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6 애증의 관계 =========================================================================
진아와 창호와의 관계를 전부 다 알아버린 수화는 그 날 이후 한동안 창호를 만나지 않았다. 사실, 만나지 않았다기 보다는 갖은 핑계를 대며 만남을 회피했다.
수화에게는 꽤나 충격적인 사건이었기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락의 끈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직 조금은 창호에 대한 미련의 끈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생각과 마음을 정리할 시간동안 기말고사 기간이 훌쩍 지나갔고, 방학이 시작되었다.
[자기, 내일 우리 만나는 거 잊지 않았지?] 창호의 문자였다.
수화는 한참 동안 창호의 문자를 바라보다 답장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고는 다시 길을 걸었다.
집에 도착한 수화는 코트를 옷장에 걸고는 한숨을 쉬며 멍하니 침대에 걸터 앉았다.
'말해야 하는데... 말해야 하는데... 용기가 나질 않아...' 기운 없이 고개를 떨구는 수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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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어느새 크리스마스 이브날 아침이 밝았다.
수화는 일어나자마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진아와 창호의 일을 알고부터 수화는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아무리 샤워를 하고 생각을 정리하려고 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고 마음은 더 무거워져만 갔다.
샤워를 마친 수화가 바디로션을 바르고 샤워가운을 입고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수화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 민아였다.
"여보세요? 민아니?"
[응. 수화야. 이게 얼마만이야. 잘 지내고 있었지?]
"응.. 잘지내구 있지."
[남친은? 생겼어?]
"응? 남친.. 그때 내가 말했던 오빠랑 아직도 사귀고 있어.." 갑자기 축 쳐지는 목소리의 수화.
[헐....설마 그때 그 내가 헤어지라고 했던 그 사람??]
"....응.."
민아는 아주 잠시동안 충격을 받은 듯 침묵하다가 말을 이어갔다.
[그래.. 그럼 크리스마스에 그 분 만나겠네?]
"응..아마도..근데 민아 넌 남자친구랑 잘 사귀고 있지?"
[휴... 헤어졌어. 그건 얘기하자면 길어. 만나면 얘기해줄게. 참, 우리애들 한번 모여야지. 나는 31일날 뉴욕 가. 그러니까 그 전에 모였으면 좋겠는데... 스케줄 다 찼을려나?]
"아니.. 나 시간 괜찮아. 31일 전에 한번 모이자. 뉴욕갔다가 언제오는건데?"
[나.. 한 2월 쯤? 그러니까... 우리 이번에 꼭 봐야하는데. 오늘 안 그래두 수정이한테 연락왔었거든. 근데 수정이 남친이랑 헤어졌나봐. 그래서 오늘 약속 펑크났다구 같이 보자는데... 수화 넌 안 되겠지?]
"응... 선약있어서.. 미안해."
[아냐.. 뭐.. 오늘 수정이랑 같이 클럽이나 가야겠다. 남친이랑 오늘 좋은 시간 보내구.. 한.. 29일이나 30일쯤 보자.]
"그래. 알았어.. 그때보자. 민아야. 메리 크리스마스."
[그래. 수화 너도 메리크리스마스. 끊는다.]
전화를 끊은 수화는 순간 민아가 했던 창호에 대한 말들이 기억나기 시작했다.
'그래... 민아가... 처음부터 창호 오빠랑 만나는 거 반대했었지... 그 말을.. 들었어야했나봐... 그럼 이렇게 마음이 힘들고 상처받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었고 그때 수화는 창호에게 이미 빠져버리고 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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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시간 1시간 전.
거울을 보며 예쁘게 단장하고 있는 수화의 표정은 왠지 슬퍼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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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호의 집.
창호, 집에서 막 나가려는데 전화벨 울린다. 진아였다.
"어, 진아야."
[선배. 오늘.. 가족들이랑 만나기로 한 거예요?]
"아, 응. 가족들이랑 지금 막 나가려던 참이야."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태연하게 거짓말하는 창호.
[피. 할 수 없죠 뭐. 가족 모임이니까 봐줄게요. 선배, 보고싶어요. 내일 일찍 돌아오게 되면.. 잠깐이라도 봐요. 네?]
"음.. 알았어. 내일 일찍 돌아오면 연락줄게. 근데 진아는 오늘 뭐하려구?"
[저야 뭐... 선배두 없는데.. 친구들이랑 클럽이나 가려구요.]
"뭐? 클럽? 가서 남자들이 꼬시면 어쩔려구 그래."
[걱정마요. 난 선배같은 사람 아니니까.] 장난치는 진아.
"뭐? 방금 뭐라구 했어?"
[훗.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튼. 남자 조심해야 돼. 남자는 다 늑대니까."
[푸훗. 알았어요. 선배 내일 오면 연락줘요.]
"알았어. 진아야 크리스마스 잘 보내."
[선배두요.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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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젤공원 스케이트장 앞.
금방이라도 어둠이 덮칠 듯 하늘은 하늘색에서 점차 남색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대형 트리가 설치되어있고 아직 날도 어둡지 않은데 벌써부터 트리 전구가 반짝반짝 은은하게 빛을 내뿜고 있다.
거리에는 온통 가족과 커플들, 친구로 보이는 무리들이 가득하다.
수화, 지하철 개찰구에서 나와 대형 트리 앞을 지나 엔젤공원 스케이트장에 도착한다.
수화는 평소처럼 15분 전쯤에 미리 약속 장소에 도착했고, 창호 역시 평소처럼 약속 시간이 20분정도 지나고나서야 도착했다.
날씨가 추워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고 기다리고 있는 수화를 향해 뛰어가는 창호.
"수화야!"
"오빠.. 왔어요?"
"응. 그동안 왜 그렇게 바빴어. 보고싶었잖아."
'보고싶었다'고 말하는 창호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흔들리는 수화였다.
하지만 더이상은 이대로 지낼 수 없었다. 누군가는 이 괴로운 상황을 깨야했고, 그 누군가는 괴로움을 당하는 당사자여야 했다.
"저두요. 보고싶었어요." 슬픈 마음을 꾹꾹 눌러담고 창호를 보며 환하게 웃어보이는 수화.
"우리 일단 스케이트부터 타자. 그 다음에 근처에 맛있는 음식도 먹으러가자."
수화의 손을 덥썩 잡고는 스케이트장으로 향하는 창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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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많은 연인들이 손을 잡고 스케이트를 타고 있다.
오늘 하루가 '축제의 날'인 것처럼 하나같이 환하고 행복한 표정들의 사람들이 가득했다.
수화는 행복한 사람들 속에서 자신 혼자만 웃지 않는 것이 어색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웃으려고 노력해보았지만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무겁고 찝찝한 마음은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창호는 스케이트를 신고 먼저 스케이트장으로 나갔다.
"수화야. 빨리와." 저 멀리 스케이트를 타면서 웃고 있는 창호.
"오빠. 저.. 스케이트 처음 타요..!!" 부들부들 떠는 손으로 지지대를 잡으며 한 발 한 발 내딛는 수화.
그런 수화에게 한 걸음에 슝 달려오는 창호.
"아, 진짜 처음 타는 거야? 자 오빠 손 잡아." 손을 내미는 창호.
"오빠, 저 처음 타는 거구.. 좀 무서워요...."
"괜찮아. 오빠가 손 잡아줄게."
수화, 창호가 내미는 손을 잡고 천천히 스케이트장 중앙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으아앗..!!!" 손을 휘두르며 균형을 잡는 수화.
창호는 그런 수화를 보며 씨익 웃고는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다.
수화는 처음 타보는 스케이트이기도 했고 겁이 많았기 때문에 순전히 창호에게만 의지하며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창호 옆으로 능숙하게 줄지어 달려가는 아이들 보이고, 수화도 저 아이들처럼 잘 타길 바라는 동시에 장난도 쳐 보고 싶은 마음의 창호였다.
"자, 한 번 손 놓고 타 봐." 갑자기 수화의 손을 한 순간에 놓아버리는 창호.
"으아아. 오빠 안 돼ㅇ..!!" 창호가 손을 놓자, 팔을 허우적 거리는 수화.
그때 수화 옆에서 오던 사람이 수화가 허우적 거리는 바람에 창호를 덮친다.
그러자 우당탕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지는 창호.
"으......." 엉덩방아를 찧어 정신 없는 창호.
"오빠..!! 괜찮아요??" 그 자리에서 오도가도 못하며 창호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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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이트장 대기실.
"오빠.. 아픈 건 좀 어때요? 진짜 아프시겠어요..."
"내가 너 손을 놓아서 벌 받았나봐." 씨익웃어보이는 창호.
"휴.. 오빠 우리 이제.. 그만 타고 밥 먹으러가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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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젤공원 근처 음식점.
수화와 창호, 마주앉아 이야기하며 음식을 먹고 있다.
"있잖아. 넌 크리스마스하면 뭐가 제일 생각나?" 밥을 스튜에 떠먹으며 창호가 말했다.
"음... 산타클로스랑..하얀 눈이랑.. 그리고 크리스마스 트리랑.. 또 뭐가 있더라.."
"나도 크리스마스하면 하얀 눈이 제일 먼저 떠오르더라. 근데 화이트 크리스마스도 진짜 보기 어렵지않아?"
"맞아요... 눈이 와야 제대로 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잖아요. 아.. 오늘은 눈 안 내리려나..."
"그러게. 오늘 밤에 눈 내릴 수도 있다고 하던데... 지금 하늘 보면 내릴 것 같지도 않아."
수화는 창호의 말에 적당히 대답을 하면서 이야기를 꺼낼 타이밍을 찾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