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51 >
타인을 평가한다는 것.
그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말 한마디도 상처가 되니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한 사람의 미래가 좌지우지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대다수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얼굴이었다. 당연히 더 어렵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심사는 차질없이 진행되었다.
한 사람당 십 분씩 주어진 시간이 주어졌다. 그 연기를 보고 성우는 채점에 신경 썼다. 마지막 단원의 연기가 끝나 시계를 보니 어느덧 반나절이 그냥 지나가 버렸다. 성우는 객석 의자에 등을 기대며 축 늘어졌다.
“단장님은 이걸 매년 어떻게 해요?”
“단원 뽑을 때만 하냐? 너 무대 오르기 전에 오디션 본 것은 이제 기억도 안 나?”
“아 맞다. 작품별로 출연자 결정할 때 또 경쟁하죠.”
“연출 짬밥이 몇십 년인데 이 정도 인원은 금방이지. 재작년인가 단원 모집할 때는 너 때문에 이 동네 배우란 배우는 다 몰려서 죽는지 알았다.”
“하하하. 작두의 경쟁률이 엄청나네요.”
성우도 몇 번 들었던 이야기였다.
과거 자신이 이 무대에 섰던 탓일까?
작두를 곧 성공의 지름길로 여기 이들이 종종 있었다. 사실 철민이 형과 혜정이 누나를 생각하면 일리가 있기는 했다. 최근에는 2~3기의 주력 배우들도 서서히 TV와 영화 쪽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각자 열 명씩 추려볼까요? 그런 다음에 추스르든지 하죠.”
“네. 저는 이렇게 열 명을 추천해요.”
“성우 너는 누가 상위권이야?”
주이호의 말에 성우는 서류를 뒤척였다.
그가 고른 단원 중은 4~5기가 상당수 보였다. 그것을 본 주이호는 예상 밖의 Pick에 깜짝 놀랐다.
“얘네는 무대 경험도 거의 없는데.”
“발전 가능성을 좀 봤어요.”
“그래도 그렇지.”
그래도 성우의 의견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들 세 명은 머리를 맞대고 최종 7인을 선발했다. 기존에 오디션 없이 승선한 1기를 포함해 10명을 만드는 것이 오늘의 목표였다. 심사가 끝나자 스무 명이 넘는 단원이 모조리 무대 위에 올랐다.
“성우야. 네가 발표할래?”
“단장님이 하세요.”
“꼭 나쁜 역할은 나한테 떠넘기지.”
“단장님의 인상을 봤을 때 역시 악당역이 가장 잘 어울려요.”
주이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하염없이 무대 위에서 기다리고 있는 단원들이 있었다. 그 때문에 허튼소리나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다들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며 간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마치 레이저처럼 쏘아지는 그 눈빛은 무척 부담스러웠다. 성우는 그런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가슴 속에 담았다.
주이호는 선발된 인원의 이름을 불렀다.
하나씩 이름이 불릴 때마다 무대는 출렁거렸다. 때론 기쁨의 환호가 터져 나왔고 때론 축하의 인사가 아낌없이 전해졌다. 특히 그 가운데는 가장 오래 작두에서 연습하며 출연의 기회를 얻었던 2기의 약진이 뚜렷하게 보였다.
아무래도 그들이 될 가능성은 컸다.
주이호 아래에서 단련된 시간이 가장 긴 이들이었다. 그 고된 기간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신인 몇 명이 호명되었다.
“마지막으로 손호중. ‘열정’의 캐스팅은 이걸로 끝이다.”
마지막 한 명이 발표된 순간.
무대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다시 없을 기회를 놓쳤으니 당연했다. 이미 붙은 이들은 그래서인지 오히려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같이 미래를 꿈꾸던 동지이자 친구이며 가족이었던 이들이었다. 그 반응은 당연할 일이었다.
잠시의 소란 이후.
심사 의원은 그 자리를 비켜줬다.
아마 그들끼리 해야 할 이야기가 상당히 많을 것 같았다. 작두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주이호는 바지춤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성우는 그런 그를 향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 한정된 인원만 함께 갈 수 있는 것이 아쉽네요.”
“그러게.”
“홍 작가님 혹시 숨겨놓은 시나리오 뭐 그런 거 없어요?”
“또 무슨 꿍꿍이죠?”
홍근석 작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보통 이렇게 성우가 말하면 뭔가 일이 터지고는 했다. 이제 어느 정도 그도 성우의 이런 돌출 행동에 적응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걸 옆에서 들었는지 주이호 단장도 궁금한 것을 감추지 못했다.
“또 뭘 하려고?”
“제가 요 며칠 고민해 봤는데요.”
“뭘 고민했는데?”
“단장님은 저희랑 같이 가지만, 여기 남아있는 배우들 있잖아요. 그들만 따로 이곳에서 작품 하나를 올리는 거는 어떨까요?”
성우의 제안은 뜬금없었다.
그 이유는 다들 충분히 알고 있었다.
가뜩이나 생계가 막막한 배우들이 많았다. 그런데 설 수 있는 무대마저 없다며 무너져 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걸 어루만져줄 방안을 성우가 제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돈이었다.
이곳의 임대료를 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수준의 흥행을 이뤄내야 했다. 하지만 주력 배우가 다 빠져나가는 상황이었다. 이제껏 작두가 나름 쌓아왔던 티켓 파워가 현저히 낮아질 것이 분명했다. 그걸 주이호가 지적하자 성우가 호기롭게 말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대신 수익금은 제가 가져도 되죠?”
“적자만 안 보면 다행이지. 맘대로 해.”
“이제 작가님이 극본만 내놓으면 되는데 말이죠. 혹시 있어요?”
“이거 칼만 안 들었지 강도가 따로 없네요.”
홍 작가는 웃으며 말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예전에 써놓은 것이 있지만, 무대에 올리지 못했던 것이 하나 있기는 했다. 현재의 완성도는 조금 떨어져도 손을 보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지만, 주이호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지적했다. 자신 역시 브로드웨이에 함께 가는데 누가 연출을 맡냐는 것이었다. 성우는 그 말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적당한 사람이 있어요.”
*
작두의 오디션 다음 날.
성우는 요한과 함께 강남으로 향했다.
둘이 그곳에 도착해 들어간 곳은 한 브런치 식당이었다. 평일에 아직 점심시간 이전이라 그런지 첫 손님인 것 같았다. 그가 나타나자 서빙을 보던 직원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헉! 이···쪽으로 앉으시겠어요?”
“고마워요.”
“여기 메뉴판 있습니다.”
“일행이 아직 안 왔는데 조금 있다가 주문해도 되죠?”
“물론이죠!”
머리끝까지 올라가는 하이톤.
그 소리에 자기 스스로도 놀랐는지 직원은 서둘러 사라졌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보며 요한은 웃을 뿐이었다. 한국에서 이런 경우는 제법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형이랑 어딜 못 가요.”
“싫으면 나가서 혼자 먹고 오던지. 난 안 말린다.”
“헤헤. 그럴 리가요. 배고픈데 언제 오시려나요?”
“너는 처음 보는 건가?”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우가 잠시 생각해 보니 그랬던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그분한테 연출을 맡기시려고요?”
“왜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그냥 묻는 거예요.”
“너도 언젠가 네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해.”
요한은 또 그런 소리를 한다며 야유를 보냈다. 녀석은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예전에도 그런 말을 들어본 경험이 있었다. 그렇기에 성우는 절대적이란 것을 믿지 않았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성우가 그쪽을 바라보고는 미소지었다.
그곳에는 자신의 유일한 친구이자 첫 매니저였던 진수가 서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어제 만난 것처럼 느껴졌다. 역시 친구라는 존재는 신기한 것이었다.
“왔어?”
“4년 만에 보는 건데 조금 더 반갑게 맞아주면 덧나냐?”
“벌써 그렇게 됐나?”
“배고프다. 요즘 돈 많이 벌었다며. 맛있는 거나 시켜줘라.”
진수는 그렇게 말하며 털썩 앉았다.
녀석은 전과 다름없이 빼빼 말라 있었다.
아무래도 저것은 어쩔 수 없는 유전적인 요소 같았다. 그래도 표정이나 그런 것은 자신과 함께 일했을 때 보다 훨씬 좋았다. 그것을 보니 은근히 심통이 났다.
“얼굴 좋아진 거 보니 나랑 일할 때보다 살기 좋나 보다.”
“웃기지 마. 죽지 못해 겨우 사는 나한테 할 소리냐?”
“요즘에는 뭐 하는데?”
“작년에 독립 영화 한 편 찍고 개점휴업 상태지. 이 친구가 너 대신에 총 맞은 친구?”
성우는 그제야 둘은 인사시켰다.
시기는 다르지만, 둘 다 성우의 매니저를 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금방 둘은 작심이라도 한 듯 성우의 흉을 보기 시작했다.
“저도 성우 형이랑 같이 그 영화 봤는데 너무 좋았어요.”
“그래요?”
“시나리오도 직접 쓰셨다고요?”
“저한테 맡겨주는 극본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직접 썼죠.”
진수는 웃으며 말했다.
저렇게 말해도 마음고생은 상당했을 것이다.
독립 영화를 찍어본 적은 없지만, 그 열악한 환경은 성우도 익히 알고 있었다. 과거 철민이 형이 촬영하는 현장을 응원차 가봤던 그였다.
“너는 미국에서 촬영 끝났다면서?”
“이제 슬슬 개봉할 시기가 돼서 다시 돌아가야지.”
“여전히 바쁘구나.”
“이 친구 월급이 꽤 나가. 그래서 내가 열심히 일해야 해.”
성우는 요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 말에 녀석은 웃을 뿐이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진수는 요한에 비해 쥐꼬리만 한 월급에 온갖 고생은 다 했었다. 그때 챙겨주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뭔가 빚진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남아 있었다.
“너는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냐? 해외까지 나가서 부려먹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안 그래요?”
“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워~ 아주 둘이 편먹고 나를 매도하네?”
“이게 바로 매니저들 사이의 찐한 의리다.”
그렇게 말하며 진수는 기분 좋게 웃었다.
성우는 그런 그에게 혀를 내밀며 메뉴판을 펼쳤다. 일단 뭘 하더라도 식사가 우선이었다. 그는 메뉴에서 이 가게에 시그니처 메뉴와 몇 가지를 고르고 둘의 의사를 물어봤다.
“아무거나 시켜. 내가 언제 가려 먹는 거 봤냐?”
“고칼로리 폭탄이나 먹고 살이나 쪄라.”
“됐거든요. 밤마다 라면에 아이스크림 퍼먹어도 안 되더라.”
“부럽습니다. 형님.”
요한은 자신의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
최근 녀석은 유부 못지않게 살이 찌고 있었다.
과거에 날렵하던 턱선은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는 그였다. 어느 사이에 녀석도 20대 후반에서 30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잠시 후.
그들의 식탁은 접시로 가득 채워졌다.
스테이크며 샐러드 그리고 파스타도 있었다. 남들은 브런치를 할 시간인데 거의 저녁 만찬 수준의 차림이라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그것을 보고 진수는 성우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이거 혹시 뇌물이냐?”
“너한테 잔뜩 먹여도 김영란법에는 안 걸리니까 걱정하지 마.”
“하긴 내가 누굴 챙겨주고 그럴 힘은 없지.”
“어서 먹기나 해.”
셋은 식사를 시작했다.
남자끼리 먹는 자리라 금방 끝날 줄 알았다.
하지만 상당히 많은 음식이 있었기에 식사를 마칠 때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거의 다 먹을 무렵 진수는 입가를 닦으며 성우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제 슬슬 용건을 말하지?”
“응?”
“너 갑자기 나 찾을 때부터 뭔가 있었잖아. 내가 그런 것도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아?”
“그럼 그 용한 네 직감으로 봤을 때 뭐 같은데?”
“이럴 때 보통 청첩장을 꺼내던데. 설마 장가가냐?”
진수는 기막힌 오답을 내놨다.
그의 말에 요한은 박장대소를 했다.
그것은 성우 안에 있는 두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공격에 성우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는 너는 장가갈 애인이라도 있냐?”
“당연하지! 벌써 2년째 사귀고 있는데 나중에 청첩장 보내면 사회나 봐라.”
“허얼···”
패배감이 밀려왔다.
진수는 손가락을 펼치며 승리의 V를 보였다.
너무 얄미운 그 모습에 마빡을 한 대 치고 싶었지만, 성우는 참기로 했다. 오늘은 자신이 부탁하는 입장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먼저 장가를 가겠군.”
“췌···”
“그건 그렇다고 치고. 청첩장이 아니면 무슨 일인데?”
“별다른 거는 아니고 너 취직시켜주려고.”
“취직?”
진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영화감독을 꿈꾼다는 것은 성우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취직이라니 말도 되지 않았다. 지금 와서 포기할 거면 도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성우는 설명을 이어갔다.
“대학로의 한 극단에서 객원 연출을 구하고 있어.”
“나 연극은 연출할 자신이 없다.”
“너 영화 찍기 전에 1년쯤 보조로 연출 배웠다면서.”
성우의 질문에 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경험은 있기는 했지만, 아직 자신감이 부족했다.
“그래도 직접 해본 적이 없잖아.”
“누군 뭐 태어날 때부터 경력자인가. 일단 한 번 해봐.”
“대학로에 있는 극단이면 대충 아는데 어디야?”
“작두.”
진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최근 작두는 국내 연극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든다.
객석의 규모는 작지만, 연극을 올릴 때마다 매진이 연속되는 그런 곳이었다. 생긴 지는 몇 년 되지 않았어도 명문 극단 반열에 오른 곳이었다.
뭐 그 이면에 성우의 명성도 큰 몫을 차지 하고 있어도 그게 소속 배우의 연기와 연출가의 공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성우는 그곳을 그에게 맡기려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녀석만을 위한 계획은 아니었다.
주력 배우가 빠진 이상 나머지 배우들도 주연에 오를 기회이기도 했다. 그 기회를 주기 위해 판을 짜고 있는 그였다. 어쨌든 작두라는 말에 진수는 진심으로 깜짝 놀란 눈치였다. 작두는 그가 매니저를 할 당시에 자주 들락거리던 곳이라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보고 작두의 무대를 연출하라고?”
< 광끼 -15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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