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1 새로운 시작 (8) =========================================================================
수화가 집 근처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있다.
‘음… 내일 기차 안에서 간단히 뭘 먹으면 좋지?’
그때 수화의 핸드폰 진동 울린다.
[수화야… 저녁은 먹었어? 혹시 이번 주에 시간 있어? 수화 네가 좋아하는 재즈 콘서트 티켓이 두 장 생겨서… 시간 되면 같이 가자. 콘서트장 근처에 진짜 맛있는 레스토랑도 있으니까 거기도 가자.]
성준의 문자에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 수화였다. 하지만 수화는 이내 표정을 고쳐 다시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그동안 수화는 성준이 만나자고 하는 연락을 다 무시했었다. 다가오는 성준이 싫진 않았지만 무언가 두려운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수화를 이해했는지 답장이 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성준은 수화에게 꾸준히 안부 문자를 전해왔다.
수화는 문자를 보자, 성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짧은 답장이라도 해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 나… 내일… 여행 가.] 답장을 보내고는 한숨을 한 번 쉬고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는 수화.
수화가 장을 다 보고 슈퍼마켓 밖으로 나오고 있는데 전화 벨소리 울린다. 성준이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다 조심스레 핸드폰을 받아 드는 수화.
“…여보세요…?”
“수화야. 내일… 여행 어디 가는데?”
“먼 곳은 아니구… 가까운 곳으로…”
“그래? 좀 서운하다. 난 너한테 매일 연락하는데… 너가 여행 가는 줄도 몰랐어.” 서운한 말투의 성준.
“…성준아.” 그런 성준을 이해는 하지만 여전히 낯설어 부담스러운 수화.
“…나 이따가 신화여대 근처 지나가는데… 잠깐만 나와줄 수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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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준과 통화를 끝내고 기운 없는 표정으로 집으로 통하는 골목길을 걷고 있는 수화.
‘…성준이 같이 멋있는 애가… 왜 날… 좋아하는 걸까…?’
수화는 남자에 대한 상처와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성준과 자신은 너무도 많이 차이가 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수화의 그런 마음은 창호를 만나고부터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었다. 정확히 말하면, 진아와 양다리를 걸치는 순간부터. 좋은 사람인 줄 알았던 창호가 알고 보니 인성도 바닥에다 양다리까지 걸쳤으니, 수화의 자존감은 그리도 떨어질만 했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못나서 그런 사람을 만난 거야…. 아니, 어쩌면 창호 오빠보다 내가 더 안 좋은 사람일지도 몰라….’
창호와 헤어지고 나서도 수화의 자존감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성준의 끊임없는 연락 덕분에 자존감은 딱 거기까지만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떨어져버린 자존감은 쉽게 회복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한 수화. 그런데 가로등이 고장나 어두컴컴한 현관문 앞에 누군가 서 있다.
“수화야.” 창호였다. 그는 추위에 오랜 시간 떨었던 듯 덜덜 떨고 있다가 수화를 보자마자 반가운 표정으로 수화에게 다가갔다.
“오빠… 여긴… 무슨 일이세요?” 창호의 갑작스러운 기다림에 당황해하지만 티를 내지 않는 수화.
“수화야. 왜 내 연락 안 받아…? 혹시… 내 번호 스팸 처리한거야?”
“….”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수화.
“수화야. 진짜… 나 한 번만… 한 번만 봐주면 안 돼? 나… 진아하고 헤어지고 왔어. 매몰차게, 걔 차버리고 왔다고… 그러니까 나 이제 정신 차리고 너 하나만 바라보고 너 하나만 사랑할게. 그러니까 수화야…”
“오빠가 아직도… 착각하시나 본데요…. 저… 이제 오빠… 안 좋아해요.”
“하지만… 하지만 너… 내가 첫경험 상대였잖아. 첫경험 상대를…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 있어?”
“네. 맞아요. 오빠… 제 첫경험 상대였어요. 근데… 아닌 건 아니잖아요. …아닌 사람을 그런 이유로… 계속 붙잡고 있는 게… 얼마나 미련한 짓인지… 오빠가 가르쳐줬잖아요.”
창호는 묵묵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수화를 보며 정말 수화의 마음이 떠났구나 실감했다. 하지만 수화를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수화 너. 내가 첫경험 아니지? 아니니까 네가 이렇게 나오지…!! 첫경험인데… 이렇게 쉽게 포기할 리 없지!!” 집착과 의심의 눈초리로 수화를 다그치는 창호.
“….” 미안하다고 빌어도 모자랄 판에 이젠 자신의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아픈 첫경험까지 의심당하고 있는 사실에 가슴이 아픈 수화, 눈물이 차올랐지만 애써 참아본다.
“수화 네가… 정 못 믿겠다면… 내가 보여줄게.”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창호.
[…선배…왜요…?] 잠시후 진아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창호는 스피커폰을 켜 수화에게 들려주었다.
“…!!” 당황해 하며 창호를 쳐다보고만 있는 수화.
“나 지금 수화랑 같이 있어.”
[하…그래서요?] 어이없는 듯한 목소리의 진아.
“너도 알다시피 나 수화… 진짜진짜 많이 사랑하고, 너한테는… 그동안 가지고 놀아서 미안했다.”
[…아…….] 열이 한껏 받아 말이 안 나오는 듯한 진아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전화를 뚝 끊어버리는 창호.
그런 창호를 보며 역시 어처구니가 없는 수화.
“봤지? 나… 널 위해서 이렇게 진아 차버렸어. 이제 내 진심 알겠지? 내가 널 이렇게…”
“오빠. 그런 모습 보니까… 저 이제 진짜 마음 정리 되는 것 같아요. 저 이제 앞으로 오빠 안 봤으면 좋겠네요. 저도 지금 오빠에 대한 마음… 정리하고 있으니깐, 오빠도 더 이상 저한테 연락하지 말아주세요.”
“정리하지마.” 수화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받아치는 창호.
“??”
“나에 대한 마음… 정리하지 말라고. 내가 너 마음 정리 하기 전에 이렇게… 널 찾아왔잖아. 그러니까 마음 정리 하지말고… 나한테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하…. 오빠…. 정말 한국대생 맞아요? 한국대생들은… 다 똑똑한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말 뜻을 못 알아들어요? 나…! 이제 오빠한테 마음 없다구요. 아, 마음 정리한다고 내가 말했던 거는… 정확히 말하면, 오빠한테 받았던 내 마음에 상처… 그거 아물게끔… 내 자신 스스로한테 시간을 준다는 뜻이었어요. 오빠가… 나한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는지 알아요? 오빤, 내가 오빠 첫경험 상대라는 걸 알고… 진아랑 더 당당했어요. 오빤…!! 저한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다구요…!!” 울음이 터져버린 수화.
그제서야 수화의 마음을 알아차린 창호. 울고 있는 수화를 안아주려 다가가지만, 뿌리치는 수화였다. 그러자 말없이 뒤돌아서서 가버리는 창호였다.
수화는 창호가 사라지자, 눈물을 닦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온 수화는 복잡하고 답답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밀린 설거지를 하고, 세탁기를 돌리고, 청소기를 돌리고, 욕실 청소까지 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11시가 되었다.
'그래. 역시.. 이렇게 정신없이 청소하는 동안에는 잡생각이 나지 않아서 좋아.'
그렇게 열심히 청소를 하다 보니 허기가 진 수화는 라면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리 부유하지 않은 학생신분 이다보니 냉장고에 재료는 많지 않았지만, 건강을 챙기기 위해 항상 달걀만큼은 구비하고 있던 수화였다.
반숙 달걀을 좋아하는 수화는 라면이 다 끓여지기 1분 전 즈음에 달걀을 풀어 넣었다. 그렇게 라면 불을 끄면 달걀의 노른자는 풀어지지 않고 적당히 익어서, 비리지 않으면서도 부들부들한 노른자의 식감을 느낄 수 있었다.
책상 위에 대충 언젠가 학교에서 가져왔던 학교신문을 깔고는 그 위에 냄비를 내려놓고 냄비째 라면을 먹기 시작하는 수화였다.
대학교에 들어와 자취를 하면서 라면은 수화의 '소울 푸드(soul food)'가 되었다. 아빠의 외도로 인해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부모님 두 분 모두 재혼을 하시는 바람에 수화는 아빠에게도 엄마에게도 편하게 연락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수화의 엄마와 아빠가 반씩 합쳐 그나마 지금 살고 있는 학교 앞 원룸을 얻어 주시긴 했지만, 수화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고, 언제나 불안한 마음이었다.
그런 수화가 돈을 아끼기 위해서 먹기 시작한 라면은 언제나 외로운 수화를 위로해주었던 것이다.
수화는 주변 친구들이 모두 힘든 일을 겪어도 돌아가서 위로받을 '가족'이 있다는 것에 항상 부러움을 느꼈다. 대학교 초반 때에야 그나마 엄마와 연락을 간간히 주고받긴 했지만 엄마의 '새 남편'이 수화의 존재를 불편해한다는 것을 느끼고 나서야 수화는 더 이상 엄마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런 수화가 대학교에 들어와 처음으로 '성인'이 된 후에 진지하게 만난 사람이 하필, '창호'였던 것이다.
수화는 창호와 만날 때만큼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비빌 언덕이 없던 수화는 자신도 모르게 창호에게 의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쁜 남자 창호는 그런 수화를 보듬어주지는 못할망정 진아와 양다리를 걸쳐 수화의 가슴에 더 큰 상처를 남겼다.
라면을 정신없이 먹으면서 왜인지 모를 눈물이 수화의 눈에 맺혔다.
수화는 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라면을 후루룩 먹어댔지만, 아무리 먹어도, 먹어도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수화는 주방 선반에서 인스턴트 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린 뒤 숟가락으로 슥슥 밥알을 긁어 모조리 냄비에 집어넣고는 라면에 대충 말아 숟가락에 가득 밥을 떠 퍼먹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먹다보니 어느새 냄비는 텅 비었고 수화는 그 냄비를 싱크대에 넣어놓고는 설거지를 하려고 물을 틀었다. 좁은 원룸이라 냄새가 금방 번지기도 했고, 원래도 성격상 먹은 것을 바로바로 설거지를 해왔던 수화였지만 창호와 헤어진 후에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서였는지, 힘이 나지 않아서였는지 설거지를 제때제때 안 해놓고 밀리게 방치해 두었었다.
하지만 창호를 집 앞에서 만난 뒤에 분노의 집안 청소와 밀린 설거지를 했던 수화는 깨끗한 싱크대를 보면서 '역시 집이 깨끗하니까 마음도 맑아지는구나.' 하는 것을 느껴서 바로 지금 먹은 라면 냄비도 바로바로 씻어서 그나마 이 맑아진 기분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그러나 설거지를 하려고 고무장갑을 끼려는데 갑자기 뭔가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끼는 수화였다. 창호에 대한 분노와 슬픔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라면에 밥까지 후루룩 먹었던 것이 속에서 부대낀 게 틀림없었다.
수화는 고무장갑을 벗어서 냉장고 문을 열고는 매실 엑기스를 찾았다. 그러나 엄마가 아주 오래 전에 주었던 그 매실 엑기스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어서 컵에 흘려보려고 해도 한 두 방울 정도밖에 흘려지지 않았다.
수화의 엄마는 항상 수화가 체할 때마다 따뜻한 물에 매실 엑기스를 타서 주곤 했었다. 그리고 수화의 등과 팔 등을 쓸어내려주면 금방 괜찮아지곤 했다.
수화는 갑자기 엄마 생각에 슬퍼졌지만, 심신이 너무 지쳐있던 탓인지 눈물을 흘릴 힘도 없었다.
다행히도 냉장고에는 탄산음료가 있었다. 수화의 고등학교 친구인 날라리과 황태성이라는 친구가 ‘체했을 때는 탄산음료를 벌컥벌컥 마시면 괜찮아져’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이 났다. 그래서 수화는 뚜껑을 따서 탄산음료를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말 태성의 말처럼 속이 쑥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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