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47 >
성우는 피식 웃었다.
두부의 뜬금없는 질문 때문이었다.
물론 그에게 숨겨놓은 딸은 없었다. 애초에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뜬금없이 다 큰 딸이 나타나거나 그런 일은 당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우울해하지 마. 그럴 수도 있지.
어쨌든 그의 추측은 틀렸다.
마지막으로 완성된 그 옷은 있지도 않은 딸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골든 타임]을 찍을 당시 생명을 구했지만, 불행하게도 아직 깨어나지 못한 홍지연을 위한 옷이었다.
성우는 옷을 접어 종이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옷장 안에 고이 보관했다.
털실로 짠 스웨터라 유부의 발톱을 가장 주의해야 했다. 녀석이 한번 마음먹으면 이런 옷 하나 망가트리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안 그래도 유부는 이 옷에 계속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어느 사이에 저 비만 고양이는 사료를 해치운 상태였다. 그 위협 신호를 느낀 성우는 다시 옷장을 열었다. 그리고 상자를 가장 높은 선반 위로 올렸다. 고양이에게 높이가 큰 장애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게 최선이었다. 이처럼 보관에 신경 쓰는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이 옷은 당장 전해줄 것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퇴원을 축하하기 위한 선물이기 때문이었다. 언제 가능할지 모르는 일이지만, 그러기를 바라며 짠 옷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서 빨리 이 스웨터가 주인을 찾아갔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깨어나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가능하길 바랄 뿐이지.’
-하긴 종종 기적이란 것이 일어날 때가 있으니까. 한창 창창할 나이인데 어서 깨어났으면 좋겠다.
두부 역시 쾌유를 빌어줬다.
성우가 이처럼 신경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왠지 자신의 후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같은 극단은 아니지만, 그래도 연극 무대에 오르던 배우였기에 그럴지도 몰랐다.
그때 방안이 갑자기 환해졌다.
그 빛의 근원지는 호텔 창문 너머였다.
성우는 그 갑작스러운 상황에 크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이미 이럴 것이란 예상은 조금이나마 하고 있었다. 주어진 미션은 모두 해결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아주머니가 이제 가신단다.
‘무사귀 가운데 여성분도 계셨구나.’
-그럼 남자만 귀신이 되겠냐?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그렇지.’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지금까지 그가 겪은 무사귀는 모두 남자였다.
그래서 성우도 한동안 그런 줄로만 알고 있었다. 물론 이번에 여성 분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추측되었다. 자신 역시 이번에 뜨개질을 했지만, 남자가 이걸 한다는 것은 쉽게 상상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밥 좀 잘 챙겨 먹으래. 아주 잔소리가 쩐다 쩔어.
‘그러니까 좀 평소에 이상한 것 좀 먹자고 하지 마.’
-그게 뭐 나 혼자만의 의견인가. 맛이 궁금하다는 데 어떻게 해?
‘이제 몇 명 남지도 않았잖아.’
-크음!
두부는 헛기침을 했다.
성우의 말처럼 이제 두부 포함 세 명이 전부였다.
더는 다른 무사귀의 핑계를 대기는 조금 어려워진 상황이었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적어도 1/3의 지분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그것과 별개로 성불은 진행되고 있었다.
빛으로 걸어가는 한 여인.
전형적인 아주머니 모습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끝내지 못한 옷 한 벌이 쥐어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아이가 입을 만한 사이즈였다. 어쩌면 그녀가 남아 있게 된 아쉬움은 그 옷이 아니라 아이 때문이지 않았을까 추측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그 아이를 찾아달라는 말은 이제껏 단 한 마디도 없었다.
“성불하셔서 평안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성우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그는 보지 못했지만, 느낌상으로 미소를 지어주고 계신 것 같았다. 그녀가 떠난 이후에 창문 너머의 빛은 사라졌다. 그곳은 평소처럼 어둠 만이 깊게 내려앉아 있었다.
‘하루가 참 길구나.’
*
적막한 뉴욕의 거리.
밤 깊은 시간에 그곳을 헤매는 그림자.
남자는 비틀거리며 정처 없이 걷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일부 사람은 혹시라도 부딪힐까 싶어 멀리 거리를 두고 있었다. 마치 건드리기만 하면 전염병이라도 옮을 것 같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두두둑.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줄기.
그 빗방울은 그를 더 처량하게 만들었다.
남자는 등에 메고 있는 기타를 품에 안았다. 자신의 몸이며 머리카락이 젖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 그에게는 기타 만이 유일한 친구이자 또 해방구였다.
“조!”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
그것을 들은 남자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외투를 올려 머리를 감싼 한 남자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조는 그제야 그 남자가 누군지 기억해냈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은 확연히 달라졌다.
“택시(태식)?”
“도대체 어디 계셨던 거예요. 덕분에 한참 찾았어요.”
“너 이 자식!”
조는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그의 눈빛은 굉장히 날카로웠다.
마치 무슨 일이라도 벌일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그제야 태식은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더듬거리면서도 계속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 약속 안 어겼어요. 당신이 그 자리에 나오지 않았잖아요.”
“무슨 소리야. 이 개XX야.”
“정말이라니까요. 그러니까 빚 갚으려고 이 동네에 또 왔죠. 저도 여기 오는 거 정말 싫어요.”
“됐으니까 내가 빌려준 돈이나 내놓고 당장 꺼져!”
그 말에 태식은 서둘러 지갑을 꺼냈다.
한눈에 봐도 명품으로 보이는 그 안에는 제법 지폐가 두둑하게 들어 있었다. 조는 그걸 보고 조만간에 또 엄한 녀석이 횡재하게 생겼다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니나 다를까 멀리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내 말 잘 들어.”
“네?”
“혹시 총 가진 거 있어?”
“당연히 없죠.”
“하아···”
조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태식이 내미는 지폐를 낚아챘다.
그리고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소리 낮춰 말했다.
“지갑 당장 넣고 뒤돌아보지 말고 내 곁에 딱 붙어.”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네요.”
“너 또 털리기 직전이야. 덕분에 나도 엮이게 생겼다고.”
“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당장 따라와.”
그렇게 말하며 조는 걷기 시작했다.
어느 사이에 빗줄기는 더 굵어져 소나기가 되었다. 둘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멀리서 상황을 보고 있던 두 남자도 따라왔다. 조는 그걸 눈치채고 발걸음을 더 빨리했다.
“혹시 달리기 잘해?”
“못하는 편은 아니에요. 취미가 마라톤이거든요.”
“잘됐네. 그럼 뛰어!”
낮에 온 비 때문에 고인 물.
그 물웅덩이가 그들의 발자국에 의해 첨벙거렸다.
허벅지 부근까지 튀어 오르는 물방울은 금방 바지를 적셨다. 덕분에 두 남자가 흠뻑 젖기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얼마나 뛰었을까?
골목 사이를 한참 뛰던 조는 멈췄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며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나마 그가 이 동네의 거리를 잘 알기 때문에 가능한 짓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모른 척하고 돌아섰을 것이다.
그러나 벌써 후회가 되었다.
그의 기타 케이스는 완벽하게 젖어 있었다.
방수가 아니기에 아마 기타마저 온전치 못할 것이 뻔했다. 그 생각이 들자 조는 그만 기타를 내려놓고 싶었다. 더는 연주고 뭐고 진저리가 나는 그였다. 배고픈 예술가는 이제 끝내고 싶었다. 그때 태식이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런데 저는 어떻게 돌아가야 하죠?”
“정말 손 많이 가는 녀석이네. 택시 탈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줄게.”
“그런데 혹시 잘 곳은 있어요?”
태식은 그의 몰골을 보며 물었다.
그답지 않게 굉장히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조는 순간 또 그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삶은 바닥에 떨어졌지만, 아직 자존심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태식의 순진무구한 얼굴을 보고는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없으면 호텔 방이라도 잡아주게?”
“네. 그러려고요.”
“내 주제에 무슨 호텔이야. 비만 안 맞으면 장땡이지.”
“그러지 말고 저랑 같이 가요. 따뜻한 물에 샤워도 좀 하고 먹을 것도 먹죠.”
“나한테 왜 이러는데?”
조는 아직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이러다 뒤통수를 치는 이들이 한둘이던가. 혹시 고도의 납치 수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다양한 추측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을 납치해도 딱히 쓸 곳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는 조는 저한테 왜 호의를 베푸셨죠?”
“위태로워 보였으니까.”
“저도 비슷한 거 아닐까요. 더구나 같은 한국인이잖아요.”
“너···”
조는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따뜻한 물로 샤워한다는 말을 들은 이후. 그 느낌이 계속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더구나 포근한 침대까지 있을 테니 금상첨화였다. 길거리 생활을 한 지 벌써 몇 개월째였다.
“그 호의 받아들이지.”
얼마 후.
둘은 맨해튼 중심부의 호텔로 들어섰다.
그곳은 하루 숙박비만 수십만 원이 넘어가는 곳이었다. 조는 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도저히 자신이 들어갈 그런 곳은 아니었다.
“너 부자야?”
“굶어 죽을 정도는 아니에요.”
“그래도 여긴 너무 과해서 내가 불편할 거 같아.”
“여기까지 와놓고 뭐에요. 이번에는 저를 따라 오세요.”
태식은 조의 등을 밀었다.
그러자 그는 마지못해 안으로 들어섰다.
태식은 카드를 꺼내 그에게 방 하나를 예약해주었다. 프론트에 서있는 직원은 갑자기 풍겨오는 악취에 알게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조가 쫓겨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인정 때문은 아니었다.
이 호텔에서 가장 비싼 방을 사용 중인 존재.
바로 태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고 있는 것이었다. 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안으로 사라졌다.
“30분 후에 식사하러 가죠.”
“혹시 방을 같이 써야 하는 거야?”
“아니요. 저는 11층에 따로 방이 있으니 편하게 쓰세요.”
“다행이네. 네 취향이 특이한지 알았거든.”
“하하하. 그럴 리가요.”
그때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7층은 조가 쓰는 방이 있는 곳이었다.
태식은 열림 버튼을 누르고 그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그가 내리자 태식은 1시간 후 로비에서 보자고 했다. 조는 알겠다며 손을 흔들고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1시간 후.
조는 로비로 내려왔다.
모처럼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더니 노곤해진 그였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침대에 누워 잠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식욕이 더 앞섰다. 그러나 아직 로비에 태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기타 상태나 살펴볼까?”
기타 가방을 열었다.
방에서 타월로 열심히 닦았지만, 아직 축축했다. 그가 기타를 꺼냈지만, 어떤 누구도 눈여겨보는 이가 없었다.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조는 저들이 사는 세상은 아예 다른 차원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외로움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There is no exit deep in the dark.]
[The stars fell and lost light. I walked all night in the street.]
로비에 울리는 목소리.
그 소리의 호소력은 매우 짙었다.
조는 어느새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그가 첫 소절을 마치자 로비에는 마법처럼 여러 악기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들의 뒤편에서 춤추는 댄서가 다수 나와 분위기를 업그레이드 시켜주었다.
3분 30초의 노래.
그것은 조의 허밍으로 끝이 났다.
그러자 그를 둘러싸고 있던 이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조는 무거운 눈꺼풀을 치켜뜨며 주변을 살폈다. 로비에는 여전히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졸았던 것이었다.
“컷!”
“다음 장면은 씬 5-3입니다!”
“화면에 걸리지 않게 로비 통제 잘 해주세요.”
서전트 감독의 외침 이후.
스태프는 다음 촬영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물론 이곳이 진짜 맨해튼 중심에 있는 호텔은 아니었다. 호텔 로비를 하루 빌리는 돈이 적지 않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을 빌리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비쌌다.
성우는 기타를 아직 놓지 않았다.
다들 바쁘지만, 정작 자신은 할 것이 없었다. 메이크업과 의상 체크는 수시로 이뤄졌기에 딱히 건드릴 부분도 없었다. 잠시 두리번거리던 그는 기타를 튕겼다.
따라라랑.
이번 촬영에서 부른 곡.
그것을 연습할 겸 시작하니 곧 공태식 역을 맡은 조동주가 다가왔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본 성우는 노래나 불러보라며 꼬드겼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부르는 버전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조동주 버전의 노래.
그것은 성우가 부른 것과 또 다른 맛이 있었다.
성우보다 음색은 더 탁했지만, 뭔가 느낌이 색달랐다. 뮤지컬을 다년간 했다고 들었는데 역시 실력이 상당했다. 문제는 둘이 이렇게 하고 있자 우후죽순으로 붙는 이들이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방금 전 촬영을 함께한 세션.
그들 역시 악기를 치우다가 흥이 났는지 갑자기 합주가 시작되었다. 성우는 그 상황에 깜짝 놀랐지만 자주 있는 일이라 태연하게 리드를 하기 시작했다. 언제 또 호텔 로비에서 이런 합주를 할 수 있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예~!”
“한 곡 더 가죠.”
“이번에는 다른 곡으로 하죠. 하하.”
그렇게 합주는 계속되었다.
하지만 다들 이상하게 보지는 않았다.
종종 촬영 중간에 이런 경우가 있기 때문이었다. 버스커 촬영 현장의 독특한 습관처럼 굳어진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카메라를 든 감독에 의해 촬영되고 있었다.
“촬영하다 말고 또 합주야?”
음악감독을 맡은 짐 하트.
그는 이걸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졌다.
노래가 좋으니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라 해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촬영 스케줄 때문에 눈치가 보였다. 그는 슬쩍 친구인 서전트를 찾았지만, 그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그는 허탈하게 웃어야 했다. 감독마저 한쪽 구석에서 저 합주에 동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너마저 그러면 어쩌냐...”
< 광끼 -14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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