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3 두 사람 =========================================================================
수화는 다른 여자들과 웃고 있는 창호를 멀리서 지켜보며 술잔만 들이키고 있었다. 그리고 반대편에 앉은 민수는 쉴새 없이 수화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민수는 수화를 웃길려고 이런저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쏟아붓고 있었다. 그러나 수화는 그런 민수의 말을 귀기울여 들어주고 싶었지만 민수의 이야기는 전혀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저 민수는 자신 스스로가 재밌다고 느껴지는 이야기들을 하고 스스로 막 웃는 것이었다. 수화는 점점 참기가 힘들어졌다. 가뜩이나 창호를 지켜보는 것도 힘든데…. 억지로 웃기까지 해야한다니….
"저 화장실 다녀올게요…." 화장실을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호의 옆을 지나쳐간다.
수화는 보이지도 않는지 그저 쉴새 없이 술게임을 하고 있는 창호.
화장실에 들어가 립글로스를 덧발라 본다. 그리고 머리를 정돈한 후 다시 밖으로 나가려는데 누군가와 부딪혀 수화의 파우치가 바닥에 떨어진다.
"아, 죄송해요. 사람 있는 줄 모르고... 어? 수화씨네" 파우치를 주워주며 종현이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 언제 오셨어요? 오늘 안 보여서 바쁘신가 했는데…."
"아, 오늘 학교에 일이 좀 있어서요. 호수공원 어땠어요? 멋지죠?"
"네…. 진짜 멋졌어요. 같이 보셨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웃으며 수화가 말했다.
"뭐…. 저는 학교 근처라 가끔 가는데요 뭐."
"아, 그래요…. 그럼 저는 가볼게요…." 둘 사이의 침묵으로 낯선 수화는 어색하게 웃었다.
자리에서 돌아온 수화는 창호때문에 다운되었던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민수와 같은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다른 테이블은 술게임으로 아주 시끄러웠다.
"수화누나!!! 우리도 술 게임해요!!" 민수가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며 말했다.
"맞아요, 언니! 우리 테이블도 저기처럼 술게임해요!!" 동연도 옆에서 거들었다.
"아, 그럴까…? 그래. 무슨 게임부터 하지? 딸기 게임 어때? " 수화가 말했다.
"아, 근데 나 게임할 줄 모르는데…. 딸기게임 어떻게 하는거예요?" 당황하는 동연.
민수는 신입생이라 게임을 모르는 동연에게 열심히 딸기 게임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나도 껴줘요. 나도 딸기 게임 할래. " 그때 수화의 옆자리에 불쑥 앉는 종현.
"아…. 그래요. 같이해요" 조금은 어색한 표정의 수화
그러나 수화는 그런 종현이가 나쁘지 않았다. 종현이는 창호만큼의 두근거림이 느껴지지도, 완전 남자다운 수컷의 냄새가 풍기지도 않지만 그래도 뭔가 적당한 편안함이 느껴지고 또 살짝 궁금증이 유발되는 사람이었다.
민수가 동연과 다른 신입생들에게 게임을 다 알려주고는 본격적으로 게임이 시작되었다.
"수화누나가 좋아하는 딸기~ 게임!! 딸기가 좋아. 딸기가 좋아. 좋아.좋아.좋아좋아좋아." 민수가 촐싹대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수화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은 딸기게임 이었다. 딸기 게임할때 수화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을 보며 자신의 귀엽고 엉뚱한 매력이 어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수화는 눈치가 참 빠른 여자였다.
계속해서 딸기게임은 진행되었고 소주와 맥주 반반으로 섞인 폭탄주는 계속해서 민수가 마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수는 술에 꼴은 상태가 되었다. 술에 잔뜩 취한 민수는 다른 테이블로 옮겨졌다.
종현은 계속해서 수화의 장래희망과 취향에 대해서 물었다. 수화는 종현과 이야기하면서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수화는 이야기가 잘 통하는 사람이 좋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속마음을 끄집어 낼 수 있게 이것저것 물어봐 주는 사람이 좋았다. 수화는 그런 남자를 결혼 상대라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종현은 결혼상대로 누가봐도 손색이 없었다. 종현 옆에 있으면 안정감이 느껴지면서도 생각도 깊고 사람들을 잘 챙기는 타입이었다.
종현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찰나, 누군가 수화의 건너편에 앉았다. 창호였다.
"둘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해?" 종현과 수화의 표정을 살피며 자리에 앉는 창호.
수화는 순간 좋아서 웃기만 했다.
"형, 술 좀 많이 드셨어요?" 종현이 물었다.
"응. 좀 먹었지. 술게임하는데 쟤네들 다 꼴고 나만 살아남았어" 은근히 자랑하며 말하는 창호.
"그럼 우리 살아남은 사람끼리 한잔해요" 종현이 잔을 내밀었다.
"짠" 다같이 서로의 잔을 부딪혔다.
그리고 세 사람은 술을 원샷했다. 수화는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창호와 가까이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회장님은... 몇 살.. 이라고 하셨죠?" 술에 취해 조금은 얼굴이 빨개진 수화가 물었다.
"나 스물일곱. 학교를 좀 늦게 들어가서." 창호가 안주를 집어먹으며 대답했다.
"아... 동안이세요... 회장님 저랑 동갑인 줄 알았어요.." 수줍게 웃는 수화.
"칭찬 들으니 고맙네. 아 근데 언제까지 회장님이라고 할꺼야??"
"아.. 그럼 뭐라고 불러드리는 게 편할까요?" 창호의 말에 조금 정신이 드는 수화.
"창호오빠? 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창호.
"역시…. 형도 오빠라고 불러주는 게 좋군요?" 술이 약한 탓에 온 몸이 시뻘개진 민수였다.
"그럼. 나도 남잔데."
"창호…. 오빠….? 헤헤" 수화가 용기내어 불러보았다.
그러자 창호는 수화의 '오빠'라는 소리에 기분이 좋아서 계속 웃었고, 종현은 갑작스러운 창호의 등장에 멈칫했다. 종현은 누가봐도 남자다운 창호에게 늘 주눅이 들어있었다. 종현은 자신에게는 없는 수컷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남자다움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수화야. 그럼 이제 우리도 말 놓자" 종현은 수화와 창호,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려 노력했다.
"그럴…까?" 수줍은 수화.
"음…. 내가 너보다 한 기수 위니까. 나보고 종현선배라고 불러" 으스대며 말하는 종현.
"이새끼.. 너도 남자라고 선배라는 소리 듣고 싶구나? " 그런 종현을 보며 우습다는 듯 비웃는 창호였다.
"하하…. 조… 종현선배? " 그런 창호를 보며 종현에게 장난치는 수화
"농담이야. 우린 동갑이니까 그냥 서로 이름 부르자. 수화야." 그런 수화가 귀엽다는 듯 바라보는 종현.
"그래. 그러자…. 종현아." 따뜻한 종현의 표정에 웃으며 대답하는 수화.
"이제 곧 있으면 동아리 MT인데 수화도 올 거지?" 훈훈한 둘 사이를 거침없이 비집고 들어오는 창호
"네…. 되도록이면 가려고 할려구요." 수화가 대답했다.
"넌 오냐?" 창호가 종현에게 물었다.
"그때 봐서요." 종현이 대답했다.
술자리가 모두 파한 뒤 7명 정도의 인원만 술집 앞에 모였다. 여자는 수화뿐이었다.
"수화야. 너 집에 안 가도 괜찮겠어?" 종현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수화에게 물었다.
"아, 응…. 오늘은 소주 안 마셔서 멀쩡해." 활짝 웃어보이는 수화.
"아니, 내일 수업 없냐구." 진지하게 걱정하는 종현.
"내일 수업 3시지롱." 방긋 웃으며 자랑하는 수화.
"아, 다행이네." 수화가 개구쟁이처럼 웃자 그제서야 안심되는 종현.
"자, 그럼 집에 갈 사람은 가구 남아서 술 한잔 더할 사람은 따라오세요." 창호가 동아리 사람들 앞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5명정도의 인원들은 치킨집으로 향했다. 수화는 남자들밖에 없었는데도 어색해 하지 않고 공대 아름이 마냥 잘 적응하고 웃으며 술자리를 빛나게 해주고 있었다. 처음보는 남자들과도 잘 어울리는 거리낌없는 수화의 성격 탓인지 술자리에 있던 남자들은 다들 수화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종현은 자신이 관심있어하는 수화 옆에 다른 남자들이 말을 거는 게 거슬렸다. 그것은 창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창호도 그저 평범한 신입생인 수화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니, 사냥본능이 발동해서일까.
창호의 마음속에 다른 남자들의 관심을 받으며 둘러싸여 있는 수화를 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술자리가 모두 끝나고나서 였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 수화네 집이 어디랬지?" 창호가 물었다.
"아, 저 신화여대 근처에요…."
"아, 그럼 내가 데려다줄게."
"아니에요, 형. 제가 저번에 데려다줘서 알아요. 제가 수화 데려다줄게요." 종현이 끼어들며 말했다.
잠시동안 창호와 종현, 두 사람의 약간의 신경전이 오갔다.
"아, 그럼 형이 데려다주세요."
결국 창호가 수화를 데려다주기로 하였다. 수화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창호랑 있는 단 둘만의 시간이었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창호는 은근슬쩍 수화에게 스킨쉽을 했다. 은근슬쩍 어깨를 부딪힌다던지...
수화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창호와 둘이서 이야기를 하면서 걷는 시간이 좋았다.
"오빠. 여기가 저희집이에요."
"아, 너 혹시 자취하는거야?"
"아, 네…. 통학하기 힘들어서…. 자취하고 있어요."
"혼자?"
"네…."
창호는 혼자산다는 수화의 말에 마음 속에서 시커먼 속내가 튀어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못빠져 나오게 막고 있었다.
"아…. 그럼 밥은 어떻게 해먹어? 잘 해먹어?"
"학생식당에서 주로 사먹어요…. 편의점에서도 그냥 삼각김밥으로 때우기도 하구…. 오빠는요?? 오빠는 잘 드세요??"
"아, 나는 부모님이랑 같이 살아서... 그나저나 너 밥 잘 챙겨 먹어야 할텐데"
"오빠 참 자상하시네요…." 창호가 걱정해주는 것이 기분 좋은 수화였다.
"내가 좀 자상하지. 하하하. 나는 여자 혼자 사는 집 한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좀 궁금하네."
"아 정말요? 그럼 지금…."
수화는 순간 지난 번 종현이 집에 바래다줬을때 수화의 초대에도 종현은 거절하고 그냥 갔던 것이 생각이 났다.
'아…. 나는 그저 고마워서 초대한거지만…. 상대방은 내가 막 초대하구…. 그러면 쉬운여자라고 싫어할 지도 몰라…. 조심해야겠다.'
"그럼 다음에…. 제가 초대할게요." 수화가 아쉬운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다음에? 그냥 지금 잠깐 구경하고 가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