셔야 될텐데……" 말은 솔아를 위로하고 있었지만 초조해지기 시작하는 진아였다.
'일이 꼬여버렸어. 어쩌지…? 최솔아가 병원에 자주 오게 되면… 언젠가는 할머니와 한수화랑 마주치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내 정체가 탄로나는 건 시간 문제야.'
잠시 흔들리는 눈빛을 보였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솔아에게 위로의 눈짓을 보내는 진아였다.
***
병실에서 할머니에게 안마를 해드리고 있는 수화.
"이제 됐어. 그만해. 손 아프겠다." 수화의 손을 밀어내는 주옥.
"아이. 됐기는요. 저는 할머니 있는 애들이 제일 부러워요. 이렇게 안마 해드리면서… 할머니랑 재밌는 얘기도 나눌 수 있잖아요." 옥자가 밀어냄에도 불구하고 계속 안마를 하는 수화.
수화의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짓는 옥자였지만, 수화가 힘들 것 같아 일부러 밀어내는 주옥이었다.
"학생.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어여 가봐. 이제 나도 곧 손님이 오거든."
"아, 그러세요? 그럼 저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내일 봬요. 할머니." 수화는 옷과 가방을 챙겨 주옥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는 병실 밖을 나갔다.
주옥은 그런 수화의 모습이 꼭 손녀와 닮은 것 같아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
어느새 엘레베이터를 타고 1층에 도착한 수화.
"서연아. 나 지금 1층 도착했어. 내가 그 건물로 갈게. 기다려." 서연과 통화를 하며 막 병원 건물 밖을 빠져나가려던 수화였다.
"수화야. 잠깐만 나랑 얘기 좀 해." 수화를 1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성준이 수화를 보자마자 달려와 그녀의 팔을 낚아채며 말했다.
========== 작품 후기 ==========
〈이지시스 독자님〉 출석체크 감사드립니다.
이지시스 독자님, 둘 사이의 시련은 아직 조금(?) 더 남았지만, 어떻게 흘러갈 지 계속 지켜봐주세요 :)
저의 근황을 간단하게 말씀드리자면, 개인적인 일로 조금 정신이 없었고 멘탈이 약해진 상태였으며, 또 요즘 부쩍 늘어난 독자님들의 관심과 사랑에 몸둘 바를 모르며 허우적허우적 거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독자님들의 관심과 사랑은 언제나, 너무너무나 감사한 것이며 좋은 것입니다.
그럼 불금과 주말도 잘 보내시고, 또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 개인적으로 저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이메일 주십시오.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