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끼 -146 >
ACA와 맺은 계약.
그걸 말하는 것은 확실히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서 렉스가 그 계약을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그 건은 이제 막 그에게 유리해진 상황이었다. 앞으로 남은 기간 동안 그 계약만 지켜도 그 역시 성우와 함께 돈방석에 앉을 수 있었다.
10% 수수료.
그것만으로 수십억을 받을 예정이었다.
이번 [버스커] 계약은 아직 10억 정도에 불과했지만, 아크로 속편을 정말 4천만 달러에 계약하면 40억 정도를 챙겨간다. 당연히 ACA가 바보가 아닌 이상에 그 계약을 손댈 리 없었다. 그러다 보니 성우는 당연히 다른 계약을 떠올렸다.
바이올렛 엔터와 맺은 계약.
아마 그는 그것을 말하는 것 같았다.
아시아와 한국에 대한 활동이 탐날 만도 했다. 사실 그가 잠시 한국에 다녀오며 바이올렛의 강 대표에게 안겨주는 금액은 적지 않았다. 렉스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바이올렛과 맺은 계약을 말하시는 건가요?”
“역시 금방 알아차리네.”
“저는 굳이 지금 그걸 바꿀 필요성을 모르겠어요.”
“계약 기간도 이제 끝이잖아. 고려하는 척이라도 해줘.”
그것은 사실이었다.
바이올렛과 계약은 3개월 정도 남았다.
처음 그가 데뷔하고 맺은 36개월짜리 계약은 끝난 지 오래였다. 성우는 동일한 조건으로 2년을 연장했다. 그런데 이번에 그 계약마저 종료가 다가오고 있었다.
당연히 바이올렛 엔터도 난리였다.
이 문제 때문에 강 대표는 최근 계속 연락을 주고 있었다. 미국으로 당장 날아오겠다는 것을 말린 것도 몇 번쯤 되었다. 어차피 성우는 다시 그와 계약을 맺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렉스도 만만치 않게 끈질겼다.
“너희 스태프 모두 그대로 고용할게. 거기에 네 개인적으로 운용하고 있는 보디가드도 포함해서.”
“관심 없어요.”
“기존 연봉의 두 배를 줘도? 그리고 수수료도 2/3 수준으로 내려줄게. 중국도 제대로 진출해봐야지 않겠어.”
그 말에 최정과 요한이 눈치를 봤다.
돈을 두 배로 올려 준다는 말에 약간이나마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 된다면 둘 다 억대 연봉 그 이상이 되는 것이었다. 사실 이 둘은 회사를 바꿔 ACA로 가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성우는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다.
성우는 그를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스태프가 있는 상황에서 이러는 것은 반칙이라 할 수 있었다. 둘만 있을 때 해도 될 이야기였다. 그의 속셈은 너무 빤히 보였다. 성우의 곁에서 그림자처럼 항상 붙어 있는 둘을 우선 공략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그래도 아예 비열한 편은 아니었다.
만약 자신 몰래 둘과 접촉했다면 더 골치 아플 뻔했다. 물론 그렇다고 요한과 최정이 홀라당 렉스에게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그 정도의 믿음은 있었다.
“형이랑 요한이는 먼저 숙소로 들어가 계실래요?”
“그럴까?”
“저는 아놀드랑 같이 들어갈게요.”
아놀드는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에게 둘만 먼저 간다고 하니 같이 있던 보디가드 한 명을 붙여 주었다. 그렇게 다른 일행이 사라진 이후에 성우는 렉스를 노려봤다.
안 그래도 오늘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아역 배우인 지훈이와 이상한 아줌마 일도 있었다. 거기에 자신을 떠난 무사귀 때문에 울적한 기분이었다. 렉스는 그런 상황도 모르고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것이었다.
“자꾸 이러면 ACA와 재계약도 다시 검토할 거에요. 치사하게 이게 뭡니까?”
“미안해. 내가 마음이 급해서 실수했어.”
“그런 말에 속을 거 같아요? 의도가 빤히 보이는데요.”
그제야 렉스는 실수를 깨달았다.
성우는 확실히 자신과 다른 부류였다.
계약할 때 런닝 개런티를 즐겨 쓰는 성우를 보고 잠시 착각한 것이었다. 혹시 자신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른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는 와인을 마시며 성우의 눈치를 살폈다.
“오늘 들은 이야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할게요.”
“고마워.”
“덕분에 저 친구를 다독이려면 제 돈이 나갈 것 같네요. 이거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성우의 말에 렉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마침내 답을 내놨다.
혹시 이것 때문에 인상분이 생기면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것이었다. 성우는 그 말에 아예 못을 박아 버렸다.
“그걸 매월 받기는 조금 그렇죠. 그 친구들한테 보너스나 좀 줘요.”
“얼마나?”
“뭐 한 사람당 5만 달러 정도면 될 거 같은데요.”
“경력직 스태프 한 명의 연봉 수준이잖아!”
렉스는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 이상 더 말을 하진 못했다.
아예 이 자리를 접고 나서려다 그는 4천만 달러가 걸린 계약을 떠올렸다. 만약 이대로 나가면 그 계약마저 파투가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성우라면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계약 때문에 영화는 찍어야 했다.
이미 3편을 찍겠다는 조항이 걸려 있었다. 하지만 아예 계약금을 낮춰버리는 방법과 ACA와 계약이 끝날 때까지 촬영을 지연시키는 방법도 있었다. 배우가 에이전시를 물 먹이는 방법은 꽤 다양한 편이었다. 그걸 떠올리며 렉스는 마지못해 수긍했다.
“알겠어. 수표로 써주면 되지?”
“편하신 대로 하세요.”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아셨으면 다행이네요. 다음에 또 이러면 정말 끝입니다. 저 원하는 에이전시는 ACA 말고도 수없이 많아요.”
“알았다고.”
그는 품에서 수표책을 꺼냈다.
그리고 만년필로 뭔가를 쓰더니 성우에게 건넸다. 두 장의 수표에는 각각 5만 달러씩 적혀 있었다. 그것을 보며 성우는 씩 웃었다.
“이번에 잘 되면 4백만 달러 버시잖아요. 너무 기분 나빠 하지는 마요.”
“그것도 잘 돼야 그 정도지.”
“차기작도 대박 쳐서 마지막 세 번째는 마벨 스튜디오가 기록한 8천만 달러 기록도 한번 깨봐야죠.”
“그 말 내가 꼭 기억하고 있을 거야.”
“물론 그때쯤이면 ACA와 재계약 시기인 것도 아시죠?”
“어휴~ 너는 정말···”
렉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그는 아직 전하지 못한 소식 하나가 기억났다.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그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새까맣게 까먹고 있었네. 아크로 후속작 찍기 전에 한 달쯤 작업해야 할 게 있어.”
“뭔데요?”
“유니버스 시리즈도 찍어야지.”
“아... 맞다. 그것도 있었죠.”
“킬리안이 찍고 있는 레오파드 다음으로 유니버스 시리즈가 개봉될 거야. 그다음으로 네 차기작이 개봉하는 순서야.”
성우는 인상을 찡그렸다.
전에 아크로를 찍기 전에 참여했었던 시리즈였다. 마벨의 히어로가 모두 모이는 그 영화는 좋은 기억이 없었다. 처음 겪는 CG 위주의 촬영이다 보니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그의 배우 활동 중에 유일한 흑역사였다.
“한 달이면 제 분량은 그리 많지 않나 보네요.”
“너는 아직 스토리를 쌓고 있는 중이니 어쩔 수 없지. 이번에는 아마 레오파드(킬리안) 쪽이 메인으로 갈 거 같아.”
“어쩔 수 없죠. 그거는 개런티가 어떻게 되는데요?”
“천만 달러(110억) 정도 될 거 같아.”
성우는 알겠다고 답했다.
사실 개런티가 조금 작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조금 적지만 어쩔 수 없죠.”
“속편 개봉된 이후에는 유니버스 시리즈의 출연료도 대폭 인상할 거야. 이건 그쪽에서 먼저 약속한 내용이야.”
“알겠어요.”
15분 출연 분량에 1,200억(1억 달러).
이것은 마벨 스튜디오의 한 히어로가 달성한 것이었다. 성우는 나중에라도 그 금액을 뛰어넘고 싶었다. 그가 돈독이 올라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100억이 넘는 돈이 적다고 느낄 리 없었다.
문제는 편견이었다.
그래서 더 욕심이 나는 그였다.
아시아계에게 은근히 가해지는 개런티의 불합리한 구조. 그것을 통쾌하게 깨고 싶었다. 그래야 훗날 다른 후배들이 어깨를 펴고 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쉬울 거란 생각은 안 들었다.
할리우드 전반에 깔린 그 편견은 꽤 굳건했다. 성우는 앞으로 남은 두 편의 마벨 스튜디오 영화에 모든 것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갈 길이 참 머네.’
*
뜻밖의 5만 달러.
그것을 받은 요한과 최정은 놀랐다.
설마 이런 수표를 받게 될지 몰랐던 탓이었다. 성우는 갑자기 그것을 내려놓고 쉬겠다며 유부와 함께 자신의 방으로 사라졌다.
“이게 정말 5만 달러 수표야?”
최정의 눈은 반짝였다.
꽁돈이 좋은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받아낸 건지 모를 일이지만, 회사를 옮길 필요는 없어 보였다. 덕분에 그는 그동안 눈여겨보던 아이템을 획득할 찬스라며 좋아했다. 그의 노트북에는 위시 리스트가 상당히 길었다.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것을 본 요한이 잔소리를 했다.
“그 많은 것들을 사서 도대체 어디 쌓아 놔요?”
“집이 거의 창고 수준이지.”
“잠잘 공간이 있기는 해요?”
“어차피 집에도 잘 안 들어가는 데 필요 있나.”
그 말에 요한은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서울에 있는 집은 계륵 같은 존재였다.
1년 중에 정작 며칠밖에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니 아예 집을 팔아버릴까 고민이 될 수준이었다. 서울에 있더라도 성우의 집에서 숙식하는 경우가 워낙 많았다. 일단 스케줄이 빡빡한 와중에는 퇴근이란 개념조차 거의 없었다.
“너는 그 돈으로 뭐 하려고?”
“글쎄요. 딱히 사고 싶은 것도 없고 그냥 저축이나 할까 싶어요.”
“돈을 딱히 쓰는 곳도 없고 꽤 많이 모았겠네.”
“저번에 집 사서 별로 없어요.”
요한의 말을 듣고 최정이 웃었다.
그리고는 아까 한 말을 그대로 또 했다.
어차피 집에 갈 일이 거의 없으면서 왜 샀냐는 말에 요한은 어깨를 으쓱했다. 집 마련은 그의 로망이었으나 딱히 설명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이런 말을 꺼냈다.
“성우 형이 휴가 좀 가라고 자꾸 그러시는데 촬영 끝나면 한 달쯤 쉬다 올까 싶은 생각도 들고요.”
“한국에서?”
“아니요. 모처럼 유럽이나 여행으로 다녀올까 생각도 들고요.”
“오~ 나도 구미가 당긴다.”
“같이 가실래요?”
요한의 말에 최정은 망설였다.
하지만 그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 역시 꽤 심신이 지친 상황이었다. 성우가 수년간 이어온 살인적인 스케줄 덕분이었다.
“너만 불편하지 않다면 같이 가는 게 좋지. 영어 잘하는 너랑 다니면 편하잖아.”
“그런데 저희 둘만 여행 간다고 하면 성우 형 삐지는 거 아니에요?”
“뭐 한국에 있는 우현이랑 놀아도 되고 알아서 하겠지.”
“우현이가 왜?”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그것을 들은 둘은 그대로 입을 닫았다.
하지만 이미 상당수의 내용은 성우도 들은 상태였다. 뭐 일부러 엿들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유부의 사료를 챙기러 나오던 길이었다.
“들으셨어요?”
“뭐 대충.”
“형도 저희랑 함께 가실래요?”
“뭐 원한다면. 그래서 그 휴가는 어디로 갈 건데.”
성우의 질문에 요한은 답을 하지 못했다.
유럽이란 것도 너무 포괄적이었다. 잠시 성우를 바라보던 그는 아무래도 이번 여행은 오지를 찾아다녀야 할 것 같았다. 안 그러면 유명세 때문에 제대로 쉬지 못할 것 같았다. 잠시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요한을 향해 성우는 웃으며 말했다.
“어디를 가든지 좋으니 요한이 네가 책임지고 천천히 계획 한 번 짜 봐.”
“형도 같이 가시게요?”
“시간 되면 안 될 거는 없지. 대신 모든 비용은 내가 댈게.”
“정말요? 저 5성 호텔 막 이런 거 잡아도 돼요?”
“포상 휴가 같은 개념이니 맘대로 해. 대신 이번 영화를 잘 마무리한다는 조건이야. 그러니 마지막까지 긴장 풀지 마.”
성우의 말에 둘 다 웃었다.
평균 나이가 서른 가까운 그들이지만, 언제나 여행은 즐거운 일이었다. 과거 아크로의 월드 투어 당시 돌아다닌 나라는 14개국에 달했다. 하지만 정작 그 나라를 제대로 본 것은 없었다. 정말 잠자는 시간 제외하고 줄곧 홍보 일정이 있었다.
그런 둘의 표정을 보고 성우는 돌아섰다.
아마 당분간은 여행 계획을 짜느라 정신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가장 행복한 시간이 그맘때가 아닐까? 여행은 떠나기 전의 설렘이 반쯤 차지하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유부에게 사료를 줬다. 그런 이후에 침대에 기대며 뜨개질바늘을 잡았다.
“벌써 마지막인가?”
무사귀가 제시한 수량.
그것은 다섯 개에 불과했다.
전에 책을 수백 권씩 읽으라고 하던 것에 비하면 아주 적은 수였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 뜨개질을 마칠 예정이었다.
-그거는 누구 주려고?
‘다 임자가 있습니다.’
-딱 봐도 여자 옷인데. 네 주변에 여자가 어딨어?
두부의 말에 성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만약 만화였다면 지금 이 순간 이마에 힘줄이 솟아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딱히 화도 내지 않고 바늘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1시간쯤 그렇게 말없이 뜨개질을 하니 어느새 시계는 저녁 11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내일의 촬영을 위해 슬슬 자야할 때였다.
하지만 거의 마무리 단계라 끝을 보기로 했다.
그렇게 10분이 지난 후.
성우는 분홍색 스웨터를 완성했다.
실의 재질 자체가 보슬보슬한 것이 제법 따뜻해 보였다. 그것을 보자 두부는 재차 묻기 시작했다. 마치 취조를 당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누구 거야? 궁금해 죽겠다! 좀 알려줘라.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지금까지 만든 것은 대부분 자신의 목도리와 유부의 방석 같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누가 봐도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성우는 조금 더 골려줄까 생각하다 정답을 알려주기로 했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님꺼야.”
< 광끼 -14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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