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8 좋은사람 =========================================================================
시간은 어느새 자정.
진아, 핸드폰을 쥐고는 불안한 지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다.
'선배가 왜 이리 연락이 없지...?'
다시 전화를 걸어보는 진아.
[여보세요..] 잠결에 받은 듯한 피곤한 목소리의 창호다.
"선배. 어떻게 된 거예요... 왜 연락이 없었어요?!" 다그치는 진아.
[..어... 수화야.. 하암...오빠 잘 들어왔어..] 거의 잠꼬대 식으로 이야기하는 중인 창호.
"....허....뭐라구요..? 수화야..? 나 진아예요 선배!" 기가 차는 진아.
[..응...나도 사랑해...]
그러자 뚝 끊기는 전화.
진아, 뚝 끊긴 전화기를 들고 그 자리에서 부들부들 떨기 시작한다.
'선배... 어떻게 나랑 한수화랑 헷갈릴 수 있냐구욧...!!! 한수화랑 또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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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명종 소리에 일어나는 수화.
시간은 오전 6시이지만 아직 밖은 어둡다.
기지개를 켜고 세면대로 가 세수를 하고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수화.
'정진아.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두고보자. 아니, 내가 이길거야..!! 창호 오빠가 나만 바라보게 만들겠어. 정진아 너는 그저 세컨드일 뿐이었다는 걸 깨닫게 해주겠어..!! '
운동복을 입고는 가까운 천(川)을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는 비장한 표정의 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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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간, 창호의 꿈 속.
수화가 나풀나풀거리는 하얀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는 웃으며 다가오고 있다. 환하게 웃는 수화에게서 후광이 비쳐진다.
그런 수화가 창호의 무릎에 앉고는 창호의 목덜미를 살며시 잡고는 입을 맞추기 시작한다. 그러면 창호도 수화의 허리를 껴안고 눈을 감는데...
시끄러운 락음악 알람이 울리자, 잠에서 깨는 창호.
"아이씨... 좋았는데..." 짜증내며 알람을 끈다.
사실 수화가 점점 자신의 이상형으로 되어가는 것 같아 설레기 시작하는 창호였다.
혹시나 하고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수화에게 아침 문자가 와 있다.
[오빠, 일어났어용? 저는 지금 운동하러가용^^]
창호, 씨익 웃으며 답장 보낸다.
[자기, 나 오늘 자기 꿈 꿨어. 오늘 잠깐 볼까?]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수화. 창호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하고는 답장한다.
[무슨 꿈 꿨는데용? 이따 학원 가긴 하는데... 그 전에 잠깐 보든지 아님 다녀와서 보든지 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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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대 공학1관 303호 강의실 앞.
수업이 끝나 학생들이 우르르 복도로 나오고 있다.
"윤창호 이 자식. 너 우리과 1등이더라?" - 세중
"기말까지 잘 봐야 1등이지. 등수는 방심하면 엎치락뒤치락 되는 거 모르냐."- 창호
"그래두. 이제 기말 점수좀 잘 받고 한자 자격증만 따면 되겠네... 근데 너 오늘 무슨 좋은일 있냐? 표정 좋아보인다?" - 세중
"좋은 일은 무슨.." 실실 웃기 시작하는 창호.
"너 혹시 여자친구 생겼냐?" - 세중
"아, 나 여자친구 있는거 말 안 했었나?" - 창호
창호는 자신이 여자친구를 사귈 때 늘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 편이었다. 왜냐하면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사귀는 게 아니라, 동시에 이여자 저여자 만나는 것을 좋아해서 사람들에게 여자친구를 소개하는 순간부터 자신의 이 '자유로운 연애' 방식이 사람들의 눈에 의해 의심받고, 또 방해받을까 두려웠다.
"응. 얘기 안 했잖아 임마. 근데 누군데? 내가 아는 사람?" - 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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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중과 창호, 이야기하며 공학1관을 빠져나오고 있다.
"선배." 삐진 표정으로 창호의 앞을 막아서는 진아.
"진아야." 생각지 못한 진아의 등장에 조금은 놀란 창호.
"..누구? 아, 설마 이 분이 여자친구?" - 세중
"세중아, 미안한데. 오늘은 너 먼저 가야겠다. 할 얘기가 있어서." - 창호
"어? 어.. 알았어.. 그럼.. 다음에 보자." 세중, 창호와 진아를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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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안, 작은 숲속.
벤치에 마주 앉아 있는 창호와 진아.
"왜 그래. 진아야. 어제 피곤해서 집 도착하자마자 바로 자느라고 답장 못한거라고 얘기 했잖아. 응?"
"내가.. 그거때문에 그런 줄 알아요?"
"그럼 뭐 때문인데."
"선배. 어제.. 나한테 잠결에 전화받고서.. 무슨 얘기 했는지.. 아냐구요."
"하... 기억도 안 나. 너무 피곤해서 무슨 얘기 했는지도."
"어제... 수화언니 만났죠?"
"응? 응..." 미안한 지 고개숙이는 창호.
"도대체 뭘 했길래 그렇게 피곤했어요?"
"하긴 뭘 해..."
진아는 어제 창호가 전화로 말실수 했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그 얘기를 꺼내버리면 무의식 속에서도 창호가 수화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인정해버리는 셈이니까.
"그래요... 이해할게요. 내가.. 시간 준다고 했으니까. 선배한테두 시간이 필요할테니까.." 울먹이는 진아.
마음 약해진 창호, 자리에서 일어나 진아의 옆으로 가서 앉는다.
"진아야... 오빠는... 진아가 힘들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진아의 어깨를 감싸주며 위로하는 창호.
그러자, 창호의 팔을 밀어내는 진아.
"치... 선배.. 미워!! 아까 선배 친구분한테.. 내가 여자친구라고 말하지.. 그랬음... 나 그냥... 이렇게 삐지지도 않았을텐데..." 입술을 삐죽거리며 창호를 바라보는 진아.
"아.. 우리 진아가 아까 그것때문에 삐졌던 거구나? 으이구. 아무튼 못말린다니까." 진아의 볼을 꼬집는 창호.
"선배... 오늘... 나랑.. 같이 있어줄꺼죠..?"
진아가 눈물 그렁그렁하게 바라보면, 덥썩 진아를 껴안아버리는 창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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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크아웃한 커피를 마시며 캠퍼스 안을 걷고 있는 장미.
"어머, 그래서 오늘 그 분이랑 만나기로 한거야?" - 장미
[응. 오빠가 오늘 내가 꿈에 나왔대. 헤헤.] - 수화
"이 기지배. 무슨 마법을 부렸길래 그 분이 너한테 또 마음이 뿅 가셨대에?" - 장미
[마법은 무슨.. 역시.. 오빠는 나를 많이 아끼는 것 같아. 내가 그 여자애 때문에 그동안 너무 오빠를 의심했던 건 아니었을까 싶어..] - 수화
"에휴... 그래에... 니가 편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 저 멀리 껴안고 있는 남녀를 발견한 장미. 틀림없는 창호와 진아였다.
[장미야. 여보세요?] 갑자기 말이 없어진 장미가 걱정스러운 수화.
".........." 커피를 든 장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장미야??] 영문을 모르는 수화.
"......수화야... 너...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 같다..."
전화를 끊고는 사진을 찍어 수화에게 전송하는 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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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확인하는 수화, 멍하니 자리에 주저앉는다.
멍한 것도 잠시, 창호에게 전화를 거는 수화.
'뚜루루'
[여보세요?] 평소같으면 '수화야'하고 받았겠지만 옆에 진아가 있어 눈치가 보이는 창호였다.
"오빠.. 지금.. 어디예요?"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수화.
[어. 나 학교지. 밥 먹었어?] 창호 역시 진아와 있다는 것을 티내지 않으려 애썼다.
"아직이요.. 오빠랑 같이 점심 먹을려구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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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오늘?" 창호, 진아의 표정을 보는데 찌푸리며 설레설레 고개를 젓는 진아였다.
[네. 오늘.. 오빠가 보자고 하셨잖아요...]
"흠흠!!!" 일부러 헛기침 소리를 크게 내는 진아.
창호, 진아에게 '쉿!!' 해 보이면 딴청피우는 진아다.
[오빠.. 지금 옆에.. 누구 있어요..?]
"어? 아, 아니... 수화야 근데 어쩌지? 오빠가 지금.... 교수님 뵈러 가야할 것 같은데... 이따 저녁에.. 저녁에 만나자. 응?"
그러자 한껏 밝아지는 진아의 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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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화, 잠시 고민을 한다.
'안 돼... 이대로 둘이 계속 있게 내버려 둘 수 없어. 어떻게든 오빠를 만나야 해. 두 사람을 떼어놓아야 해...!!!'
"오빠.. 저.. 오빠한테 할 말 있어요..." 비장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수화.
[할 말? 뭔데..? 중요한..거야?]
"네. 중요해요. 오빠.. 우리 만나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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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이잉.. 가지마요. 선배. 네? 같이 있기로 했잖아요." 창호의 팔을 못 가게 잡고는 응석부리는 진아.
"미안. 사실 오늘 아침에 수화랑 만나기로 약속 했었거든.."
"취소하면 되잖아요. 교수님 만나러 간다고 하면 되잖아요. 네?"
"수화가 할 말이 있대. 중요한 이야기인가봐."
"아.. 설마..."
"설마? 뭐?"
"설마... 헤어지자고..하는 거.. 아닐까요..?"
"뭐?" 잠시 멍한 창호.
자신이 말한 대로 수화가 창호에게 이별을 고하길 기대하는 진아였다.
'그래. 한수화가 선배한테 헤어지자고 하면. 나야 땡큐지. 놓기만 해봐. 이제 선배.. 꽉 잡고 어디도 못 가게 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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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 거울 앞에 서 있는 미니스커트 차림의 수화, 거울을 보며 붉은 립스틱을 덧 바른다. 그리고는 머리를 단정히 하며 씨익 웃어보인다.
'정진아. 착각하지 마. 게임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