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48 >
마음 잘 맞는 스태프.
그것만큼 촬영에 힘이 되어주는 존재는 없었다. 이번 영화에 있어 그들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했다. 열정은 영화 곳곳에 묻어났다. 다들 음악을 좋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덕분에 이런저런 일들이 중간에 있었지만, 촬영은 무사히 끝날 수 있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서전트 감독의 마지막 인사.
그의 짧은 소감이 끝나자 다들 환호했다.
3개월가량의 촬영이 모두 끝나는 순간이었다. 다들 맥주캔을 머리 위로 들며 흥에 겨워 춤을 췄다. 악기를 쥐고 있는 이들은 즉흥 연주를 시작했다.
그들 사이로 성우는 걸었다.
한 명씩 인사를 하며 아쉬움을 표했다.
3개월에 불과했지만, 언제나 촬영의 끝에 맞이하는 이별은 적응하기 어려운 그였다. 본격적인 뒤풀이는 따로 장소를 옮겨서 할 예정이지만, 먼저 가는 이들이 일부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음악을 함께 만든 세션과 인사할 때.
성우는 가슴 찡한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마지막 선물이라며 CD 한 장을 건네주었다. 그 안에 든 것은 영화를 촬영하면서 녹음한 음악과 영상이라고 했다. 정성이 없으면 절대 만들 수 없는 선물이었다. 더구나 그들 가운데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트럼펫 주자 고든은 포옹을 하며 이런 말을 남겼다.
“당신과 함께 연주할 수 있어 너무 행복했습니다.”
이보다 더한 찬사가 있을까?
성우는 지금까지 받은 어떤 상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물론 연기가 아닌 음악으로 인정받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지만, 그래도 지금 현재의 그의 마음이 그랬다. 성우는 세션 모두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곧 성우는 한 남자를 찾기 시작했다.
“누구를 그렇게 열심히 찾아요?”
“어! 요한아. 혹시 오늘 홍근석 작가님 못 봤어?”
“조금 전에 화장실 간다고 저쪽 건물로 들어갔는데요.”
“그래?”
성우는 그쪽을 바라봤다.
굳이 그 안까지 따라갈 생각은 없었다.
기다리면 나올 텐데 괜히 유난을 떠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건물은 현장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때 이번 영화의 한 축을 담당하던 조동주가 다가왔다.
“선배님. 수고하셨습니다.”
“어~ 너 오늘 촬영 없었잖아. 일부러 온 거야?”
“마지막 촬영이라 인사드리려고 왔죠. 호텔에서 혼자 쉬려니 너무 심심해서요.”
“감독님한테 인사했어?”
“아직이요. 제 마음속의 1순위는 언제나 선배님입니다.”
닭살이 살살 돋았다.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조강철 선배님의 아들인데 성격은 꽤 달랐다. 이제 20대 중반인 동주와 대화할 때는 이런 것은 흔한 일이었다. 좋게 말하면 붙임성이 좋은 거고 나쁘게 말하면 쬐금 뺀질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연기는 성우도 인정하는 바였다.
“바로 한국으로 돌아갈 거야?”
“여기 체류비가 엄청나서 그래야 할 거 같아요.”
“하긴 뉴욕에서 3개월이나 있었는데 슬슬 지겹겠지.”
“아무리 예쁜 여... 아니 천국도 질리는 순간은 오니까요.”
동주는 순식간에 말을 바꿨다.
성우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다 만 것인지 알았지만, 딱히 파고들지는 않았다. 각자의 사생활은 터치하지 않는 게 편했다. 지금까지 딱히 여자 문제를 크게 만들지 않은 녀석이라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홍 작가님이 안 보이시네요.”
“화장실 가셨대.”
“변비신가? 아까부터 찾았는데요.”
“언제는 내가 1순위라며.”
“형님은 배우 가운데 1순위! 홍 작가님은 스태프 가운데 1순위죠. 분야가 다르시잖아요.”
“하여간 말빨은···”
“저는 아직 쑥쑥 자랄 때라 작가님한테 잘 보여야 해요.”
동주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하여간 미워할 수 없는 녀석이었다.
사실 성우도 그 때문에 홍 작가를 찾고 있었다. 과연 그의 후속작은 어떤 것이 될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버스커]는 그의 창작물이 아닌 각색이었다. 분명 그에게는 또 다른 시나리오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과거 [저승에서 온 차사]가 끝난 이후.
벌써 시간이 2년 이상이나 흘렀다. 아직 단 한 편도 안 썼을 리가 없었다. 성우는 그것이 탐났다. 만약 그게 실존한다면 어떻게든 잡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경쟁자는 바로 옆에 있는 동주가 될 것이 분명했다. 이 녀석 역시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애송이쯤은 가볍게 짓밟아버려!
‘아무리 좋아하는 동생이라도 캐스팅 경쟁에서 질 생각은 전혀 없어.’
-그런데 시나리오가 있기는 해?
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럴 것 같다는 추측일 뿐이었다.
때마침 멀리서 홍근석 작가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한발 빨리 움직인 것은 동주였다. 사실 그보다 자신이 더 빨리 움직일 수 있었지만, 체면 때문에 그러지는 못했다.
“작가님! 수고하셨어요.”
“동주 씨도 수고했어요.”
“워낙 시나리오가 좋아서 대박 날 거 같아요. 안 그래요 선배님?”
동주가 뒤를 돌아보며 성우에게 물었다.
성우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번 홍 작가를 만날 때마다 그 역시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칭찬인지 아부인지 헷갈리는 그런 말을 듣고도 그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작가님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별일 아니에요. 저 잠깐 성우 씨와 할 이야기가 있는데 잠시 자리 좀 비켜주실 수 있나요?”
“어··· 그러시죠.”
동주는 알겠다며 돌아섰다.
흔쾌히 수긍하는 말과 달리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물론 성우는 그런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도 그 표정과 별로 차이가 없었을 것 같았다.
동주가 사라진 이후.
그는 성우를 보며 한참을 말없이 서 있었다.
얼마나 답답했는지 두부가 난리를 칠 정도였다. 당연히 성우 역시 고구마를 서너 개 물도 없이 먹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침착하게 그가 말을 꺼내기만을 기다려줬다. 한참 이후에야 홍 작가는 마침내 입을 뗐다.
“성우 씨. 제가 부탁을 하나 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뭔가요?”
“거절하셔도 어쩔 수 없지만, 제 시나리오 한 번 읽어주실 수 있나요?”
성우는 그 자리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안 그래도 탐내던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그게 제 발로 굴러들어온 것이었다. 그가 그걸 마다할 리 없었다. 홍 작가가 쓴 시나리오가 성우의 기대치에 못 미친 경우는 없었다. 정말 믿고 따라가도 될 그런 작가가 바로 홍근석이었다.
“당연하죠. 저 작가님 시나리오 엄청 좋아하잖아요.”
“혹시 읽어보시고 마음에 드시면 출연도...”
“네! 적극적으로 검토해 볼게요.”
“그런데 이번 시나리오는 영화가 아니에요.”
“그럼 예전에 함께 했던 것처럼 드라마 쪽인가요? 저는 그것도 좋아요.”
“아니요···”
홍 작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성우는 영화와 드라마가 아니라면 도대체 뭘까 싶었다. 그 순간 그가 썼던 대학로의 연극을 떠올렸다. 브로드웨이 주변에 사는 것까지 합치니 심증은 확증으로 바뀌었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연극 대본일 것이 분명했다.
“설마 연극?”
“맞아요. 거절한다고 해도 충분히 이해해요. 그래도 일단 한 번 읽어봐 주실 수 있죠?”
홍 작가답지 않은 절박함이 엿보였다.
그가 봤을 때 성우는 연극을 할 이유가 없었다. 영화를 찍을 때마다 대박이었고 이번 영화도 성공한다면 세계적인 배우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될 예정이었다.
아크로로 얻은 명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조금 아쉬움이 있었다. 작품성으로 봤을 때 마벨 스튜디오의 오락 영화는 크게 인정받기 어려웠다. 이번에 그런 아쉬움을 [버스커]로 채워줄 수 있었다. 이제는 반쪽뿐이던 명성이 완벽해지는 형태였다. 그런 그가 연극 출연을 쉽게 결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꼭 한번 읽어보고 싶어요.”
“아마 오프 브로드웨이에 오를 것 같아요. 문제는 출연료인데... 아무리 잘 책정해 봐야 지금 이 영화의 10%도 안 될 것 같아요.”
“작가님이 저를 잘못 보고 계셨군요. 작품만 좋다면 저 그런 거 안 따져요.”
“그럼 극본 바로 갖다 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며 그는 사라졌다.
사실 성우는 돈으로 출연을 결정할 이유가 없었다. 돈이야 이미 흘러넘칠 정도로 벌고 있었다. 사람마다 만족하는 선이 천차만별이겠지만, 성우에게는 그게 그리 높지는 않았다.
더구나 현재 그의 재산은 백억 대가 넘어갔다.
거기에 이번 영화의 걸린 런닝 개런티와 아크로 시리즈로 받을 돈을 생각하면 더는 욕심내지 않아도 될 수준이었다. 그때 성우는 잊고 있던 꿈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허망 된 이야기라며 고개를 저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때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꿈이 현실이 되기 충분했다.
‘이제는 해볼 만 하지.’
*
며칠 후.
성우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그가 향한 곳은 바이올렛 엔터였다. 당연히 그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오만석 실장은 직접 공항까지 마중을 나올 정도였다.
“너 때문에 강 대표님이 얼마나 스트레스받았는지 알아?”
“그게 왜 저 때문인가요. 재계약 하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미국에 오지 말라고 하도 그러니 그렇지.”
“저는 나름 대표님이 헛걸음할까 봐 배려해준 건데요. 계약은 한국에서 할 건데 뭐하러 굳이 와요.”
“하하. 하여간 그 성격은 여전하네.”
만석은 호기롭게 웃었다.
그래도 계약을 연장하겠다는 말에 기분 좋은 것 같았다. 돈이나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만석은 성우가 바이올렛 엔터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만족했다.
대한민국 제일의 톱스타.
그것은 누가 뭐라 해도 성우였다.
그만큼 대단한 활약을 보이는 배우가 없었다. 어쩌면 아시아에서 제일 잘 나가는 배우라 해도 무방할 그런 수준이었다. 당연히 한국 연예계에서 그 이름값은 확실히 대단했다. 그 덕분인지 바이올렛 엔터의 입지는 나날이 드높아지고 있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있을 거야?”
“휴가 갈 예정이라 며칠 안 있을 거 같아요.”
“휴가를 어디로 가는데?”
“글쎄요.”
성우는 요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녀석은 어디로 갈 건지 브리핑을 해주지 않고 있었다. 매일 최정과 함께 여행 계획을 짜는 것 같아 보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결정이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이 친구들도 한국에서 쉬게 좀 해줘야지.”
“회사에서 일만 안 시키면 그렇게 하죠. 또 일거리 쌓아 놓고 기다리고 계신 거는 아니죠?”
“흠··· 아니라고는 말 못 하지.”
만석은 내심 찔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본 성우는 그럴 줄 알았다며 웃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휴식이 우선이었다. 당연히 일은 그 이후에 할 생각이라며 오만석 실장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그는 예상했다는 듯이 말했다.
“우리가 뭐 악덕 회사냐? 꼭 전해달라고 사정사정하니까 시나리오며 광고 건을 키핑하고 있는 거지.”
성우도 그 말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재수 없게 들릴지 몰라도 자신이 출연하면 적어도 해외에 판권을 파는 데 적지 않게 수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사이 차는 회사의 지하 주차장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지정 주차 자리에 차를 주차하며 말했다.
“대표님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는 그 자리에 들어올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성우는 고생하셨다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요한과 최정에게는 유부와 짐을 집에 내려놓고 곧장 퇴근하라고 했다. 하지만 둘 다 그것을 격하게 거부했다.
“제가 집까지 데려다줘야죠.”
“택시 타면 되는데 뭘 그래.”
“그냥 이따가 같이 가요. 휴가 때문에 할 말도 있는데.”
성우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장 대표실로 향했다. 그가 노크를 하자 강 대표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반겨주었다.
“이게 얼마 만이야. 소속 배우 보기가 왜 이렇게 어려워?”
“6개월도 안 됐어요.”
“우리 회사 소속 배우를 반년에 한 번 얼굴을 보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언제부터 그렇게 살뜰하게 챙기셨다고 그러세요?”
“네가 잘 몰라서 그렇지. 나는 너랑 계약할 당시부터 언제나 그랬다고.”
강 대표는 웃으며 말했다.
잠시 후 비서가 차가운 커피 두 잔을 들고 들어왔다. 그녀가 테이블 위에 그것을 내려놓고 나가자 그는 본론을 꺼냈다.
“재계약은 어떻게 할 거야?”
“당연히 해야죠.”
“부탁 하나만 하자. 제발 부탁인데 이번에는 계약 기간 좀 늘리면 안 될까? 2년마다 심장이 쫄깃해 죽을 지경이다. 나 좀 살려줘.”
“엄살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나 정말 정색하고 말하는 거야.”
“그럼 제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그럼 2년이 아니라 4년 단위 계약도 고려해 볼게요.”
성우의 말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뤄지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그냥 뱉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걸 덥석 성우가 물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성우가 말하는 것을 듣고 정색했다.
“빌딩 올리는 거를 도와 달라고?”
< 광끼 -14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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