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4 새로운 시작 =========================================================================
이별의 말을 꺼낸 뒤 멍하니 있는 창호를 두고 뒤돌아 빠른 걸음으로 걷는 수화.
여기저기에서는 여전히 새해를 축하하는 듯한 불꽃들이 팡팡 터지고 있고 거리의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창호에게 이별을 고한 직후에는 머릿 속이 새하얘져서 어쩔 줄을 몰랐는데, 뒤돌아서서 한참을 홀로 걷다보니 정신이 조금씩 들기 시작하는 수화였다.
'역시... 오빠는 날... 좋아하지 않았던 거야... 그래도... 그래도 한 번 쯤은... 뒤돌아서는 날 잡아줄 줄 알았는데....'
눈에 가득 고였던 눈물이 이내 어딘가로 증발해 버리고 냉정을 되찾아가기 시작하는 수화였다.
'마음은 아프지만... 그래. 헤어지길 잘 한 거야.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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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보신각 앞에서 이미 떠나버린 수화가 걸어간 길을 바라보고 있는 창호.
하지만 아직도 창호의 마음속에는 조금의 자만심이 남아 있었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마음에도 없는 헤어짐을 고하기도 한다던데... 그럼 내가 잡아주면 그만아냐?'
창호는 수화에게 전화를 걸려고 핸드폰을 꺼냈다.
'아니지. 이별의 말도 함부로 꺼내면 안 된 다는 걸. 가르쳐줘야겠어. 한수화. 내가 너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거 모르지? 너도 다른 여자들하고 똑같아. 사람의 마음을 확인하려고 간을 보다니...'
창호는 수화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기 위해서 연락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한참이 지난 뒤에 수화의 애간장이 태워질 대로 태워질 때쯤에 연락을 해서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못하도록 단단히 혼을 내 줄 심산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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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아침.
장미의 학교 앞 자취집.
장미, 떡국이 들어 있는 큰 냄비를 식탁 정 가운데에 내려놓는다.
"우와~~~" 맛깔스러운 떡국을 보며 놀란 수화.
"널 위해서 내가 특별히 소꼬리까지 넣었어. 이거 먹구 힘내라구." 장미가 우쭐대며 말했다.
"진짜 감동이야... 내가 해줘야 되는건데... 고마워 장미야." 감동받은 눈빛으로 장미를 바라보는 수화.
"고맙긴. 어서 먹어. 원래 음식은 따뜻할 때 먹어야 제 맛이야."
수화는 장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떡국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아... 진짜 맛있다." 환하게 웃어보이는 수화.
"근데.. 수화야..."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장미.
"응?"
"아.. 아니야.. 어서 먹어." 말을 흐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숟가락을 드는 장미.
"피이. 장미 너. 무슨 말 하려고 그랬지? 무슨 말을 하다 말어~ 뭔 데. 말해봐아."
"아.. 아니. 새해라서 일부러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려고 했지. 어제... 잘 끝냈는지.."
"...아... 응... 잘 헤어졌어." 걱정끼치지 않기 위해 웃으며 말하는 수화.
수화의 말과 표정에 비로소 안심하는 표정을 짓는 장미였다.
"그래. 이번 해에는 공부 열심히 하면서 소개팅도 많이 하구 다른 동아리도 가입하구 그래봐."
"이제 나 신입생도 아닌 걸 뭐... 동아리에 들어가기에는 좀 늦지 않았나..헤헤." 수줍게 웃는 수화.
"아... 그런가? 근데 뭐 동아리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좋아하는 관심사 앞에서는 다 똑같은데."
"장미 네 말이 맞아... 그래두.. 그냥... 내가 당분간 동아리 같은 건... 안 하구 싶어서... 그래두 장미 네 말 대루.. 소개팅도 받아보구 그럴게. 아참... 장미야.. 너 혹시.. 너네 학교에 하성준이라는 애 알아?"
"하성준?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누구더라? 근데 그 사람은 왜?"
"어? 아니... 우연히 만났거든... 두 번씩이나. 근데.. 걔가 내 친구의 중학교 동창이었던 거야."
"두 번씩이나 우연히 만났다구? 그거 하늘이 내려주신 인연 뭐 그런 거 아냐?"
"글쎄... 조금 신기하긴 하지만... 뭐 인연까지는..."
그때, 수화의 핸드폰 진동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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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호의 집.
창호가 식탁에서 가족들과 떡국을 먹고 있다.
떡국을 먹으면서도 자꾸 핸드폰을 확인하는 창호.
창호의 부모님이 식탁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창호에게 눈치를 주자, 떡국 한 그릇을 금새 해치우고는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창호였다.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바라보는 창호.
'아... 새해 첫 날부터 헤어지자고 말하질 않나... 그렇다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문자 정도는 보내야 매너 아닌가? 얘가 예의도 없이.' 창호는 지나간 수화와의 문자 목록을 쭈욱 보면서 투덜거렸다. 그리고 수화가 보통 삐진 게 아니구나. 생각하며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 울린다. 진아였다.
"어."
[선배. 떡국 먹었어요? 어제는 가족들이랑 잘 보냈구요?]
"응. 뭐... 그렇지."
[선배 오늘은 어디 안 가요? 어디 안 가면.. 우리 영화 보러가용!]
순간 진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서 수화가 '이별 장난'을 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창호였다.
"음. 안 그래도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는데. 몇 시에 만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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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 근처 영화관.
창호가 영화관 입구로 들어서려는데 낯선 누군가가 자신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창호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 사람을 돌아보는데... 분명 수화의 뒷모습이다.
그런데 옆에는 어떤 남자와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다.
'뭐지..? 설마 수화? 아니겠지. 아닐거야...'
하지만 그 사람이 수화임을 확신한 창호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수화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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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 매표소 앞에서 서 있는 진아.
"아... 광고 시간도 지났고.. 이제 영화 시작하는데... 선배는 왜 이렇게 안 오는거야..." 다시 전화를 걸어보는 진아, 하지만 받지 않는 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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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 앞 로데오 거리.
"근데... 오늘 왜 보자고 한 거야?" 수화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잊었어? 우리 작년에 인연이었잖아. 그런데 올해도 그 인연 이어나가고 싶어서 보자고 한 거야."
"......."
"밥은 먹고 왔다고 했으니까... 따뜻한 거라도 마실래?"
커피숍으로 들어가고 있는 수화와 성준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를 가는 창호.
'한수화... 이제는 딴 남자까지 만나? 완전 엇나갈 데로 엇나갔구나! 비행 소녀가 따로 없어!'
창호는 얼른 핸드폰을 꺼내 수화에게 전화해서 커피숍 밖으로 불러내려고 했지만 홧김에 수화의 연락처를 지워버리는 바람에 한참을 찾아야 했다.
그때 진아에게서 전화가 오자 불현듯 진아와의 약속이 떠오르는 창호였다.
"어... 진아야.."
[선배! 어디예요? 지금 영화 시작한 지 20분이나 되었어요! 전화도 안 받구 무슨 일 있는거예요?] 흥분한 목소리의 진아.
"아... 미안해. 지금 내가 일이 생겨가지고... 근데 조금 늦을 거 같은데..어쩌지?"
[알았어요... 할 수 없죠 뭐.. 그럼 영화관에서 기다릴고 있을게요. 빨리 와요.] 실망한 목소리의 진아였다.
재빨리 전화를 끊은 창호는 커피숍 밖 유리창을 통해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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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은 수화와 성준.
수화는 여전히 기운 없는 표정이다.
"민아는... 잘 갔어?" 적막을 깨고 성준이 먼저 말을 시작했다.
"아, 응... 잘 갔어... 성준이 너한테도..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전해달래."
"그래. 민아 이 녀석. 가서도 잘 할 거야. 워낙 씩씩한 애라."
"맞아...잘 지낼거야.." 쓸쓸하게 웃는 수화.
"근데... 표정이 좀.. 어두워 보이네? 무슨 일... 있었어?" 수화의 표정을 살피는 성준.
성준은 사실 수화의 상황을 민아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수화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먼저 택시를 타고 집에 가던 날, 민아가 말해주었던 것이다. 성준은 수화의 표정을 보면서 대략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모른척 하기로 했다.
"아... 실은.. 어제.. 남자친구랑.. 헤어졌거든." 고개를 숙이고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수화.
"아... 그래? ... 12월 31일... 마지막 날의 이별이라... 참 슬픈 사건이네. 그래도... 무슨 사정이 있었으니까 헤어졌겠지."
그저 쓴 웃음으로 대답하는 수화, 그런 수화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성준.
잠시 정적이 흐르고,
곧이어 수화의 테이블 아래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자 당황하는 수화.
"아... 미안.. 왜 이러지 갑자기...?"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훔쳐내는 수화.
성준은 처음엔 당황해 하다가 이내 수화 옆 자리로 가 휴지를 건넨다.
"...고마워...." 성준의 휴지를 받아 눈물을 닦는 수화.
"울보." 그런 수화에게 안쓰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성준.
"??"
"수화야. 너 그거 알아? 우리... 우연히 두 번 만났을 때 전부... 너 울고 있었어."
눈물을 닦다 말고 성준을 바라보는 수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