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6 그녀의 요상한 판타지 =========================================================================
저녁 식사를 한 후 신화여대 앞 로데오 거리를 걷고 있는 수화와 서연.
“언니,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서연이 수화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아냐. 나 혼자 갈 수 있어. 오늘은 왠지 혼자 걸으면서 생각 좀 하다 들어가고 싶어서.”
서연과 헤어진 수화는 학교 근처에 있는 청계천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래… 내 주제에 좋은 사람을 만날 리가 없잖아….’
수화는 엄마와 아빠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부모의 이혼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며 상처를 많이 받았던 수화는 자신의 부모처럼 마음이 맞지 않는 상대와 결혼하여 결국 파국으로 치닫는 것보다 처음부터 자신을 평생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 늙어서도 헤어지지 않고 따뜻하게 사랑하며 살기를 원했다.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경우에는 그냥 평생을 혼자서 살아야겠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조금씩 하고 있었던 수화였다.
생각에 잠겨 걷다보니 어느새 자신의 집과 멀리 떨어져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수화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집으로 향했다.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한 수화. 그런데 집 앞에 누군가 낯익은 모습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 진아였다. 머뭇거리다 진아에게 다가가는 수화였다.
"정진아. 네가 여기 무슨 일이야?"
수화를 보자마자 수화의 뺨을 한 대 치는 진아.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뺨에 손을 갖다 댄 채 진아를 째려보는 수화였다.
"너야말로 이게 무슨 짓이야? 어떻게… 네가 창호 선배를… 정신 병원에 보낼 수가 있어?"
"하… 지금… 그 말 하려고 이 시간에 날 찾아 온 거야? 근데 너… 내가 당했던 건 생각 안 하는 거니?"
"왜 이제와서 깨끗한 척을 하려고 그래? 한수화. 너. 선배랑 잤잖아. 근데 뭐… 강간미수? 너 미쳤어.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구!!!"
"미친 건 너야. 난 이미 오래전부터 창호오빠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어."
"너… 그 말 사실이야? 하늘에 대고 맹세할 수 있어? 다시는… 나한테서 창호선배 안 뺏어가겠다고… 맹세할 자신이 있냐구?!" 진아가 이글이글 불타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 창호같은 쓰레기… 백트럭줘도… 아니, 억트럭줘도 안 가지니까!! 제발 좀 네가 수거 해가라. 응?"
강하게 나오는 수화에게 잠시 당황한 진아는 이내 수화를 째려보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런 진아의 뒷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어 코웃음을 치는 수화였다.
그때 수화의 핸드폰 진동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어? 누구지……?”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전혀 모르는 번호였다.
수화는 괜히 겁이나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들고 받을까 말까 망설였지만 이내 용기를 냈다.
“…여보세요?” 조심스럽고 떨리는 목소리로 응답하는 수화.
“여보세요…? 수화양…?” 전화를 건 상대방은 수화의 어머니와 비슷한 연령대인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네… 누구세요?”
“나… 성준이 엄만데… 성준이가 지금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해 있어… 며칠째 못 깨어나다 이제 겨우 깨어났는데 잠결에 자꾸 ‘수화야… 수화야…’ 이름을 불러서…….”
흐느껴 울고 있는 성준의 어머니 목소리를 들은 수화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수화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성준이 입원한 병원으로 달려갔다.
***
병원으로 한달음에 달려온 수화는 어느새 성준이 입원해 있는 병실 앞에 도착했다.
병실 앞 문패에 적혀 있는 성준의 이름을 보니 정말 성준의 사고가 실감나기 시작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병실에는 머리에 붕대를 감은 채 누워 있는 성준과 그의 곁에서 그의 손을 꼭 붙잡고 울고 있는 성준의 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네가… 수화니…?”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수화를 반기는 성준의 어머니였다.
“네… 안녕하세요. 제가 수화에요… 근데… 성준이는… 어떻게 된 거예요…?”
“그게… 그 날 엄마 생신이라 케이크 사 들고 오겠다는 애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고 태백에 다녀오겠다는 거지 뭐야…. 그런데 몇 시간 후에 병원에서 전화가 오더니… 성준이 차가 눈길에서 미끄러져서… 흑흑…….” 성준의 어머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울기 시작했다.
'태백이라면… 설마… 날 구하려고 오다가 사고난 거야…?!' 수화의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수…화야… 수화…야…….” 자신을 부르는 성준의 목소리에 성준의 곁으로 달려가는 수화였다.
“성준아…!! 괜찮아??” 수화의 눈은 이미 눈물로 젖어 있었다.
수화의 목소리에 눈을 뜬 성준은 수화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성준아… 너 대체 어떻게 알았던 거야… 어떻게 알고… 태백까지 쫓아와서 이렇게 된 거야… 이 바보야… 이게 뭐야… 흑… 흑…….”
성준은 자신의 곁에서 눈물을 흘리는 수화를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애썼다.
“성준아… 의사 선생님이 너 안정을 취해야 한 대….” 성준을 염려하며 어머니가 말했다.
“…괜찮아요. 어머니….” 성준은 웃으며 손사래를 치고는 기어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고, 성준의 어머니는 눈물을 닦으며 자리를 피해주었다.
“…수화야.” 고개 숙여 울고 있는 수화를 불러 보는 성준.
“…응.” 고개 숙인 채 힘 없이 대답하는 수화.
“…울지 마. 우리 수화… 아악….” 성준이 수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해주려다 성준의 팔에 꽂혀있던 주사 바늘이 잘못 건드려진 모양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수화는 큰일이라도 난 듯 성준의 팔을 샅샅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 수화를 보며 괜히 피식 웃음이 나는 성준이었다.
“뭐… 뭐야… 하성준…. 너 왜 웃어? 너 방금 장난이었어? 설마… 아픈 것도 다 거짓말이었던 거야?” 장난스런 성준을 보며 깜빡 속은 기분이 드는 수화였다.
“좋아서.”
“뭐?”
“좋아서… 수화 네가 앞으로도 내 옆에서 이렇게 내 걱정해주고 늘 그렇게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봐줬으면 좋겠다….”
자신의 말에 걱정스레 미소 짓는 수화가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성준이었다.
“수화야….”
“응…?”
“나… 소원이 하나 있는데….”
“…뭔데?”
“…나… 너 한 번… 안아 봐도 돼…?”
수화는 순간 대답하지 못하고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그러자 성준은 그런 수화를 덥석 자신의 품에 안았다.
성준의 품에 안겨진 순간 수화는 자신의 심장이 쿵쿵 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수화야. 고마워… 내 옆에 있어줘서….”
수화 역시 쿵쾅쿵쾅 뛰고 있는 성준의 심장 소리를 느꼈고 처음으로 안겨본 성준의 가슴팍이 낯설게 느껴졌지만 왠지 설레기만 하는 수화였다.
“…나도… 고마워….”
***
오랜만에 서연, 현정과 예술의 전당 전시회를 찾은 수화.
"이번 전시회 지인짜 기대 많이 했는데!" 서연이 흥분된 얼굴로 말했다.
"나두. 근데 딱 오늘까지 전시 한다 그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현정이 서연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어? 근데 여기 보니깐 오디오 가이드도 필요한 것 같은데?" 수화가 전시회 설명이 적힌 카드를 보며 말했다.
"아! 언니. 그럼 제가 오디오 가이드 가져올게요. 근데 오디오 가이드 어디서 받지?" 서연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안되겠다. 서연이 너 길 잘 잃어버리잖아. 나랑 같이가자. 나 어디서 받는 지 알아." 든든한 현정의 말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서연이었다.
"응. 다녀와. 나 여기 있을게." 사이가 좋은 현정과 서연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수화였다.
그때 수화의 전화벨소리 울린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조심스레 전화를 받아보는 수화였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전화를 끊으려는 수화.
그때
"수화야." 낯익은 목소리 들려왔다.
"……!!!" 수화는 아주 잠시동안 '누구 목소리였더라.'했지만 이내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수화야. 끊지마. 제발… 내 얘기 좀 들어주라. 마지막 부탁이야. 응?" 흐느끼며 간절하게 이야기하는 창호였다.
"……."
"내가 생각 많이 해봤는데… 나 진짜…나쁜놈이었더라… 하지만 이젠… 내가 너한테 무슨 잘못을 했는지… 다 알았고… 반성도 했어… 아니… 앞으로 죽을 때까지 반성해도 모자르다는 거… 알아… 수화야…듣고 있니…?"
수화는 '마지막 부탁'이라는 창호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수화야. 믿을 진 모르겠지만…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사랑했었던 여자는 바로 너였어… 사랑이 그렇더라… 옆에 있을 땐 사랑인 줄 몰랐는데… 네가 날 떠나갔던 그 순간부터… 내가 진정하게 사랑했던 사람은 너였다는 걸… 난 너무 늦게 깨닫기 시작했어…."
창호의 말에 괜시리 눈시울이 붉어져 입술을 꾹 깨무는 수화였다.
"수화야. 내가 출소하면… 네 얼굴 보면서…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은데…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은데… 그건 안 되겠지…?"
대답 없는 수화였다.
"미안……. 내가 갑자기 전화해서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것 같네… 이만 전화 끊을게…."
"…오빠."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렸던 수화의 목소리에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 창호였다.
"저도… 오빠 만나서… 처음으로 대학 생활이 즐거웠어요… 여대라서 씨씨는 못했지만 오빠 덕분에 한국대를 오가면서 즐거운 시간도 보냈었구요. …저도… 오빠를 정말… 많이 좋아했었어요. 오빠랑 제가 지금은 이렇게 된 게 정말 유감이지만… 이제 오빠도 정말… 진심으로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수화야… 오빠를 한 번만 더… 믿어주면 안 되겠니? 그럼 진심으로 행복할 것 같은데… 응?" 울먹이는 목소리의 창호였다.
"…오빠를 이제 믿을 수 없어요… 그것보다… 오빠에게 더 이상 남아있는 감정도 없구요…."
그때 서연과 현정이 뛰어오는 모습이 멀리서 보인다.
"…오빠… 이만 전화 끊어야겠어요. 앞으론… 전화 안 했으면 좋겠어요. 진심으로…오빠의 행복을 빌게요."
전화를 끊은 수화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웃으며 서연, 현정과 함께 전시실로 들어갔다.
***
창호는 끊겨 버린 수화기를 들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으흑흑흑… 흑흑흑…… 으흑흑흑……"
그때 멀리서 창호를 발견한 교도관이 창호에게 다가와 누군가 접견신청을 해왔다고 전했다.
잔뜩 울어 빨개진 얼굴로 접견실로 들어가는 창호.
"…선배…." 창호의 모습을 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진아였다.
"하… 니가 여긴 웬 일이야?" 진아를 보자 언제 울었냐는 듯 화를 내는 창호.
"…선배… 일단 앉아요…."
진아를 죽일 듯이 째려보며 자리에 앉는 창호였다.
"…선배… 얼굴이 많이… 상했어요… 잘 생겼던 얼굴이 그게 뭐예요…." 안쓰러운 표정의 진아였다.
"하… 니가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내가 니 남친이라도 되냐? 어?" 띠껍게 진아의 말을 받아치는 창호.
"선배… 지금 마음이 많이 복잡하고… 힘드시죠? 선배 여기서 나오면… 우리… 다시 새로 시작해요. …학교에… 우리 소문이 쫙 다 났어요… 어제는 학교에 갔는데… 누가 절 알아보구 저한테 밀가루를 뿌리는 거 있죠? 근데… 나… 선배만 옆에 있으면… 그런 거 다 참구… 학교 다닐 수 있을 것 같아요… 선배만 약속해주면… 나… 이번해에 선배 없이도 꾹 참고 열심히 학교 다닐게요."
"무슨 약속?" 어이 없는 표정의 창호.
"선배… 정말 몰라서 묻는 거예요? 선배 여기서 나오면… 우리 다시 전처럼 예쁘게 만나요. 며칠전에 한수화도 만났어요. 만나서 확실하게 대답 받아냈어요. 한수화가… 선배… 절대 만나지 않을거래요…"
"뭐? 정진아!!!!! 너 진짜 미쳤구나?!?!?!" 수화가 자신을 거절한 것이 진아 때문인 줄 알고 착각하며 불같이 화를 내는 창호였다.
"선배… 제발 진정해요… 한수화는 더 이상 선배를 사랑하지 않아요… 선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건 바로 저라구요. 그러니까… 선배도 이제 그만 정신차리구 초심으로 돌아가서… 우리 다시 시작해요… 네?"
"뭐? 정신 차리라구? 아니. 절대. 내가 너한테 돌아가는 일…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없어. 그러니까 돌아가." 매정하게 이야기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창호였다.
"선배… 제발… 나… 선배 없으면 안 되는 거 알잖아요… 선배 제발…" 진아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애절한 눈빛으로 창호를 잡아 보았다.
그러나 진아의 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창호는 방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때, 창호의 뒷통수에 소리치는 진아였다.
"선배!!!! 그럼… 마지막으로… 저한테… 한 번만… 따뜻하게… 사랑한다고 말해주면 안 돼요? 선배가 그렇게 돌아서버리면… 나 진짜… 죽어버릴지도 몰라요…!!!" 울먹이며 진아가 소리쳤다.
"하… 그럼 죽어. 확 죽어버려. 됐어?" 멈춰서 차가운 말 한 마디를 던지고는 방에서 빠져나가는 창호였다.
창호가 떠난 텅 빈 접견실 안에서 멍한 표정으로 한참을 눈물 짓는 진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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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요상한 판타지를 사랑해주시는 독자님들,
이제 이번주면 그녀의 요상한 판타지가 막을 내립니다.
끝까지 지켜봐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