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3 좋은사람 =========================================================================
창호는 진아와 전화를 끊고는 잠시 긴 생각에 잠겼다.
루리는 수화를 투명인간 취급하면서 동아리 임원들끼리만의 얘기를 이어나갔다.
"우리 오랜만에 이번주에 한번 모이자. 임원들끼리 요즘 너어무 안 모였잖어. 어때? 우린 다 같은 학교니깐." - 루리
"에이, 누나. 근데 지금.. 수화누나도 옆에 있잖아요. 너무 우리끼리만 얘기하는 거 아니예요?" 병욱이 수화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야, 장병욱." 루리는 병욱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병욱은 쫄아서 곧바로 눈을 깔았다.
"낄끼빠빠 몰라?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질 줄 알아야지. 센스 없게 운영진들 자리에 낀 게 누군데 그래?!" 루리가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맞어. 이건 뭐 예의도 없고 눈치도 없고. 어휴." 민주가 맞장구를 쳤다.
수화는 그 자리에 더이상 앉아있기 싫었다. 생각했던 것처럼 가시방석이긴 하지만 여기까지 온 건 순전히 창호때문이었다. 창호의 연인으로서 사람들에게 정식으로 인사하고 싶었다. 그러면 자신을 싫어했던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자신을 인정해줄 것 같았다.
또한 루리와 민주가 그 자리에서 괴롭혀도 창호가 옆에서 든든하게 자신을 지켜줄 줄 알았다. 하지만 창호는 지금 이 자리에 없다.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동안...
수화는 창호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오빠, 어디예요?]
메세지가 전송되기 무섭게 창호가 가게 안으로 들어온다.
"야, 윤창호. 너 뭐하다 이제 왔냐?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루리가 장난치듯 말했다.
"어어.. 미안. 부모님이랑 통화가 좀 길어져서."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는 창호
"오빠. 괜찮아요?" 수화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어? 어... 아무 일도 아냐. 걱정하지마."
창호가 걱정이 되었던 수화는 테이블 아래로 창호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순간 창호가 수화를 보면 수줍게 웃고 있는 수화의 얼굴이다.
창호는 수화의 웃는 얼굴에서 자신에게 신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수화야... 니가 날 이렇게 믿어주는데... 난...' 창호는 죄책감에 고개를 숙였다.
그때 창호의 핸드폰 메세지 알림이 울린다. 창호, 몰래 핸드폰 확인한다.
[선배.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예요. 기다릴게요.]
창호는 잠시 흔들린듯 했지만 이내 핸드폰을 꺼버린다.
루리가 물을 따라 마시려는데 수화가 물을 대신 따라준다. 수화가 계속 챙겨주자 조금 흔들린듯 했지만 이내 수화를 또 못살게 굴기 시작한다.
"아, 됐어. 내가 먹을게." 수화가 루리의 앞접시에 음식을 담아주려는데 루리가 앞접시를 홱 뺏어버린다. 수화는 잠시 민망했지만 이내 웃어보인다.
"네. 헤헤" 수화는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는 자리가 너무 힘들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창호 오빠에게 어울리는 여자친구라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 그리고 창호 오빠를 치켜세워주기 위해서.
"형, 진짜 부러워요. 나도 저렇게 잘 챙겨주고 여성스러운 여자친구 생겼으면 좋겠다. 헤헤" 창호를 부러워하는 병욱.
"야, 임마. 너 소개팅 해봐라. 백 날. 그래도 수화 같은 여자 안 나온다. " 창호가 기세등등하며 받아친다.
"허.. 형..이러기에요? 저 소개팅은 언제 시켜줄거예요? 아니, 수화누나!! 누나 후배들중에 소개시켜줄 만한 사람 없어요??"
"아, 음... 병욱씨는... 어떤 스타일 좋아하시는데요?"
"저는.. 잘챙겨주고 여성스럽고.. 조신하고..딱 수화누나 같은 여자요!!"
"참나.. 니가 뭘 알고 그렇게 말하는 거니? 남자들이란.. 단순하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그러다 엄청 쎄게 물릴수도 있어. 앙!!!" 병욱을 물어버릴 것처럼 무섭게 표정지어보이는 루리. 그러자 병욱, 루리 표정에 움찔한다.
"음.. 알았어요. 한번 찾아볼게요. "
"고맙습니다 누나!!" 이내 활짝 웃어보이는 병욱.
밥을 다 먹고는 모두 흩어진 동아리 임원들. 창호와 수화는 단 둘이서 골목길을 걷고 있다.
어느새 수화의 집 앞에 도착한 둘.
"수화야."
"네?"
"이번 MT에서... 걱정 많이했지? 진아가 갑작스럽게 그렇게 말해서..."
"아... 좀 놀래긴 했어요.. 진아가 오빠를 많이 좋아했나보다. 하고..."
"하아....." 하늘을 보며 한숨쉬는 창호.
"근데... 전 오빠를 믿어요. 그래서 진아가 그렇게 말해두... 오빠가 꼭 저를 지켜줄 걸 알고 있었으니까... 진아를 잘 타이르고.. 나한테 이렇게 와줄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창호는 그렇게 말하는 수화를 덥썩 껴안았다. 창호의 갑작스러운 포옹에 놀란 수화. 그러나 이내 수화도 웃으며 창호를 꼭 껴안는다.
"수화야... 앞으로... 니가 걱정하는 일 없게 할게..." 창호의 턱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흘렀다.
"네. 지금도 오빠 믿고. 앞으로도 계속 믿을거예요..."
둘은 미소지은 채로 서로를 꼭 껴안는다. 깍지가 풀어질세라 조금만 몸에서 떨어져도 다시 꼭 껴안는 두 사람.
.
.
.
그 날 이후로 두 사람은 더욱 가까워졌다. 진아에게서는 더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고 창호는 처음에 내심 진아가 걱정되었지만, 매일매일 자신을 보고 활짝 웃어주고 믿어주는 수화에게 충성을 다해야겠다는 마음이 점점 커져만 갔다.
"오빠는 정말 좋은 사람이예요." 수화가 창호를 보며 방긋 웃어보였다.
수화는 언제나 창호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해주었고 창호는 수화의 그 말에 자신이 정말 '좋은 사람'인 것 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자신을 열렬히 믿고 있는 수화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더 노력하고 있었다.
어느새 시험기간이 찾아왔고, 창호와 수화는 각자의 학교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와 과제를 수행해내고 있었다.
[오빠, 공부 잘 되가요? 드디어... 내일이면!! 시험 끝!! 신난당! 헤헤]
열심히 노트정리를 하던 창호가 수화의 메세지에 방긋 웃어보인다.
[응. 드디어 우리 둘다 내일이면 시험 끝이네. 마지막까지 불타올라야지.]
[당근당근!! 글구 놀이공원 진짜 기대돼요!! 가서 바이킹도 타구 사탕열차도 타구 공포체험두 해요! 헤헤]
[근데 나 무서운 거 진짜 잘 못 타는데. 그래도 수화가 손 잡아주면 괜찮을 것도 같고.]
[제가 손 꼭 잡아줄게요. 헤헤헤]
수화가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킥킥 거리자, 앞 자리에 앉은 여학생이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주면 수화는 재빨리 자신의 입을 막는다.
[그래. 그럼 열공하구. 내일 시험 끝나고 잠깐이라도 보자.]
[네. 내일 시험끝나고 봬용. 낼은 제가 한국대로 갈게요. 히히. 그럼 열공!!]
[열공. 사랑해.]
[저두요. I LOVE YOU♥ 열공해요 오빠.^^]
수화는 아까보다 더 열심히 책장을 넘기며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창호 역시 수화의 애교 섞인 문자에 실실 쪼개며 다시 열심히 공부를 한다.
.
.
늦은 저녁, 한국대 캠퍼스를 혼자 거닐고 있는 진아. 잠을 못 잔건지 밥을 제대로 못 먹은건지 몰골이 핼쓱하고 초췌하다.
도서관을 막 지나치는데 1층 도서관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창호의 모습보인다.
"선...배..."
진아는 유리창에 기대어 눈물을 흘리며 창호를 계속 바라본다.
지나가던 몇몇 학우들은 진아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지만 진아는 그런 시선들에 개의치 않는다.
열심히 공부를 하던 창호는 잠시 창 밖 풍경을 보다가 기지개를 한번 켜고는 도서관 밖으로 나온다.
나무 뒤에 홱 빠르게 숨는 진아.
창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다.
"어. 수화야. 열공하고 있어?"
수화 역시 창호의 전화에 열람실에서 나와 통화를 받는다.
[네. 열공하고 있긴한데... 아직 부족해요. 몇 번 더 봐야할 것 같아요.]
"우리 수화. 이번에 A+ 받으면 오빠가 소원 하나 들어줄까?"
[네!! 음.. 근데 소원 뭘로 빌지... 벌써부터 고민된당..]
"천천히 생각해 놔. 내가 어디 내일 당장 떠나는 것도 아니니까."
[아. 그럼 소원은 오빠가 절 떠나지 않는걸로 할게요!]
"뭐? 하하. 우리 수화 이제 이런 장난도 칠 줄 알구. 많이 컸어."
[흥. 오빠가 저를 이렇게 키웠잖아요. 책임져요.]
"그래. 오빠가 수화 책임질게. 됐지? 하하"
나무 뒤에 숨어 이를 악물며 눈물을 쏟아내던 진아는 질투의 칼날을 갈고 있었다.
'한수화... 여우같은 년... 도대체 우리 창호 선배를 어떻게 구워 삶았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