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49 >
갑작스러운 제안.
강 대표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난데없이 빌딩을 세울 거라며 도와 달라는 말에 그가 할 수 있는 반응은 그것 외에 딱히 없었다. 물론 그가 건축업자도 아닌데 직접 그걸 만들어 달라는 뜻으로 성우가 말한 것은 아니었다.
“바이올렛 엔터 사옥 디자인 무척 좋은데 소개 좀 해줘요.”
“친한 후배가 하는 사무실에서 디자인한 거라 그거는 쉽지. 그런데 그것만 바라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당연하죠. 저 대신 전체 과정 좀 책임지고 살펴달라는 거예요.”
“부지 매입부터 모든 과정을?”
“제가 한국에만 계속 있는 게 아니잖아요. 사소한 것까지 미국에서 챙길 수 없으니까 그렇죠.”
“뭐하러 힘들게 새로 지어. 그냥 완공된 빌딩을 사면 되잖아. 집 하나 짓기도 힘든데 빌딩 세우는 일은 장난 아니야.”
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쉬운 길인 것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보통의 빌딩으로 구현하기는 어려웠다. 애초에 독특한 구조가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성우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꿈꾸는 공간을 설명해주었다. 잠시 이야기를 듣던 강 대표는 깜짝 놀랐다.
“멀티플렉스?”
성우의 꿈.
그것은 소극장이 모여있는 멀티플렉스였다.
자신의 배우 인생 첫 발자국을 새긴 곳이 바로 이곳 대학로였다. 그곳에 연극을 위한 성지 같은 장소를 만들고 싶었다. 한 건물에 들어서서 영화관처럼 쉽게 연극을 볼 수 있는 구조. 그것을 바라는 것이었다.
“한 건물 안에 여러 극단이 들어갈 수 있게 하려면 건축 디자인도 쉽지 않겠네.”
“아무래도 그렇겠죠.”
“설계비만 해도 적지 않게 들어갈 거야. 부지도 넓어야 할 테고.”
“300~400평 정도 예상하고 있어요.”
“너 돈 많구나?”
강 대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정도의 크기의 건물이라면 적지 않게 돈이 들어갈 것이다. 대학로의 메인 스트리트가 아니라 주변으로 살짝 빠지더라도 그 동네의 땅값은 굉장히 비쌌다. 그 규모의 땅을 사는 것만 해도 수십억 이상은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지금 당장은 저도 별로 없어요.”
“너 그러다 나중에 빚더미에 올라앉는 거 아냐?”
“그럴 리가요. 이번 영화 정산되고 아크로 후속작도 있잖아요. 돈이 모자랄 일은 없어요.”
“그래서 얼마나 있는데?”
“음··· 평당 1억 정도면 되겠죠? 그 정도는 투자 가능해요.”
성우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그 정도는 이미 계산해서 온 그였다.
이번 영화의 개봉 이전에 받을 개런티와 전 재산을 합치면 300억이 조금 안 되었다. 공사비가 그걸 넘더라도 향후 찍을 예정인 아크로 후속편의 개런티면 충분히 충당될 것 같았다. 일단 빌딩이 하루아침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뭐 그 정도면 충분하겠네.”
“모자라면 더 열심히 벌면 되죠.”
“하긴 네가 마음먹고 광고만 찍어도 수십억 정도는 금방 버니.”
“아! 오 실장님이 저한테 들어온 광고가 있다고 하던데 많나요?”
“엄청 많지!”
광고 이야기에 강 대표는 화색이 돌았다.
불과 6개월 전에 광고를 몰아 찍은 그였지만, 그사이 들어온 광고만 스무 개가 넘었다. 물론 그 가운데는 병맛에 가까운 것들도 있고 단가가 안 맞는 것을 제외하면 열 개 정도는 검토할 만한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성우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기대를 무너뜨렸다.
“제가 요즘 국내에서 활동도 거의 안 하는데 광고만 찍는 것은 조금 그래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마치 광고 찍으러 한국에 들어온 기분이잖아요.”
실제로 그런 의견도 많았다.
지난번에 팬 미팅을 한 차례 했지만, 팬의 기대를 채우기에는 아쉬움이 많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성우를 향해 강 대표가 정색하며 말했다.
“너 이번에 찍은 영화도 조만간 개봉할 거잖아. 그런 거 신경 쓰지 마.”
“그거 영화관에 걸리려면 적어도 반년 정도 걸리는 거 아시잖아요. 아직 O.S.T 녹음도 못 했어요.”
“하긴 이번에는 네가 노래하는 게 좀 많지?”
앨범 가운데 5곡 정도.
그 곡들은 성우가 직접 노래해야 했다.
그것 때문에 성우가 즐길 수 있는 휴가는 2개월 남짓에 불과했다. 편집이 어느 정도 끝나면 녹음을 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일단 알겠어. 재계약은 건축 업자 구한 다음에 할 거야?”
“아뇨. 오늘 온 김에 하죠.”
“기간은?”
“4년으로 하고 계약금은 따로 안 받을게요.”
강 대표는 병 주고 약 준다며 투덜거렸다.
분명 그가 생각지도 못한 좋은 조건이었지만, 건물을 올린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이곳 바이올렛 엔터의 사옥을 지을 당시 몇 년쯤 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걸 떠올리자 몸서리치게 두려웠다.
어찌 되었든 그는 비서를 시켜 계약서를 새로 작성했다. 기존에 이미 재계약을 한 차례 했었기에 서류상의 날짜와 기간만 바꾸면 되는 일이라 금방이었다. 잠시 후 비서가 서류를 가지고 들어오자 성우는 그곳에 사인했다. 그런 이후에 강 대표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앞으로 4년간 잘 부탁드립니다.”
* * *
2개월 후.
성우는 긴 휴가에서 복귀했다.
때론 여유롭고 때론 지루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그 시간 동안에 재충전은 충분히 한 느낌이었다. 요한과 최정이 바라는 여행지는 바로 중남미 쪽이었다.
성우도 그 계획에 동참했다.
과거 유 식당을 통해 콜롬비아에 가본 그였다.
그 당시에 좋은 추억이 많았기에 그 역시 둘을 따라나섰다. 이번에는 쿠바와 페루에서 각각 한 달을 보냈다. 원래는 조금 더 활발하게 다닐 생각이었으나 쿠바의 아바나와 페루의 와라즈에 빠져서 본의 아니게 각 도시에서 한 달 살기를 했다.
그 가운데 성우는 와라즈를 특히 좋아했다.
도심에서 보이는 설산과 그 사이를 걷는 트레킹 모두 마음에 쏙 들었기 때문이었다. 때론 그 설산 아래서 캠핑을 하며 별무리를 이불 삼아 자는 추억도 만들었다.
특히 유부가 그곳을 좋아했다.
매번 방 안에서 지내던 녀석은 야성미를 뿜뿜했다. 마치 자신이 아마존에 사는 한 마리의 퓨마가 된 것처럼 느끼는 것 같았다. 때론 새를 물어와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그것을 보며 성우는 가능하다면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휴가를 끝낸 이후.
곧장 한국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남미에서 가까운 미국부터 들러야 했다. 그곳에서 3일에 거쳐 녹음을 마친 이후에야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동안 빌딩의 위치는 정해졌다. 마침 노후화된 400평짜리 건물의 부지가 시장에 나온 덕분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성우는 가장 먼저 그곳을 찾았다. 사진으로 이미 위치는 보았지만, 생각보다 접근성이 용이해 보였다. 이 정도의 위치라면 누구라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 같았다.
“이곳에 빌딩이 세워질 예정입니다.”
뿔테 안경을 쓴 남자.
그는 강 대표가 소개해준 후배였다.
사람 좋아 보이는 그가 보여준 공사현장은 텅 비어 있었다. 이미 기존의 낡은 건물은 허물어 치운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지상 10층에 지하 3층짜리 건물의 청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참 듣던 성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봐봤자 뭐 알겠나요.”
“그래도 건축주분이 직접 설명은 들으셔야죠.”
“그런 어려운 이야기는 바이올렛 엔터의 강 대표님한테 해주세요. 저는 그저 튼튼하게만 지어졌으면 해요. 지진에 무너지지 않게 그 뭐냐...”
“내진 설계요.”
“맞아요. 그것도 좀 많이 신경 써주시고요.”
“전에 말씀해주신 대로 내진은 물론이고 화재에 큰 피해가 없게 스프링클러와 단열재에도 최대한 신경 쓰고 있어요.”
그의 말에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은 바로 안전이었다. 과거에 소극장에서 직접 겪었던 화재는 참담했다. 그런 일이 또 벌어지지 않기 위해 그 부분을 강조한 것이었다. 적어도 앞으로 지어질 이 건물에서는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언제든 궁금하신 것이 있으시면 연락주세요.”
“감사합니다.”
성우는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어차피 건물을 짓는 것은 바이올렛 엔터의 강 대표에게 일임시킨 그였다. 때때로 디자인과 몇 가지 결정 사항에 대해서만 자신이 결정해주면 될 일이었다. 더구나 강 대표라면 장난질을 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만약 그걸 발견하는 순간 바이올렛 엔터와 그의 계약은 종료되기 때문이었다. 계약서에 넣은 그 한 줄은 꽤 위력이 좋았다.
“집으로 가실 건가요?”
“아니 작두에 볼일이 있어서 거기 잠시 들려야 해.”
“아직 공연 시작하기 전인데요.”
“그러니까 가는 거야. 단장님하고 할 말이 있어서.”
그 말에 요한은 알겠다며 앞장섰다.
성우가 세우는 건물의 위치와 극단 작두와의 거리는 불과 500m. 충분히 걸어서도 갈만한 거리였다. 그러니 요한이 따로 차를 운전할 필요는 없었다.
“이 동네도 많이 바뀌었네.”
“매번 올 때마다 깜짝깜짝 놀래요.”
“그러게.”
23살이던 그가 이곳에 첫발을 디딘 지 6년.
어느덧 이십 대의 마지막 해가 되어 버렸다. 그가 나이를 먹은 만큼 골목 역시 상당히 많이 바뀌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더니 옛말이 틀린 것이 없었다. 그가 즐겨 먹던 떡볶이집도 사라졌고 뒤풀이의 2차로 항상 가던 호프집도 음식점으로 바뀌었다. 그 모습에 성우는 조금 씁쓸해졌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도 늙듯 풍경도 바뀌지.
두부는 그 점을 강조했다.
특히 조선 시대 사람인 그에게 서울의 변화는 엄청났을 것이다. 성우 역시 환상을 통해 조선 시대를 잠시나마 겪었기에 그 느낌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때 극단 작두의 소극장 간판이 보였다.
“저는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을까요?”
“길게 이야기할 거는 아냐. 그냥 같이 들어가면 돼.”
“알겠어요.”
성우는 요한과 함께 지하로 내려갔다.
그러자 연출용 기계가 가득한 작은 공간에 앉아있는 주이호가 보였다. 그는 예전에 성우가 데뷔할 당시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 얼굴에 주름이 사뭇 많아졌다. 그 역시 세월의 흐름은 이겨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단장님.”
“오~! 이게 누구야. 한국에 왔다는 건 들었는데 벌써 올 줄은 몰랐네.”
“단장님의 조언이 필요해서요.”
“일단 일루 앉아.”
주이호는 의자를 권했다.
성우가 그곳에 앉자 그는 무슨 조언이 필요하냐며 물었다.
“저 브로드웨이에서 연극 하나를 할 예정이에요.”
“정말?”
“운이 좋게 그렇게 되었어요.”
“축하한다. 이야~ 우리 극단 출신이 그런 무대에도 서는구나.”
주이호는 아낌없이 축하 인사를 해줬다.
정말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 표정을 보며 성우는 종이 뭉치 하나를 가방에서 꺼냈다. 그리고는 그걸 주이호에게 건넸다.
“이건 뭔데?”
“브로드웨이에서 제가 출연할 작품의 극본이요.”
“내가 읽어봐도 되는 거야?”
“한 번 읽어보시고 괜찮은지 봐주세요.”
“이미 출연하기로 결정한 거 아니야? 내 의견이 필요하다고 하기에는 이미 늦은 거 같은데?”
말은 그렇게 해도 손은 극본으로 향하고 있었다. 직업적인 본능과 같은 일이라 성우는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브로드웨이에 올라가는 극본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궁금한 것 같았다. 이내 극본은 쥔 그는 첫 장을 넘기려다 고개를 들었다.
“이거 혹시 영어로 된 거는 아니지?”
“하하하. 표지만 영문이고 내용은 한글이에요.”
“다행이네.”
그렇게 말하며 그는 극본을 읽기 시작했다.
극본의 첫 장에 적혀 있는 콜리 홍이라는 작가의 이름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 읽고 나서도 그럴 수 있을지 지켜보기로 했다. 아마 성우의 예상대로면 주이호는 당장 이 극본을 쓴 작가가 누구냐고 물어볼 것이 분명했다.
30분 후.
아니나 다를까.
그는 대본을 내려놓으며 성우한테 물었다. 그의 눈에는 궁금증이 그대로 드리워져 있었다.
“이거 도대체 누가 쓴 거야?”
“재미있죠?”
“완벽한데. 역시 브로드웨이는 극본의 수준도 상당히 높구나.”
“정확하게는 오프 브로드웨이에요. 내용이 상업성이 강한 쪽은 아니잖아요.”
주이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그가 본 극본은 예술적인 면모가 강했다.
그렇다고 완벽히 그걸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제법 무대의 규모도 컸고 출연진의 수도 적지 않았다. 그 바닥의 생리는 잘 알지 못했지만, 잘하면 대박이 날 수 있을 그런 극본으로 보였다. 이호는 갑자기 그걸 내려놓으며 짜증을 냈다.
“에잇. 눈만 버렸어.”
“왜요?”
“이걸 보니까 직접 연출해보고 싶어졌잖아. 한국에도 이런 각본을 써낼 수 있는 그런 작가가 많이 있어야 할 텐데.”
“이거 사실 한국 사람이 쓴 거예요.”
“정말?”
“왜 예전에 대학로에서 대박 쳤던 ‘더 룸’ 있잖아요. 그 작품의 작가님이 썼어요.”
성우의 말에 주이호는 수긍하고 말았다.
더 룸은 그 역시 대단하다 여겼던 작품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그는 더욱 이 작품이 탐났다. 그때 성우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래서 말인데요.”
“뭔데? 뜸 들이지 말고 말해. 설마 우리 배우들 빼가겠다는 거는 아니겠지?”
“그렇다고 하면 허락해 주실 건가요?”
“뭐 애들한테 워낙 좋은 기회니까 말리지는 못하겠네. 지금 올려놓은 판이 다음 달에 끝나니까 그때까지 기다렸다가 데려가든지 맘대로 해.”
“제가 작두의 대기 리스트에 있는 배우까지 몽땅 다 데려간다고 해도요?”
성우의 말에 주이호는 말을 잃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더 말을 돌렸다간 호통이 떨어질 것 같았다. 덕분에 성우는 오늘 이곳을 찾은 원래의 목적을 서둘러 꺼내 놓아야 했다.
“단장님도 저랑 같이 가시죠.”
“나도?”
“이 작품 연출해보고 싶다면서요.”
“그게 가능해?”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이호는 아직도 그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성우는 진심이었고 그들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만약 여기서 그가 거절하면 상당히 난처한 순간이었다. 성우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강조했다.
“브로드웨이가 저희를 기다리고 있어요.”
< 광끼 -14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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