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58 >
언젠가 터질 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오늘일 거란 생각은 못 했다.
막상 열애설이 터지니 어떻게 해야 하나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성우는 일단 미소와 연락부터 해야 했다. 자신이 이럴 정도면 아마 그녀는 더 심할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멘탈이 붕괴해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할 수도 있었다.
남자 배우와 여자 아이돌.
당연히 열애설에 취약한 것은 미소 측이었다.
과거 유일한과 손혜리 열애설 당시를 떠올려봐도 그랬다. 당시 터진 열애설 덕분에 혜리는 상당히 타격을 입었다. 덕분에 꽤 긴 시간 동안 활동을 원활히 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게 걱정이었다.
더구나 미소는 아이돌이었다.
그녀의 팬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걱정되었다. 만약 이번 일이 잘못되면 어쩌나 싶어 성우는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그런 그에게 두부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남자답게 책임져.
‘결혼이라도 하라는 거야?’
-그게 당장의 해결책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요즘같이 바닥을 치는 출산율을 보면 장려할 만 하지.
‘어이구 지금 당장은 사양하겠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의 핸드폰은 어느 정도 충전되었다.
손을 대지 않아도 자동으로 켜진 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상당수 보였다. 서둘러 목록을 확인하니 미소가 건 전화도 몇 통 보였다. 그것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필요할 때 곁에 없었던 것이다.
성우는 미안한 마음에 곧장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 성우의 모습을 보며 요한은 머리를 긁적였다. 열애설 한 번 안 난다며 타박하던 자신의 말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막상 이 일을 당하니 그 역시 정신이 없었다.
하루 뒤.
세상은 더 시끄러워졌다.
성우의 소속사에서 둘의 열애설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것은 미소가 소속된 JR 엔터테인먼트에서 내놓은 보도문도 마찬가지였다. 그 과정에서 일반인은 모르는 진통이 약간 있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성우와 미소의 노력 덕분에 큰 문제는 없이 잘 넘어갔다.
[성우x미소 마침내 열애 인정]
[공식 입장 :유성우 측 미소와 열애설 인정 “첫 만남은 블링 LA콘서트”]
[팬들조차 인정한 비주얼 커플]
[다시 보는 ‘트러블 메이크’ 무대. 돌이켜 생각하면 이때가 시작!]
미소는 생각보다 씩씩했다.
오히려 대놓고 연애할 수 있다며 좋아하기도 했다.
물론 그 이면에 내색하지는 않았어도 다른 멤버들에 대한 미안한 감정도 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처제들은 이번 열애설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성우는 이왕 공개된 김에 즐기고 싶었다.
평소 둘이 해보고 싶었지만, 들킬까 두려워 시도조차 하지 못한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소가 그토록 바라던 놀이동산도 성우가 바라던 국내 여행도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브로드웨이의 개봉일.
그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성우는 그 무대에서 상준과 함께 무대를 꾸려야 했다. 특히 오프닝은 그의 몫이었다. 지금껏 준비할 시간이 없었기에 더는 뭉그적거릴 틈이 없었다.
*
3월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브로드웨이에 새로운 연극 하나가 걸렸다.
중심부에서 다소 외진 극장이었지만, 그래도 오프 브로드웨이 극장 가운데 제법 규모가 있는 곳이었다.
연극은 시작부터 관심을 제법 받았다.
가장 큰 이유는 유성우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할리우드에서 한참 잘나가는 그가 브로드웨이에 선다는 것은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더구나 한국산 연극이었다.
그러니 더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한국의 예술단이 처음 발 디딘 것은 아니었다.
과거에도 한국의 뮤지컬이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적이 있었다. 그때의 그 뮤지컬은 위안부 소재로 만들어진 내용이었는데 상당히 극찬을 받은 적이 있었다.
첫 공연을 마친 이후.
성우는 텅 빈 무대를 바라봤다.
오늘 공연은 무척 여운이 길게 가고 있었다.
할리우드에서 제법 성공했지만, 그게 그의 꿈이라 할 수는 없었다. 만약 누군가 자신에게 꿈을 이룬 순간을 묻는다면 성우는 오늘이라 말하고 싶었다. 그만큼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브로드웨이.
연극과 뮤지컬 무대의 정점인 장소였다.
그곳에서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쁜 일이었다. 특히 파란 눈의 외국인들이 바라보는 그 눈길은 국내와는 또 다른 느낌이 있었다. 그때 무대 뒤에서 주이호가 걸어 나왔다.
“여기서 혼자 뭐해?”
그는 천천히 걸어와 성우의 옆에 앉았다.
성우가 흘깃 보니 그의 눈가에 물기가 보였다. 그게 눈물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아마 무대 뒤편은 더 난리도 아닐 것 같았다.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첫발은 잘 디뎠으니 충분히 그럴 자격은 있었다.
“뭐 그냥 이런저런 생각 하고 있었어요.”
“오늘 수고 많았어. 너 아니면 정말 다들 멘붕에 빠질 뻔했어.
“아하하. 처음이니 그렇죠.”
사실 최종 리허설까지.
모든 이들이 실수를 연발했다.
그토록 열심히 땀 흘려가며 연습했던 것들이 여기서는 쉽게 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긴장감 때문이었다. 솔직히 주이호마저 컨트롤 박스에서 실수를 했을 정도니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나마 성우가 온갖 노력을 다하지 않았더라면 첫 공연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될 뻔했다.
“이제 너도 선배 노릇 톡톡히 하는 거 보니까. 엄청 대견하더라.”
“단장님이 봐도 제가 나이를 헛먹지는 않았죠?”
“하하하. 그렇다고 치자. 그나저나 꿈을 이룬 소감은 어때?”
“꿈이요?”
“너 데뷔할 때부터 술만 먹으면 브로드웨이 가고 싶다고 했잖아.”
“당연히 기분 좋죠.”
성우는 짧게 답을 했다.
그게 그의 진심이기도 했다.
그 이상 수식어를 붙여도 지금 심정을 그대로 반영하기 어려웠다. 그걸 아는지 이호도 더는 묻지 않았다. 그 역시 성우와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호는 잠시 무대를 바라보다 툭 던지듯 말을 했다.
“어쨌든 고맙다.”
“에에~ 그게 뭐예요.”
“구차하게 하나씩 말해 주길 바라는 거야? 국내에 남아있는 녀석들 무대를 따로 챙겨준 것도 고맙고. 작두에 무대를 저렴하게 임대해준...”
“어이쿠 됐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성우는 재빨리 말을 끊었다.
듣다 보니 상당히 민망한 이야기였다.
사실 그가 지금까지 해준 일은 다른 이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의 만족 때문에 일을 벌인 거라 생각하는 그였다. 이 무대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자신이 이 무대에 서지 않을 거라면 이 정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생각보다 쑥스러워하자 이호는 주제를 슬쩍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
“그나저나 내일이 시상식인데 준비는 잘하고 있어?”
“그걸 따로 준비해야 하나요?”
“수상 소감도 미리 써놓고 그래야지.”
“괜히 정성껏 준비 했다가 다른 사람이 받으면 솔직히 맘 상하잖아요.”
“너 그런 상에 후보로 올라가서 떨어져 본 적은 있냐?”
성우는 곰곰이 따져봤다.
사실 노미네이트에서 떨어진 경험은 없었다.
물론 이번처럼 명성 높은 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승률은 100%였다. 어찌 보면 운이 좋다고 봐도 되었다.
-자신감과 오만함은 한 끗 차이다.
두부는 그것을 지적했다.
항상 겸손해야 한다는 말을 달고 사는 녀석이었다. 성우도 그런 그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는 않았다. 데뷔 이후에 거만함에 물들어 망가지는 이들을 상당히 많이 본 그였다.
“그것 봐 그런 적 없지?”
“그래도 언제나 처음이라는 것은 있죠.”
“뭐 그건 알아서 판단하고 모처럼 얻은 기회니까 멋진 소감 기다릴게.”
“매번 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게 참 힘들어요.”
지금까지 성우가 받은 상.
그것을 모두 합치면 4~5개는 되었다.
어떤 것은 드라마를 통해서 어떤 것은 영화를 통해 받은 것이었다. 현재까지 그 상 가운데 가장 소중하다 여기는 것은 황룡영화제의 신인상이었다. ‘왈우’를 출연한 이후에 받은 그 상은 그의 본격적인 활동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이후에 남우 주연도 받았지만, 그래도 그때만큼의 감동은 없었다.
문제는 당시 그의 소감 발표였다.
그때도 소감문은 전혀 준비하지 못한 그였다. 덕분에 무대 위에서 한참 버벅대며 말했던 기억이 났다. 그때 생각이 나자 성우는 잠시나마 고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이미 예정된 것은 있었다.
-내 소원 잊지 마.
‘도대체 몇 번을 말하냐. 안 까먹는다고!’
-정말 중요한 거란 말이야.
두부는 몇 번이고 소원을 강조했다.
시상식에서 이름 한번 말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해외의 경우에는 감사의 인사를 그렇게 하는 것은 흔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한두 명의 이름쯤은 부르는 데 전혀 문제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녀석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성우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기분이랄까? 그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녀석이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무척 진지했기 때문이었다.
둘이 함께한 세월이 벌써 8년째였다.
23살에 그가 전역한 그 날부터 서른이 넘어간 지금까지 둘은 하루도 떨어지지 않고 같이 보냈다. 당연히 목소리만으로도 대충 거기 담긴 감정의 행간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마침 나머지 무사귀도 떠난 상태였다.
최후까지 남은 두 무사귀는 지난 1월을 끝으로 모두 성불했다. 가능하면 바쁜 일을 마치고 하려 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두부가 매일 재촉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덕분에 가양주를 배우러 안동까지 가야 했지만, 성공적으로 두 분 모두 성불을 시켰다.
이제 남은 것은 두부 하나.
그마저 떠나려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되었다.
하지만 녀석은 그에 관련된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입에 시멘트라도 바른 듯 묵묵부답이었다.
‘도대체 이유가 뭐야?’
*
아카데미 시상식 당일.
성우는 아침부터 무척 바빴다.
새벽에 입국하신 부모님 마중을 나가야 했고 오전에는 미소를 데리러 가야 했다. 하루에 두 번이나 공항에 다녀오니 제법 피로가 몰려왔다. 성우는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대로 누워버릴 수는 없었다. 눈앞에 있는 미소가 무척 긴장한 상태이기 때문이었다.
“오늘 같은 날 인사드려도 될까요?”
“사실 지금 아니면 힘들어. 나도 몇 년 만에 뵙는 건데 언제 또 가능할지 예측이 안 되잖아.”
“평소 부모님 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요?”
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항상 듣던 말이 있었다. 성인이 된 순간부터 각자의 삶을 살자는 것이었다. 그 말에는 성우도 흔쾌히 동의를 했었다. 자신이 독립적인 삶을 바라듯 부모님도 그럴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소는 그런 그의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잘 이해가 안 되네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 괜찮아. 그리고 아마 부모님이 한국에 계셨더라도 얼굴 보기 쉽지 않았을걸.”
“하긴 그렇기는 하죠.”
성우는 미소를 마주 보며 웃었다.
그러자 갑자기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그것을 느낀 미소는 볼이 빨갛게 변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분위기는 19금으로 가는 초입인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성우는 충분히 그럴 의사가 있었다. 무척 오랜만에 보는 연인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시도는 키스가 시작하기도 전에 깨지고 말았다.
띵동!
입구에서 울리는 초인종 소리.
그 소리는 한껏 달아오르던 분위기를 한순간에 깨버렸다. 덕분에 성우는 슬쩍 짜증이 났다. 하지만 입을 가리며 웃는 미소의 얼굴을 보고 겨우 참을 수 있었다. 그녀는 어서 누군지 확인해 보라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주문한 드레스 온 거 아닐까요?
“드레스만 기다렸던 거였어?”
“설마요. 혹시 성우 씨 부모님일 수도 있잖아요.”
미소의 말에 성우는 몸을 일으켰다.
마음 같아서는 못 들은 척하고 싶었다.
하지만 미소의 말처럼 부모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가 입구로 걸어 나갈 무렵 다시 한번 벨이 울렸다.
성우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앞에는 전혀 예상 못 한 이가 있었다. 그는 바로 하얀 정장을 차려입은 킬리안이었다.
“헤이~ 브로! 내가 오늘 특별히 시상식장까지 태워줄게. 어서 나가자.”
“전화 좀 하고 오면 덧나냐?”
“그럼 서프라이즈가 아니지. 오늘 꼭 상 타라고 최고급 리무진까지 빌렸어. 어서 나갈 준비해.”
“정말 고맙기는 한데 딱 한 대만 맞아라.”
“무슨 소리야?”
한 차례의 타격음.
확실히 손은 말보다 빨랐다.
킬리안은 곧장 항의하려 했지만, 뒤늦게 성우의 등 뒤에서 고개를 내민 미소를 발견했다. 그 순간 킬리안은 왜 자신이 맞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 음흉한 놈! 낮부터···커억!”
< 광끼 -15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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