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8 그녀의 요상한 판타지 =========================================================================
"아싸~ 오늘은 병원밥 안 먹고 매점에서 맛있는 거 사먹어야지."
킬킬 웃으며 링겔대를 한 손으로 끌고 병실 밖으로 나오는 성준.
그때 마침 성준의 병실 앞을 지나던 사람이 성준의 링겔대에 부딪쳐 바닥으로 넘어진다.
"윽…"
"괜찮으세요???" 화들짝 놀라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 성준이었다.
"아, 네… 전… 괜찮아요…." 성준에게 활짝 웃어보이는 사람은 다름 아닌, 진아였다.
성준은 링겔을 꼽지 않은 손을 진아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그 손을 꽉 잡으며 일어나는 진아.
"고마워요."
"고맙긴요. 깜짝 놀랐네. 어디 아픈 데 없어요?" 성준이 걱정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 팔이 쪼끔… 아프긴 한데…뭐 이정도면 괜찮아요." 진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어떻게 하죠… 검사라도… 받아보실래요?"
"아, 검사까진 괜찮구요… 그냥… 음료수만 한 번 사주면… 다 나을 것 같아요." 수줍은 표정의 진아였다.
***
병원 휴게실에 마주 앉아 있는 성준과 진아.
"환자는 아니신 것 같은데… 병문안 온 거에요?" 성준이 물었다.
"아…… 네. 저희… 할머니가…입원해 계셔서요. 아참, 학생이신 것 같은데…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성준에게 관심이 있는 눈빛의 진아.
"아, 전 이번에 스물 다섯이요. 4학년이고, 이름은 하성준이구요."
"아, 저보다 오빠시구나. 근데… 낯이 익어서 그러는데…혹시… 학교는 어디세요?"
"아, 저 그냥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교 다니는데…." 수줍은 듯 머리를 긁적이는 성준이었다.
"서울 4년제요?! 저두 그렇게 따지면 서울 4년제 다니는데. 혹시… 한국대 학생…아니세요?" 진아가 성준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어? 어떻게 알았지?" 성준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저도 한국대 다니거든요. 전 이번에 3학년 올라가요."
진아의 말에 여전히 놀라는 눈치의 성준이었다.
"근데 왜 한국대라고 당당히 밝히지 못하신 거예요?" 진아가 그런 성준을 보며 물었다.
"아… 사실,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 한국대 다닌다고 말하면…다들 너무 놀라워하고 그러니깐 좀 그래서요… 그래서 나중에 친해지면 얘기하는 편이에요. 아참, 후배…님은 이름이 뭐라고 했죠?"
"아, 제 주변에도 그러는 애들 있어요. 저도 한국대 학생이지만… 사람들 반응이 좀… 부담스러울 때가 있죠. 그래서 오빠가 왜 그러셨는지 이해가요. 아참, 제 이름은…"
순간 진아는 자신의 이름을 솔직하게 밝히는 것이 꺼려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학교에 '불륜녀'따위로 자신의 이름이 이미 유명해져 있었고, 수화에게 완벽하게 복수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분을 철저하게 숨겨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본능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아, 제 이름은 정수진요." 즉석으로 지어냈지만 자연스럽게 가명을 이야기하는 진아였다.
“아, 정수진. 아무튼 반가웠어요. 다음에 개학해서 학교에서 마주치게 되면 밥 한 번 같이 먹던가 해요.”
“네. 당연하죠. 참 선배님이신데 말 놓으세요.” 미소 짓는 진아였다.
“아, 초면에 말 잘 안 놓는데…….” 머리를 긁적이는 성준.
“그럼… 만약에 다음에 또 마주치게 되면 그때는 말 놓기에요?”
“아, 그러죠 뭐. 오늘 신세도 졌는데…. 아, 저는 이만 뭐 좀 먹으러 가야겠어요." 성준이 일어나며 말했다.
"아, 저기… 병원에 있는 게 너무 심심해서 그런데… 앞으로 저희 할머니 퇴원할 때까지 친구하면 안 될까요? 보아하니, 병원 밥도 질리셔서 밖에서 드시는 것 같은데…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진아가 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아… 근데… 저 밖에서 먹는 건 오늘이 마지막 일지도 몰라요. 어머니가 오늘 일 때문에 못 오셔서 몰래 사먹는거거든요." 성준이 머쓱해하며 말했다.
"아, 그래요? 그럼 뭐… 할 수 없죠…." 진아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요. 그럼… 할머니 빨리 나으시길 바랄게요."
자신에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 떠나가는 성준의 뒷모습을 엉큼하게 바라보는 진아였다.
'어떻게 하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안 되겠어… 우연히 만날 수 있게끔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겠어.'
1층 매점에 도착하여 컵라면과 과자 몇 가지를 사서 자리에 앉는 성준.
성준은 우연히 만난 진아가 신기했지만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
집에 도착하여 편의점에서 사온 도시락을 먹는 수화. 자꾸만 핸드폰을 확인해보고는 한숨을 내쉰다.
‘오늘 따라 왜… 성준이한테 연락이 없는 거지?’ 조금 불안해지는 수화였다.
그때 핸드폰 진동 울린다.
[수화야. 저녁 먹었어? 난 지금 오랜만에 매점에서 컵라면 먹는 중.]
성준의 문자에 표정이 환해지는 수화였다.
[잉? 왠 컵라면? 병원에서 오늘 밥 안 나와?] 이내 성준의 건강이 염려되는 수화였다.
[아, 오늘 엄마가 급한 일이 생겨서 못 오셨거든. 그래서 간만에 병원 밥 땡땡이 좀 쳤어.]
[그럼 나한테 일찍 알려주지 그랬어… 같이 밥 먹었을 텐데.]
[으이구. 내 걱정 하지 마. 이제 병원 밥이 슬슬 질릴 때가 됐나봐. 빨리 퇴원해서 수화랑 맛있는 거 먹으러 다녀야지. 나 퇴원하면 수화가 가고 싶었던 데 다 가자. 지금부터 알아놔. 하나하나 빠짐없이 다 가자.]
[일단 퇴원이나 해. 참, 그럼 내일은 어머님 오시는 거야?] 성준의 간지러운 말에 말을 돌리는 수화였다.
[아마도 저녁쯤이나 오실 것 같긴 한데… 뭐 괜찮아. 조금 심심하겠지만.]
[나 내일 학교 특강 있는데 그럼 그거 끝나구 갈게. 너 걱정되어서 안 되겠어. 성준이 너 어른스러운 줄 알았더니 은근히 어린애 같은 면이 있네?]
[왜에. 실망했어?] 수화의 말에 조금 서운한 표정의 성준이었다.
[장난이야. 아무튼 내일 아침은 꼭 병원 밥으로 먹겠다고 약속해.]
[알았어. 약속할게. 근데 수화야… 나 할 말 있는데… 잠깐 전화해도 돼?]
갑작스러운 성준의 전화하자는 말에 왠지 모르게 가슴이 철렁대는 수화였다.
곧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조심스러운 수화의 목소리였다.
[아 좋다아.]
“뭐가?”
[수화 목소리 들으니까. 좋아서.]
“치. 근데… 왜 전화하자고 한 거야?”
[응… 혹시… 내가 그때 고백했던 거… 이제… 대답해줄 수 있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장난스럽던 성준이었는데 급 진지한 모습에 당황스러운 수화였다.
“아……. 미안한데… 아직은… 확실하게… 대답 못 하겠어….”
수화는 오늘 만났을 때 무언가 숨기는 듯한 성준의 표정이 기억났다.
“아… 그래? 그래도 괜찮아. 내가 약속했지? 수화 너… 마음 괜찮아 질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성준의 말에 자꾸만 의문을 품는 수화였다. 수화는 오늘 휴게실에서 누구와 통화를 했었는지, 왜 표정은 갑자기 어두워 졌던 건지 성준에게 전부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배신과 이별의 아픔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수화는 행여나 성준의 대답에 상처를 받게 될까 두려웠다.
전화를 끊은 수화는 밥맛이 떨어졌는지 한 입 정도밖에 먹지 않은 도시락 뚜껑을 덮어 도로 냉장고에 집어넣고는 침대로 돌아와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푸우…….” 마음이 답답하여 깊은 한숨을 내쉬는 수화였다.
전화를 끊은 성준 역시 조금은 가라앉은 표정이었다.
성준은 수화가 아직 이별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자신이 기다리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병문안을 찾아오고 도시락을 챙겨주는 행동들이 단지 수화의 죄책감 때문은 아니길 바랐다.
***
다음 날 아침.
아침 일찍 병원에 도착해서 성준의 병실 앞을 서성이는 진아.
‘이제 곧 밥 먹고 나올 때가 됐는데….’
그때 마침 성준의 병실 문이 열렸고 진아는 우연히 병실 앞을 지나가는 척 하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식판을 아슬아슬하게 들고 문 밖으로 나오고 있는 성준.
“어? 안녕하세요. 이리주세요. 제가 갖다 놔 드릴게요.” 진아는 성준과 우연히 마주친 척 하며 냉큼 식판을 뺏어서 급식 차에 가져다 놓았다.
“오늘 이렇게 또 보네. 고마워요. 도와줘서.” 금세 뛰어 온 진아에게 미소 짓는 성준이었다.
“고맙긴요. 당연히 도와야죠. 근데 어제 말 놓기로 하시지 않았나요?”
“아, 맞다… 말 놓기로 했었지?”
“네. 근데 오늘은 병원 밥 드시는 거 보니까… 그래도 이제 드실 만 하신 가 봐요?”
“응. 먹기 싫었는데 약속을 해서.” 머쓱하게 웃는 성준이었다.
“약속…이요? 누구랑요…? 설마 여자친…구?” 은근히 떠보는 진아였다.
“하하. 아직 여자 친구 단계는 아니고… 그냥… 좋아하는 친구야.” 수줍은 표정의 성준이었다.
성준의 말에 얼굴이 붉어지는 진아였다.
‘한수화. 진짜 대단해. 금세 다른 남자도 꼬시고 말이야. 보통 여우가 아니었다니깐.’
“그럼… 고백은 왜 안 해요? 오빠는 뭐 잘 생기셨으니까 고백하면 잘 될 것 같은데요?” 진아가 떠보듯 말했다.
“사실… 여태까지 만났던 사람들은 다 내 겉모습 때문에 날 좋아했었던 것 같아. 근데 이 친구는 좀 달랐어.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준다는 느낌이랄까. 근데 이 친구가 얼마 전에 남자친구랑 헤어졌거든. 그래서… 마음이 좀 나아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아… 그렇구나. 누군진 몰라도… 좋겠네요 그 여자분은.” 은근히 비꼬듯 대답하는 진아였다.
“나 이제 좀 씻으러 가야되겠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
자신에게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는 것 같은 성준의 태도에 점점 화가 나는 진아였다. 그러나 더 화가 나는 것은 아무리 애써도 성준을 꼬실 수 없을 것 같다는 좌절감에서였다.
성준의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무는 진아의 손은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
세면실에서 간단히 씻은 후 병실로 향하는 성준.
병실 앞에 어떤 여자가 서 있다.
“누구지?” 자세히 다가가는 성준이었다.
“성준아…!” 그녀는 성준의 전 여자 친구인 솔아였다. 성준을 보고는 반갑게 달려가는 솔아.
“…여긴 어쩐 일이야?” 갑작스러운 솔아의 방문에 당황하는 성준의 표정.
“내가 어제 그랬잖아. 너한테 뭐… 줄 거 있다구.”
그제야 어제 솔아가 했던 통화가 기억나는 성준이었다.
***
자신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솔아에게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건네주는 성준.
“뭐 이런 걸 가져왔어. 내가 줬던 선물이니까… 그냥 너 가져.”
“성준아. 사실… 내가 여기 온 거는… 선물 때문이 아니구… 성준아. 그냥 나한테 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될까…? 다시는 너한테 헤어지자고 안 할 게. 응?” 성준에게 매달리는 솔아.
“하…… 솔아야. 내가 그랬지. 나 이미 좋아하는 사람 생겼다고. 그러니까 솔아 네가 아무리 나한테 다시 시작하자고 말해도… 내 마음은 변함없을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뭘 바라고 왔다면 이만 돌아가 줘.” 단호한 태도의 성준이었다.
“성준아. 제발…… 나… 네가 줬던 선물들… 너랑 찍었던 사진들… 하나도 안 지웠어. 아니, 못 지웠어… 집 앞에만 나가두… 너랑 갔던 곳들… 모두다 너랑 함께 했던 시간들로 가득해. 그래서 나… 너 없음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아. 그러니까 성준아… 눈 한 번만 딱 감구 나 좀 받아주라. 응?”
눈물 흘리는 솔아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진 성준이었다. 그러나 불쌍하다고 해서 솔아를 받아줄 수는 없었다. 성준의 마음 속에는 이미 수화가 자리잡았기 때문이었다.
성준은 티슈를 솔아에게 건네며 냉정하게 말했다.
“솔아야. 나 오늘은 좀 쉬고 싶다. 그러니까 부탁이야. 돌아가 줘.”
성준의 병실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엿 듣고 있던 진아는 뭔가 해결책을 얻었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