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52 >
진수는 한숨을 쉬며 거절했다.
너무 부담되는 자리라는 것이었다.
주이호 단장의 연출력이 극대화를 이루던 공간.
그런 곳에 들어가서 자신이 뭘 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성우는 진수를 믿었다.
그가 친구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자리를 제안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렇다면 추후에 주이호를 볼 낯이 없었다.
진수의 독립영화.
그 영화를 통해 보여준 재능 때문이었다.
성우는 그 영화를 제법 높게 여기고 있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진수는 연출에 대한 감이 좋았다. 가능하다면 상업 영화로 바로 입봉(데뷔)하는 것도 좋은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경력 없는 신인 감독의 한계는 분명 있었다.
시나리오를 비롯한 자기 사람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투자자를 찾기 어려웠다.
대부분 기존에 이미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 감독에게 쏠리기 때문이었다. 인맥조차 거의 없는 진수가 그걸 뚫어내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내가 좋은 선생님 붙여줄게.”
“선생님?”
“주이호 단장님이 있잖아. 아직 미국으로 가기까지 시간 많으니까 그동안 그분한테 배우면 되는데 뭐가 걱정이야?”
어차피 한국에서 꽤 있을 그였다.
이번에 배우까지 선발했지만, 연습은 한국에서 할 예정이었다. 숙박비며 체류비가 비싼 뉴욕에 괜히 일찍 갈 필요가 없었다. 그쪽에서의 일은 자신과 홍 작가 등이 해결해도 충분했다. 브로드웨이 프로젝트를 설명해주자 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들으
니 왜 자신한테 외부 연출 제안이 들어온 건지 알아차렸다.
“그럼 작두가 반으로 쪼개지는 거잖아?”
“그 표현은 너무 과한 거 아니야?”
“그런데 그게 사실이잖아.”
“그냥 국외 파트와 국내 파트가 나눠진 거야. 어차피 나중에는 다시 합쳐질 건데 뭐.”
“엎어치나 메치나 그게 그거지.”
진수는 시니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자신의 제안이 싫지는 않은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을 내밀었다. 성우가 마주 잡은 그 손은 무척 거칠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살아온 녀석의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는 기분이었다.
‘이번에 꼭 성공해 봐.’
* * *
진수와 딜을 마친 이후.
성우는 곧장 미국으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벌여놓은 일이 워낙 많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걱정되는 것은 바로 대학로에 세워지는 빌딩이었다. 그래도 강 대표가 알아서 챙겨줄 거라 여겨졌다.
작두의 일도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이 부분은 전적으로 주이호 단장과 진수를 믿어야 했다. 두 연출가는 각각 다른 무대를 진두지휘하겠지만, 같은 극단 소속이라는 유대감이 있었다. 당연히 선의의 경쟁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되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온갖 고생 하며 판은 다 짜놓고 정작 형이 출연 못 하면 억울해서 어째요?”
“쓰읍! 부정 타는 말은 하지 마라.”
“앞으로 예정된 일정만 벌써 2년 치에요. 이거 자칫 꼬이면 재앙 수준인 거 아시죠?”
요한이 지적한 것.
성우는 그것 때문에 무척 신경 쓰였다.
왜냐하면 마벨 스튜디오의 촬영이 줄줄이 예정되어 있었다. 유니버스 시리즈의 한 달 분량의 촬영은 올해 연말 내에 끝나니 상관없지만, 아크로 시리즈가 문제였다. 그의 예상대로면 그 촬영이 내년 여름 정도에는 시작될 것 같았다.
“그래서 더블 캐스팅으로 가잖아.”
비장의 카드였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기에는 그만한 방법이 없었다.
같은 배역을 연기하면서 스케줄을 나눌 사람은 상준이 형으로 내정되었다. 철민이 형도 그 자리에 도전했지만, 아직 상준을 뛰어넘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때 유부가 케이지 안에서 그르렁거렸다.
-고양이 팔자가 나보다 좋구나.
바로 옆 좌석에 놓인 케이지.
그 안에서 녀석은 심심한지 계속 케이지를 긁었다. 매년 적어도 서너 차례 이상은 비행기를 타는 녀석이었다. 그러나 아직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매번 탈 때마다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때마다 성우는 미안했다.
“그런데 집은 어떻게 할 거예요.”
“일단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잖아.”
“전에 살던 거기로 들어가는 거는 불가능하겠죠?”
성우는 요한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그 집에서 총까지 맞았는데 또 들어가자는 이야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그곳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집을 빌려주었던 클라크에게 수리비와 함께 아예 반납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를 해주자 요한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쉽네요. 그 집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간덩이가 아주 부었구나. 너 거기서 총 맞은 거 벌써 까먹었어?”
“호텔보다는 거기가 훨씬 더 편하니까 그렇죠.”
“그러고 싶어도 현금이 없어···”
성우는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런 그를 향해 요한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빌딩주가 될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하여간 있는 사람이 더하다며 요한은 안대를 썼다.
*
7시간 후.
비행기는 LA 공항에 도착했다.
성우와 일행이 밖으로 나오자 강한 햇살이 내리꽂혔다. 이미 가장 더운 시기는 지났지만, 아직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상태였다. 성우가 손을 눈가로 올려 햇살을 가릴 무렵. 서전트 감독이 일행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잘 쉬었어?”
“나름 잘 쉬고 왔죠.”
“잘 쉬기는요. 한국 가서도 아주 일을 찾아서 만들던데요.”
요한의 말에 서전트는 크게 웃었다.
이미 뭔가 둘 사이에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성우는 도대체 무슨 말을 했냐며 요한을 바라봤다. 그러자 녀석은 어깨만 으쓱하고 최정과 함께 짐을 챙겼다.
“호텔로 일단 움직일까?”
서전트는 운전석에 앉으며 그렇게 말했다.
성우는 일단 짐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보조석에 타기 전에 케이지를 열어 유부를 품에 안았다. 체온 덕분에 제법 뜨끈거렸지만, 몇 시간 동안 갇혀 있었을 녀석을 생각하면 이 정도 서비스는 해줘야 했다.
“우와~ 한국 못지않게 여기도 덥네요.”
“에어컨 좀 틀까?”
“가장 세게 틀어줘요.”
서전트는 에어컨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곧 시원한 바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서전트는 짐을 다 싣고 일행이 모두 탄 것을 확인한 이후에 시동을 걸었다. 공항을 빠져나갈 무렵. 성우는 서전트 감독에게 오늘 공항에 나온 이유를 물었다.
“무슨 일 있죠?”
“그게 말이지... 너한테 뭐 좀 부탁할 게 있어서.”
“뭔데요?”
“촬영된 필름으로 편집하다 보니까 엔딩이 조금 아쉬운 거 있지. 그래서 몇 장면은 재촬영을 해야 할 것 같아.”
서전트 감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에어컨을 틀었지만,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재촬영을 논한다는 것은 감독의 역량 평가에 치명적이었다. 뭔가 실수가 있었을 때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돈이 추가로 들어간다.
그것은 기본에 불과한 사항이었다.
그 외에도 배우와 스태프의 일정을 잡는 것도 문제였다. 절대 쉽게 볼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저는 상관없어요.”
“다행이다. 대신 멋진 선물을 준비해놨어.”
“뭔데요?”
“혹시 한국 출신의 K-Pop 가수 중에 ‘블링’이라고 알아?”
성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서전트가 말할 정도면 제법 유명한 것 같은데 혹시 몰라 성우는 재차 되물었다. 하지만 그가 하는 사람인지 그룹인지 모를 존재의 정체는 기억나지 않았다.
서전트 감독은 상관없다는 듯 설명을 이어갔다.
지난 촬영에 엔딩으로 썼던 공연장의 화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은 괜찮다고 했지만, 그는 그대로 그것을 내보기 싫었다. 그래서 백방으로 촬영지를 수소문하던 와중에 그 한국 가수 측과 연락이 닿은 것이었다.
“그 장면이 그렇게 신경 쓰였어요?”
“CG로 한계가 있잖아. 현장감도 너무 떨어지고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럼 애초에 다시 찍자고 하시죠.”
“나도 그 정도로 거지 같은지 몰랐지. 나중에 편집하다가 내가 얼마나 욕하며 자책했는지 너는 모를 거야.”
“뭐 개봉 전에 시간이 있으니 다행이네요.”
성우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개봉 시기까지 여유가 아직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성우가 뭔가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촬영이 언제인지 안 물어봐?”
“뭐 연습하고 그런 거 생각하면 1~2주 정도 시간 있을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야. 3일 후에 당장 그곳에서 재촬영해야 한다고.”
“네?”
서전트 감독의 말에 성우는 혀를 내둘렀다.
번갯불에 콩도 구워 먹은 인간이 바로 여기 있었다. 성우는 그 정체 모를 이들의 연락처를 달라고 했다. 일단 한 번 통화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도움을 받는 형편이니 감사하다는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호텔에 도착하면 연락처 줄게.”
“요한아. 너 블링이라고 알아?”
“케이팝 안 들은 지 꽤 돼서 잘 모르겠어요.”
“나는 아는데. 설명해줄까?”
최정이 웃으며 말했다.
마치 자신에게 모두 물어보라며 거들먹거리는 느낌이었다. 그에게 질문하자 최정은 폭포수처럼 그 ‘블링’이라는 그룹에 대한 정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데뷔한 지 487일 된 평균 나이 24.6세의 걸그룹. 네 명으로 이뤄졌는데 국적이 다양해. 중국과 태국 출신이 있고 나머지 둘은 순수 한국인이야. 다들 랩은 물론이고 춤을 아주 잘 추는데 특히 태국 출신의 릴리가 짱이지!”
“허~얼 대박!”
“487일이 지난 걸 어떻게 알아요?”
“다이어리에 표시해놨으니까.”
최정은 당당하게 말했다.
어째 이 아저씨가 그 말로만 듣던 삼촌 팬 같았다.
성우는 몇 년 만에 새로 발견한 그의 취미에 어리둥절했다. 지금까지 봐오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도저히 상상도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도대체 저 인간의 성적 취향은 어느 쪽이야?
성우 못지않게 두부도 헷갈렸다.
어쨌든 대충의 정보를 얻을 무렵 차는 호텔에 도착했다. 성우는 일단 체크인 후 자신의 짐과 유부를 맡기고 서전트와 이야기를 이어갔다. 당장 며칠 후의 이야기였기에 마음이 바빴다.
“그래서 콘서트홀 무대 위에서 공연해야 한다고요?”
“막 가슴 뛰지 않아?”
“설레는 것보다 걱정이 앞서는데요.”
“걱정하지 마. 평소대로 하기만 해도 충분해. 더구나 함께 촬영한 세션도 모두 출연하기로 약속했다고.”
“그래요?”
성우는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그들과 함께라면 충분히 재미있는 무대가 될 것 같았다. 이미 긴 시간 호흡을 맞췄기에 자신의 실수는 능숙하게 덮어줄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렇다고 성우의 실력이 묻어가는 그런 수준은 아니었지만, 프로의 합세는 힘이 되었다.
“감독님도 카메오로 출연하실 거죠?”
“내가 왜?”
“다른 감독님들은 잘하시던데 문제 있나요? 저 혼자는 안 죽습니다.”
서전트는 혀를 내둘렀다.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도 못 한 것 같았다.
이른바 한국식 물귀신 작전이었다. 계속된 성우의 추궁에 그는 결국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은 그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라고 혼자 당할 생각은 없는지 짐의 이야기를 꺼냈다.
“감독님이 빠지시는데 짐까지 무대에 오르면 안 되죠. 누군가는 아래서 모니터를 해야 하잖아요.”
“그럼 짐을 무대로 올리고 내가...”
“감독님이 음향 체크를 해줄 수 있는 거는 아니잖아요. 그냥 딱 한 무대만 뛰고 내려가요.”
둘은 그렇게 타협했다.
애써 마련한 촬영 기회였다.
그런데 감독이 자리를 계속 비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어쨌든 성우는 자신에게 주어진 30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 다시 고민되었다.
“아! 그리고 이거 오튜브로 실시간 스트리밍할 예정이다.”
“헐··· 그건 또 왜요?”
“우리 홍보비가 좀 부족하니 이렇게라도 관심 좀 끌어야지. 전에 네가 하던 마벨 스튜디오 때처럼 월드 투어를 하는 것은 힘들어.”
“에혀 알겠어요.”
머리가 지끈거리는 순간이었다.
라이브로 온라인에 방송하는 것은 그만큼 부담되었다. 실수가 편집 없이 그대로 송출되어 평생 자료로 남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니 이대로 그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연습할 장소 좀 구해줘요.”
“이미 준비했지. 네가 맡겨 놓은 기타랑 촬영 때 사용하던 것도 거기에 다 있어.”
“주소는 문자로 보내줘요. 아! 아까 무대 양보해준 그 친구들 연락처도요.”
서전트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성우의 핸드폰에는 두 개의 문자가 연달아 들어왔다. 그 내용을 확인한 이후에 그는 서전트와 인사를 나누었다. 일단 뭘 하더라도 먼저 씻어야 할 것 같았다. 방으로 향하는 그를 향해 두부는 웃으며 말했다.
-이거 네가 제대로 당한 것 같은데?
< 광끼 -15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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