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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요상한 판타지-57화 (57/103)

00057  애증의 관계  =========================================================================

그때 창호의 핸드폰 메세지 알림이 울렸다.

확인해보면 화려한 메이크업 상태의, 보기에도 딱 달라붙는 반짝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윙크를 하며 입에 잔뜩 바람을 넣은 진아의 사진이었다.

[선배. 저 이렇게 하구 나와쪄용. 메리크리스마스♡]

사진을 보자마자 창호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픽하고 나온다.

'이렇게 야하게 차려입고 클럽에 간다고? 우씨...' 그러나 이내 이러고 다른 남자들과 어울릴 생각에 조금 열이 받는 창호였다.

그런 창호의 표정 변화를 지켜보며 입술을 꾹 깨무는 수화였다.

'또 진아인가 보지..? 이제는... 얘기해야 해... 꼭...'

"오빠...."

"으,응?" 그제서야 핸드폰을 잽싸게 다시 내려놓고는 수화를 보는 창호.

"누구..예요? 누군데... 그렇게.. 웃어요?"

"아.. 그냥.. 오빠 친구야." 아무 일도 없단 듯 둘러대는 창호.

"근데... 무슨 얘기를 했길래.. 그렇게 즐거워요... 저도 좀.. 알려주시면 안 돼요?"

"수화야. 그냥.. 남자들끼리 얘기야. 재미 없어."

그러자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창호의 핸드폰을 휙 잡아드는 수화.

"수화야. 너 왜 그래. 이리 줘."

"솔직하게 얘기해줘요. 무슨 얘기를 했는데요. 오빠가 웃으니까.. 저도 궁금하잖아요." 장난치는 듯한 연기를 하는 수화.

"아 그냥.. 오빠 친구가 여자친구가 생겼는데.. 뭐 그런 얘기라니까. 수화야 내 핸드폰 줘." 손을 내미는 창호.

그러자 핸드폰을 확인하는 수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진아의 윙크하는 사진이 뜬다.

"하....." 사진을 보며 입술을 깨무는 수화.

창호는 그런 수화를 쳐다보며 어찌할 줄 몰라하다 수화의 손에 든 핸드폰을 뺏어든다.

"휴.. 얘가 또.. 안 그러다 이러네..." 피해자인 척 연기하는 창호.

"....그래요? 오랜만에.. 진아가 이런 사진을 보낸거에요?"

"응. 크리스마스라고... 보낸건가 봐.. 자기 사진을. 근데 왜 보낸 지 모르겠네 나도."

"오빠... 근데 왜 거짓말해요...?"

"...응? 뭐가? 무슨 거짓말?"

"오빠 친구한테 연락왔었다면서요... 왜 그런 거짓말을 했냐구요.."

"아니... 당연히 니가 싫어할까봐 그러지.."

"그래도... 거짓말.. 안 하기로 했잖아요... 제가 그랬잖아요.. 거짓말 하는 것보다.. 차라리 솔직하게 얘기하는 게 낫다구.."

"수화야. 크리스마스인데 이러지 말자. 걔랑 나랑 동아리 임원인데 아예 연락을 끊고 살 수는 없잖아."

"제가 언제 연락 끊으라고 그랬어요...? 저는 그냥... 오빠가 떳떳하게 이야기했으면 좋겠.."

"휴. 그래서 내가 거짓말을 한 거야. 니가 계속 이럴까봐."

"...오빠." 서운하게 창호를 바라보는 수화.

"걔 사진. 삭제할게. 그럼 되지?" 그 자리에서 진아의 사진을 지우고 핸드폰을 쾅 내려놓는 창호.

"오빠.. 화났어요..?"

"그냥. 좀 서운하네. 날 못 믿는 것 같아서."

입술을 꾹 깨무는 수화.

'당황하지 말자.. 수화야..'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 암시를 걸어보는 수화.

"저도... 서운해요.."

"뭐가?" 어이없다는 듯 받아치는 창호.

"알잖아요... 전 솔직한 거 좋아하는 거... 근데 지난번에도 그렇구.. 이번에도 그렇구.. 저도 솔직히 오빠한테 많이 서운했어요.."

"하... 또 지나간 얘기 꺼내는 거야? 그 얘기는 안 하기로 했잖아."

"지나간 얘기 꺼내서 미안한데요... 저도 사람인데... 솔직히.. 진아한테 이렇게 사진을 오게 하는 것두... 어느정도 오빠도 책임이 있는거라고 생각해요...다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거니까.."

"하.." 어이없는 표정의 창호.

"만약 제가 오빠라면... 저한테 남자친구가 있는데.. 만약 어떤 남자가 저한테 다가온다면... 전 분명하게 선을 그었을 거예요. 이런 연락도 오지 못하게끔 확실히 했을 거라구요."

"확실하게 선을 긋지 못하는 건.. 너도 알지 않니? 걔랑 나랑 같은 학교에 동아리 임원에.. 자주 만나야하는 사이라고."

"물론 알고 있는데요... 그래도... 선을 확실히 그어놓는다면... 자주 만나는 사이라도... 상대방이 안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수화는 창호의 입에서 '미안해'라는 한 마디를 원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다시는 안 그럴게.' 하면서 확실하게 진아와 정리하는 행동을 보여주길 원했다.

하지만 창호는 자존심과 자만심이 가득하여 '미안해'라는 말을 꺼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화를 '이해심이 부족한 여자'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이제 그 얘기 그만하자.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날인데. 저 웃고 있는 사람들을 봐. 이러고 있기에 시간이 너무 아깝잖아."

수화는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창호의 말대로 모두 환한 표정으로 웃으며 행복한 사람들 뿐이었다.

'나도... 저렇게 웃고 싶어요.. 하지만.. 더이상.. 가식적으로 웃고 싶지도 않다구요...'

"오빠... 그럼.. 저랑 약속해줘요."

"무슨 약속."

"앞으로 진아한테 연락오게 하지 않겠다구요. 이렇게 개인적으로."

"수화야. 넌 오빠가 지금까지 한 말 이해 못한거야? 얘랑 나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구. 물론 니 앞에서 그런 약속이야 당연히 할 수 있지. 근데 난 못 지킬 약속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아. 왜냐하면 얘랑은 어차피 계속 연락해야하는 사이니까."

수화는 더이상 창호의 거짓말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조금 남은 창호에 대한 믿음과 희망마저 바스러지고 있었다.

"오빠.. 저.. 오늘은 그냥.. 집에 들어갈게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수화.

"앉아. 오빠 얘기 아직 안 끝났어." 화가난 듯한 표정의 창호.

"죄송해요. 제가 나중에.. 연락할게요."

가방을 챙겨들고 빠른 걸음으로 음식점에서 빠져 나오는 수화. 그런 수화를 황당하게 바라보고 있는 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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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호는 뒤돌아서 나가고 있는 수화를 잡지 않았다. 잠시 저러다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리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창호는 그냥 그 자리에서 수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 수화였다.

"아.. 얘 왜 전화를 안 받아. 저렇게 나가면 어쩌자는거야..."

창호는 한참을 수화가 다시 돌아오겠지 하며 그 자리에서 기다렸지만 돌아오지 않는 수화였다.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수화를 찾으러 밖으로 빠져나왔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수화는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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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를 찾기 위해 엔젤공원 근처 스케이트장 주위를 배회하고 있는 창호.

"아.. 얘 어디간거야. 벌써 집에 갔나?"

'아까 수화를 잡을걸..' 하는 후회가 조금씩 들기 시작하는 창호였다.

또한 수화가 옆에 없어서인지 더욱 더 바람이 차갑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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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어두워진 거리.

수많은 연인들 속에서 홀로 걷고 있는 수화.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껴서인지 차오르는 슬픔을 티내지 않기 위해 애쓰며 걷는 수화였다.

줄 지은 나무들에 여기저기 흩뿌려져 걸려있는 앙증맞은 앵무 전구들이 마치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듯 깜빡이고 있었다.

'괜찮아. 잘했어. 잘했어 수화야. 어차피 꼭 말했어야 하는 거였어..'

그때 수화의 눈 앞으로 하얀 무언가 떨어져 내린다.

하늘을 바라보니 눈이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길거리에 있는 수많은 연인들은 하늘의 눈을 보며 반가운 듯 행복한 미소들을 짓는다.

수화도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수화의 코에, 뺨에.. 하얀 눈송이들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갑자기 코끝이 찡해진 수화는 코를 훌쩍여 보았다.

분명 코끝이 찡했을 뿐이었는데 갑자기 머리가 지끈하더니 눈에 조금씩 눈물이 고여오기 시작했다.

'아니야. 약해지지마. 울지마. 울지마....' 위로하면 할수록 수화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왔고 이내 터져나오고 싶었다는 듯 눈물들은 뺨을 타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흑....흑....." 수화가 그 자리에 서서 울기 시작하자, 지나가는 연인들은 모두 수화가 불쌍하다는 듯 '쯧쯧'거리며 한 번씩 쳐다보며 지나갔다.

'이젠... 이젠... 어떻게 하지...? '

수화는 아까 자신이 음식점에서 빠져나올 때 창호가 잡아주기를 바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벼랑 끝에 매달리는 심정으로 창호를 마음속으로 조금은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문에서 빠져나오고도 한참을 걷고 있어도 뒤따라나오지 않는 창호를 보며 이미 자신은 창호라는 벼랑 끝에서 뚝 떨어져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마지막 남은 수화의 믿음이 하얗게 하얀 눈이 녹는 것처럼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수화는 차디찬 거리에서 한참을, 하얀 눈과 함께 펑펑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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