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0 새로운 시작 =========================================================================
창호가 비정한 표정으로 한국대 캠퍼스를 가로 질러 지나가고 있다.
‘하… 이번엔 꼭 끝내야 돼. 수화 말대로… 그건 진아한테도 못 할 짓이야…….’
공학관을 지나 어느새 경영관 쪽으로 진입한 창호는 저 멀리 건물 앞 벤치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기다리고 있는 진아의 뒷모습을 발견하고는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이제 저 뒷모습도… 마지막이겠지…? 그래. 처음에는 진아를 좋아했었지… 하지만 그때 진아는 남자친구가 있었고… 진아가 나한테 왔을 땐… 그땐 이미 난… 수화를 좋아하기 시작했었지…….’
창호는 진아와의 추억들을 나름대로 되새겨 보기 시작했다. 풋풋했을 때였다. 하지만 창호와 진아는 첫 단추부터 이미 잘못 끼워진 인연이었다.
창호가 잠시 추억에 잠겨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때 진아가 주위를 둘러보다 창호를 발견하고는 웃으며 뛰어온다.
“선배!” 환하게 웃으며 창호를 끌어안는 진아.
“응….” 그런 진아를 얼떨결에 안는 창호.
“선배. 오늘 데이트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요?” 창호의 품에서 나와 장난 섞인 말투로 이야기하는 진아.
“응? 데이트…? 아, 일단… 날도 추운데… 우리 따뜻한 거 마시면서… 얘기 좀 할까…?”
“피. 설마… 선배… 오늘 백억 년 만에 데이트 신청한 거면서… 데이트 코스도 안 짜온 거 아니죠?” 입술을 삐죽이는 진아.
그런 진아를 보며 조금은 마음이 아팠는지 창호는 씁쓸한 웃음을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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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여대 글로벌 캠퍼스에서 ‘신화인 방학 영어회화 특강’을 들은 후 건물에서 빠져 나오고 있는 수화.
수화 옆에는 영어회화 수업을 옆자리에서 함께 들으며 친해진 신화여대 2학년 김서연이 있다.
“언니, 언니는 방학인데 어디 안가세요?” 서연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수화에게 물었다.
“음… 글쎄… 해외여행도 가고 싶었는데… 너무 비싸구… 그래서 가까운 국내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했는데… 어쩌다보니 벌써 1월 둘째 주야.” 한숨을 푸욱 내쉬며 대답하는 수화.
“언니! 저 이번 주에 혼자 국내 여행 떠날려구 했는데. ‘내일로’라고 들어보셨죠?”
“내일로? 아… 그거 뭐더라. 티켓 끊으면 일주일 동안 기차 무료로 탈 수 있는 거?”
“네. 맞아요. 지금 일단 코스를 대략 짜긴 했는데요… 아무래도 혼자 여행 가기에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서요. 언니가 같이 가면 딱 좋을 텐데…….”
서연이 간절한 눈빛으로 수화를 쳐다보자, 수화도 마음이 덜컹 흔들리는 듯 했다.
“음… 그럼… 어디어디 가기로 했는데…?”
“일단 언니. 우리 밥 먹으면서 코스에 대해서 얘기해요. 네?” 수화의 말에 밝아진 표정의 서연.
“그래. 그러자.”
수화와 서연은 웃으며 팔짱을 끼고는 학생 식당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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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 내의 작은 커피숍.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자리에 마주 앉아 있는 창호와 진아.
“선배… 지금… 뭐라고 했어요?” 어두운 표정의 진아.
“이제 그만… 만나자구.” 커피 잔을 두 손으로 꼭 쥐고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있는 창호.
“선배… 장난 좀 그만 쳐요. 선배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진짜 같잖아요.” 이내 아무 일 없던 듯 웃어 보이는 진아.
“미안해. 너한테 정말… 내가 할 말이 없다.”
창호가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자, 지금 이 상황이, 창호의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하는 진아.
“하… 선배… 너무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 제대로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잖아요. 근데 왜 갑자기 그래요? 내가… 선배한테 뭐 실망시킨 거 있어요?”
“실망시킨 거 없어. 진아 네 잘못 하나도 없어. 그냥… 우유부단했던 내 잘못이었어. 모두 다 내 잘못이야…”
“선배. 이제 그만 자책해도 돼요… 선배도 할 만큼 했잖아. 선배가 좋아하던 사람도… 한수화보다 내가 먼저였잖아. 그리고 선배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언제나 나였구. 선배 잘못…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다 잊구… 새 출발해요. 네?”
“진아야. 하아… 나… 이제 수화에게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어. 그래… 내가 맨 처음 좋아했던 사람은 너였어. 그런데… 넌 남친이 있었구… 그 사이에 수화를 만나게 되었어. 그래서 난 갈수록 수화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네가 남친하고 헤어지고 와서… 나한테 넌 안 좋은 기억은 아니었기 때문에… 계속 널 받아 주고, 받아 주고 했었지만…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었던 것 같아. 진아 너한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내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수화였어. 그렇다고 해서 네가 싫다는 게 아냐. 지금도 진아 널… 좋아해.”
그런 창호의 말을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반박도 못한 채 계속 듣고만 있는 진아였다.
“그래서… 선배의 말은… 한수화한테… 돌아가겠다… 이거예요?” 생각을 정리한 후 진아는 천천히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창호가 대답 없이 고개를 내리깔자, 진아는 화가 나기 시작했다.
“선배… 그럼… 그동안… 나 가지고… 장난쳤던 거예요?” 창호를 똑똑히 쳐다보며 사악한 표정으로 웃어보이는 진아.
“장난친 게 아니라… 난 그냥…”
“그게 장난이지 뭐예요? 그럼… 내가 기다렸던 건 대체 뭔데요? 선배가… 마음에도 없는 한수화랑 사귀게 되어서… 정리할 시간을 줬던 거… 다 마음이 약한 선배를 배려하기 위한 거였어요. 근데… 그동안 진심으로 좋아했던 게… 한수화라니요?”
“미안해… 미안하다…….”
“그럼… 선배한테는 늘… 제가 그냥 심심풀이 땅콩..이었던 거네요?”
“하… 진아야… 그렇게 까지는 생각하지 말아주라….”
“선배한테 정말… 실망이에요. 선배가 그런 사람인 지 몰랐어. 나!! 그렇게 믿었고, 좋아했던 사람한테…제대로 뒤통수 맞은 기분이라구요…!!”
“하지만 세컨드가 되겠다고 한 건 너였어.” 진아의 말에 욱하는 창호였다.
“맞아요. 처음엔 세컨드가 되도 좋다고 했었죠. 하지만 그 후에… 선배는 나한테 한수화를 정리할 시간을 달라고 했고, 그래서 난… 힘들었지만 꿋꿋하게 선배를 기다렸어요. 그리고 선배두… 내가 다른 남자랑 술 마시는 거… 질투 났었잖아요? 그때 그건… 도대체 뭔데요?”
“그래… 그건… 진심이었어. 진아 네가… 다른 남자랑 있는 거… 질투 났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 질투는…단지 그냥 널… 내 옆에 두고 싶은… 소유욕…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어….”
창호의 말에 목이 타는 듯 물 한잔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진아.
“선배… 완전 구제불능이었네요? 선배가 지금 이러는 거… 나중에 후회할 행동이란 거… 모르세요?”
“진아야. 난… 더 이상의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오늘 너한테 만나자고 한 거야. 이제 앞으로… 너한테도, 수화한테도… 상처주고 싶지 않고.”
“됐어요. 선배가 그렇게 행동하는 게… 나한테는 더 큰 상처라구요!!”
진아의 말이 끝나자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창호는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마음의 정리를 끝냈다는 듯한 표정으로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진아야. 그동안 정말 미안했고, 앞으로… 너한테 상처 줄 일… 두 번 다시 없을거야. 그러니까 너도… 이제 좋은 남자만나서 잘 살아.”
창호는 빨개진 표정으로 멍하니 대답 없이 앉아만 있는 진아를 두고, 커피숍 밖을 성큼성큼 나가버렸다.
창호는 커피숍을 벗어나자마자 수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신호음은 곧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으니….'라는 멘트로 이어질 뿐이었다.
"하…. 얘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한 번만… 딱 한 번만이라도 받아주라…."
전화를 받지 않는 수화에게 어쩔 수 없이 문자를 보내는 창호였다.
[수화야. 나… 너랑 연락안 하니까… 너를 못 보니까… 진짜 죽을 것 같다. 그러니까 제발 연락 좀 주라.]
그때, 갑자기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함박눈이 창호의 눈에 떨어지자, 작년 크리스마스에 식당 밖으로 뛰쳐나간 수화가 생각이 나는 창호였다.
'그때… 내가 수화를 잡았더라면… 그럼 우리는 지금 아무 일 없이 잘 만나고 있었을텐데….'
고집과 자만심때문에 수화를 잃은 것을 생각하니 자신이 참 어리석다고 여겨지는 창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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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라 식당의 1/3정도의 학생으로만 채워진 학생 식당 안.
수화와 서연은 마주보고 앉아 여행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언니는 패러글라이딩 타보신 적 있으세요?”
“아, 그 낙하산 같은 거? 아니, 아직 타본 적 없는데….” 머리를 긁적이는 수화.
“잘됐다! 저두 아직 안 타봤거든요. 근데 지난번에 내일로 티켓 끊어서 다녀온 친구가 패러글라이딩 강추하더라구요. 꼭 타보라구. 그래서 이번에 무슨 일이 있어도 꼭 타보고 싶어요.”
“아… 그래? 근데 그거… 위험한 거 아냐? 나 겁 되게 많아서….” 서연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수화.
“언니 겁 많으시구나. 이건 혼자 타는 게 아니라, 경력 많은 전문가가 뒤에 같이 타서 별로 무섭지 않대요.” 서연은 웃으며 수화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서연은 가방에서 지도를 꺼내서 수화에게 여행 경로를 손으로 찍으며 그 지역에서 꼭 먹어야 할 음식과 여행지들을 설명해 주었다.
수화는 최근 답답한 마음 때문에 어디라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서연의 제안에 너무 섣불리 결정한 것은 아닌가 싶어서 조금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지도를 보며 자신에게 여행지를 열심히 설명해주고 있는 서연을 보니 꼭 가야겠다는 무언의 책임감이 생기기 시작했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이번 여행에서, 그동안 쌓인 찝찝했던 마음들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오리라 다짐했다.
“아, 참. 언니는 남자친구… 있으시죠?”
“남자친구? 아니. 없어.”
“엥? 이렇게 예쁜 언니한테 남자친구가 없다니… 말도 안 돼요.”
“작년에 헤어졌어.” 어색하게 웃는 수화.
“아…. 뭐. 언니는 예쁘고 착하시니까 금방 또 좋은 남자친구 생길 거예요.” 미안한 표정으로 수화를 바라보는 서연.
그때, 수화의 핸드폰 진동 울린다.
[수화야. 지금 밖에 눈 오고 있는데… 보여? 난 왜… 눈만 보면 수화 네 생각이 날까? 보고싶다. 한수화.]
갑작스러운 성준의 문자에 조금은 두근거리는 수화.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는 수화의 표정을 요리조리 살피는 서연.
“언니… 혹시… 썸남?” 의심과 장난이 섞인 눈초리로 장난스럽게 수화를 바라보는 서연.
“아, 아냐… 그냥 친구.” 핸드폰을 급하게 내려놓으며 수화가 웃으며 말했다.
“에이. 언니… 그 눈빛. 심상치가 않은데요? 언니 얼굴두… 갑자기 발그레 해졌구요.”
“뭐? 진짜?” 서둘러 거울을 꺼내 얼굴을 확인하는 수화. 정말 볼이 빨갛다.
“누구신지는 몰라두… 잘 됐으면 좋겠네요.”
'…잘 될 수 없어….' 서연에게 대답 대신 아픈 웃음을 지어보이는 수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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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호가 밖으로 나가고 나서야, 반대편의 텅 빈 의자를 보며 창호의 빈자리를 실감하는 진아였다.
진아는 가방도 챙기지 않은 채로 곧장 커피숍 밖을 뛰쳐 나가 창호를 붙잡았다.
“선배!!!” 눈물을 펑펑 쏟으며 창호의 등을 안는 진아.
“…진아야. 나 이제 너한테… 그만 상처주고 싶어.” 자신의 등을 안고 있는 진아의 두 손을 조금은 거칠게 뿌리치는 창호.
“선배… 제발… 내가 언제나 그랬듯이 나… 세컨드가 되어도 좋아요. 그러니까 지금처럼 우리 만나요. 선배가 미안한 마음… 가지지 않아도 돼요. 그냥… 나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선배 옆에만 있게 해줘요. 네? 한수화랑… 아니, 수화언니랑 계속 사귀어도 아무 말 안할게요. 질투도 하지 않을게요. 남는 시간에… 선배가 심심할 때 언제든지 저 불러주시면 바로바로 나갈게요. 그리고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내 앞에서 만이라도… 나한테 사랑한다고 얘기해줘요. 네?”
“이러지마. 제발 쫌!! 그러지 좀 말라고 제발!!! 네가 이런다고 내 마음이 변할 것 같아? 아니? 절대 그런 일 없으니까. 이제 그만 정신 좀 차려. 정진아!!”
창호가 큰 소리를 치자, 길거리에 있던 학생들은 ‘무슨 일 인가’하는 눈빛으로 창호와 진아를 쳐다보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진아와의 정을 떼기 위해 일부러 무서운 눈빛으로 거친 말을 내 뱉고는 다시 갈 길을 가는 창호.
창호가 거칠게 말하고 나서야 진아는 펑펑 쏟아내던 눈물을 멈추었다.
진아는 곧장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얘기해도 끄떡없다면, 창호를 유혹하여 다시 내 것으로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진아는 창호가 유혹에 약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결과는 성공적일 것이라고 예감했다.
빠르게 뛰어가 창호의 앞을 가로막는 진아.
그런 진아를 영혼 없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는 창호.
“선배. 알았어요. 나… 이제… 선배한테 연락 안 할게요. 대신에… 제 소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들어주세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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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 근처 모텔 앞.
모텔로 막 들어가려는 창호와 진아.
"진아야…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모텔에 들어가려다 말고 창호가 말했다.
"제 마지막… 소원이예요.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선배 귀찮게 하지 않을게요. 약속할게요."
'이렇게 자고나면… 내가 선배를 귀찮게 하지 않아도… 선배가 또 나를 귀찮게 하겠지. 훗.'
진아의 말이 끝나고 창호는 잠시동안 생각에 잠겼다.
창호는 갑자기 자신과의 내기를 하려고 마음 먹었다.
'만약… 지금 핸드폰을 확인해서… 수화한테 연락이 와 있다면… 그럼 진아를 뿌리치고 당장 수화에게 달려갈거야.'
창호는 수화에게 답장이 와 있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 보았다.
그러나 창호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부재중은 커녕 문자 한 통도 와 있지 않았던 것이다.
"선배… 무슨 생각 해요? 우리 얼른 들어가요. 저… 추워요." 창호의 팔을 잡아끄는 진아.
그러자 진아의 팔을 냉큼 뿌리치고는 힘차게 뛰어 그 자리에서 벗어나는 창호였다.
'수화가… 내가 지금 진아를 만나는 걸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아……. 이제 수화가 지켜보든 안 보든, 스스로 떳떳해져야겠어!!'
"선배…!! 선배!!!" 이미 자신을 벗어나 멀리 저만치 뛰어가고 있는 창호를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진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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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88님, HersMania님 출석체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