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2 좋은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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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 공학관 건물에서 벗어나고 있는 두 사람.
창호, 수화의 손을 잡으려한다. 그러자 살며시 그 손을 피하는 수화.
"수화야..왜그래..?"
"아.. 갑자기 정전기가 흘러서..." 다른 말로 둘러대보았지만 어쩐지 어두워 보이는 표정은 숨길 수 없는 수화였다.
"정전기? 난 못 느꼈는데."
그러자 창호, 자신의 손에 호호 바람을 불고는 여기저기에 비벼댄다.
"자." 웃으며 다시 손을 내미는 창호.
"오빠.. 저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집에 들어가봐야 겠어요.."
"갑자기? 어디가 안 좋은데."
"잘.. 모르겠어요. 찬바람을 쐬어서 그런지 머리가 좀 아픈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집에 데려다줄게. 가자."
"아.. 저 한국대 다니는 친구 잠깐 만나기로 했어요..."
"아, 저번에 봤던 그.. 장미라는 친구?"
"네.. 맞아요. 그 친구한테 뭐 돌려줄 게 있어서요.."
"그래? 그럼 같이가줄게. 그 친구는 어디있는데?"
"아니요. 친구가 힘든 일이 있다고 해서... 단 둘이 만나기로 했어요.."
"뭐야. 오빠 서운해. 오빠랑 같이 있기로 약속해놓고.. 친구랑 약속은 언제 한거야."
순간 수화는 '누가 할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올 뻔 했지만 꾸역꾸역 올라오는 그 말을 참아냈다.
"미안해요. 우리 내일. 내일 만나서 더 재밌게 놀아요..." 애써 웃어보이지만 힘이 없어보이는 수화였다.
"그래. 알았어. 몸도 안 좋은데 친구랑 조금만 있다가 들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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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와 헤어지고 길을 걷는 창호.
'오늘 수화가 좀 이상해.. 오늘 무슨 일 있었나..? 설마... 진아랑 나랑 있는 걸 본 건 아니겠지? 아니야. 밖에서 안 만나고 몰래 강의실에서 만났는 걸.'
창호는 수화가 자신과 진아가 빈 강의실에서 껴안고 키스를 했던 것을 목격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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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호를 뒤로 하고 걷는 수화의 얼굴은 억지로 웃느라 잔뜩 긴장된 근육들이 다시 제자리로 찾아가느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하... 막상 그 모습을 직접 보니까... 기분이 이상해. 장미 말대로... 그냥... 올라가지 말 걸 그랬어...'
힘 없이 터덜터덜 걷는 수화는 그저 무거운 마음만이 들었을 뿐, 왠 일인지 눈물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차가운 바람과 수화 곁을 스치는 행복해보이는 커플들을 보며 조금씩 눈물이 흐르는 수화였다.
'왜....왜 이렇게... 사랑은 슬픈걸까.... 나는 진심으로 다가갔는데... 왜 상대방은 나를 속이고... 나를 힘들게만 하는걸까...?'
한 방울씩 흐르던 눈물이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수화의 뺨을 줄줄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학생들은 그런 수화를 보며 안쓰럽게 쳐다보기도, 신기하게 바라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런 시선들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저 수화는 자신의 첫 사랑에 대해 진심으로 마주하며 온 몸으로 온 가슴으로 절망과 슬픔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요!!"
하지만 그 소리를 못 듣고 그저 한국대 후문을 빠른 걸음으로 벗어나고 있던 수화였다.
"저기요."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는 수화를 겨우 따라잡고는 수화의 앞을 가로막는 성준이었다.
그제서야 걸음을 멈추고 성준을 바라보는 수화.
"이거.." 수화가 떨어트린 목도리를 내미는 성준이었다.
"...아..." 눈물을 닦으며 목도리를 받아드는 수화. 목도리는 정신 없이 걷다가 떨어트린 모양이었다.
".. 감사합니다..." 수화, 성준을 보며 환하게 웃어보인다. 하지만 북받쳐 오르는 감정들을 어쩐지 주체할 수가 없어 성준 앞에서 눈물을 쏟아버리고 마는 수화였다.
"..괜찮아요?" 187cm정도 되어 보이는 훤칠한 키의 성준이 수화에게 몸을 낮추고 걱정되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아..흑..흑..네...죄송..해..요.." 눈물을 멈추려 할 때마다 더욱 눈물이 나는 수화였다.
주위를 둘러보는 성준. 한국대 학생들은 모두 성준을 이상한 사람으로 쳐다보고 있다.
"저 남자가 여자 울렸나 봐."
"쯧쯧"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저기요... 왜 우시는 건지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그쪽을 다 쳐다보고 있어요. 그리고 저를 나쁜 사람처럼 쳐다보고 있구요."
"...그럼.. 가세요.."
"네?"
"그럼... 가시면 되잖..아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성준을 피해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수화.
그런 수화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 있는 채로 지켜보고 있는 성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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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온 수화. 가방을 내팽개쳐놓고 옷을 그대로입은 채 침대에 누워버린다.
그때 울리는 전화 벨소리. 그러나 엎드려 누운 채로 미동도 하지 않는 수화였다.
거의 벨소리가 끊겨 갈 때쯤 주섬주섬 일어나 가방 속을 뒤적거리며 핸드폰을 찾아내는 수화였다.
"..여보세요.."
[수화야... 어떻게 됐어..? 목소리가 힘 없게 들리는 거 보니..] 장미였다.
"....장미야.." 장미의 목소리에 또다시 눈물이 흐르는 수화였다.
[...에휴... 괜찮아? 집에는 언제 도착했어?]
"장미야... 흑...나... 마음이...진짜 쓰려... 흑... 두 눈으로.. 직접 보니까... 창호오빠가... 너무 미워졌어..."
[...휴. 그래. 네 마음 속에 그 인간에 대한 미움이 생겼다니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다행이다. 수화야.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 내가 그랬잖아.. 그 인간 더 만나면 만날수록... 힘든일만 생길거라고...]
"...네 말... 들을껄... 이제서야 장미 너의 충고가 생각났어... 근데... 그때는 오빠를 여전히 좋아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근데 아직 내 마음이 뒤죽박죽이야.. 밉기는 한데... 애증인 것 같기도 하고..."
[..한수화... 이 미련곰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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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초췌한 몰골의 수화.
'그냥 오늘... 가지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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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기로 했던 약속시간 정시.
잠실 야구장 매표소 앞으로 창호가 걸어오고 있다.
"어? 수화 아직 안 왔나보네."
날씨가 추워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는 매표소 앞에 서서 수화를 기다리는 창호.
'매일 수화가 먼저 와 있었는데... 오늘은 처음으로 내가 먼저 왔네. 오늘도 겨우 딱 맞춰오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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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에서 내려 축 늘어진 어깨로 길을 걷는 느린 걸음의 수화.
그때, 전화벨소리 울린다. 창호였다.
핸드폰 화면을 확인한 뒤 깊은 한숨을 한번 쉬고는 계속 울리는 전화기를 다시 주머니에 넣어버리는 수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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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얘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오면 혼내줘야지."
창호는 날씨도 추운데 자신을 기다리게 하는 수화를 혼내주기로 마음 먹었다. 수화가 그동안의 약속시간에 언제나 창호보다 먼저 도착했던 것은, 자신이 수화를 기다리게 했던 것들은 기억도 안 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전화를 해도 문자를 해도 답장 없는 수화였다.
곧이어 야구 경기가 시작되는 팡파르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아...추워죽겠네. 근데 얘 무슨 일 있는건가?"
창호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덜덜 떨고 있던 그때 저 멀리 수화가 개찰구에서 나와 걸어오고 있다.
"수화야." 수화에게 뛰어가는 창호.
"..죄송해요.. 많이 늦었죠." 풀이 죽은 목소리의 수화.
"너 어떻게 된 거야. 오늘 하루종일 연락도 안 하고. 오늘 야구장 올까말까 엄청 고민했어."
"....."
"하. 아무튼 경기 시작했으니까 얼른 들어가자."
창호는 수화를 혼내기 보다는 일단 최대한 빨리 경기장에 들어가서 경기를 보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경기를 다 보고 나서 늦은 일에 대해 혼내도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창호는 경기장에 들어가기 전 치킨을 주문했고
수화는 창호의 그런 모습에 서운했다.
비록 어제 아프다고 말했던 것은 거짓말이었지만, 혹시나 괜찮냐고 걱정이라도 해줄 줄 알았다.
하지만 창호는 그저 당장 치킨을 먹으며 야구를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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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 소리가 가득한 야구 경기장.
파인 시그널팀과 레인보우 고스트팀의 경기가 2-0 이 되어가고 있었다.
창호와 수화는 파인 시그널팀쪽 좌석에 앉아있다.
곧이어 파인 시그널팀의 선수가 홈런을 치자 함성을 지르는 창호였다.
창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노래를 부르는 등 즐거워보였다. 반면 수화는 그저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창호는 수화에게 야구 용어와 경기 방법에 대해 설명해주지도 않았다.
"수화야. 재밌지?" 웃으며 창호가 말했다.
"하하.. 네." 애써 웃음을 짓는 것보다 억지로 과장된 웃음을 안 보이게 감춰내는 것이 더 힘든 수화였다.
"자. 치킨 먹자. 원래 야구장에서 먹는 음식이 더 맛있는 법이야."
창호는 치킨 상자를 펼치고는 물티슈로 손을 닦고 닭다리를 뜯기 시작했다.
수화도 작은 치킨 조각을 집어 들고는 천천히 베어먹었다.
그런데, 창호가 닭다리를 한 개 먹어치우고는 하나 남은 닭다리 마저 먹어치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나도... 닭다리... 좋아하는데.....'
그런 창호를 보며 점점 정이 떨어져가는 수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