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친 재능의 탑스타-145화 (146/161)

< 광끼 -145 >

한차례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난 이후.

다시 시작된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직 어린 지훈이가 보여주는 연기는 기대 그 이상이었다. 성우가 깜짝 놀랄 그런 수준이었다. 확실히 재능이 있다는 아이 엄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때 아이가 성우를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잘하고 있냐고 묻는 것 같았다. 성우는 그런 아이에게 손을 흔들다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러자 지훈이는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울며 촬영 거부를 하던 그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오~ 제법인데.

평가가 야박한 두부도 인정했다.

지훈이는 서전트 감독이 원하는 바를 이뤄줬다. 특히 아버지를 잃었을 때의 그 느낌은 극장에서 손수건을 제법 꺼내 들게 만들 수준이었다. 대놓고 울게 만드는 그런 연출은 아니었지만, 가슴 아픈 수준은 되었다.

“컷! 다음 장면 넘어갈게요.”

“서둘러요! 이제 15분 남았습니다.”

“우측에 있는 조명 세팅 다시 맞춰줘요.”

스태프는 숨 바쁘게 일했다.

잠시 멈췄던 촬영 일정을 따라잡기 위한 노력이었다. 시간을 철저하게 따지는 대신에 그만큼 프로답게 일하는 이들이었다. 한국이었다면 이럴 필요는 없었다. 피할 수 없는 외부 요인이 아니라면 더 여유 있게 했을 것이다. 좋게 말하면 자유도가 높다고 할 수

도 있었다.

그래도 성우는 미국의 시스템이 좋았다.

뭔가 정이 없어 보이고 야박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일단 스태프의 표정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 보았던 그 피곤에 쩔어있는 모습은 이곳에서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아이 엄마가 재차 등장했다.

멀찍이 서 있던 그녀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 지훈이가 영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덕분에 그녀는 촬영 스태프 부근에서 감독의 지시를 전해주는 통역사의 역할을 해줘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인 지훈이가 인형 ‘밥’에 아직 꽂혀 있다

는 것이었다.

“나이스~ 컷!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촬영은 오전 10시. 스튜디오에서 진행됩니다.”

“가시기 전에 사인 하는 거 잊지 마세요.”

오늘 촬영이 끝이라는 신호와 함께.

모든 사람과 장비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우르르 사라지는 이들을 향해 아이 엄마는 요사스럽게 웃으며 인사했다. 마치 다음에 다른 촬영이 있으면 불러 달라고 아양을 떠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한눈을 파는 사이 성우는 지훈이한테 다가섰다.

“연기 잘하던데.”

“밥이 있어서 가능했어요.”

“그럼 아저씨가 선물로 줄까?”

“엇! 정말요?”

“물론이지. 아마 밥도 좋아할 거야.”

아이는 무척 기뻐했다.

성우는 품에서 명함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밥이 입고 있는 옷 안에 그걸 넣었다. 그런 이후에 지훈이한테 말했다.

“혹시 연기하다가 힘든 일이 있으면 아저씨한테 전화해.”

“정말 전화해도 돼요?”

“물론이지. 언제든지 해도 돼. 대신 이 번호는 아무한테도 알려주지 않기로 약속할 수 있어?”

“엄마한테도요?”

“응!”

성우의 개인 번호였다.

만약 유출이라도 되면 골치 아팠다.

사실 이 번호를 아는 이들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다. 중간에 번호를 한 번 바꿨기에 옛 친구의 연락이나 그런 것도 없었다. 더구나 대부분의 업무상 전화는 요한이를 통해 들어왔다. 지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답했다.

-어··· 성우야.

‘갑자기 왜? 이야기하고 있잖아.’

-무사귀 가운데 한 명이 떠나겠다고 하는데?

‘어딜 누가 떠나?’

-마술사 그 친구가 저 인형으로 옮겨가겠다고 하네.

성우는 어리둥절했다.

지금까지 마술을 가르쳐주던 그는 따로 미션을 준 상태였다. 아직 그걸 달성한 것은 아니었기에 지금 상황은 뜻밖이었다. 더구나 아이가 들고 있는 인형이라니 떨떠름했다.

-자기 아들 생각난다고 수호신 역할을 해줄 건가 봐.

‘아들?’

-딱 저 나이 때 잃어버린 아들이래. 넌 괜찮지?

‘너희들이 언제 나한테 물어보고 들락거렸어? 그런데 저 아이한테 해코지하거나 그러진 않겠지?’

그게 걱정이었다.

혹시라도 나쁜 마음을 먹지 않을까?

그러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대해야 했다. 앞길 창창한 아이의 미래를 훼방 놓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 말에 두부는 격하게 반응했다.

-이 친구가 너 어렸을 때 무조건 살려야 한다고 얼마나 날뛰었는지 너는 모르지?

‘그랬었어?’

-아이들만 보면 정의의 수호신처럼 바뀌는 녀석이야. 전혀 걱정하지 마.

두부의 말에 코끝이 찡했다.

사실 이름조차 아직 듣지 못한 무사귀였다.

어서 성불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지만, 이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성우가 알게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자 두부는 웃었다.

-나중에 인연이 되면 보자고 하네.

그 순간.

가슴 속이 텅 빈 것 같은 허전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밥’의 눈동자가 순간 반짝였다. 인형의 인상마저 달라진 것 같았다. 전에 없던 미소가 입가에 걸린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지훈이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직도 명함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겨우 네 명.

이제 남은 무사귀 수였다.

두부를 제외하면 세 명에 불과했다.

가양주를 제외한 뜨개질과 그림의 경우는 어느새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요즘에는 오히려 그리 열성적으로 진도를 빼지 않고 있었다. 이기적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성우는 그런 생각을 하다 고개를 저었다. 그

리고는 시선을 맞추기 위해 낮췄던 자세를 풀며 아이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아저씨는 이제 가볼게.”

“안녕히 가세요.”

“그래.”

지훈이는 허리 숙여 인사했다.

예의 바른 아이를 보며 성우는 미소지었다.

천성이 너무 착한 아이 같았다. 그가 등을 돌려 그 자리를 벗어나자 아이 엄마가 돌아왔는지 시끄러워졌다.

“아까부터 손에 들고 있는 이건 뭐야?”

“밥이요.”

“누가 줬는데?”

“아크로 아저씨요.”

“새것도 아닌 거 같은데 그냥 버리자. 털도 때 타서 시꺼멓잖아.”

“싫어요!”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성우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저 안에 든 무사귀라면 알아서 현명하게 처신할 것이 분명했다. 나중에 해외 토픽 같은 곳에 ‘귀신 들린 인형’이라며 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며 온갖 상상이 되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성우는 요한과 함께 숙소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타며 중얼거렸다.

“저 아이가 이 바닥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성우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서 가방을 메고 서 있던 요한이 입을 뗐다. 녀석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그리 오래가지 못할 거예요.”

“네 생각도 그래?”

“아직 어려서 이 정도지. 사춘기가 오면 대부분 아역 배우는 그만두죠.”

“정체성 문제인가?”

요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성우도 느낀 것이 참 많았다.

배우로서 살아온 세월 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저 아이가 앞으로 겪을 미래가 눈에 빤히 보였다. 아무리 재능이 있다고 해도 스스로 원하지 않은 것을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이른바 엄마의 치맛바람.

그것만으로 버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연기라는 것은 하면 할수록 어렵게 느껴졌다. 특히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만큼은 시나리오 속의 인물이 되어야 했다.

짧은 시간은 쉬웠다.

하지만 몇 개월씩 그 인물로 살아야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감정 소모와 자아의 분열은 쉽게 볼 일이 아니었다. 어른들도 그것을 힘들어하는데 아직 성장기인 아이들에게는 치명적이라 할 수 있었다.

-너는 첫 연극인 ‘악의’ 때 생각보다 쉽게 넘어갔던 거 같은데.

성우는 두부에 말에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자신은 그럴 일이 있어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자신 속에 또 다른 존재가 엄연히 있으니 그랬던 것 같았다. 거의 24시간 붙어 다니는 두부가 있는데 그럴 틈도 없었다. 그 생각이 들자 살짝 고마워졌다.

‘너 나하고 약속 하나만 하자.’

뜬금없는 성우의 말.

그것을 들은 두부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갑자기 무슨?

‘두부 너는 아까 그분처럼 갑자기 어디 간다고 하지 말고 나한테 딱 붙어 있어.’

-누굴 지박령으로 아나. 때가 되면 다 가는 거지.

그 말에 성우는 섭섭했다.

이미 예정되어 있는 미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나 혼자 두고 가겠다고?’

-나도 한 번쯤은 재벌 4세 금수저로 태어나고 싶거든. 지난 생에서는 망했지만, 환생하다 보면 언젠가 한 번쯤은 걸리지 않을까?

‘네가 살던 시대에 양반이면 적어도 은수저잖아?’

그 말에 딱히 대답은 없었다.

대신 요한이 옆에서 말을 걸었다. 녀석은 갑자기 손가락을 튕기며 잊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아차! 30분 전에 렉스가 뉴욕에 왔다고 문자 왔는데요. 어떻게 할까요?”

“갑자기 왜?”

“그건 모르겠어요. 할 말이 있다고 저녁이나 함께하자고 하던데요.”

성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약속을 잡으라는 의미였다.

그러자 요한은 핸드폰을 꺼내 그에게 연락했다. 마침 렉스가 공항에서 빠져나오고 있던 참이었다. 그는 성우가 머무는 호텔 부근에서 다시 연락을 주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좋은 소식 있다고 기다리라고 하는데요.”

“또 돈 이야기겠지.”

“돈은 언제나 많을수록 좋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물론이죠.”

요한은 물어볼 것을 물어보라며 말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곧 지위였다. 성우가 그것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돈에 멱살 잡혀 끌려다니는 기분이었다. 어느 사이에 일에 대한 피로감이 쌓인 것 같았다.

“이번 영화 끝나면 좀 쉬자.”

“저번에도 그렇게 말하셨죠.”

“너도 휴가 좀 가고 그래. 맨날 옆에 붙어 있으니 총도 맞고 그렇지.”

“뭐 제가 맞고 싶어서 맞았나요? 세상 어딜가도 다칠 놈은 어떻게든 다쳐요.”

그 말에 성우는 피식 웃었다.

킬리안 생각이 났기 때문이었다.

녀석은 최근 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다. 녀석처럼 튼튼한 녀석도 아프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병명을 듣고는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말라리아.

녀석이 걸린 병이 그것이었다.

최근 레오파드 속편을 찍으며 아프리카에 가 있던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덕분에 촬영의 일정은 조금 밀렸지만, 그래도 크게 걱정할 수준은 아니었다. 녀석의 말을 빌리자면 독감 수준이었다. 점차 나아지고 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다.

30분 후.

성우는 렉스를 만날 수 있었다.

식당으로 자리를 옮긴 그들은 식사를 시작했다. 성우를 비롯해 네 명의 남자는 묵묵하게 먹는 데 집중했다. 우현은 어제 한국으로 돌아갔기에 이 자리에는 없었다. 어느 정도 식사가 끝나자 성우가 렉스를 향해 질문했다.

“이제 슬슬 오신 이유를 말해주시죠.”

“하여간 성격 참 급해.”

“와인이라도 한 잔 사야 말하실 건가요?”

“그러면 나야 좋지.”

성우는 어쩔 수 없이 와인리스트를 살폈다.

그 가운데 적당한 것을 시키자 곧 테이블 위에 와인잔이 세팅되었다. 웨이터가 다가와 능숙하게 그 잔을 채웠다. 그제야 렉스는 입을 뗐다.

“계약 건 하나가 들어왔어.”

“저 촬영 중인데 뭘 또 계약해요. 점점 더 악덕 에이전트가 되어가시는 것 같아요.”

“나는 원래 이랬는데.”

“무슨 영화인데요?”

“마벨 스튜디오에서 아크로 후속작 이야기가 들어왔어.”

“벌써요?”

빨라도 너무 빨랐다.

아직 킬리안의 레오파드가 촬영 중이었다.

성우로서는 적어도 1년 정도 후에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렉스의 설명을 들으니 대충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네 몸값이 더 높아지기 전에 도장부터 받겠다는 속셈이지.”

“그래서 그쪽에서는 얼마 제시했는데요?”

“2천만 달러에 런닝 개런티로 최대 1천만 달러.”

“다 합치면 최대 3천만 달러(약 330억)네요. 렉스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보는 거예요?”

“나쁜 제안은 아니지. 그런데 조금 더 튕길까 고려 중이야. 네 의견은 어때?”

성우는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전에 다른 시리즈의 경우에는 단숨에 4천만 달러(약 440억)까지 개런티를 받은 배우도 있었다. 확실히 선례가 있으니 비교하기가 쉬웠다. 최근 영화관에서 상영을 끝낸 아크로의 성적이라면 조금 더 튕겨도 될 것 같았다.

아크로 시리즈의 첫 편.

그 성적은 마벨 스튜디오 역대 4위였다.

대박을 쳤다던 킬리안의 레오파드보다 한 단계 높은 순위였다. 그런데 이번 후속작의 킬리안 몸값이 3천5백만 달러였다. 적어도 그 정도까지는 받아도 무방할 것 같았다. 아마 렉스도 비슷한 생각이 있기에 자신을 찾아온 것 같았다.

“2천만 달러에 2천만 달러를 더 얹어서 가죠.”

“또 런닝 개런티에 배팅하는 거야?”

“인생 뭐 있나요?”

“어휴... 이번에 버스커도 그렇고 후속작도 대박 나면 돈방석에 앉는 것은 순식간이겠네. 일단 네 의사는 알겠어. 나도 고민 좀 해볼게.”

렉스는 핸드폰에 그 내용을 메모했다.

그것을 보며 성우는 이게 끝인지 궁금했다. 이것 때문에 캘리포니아에서 뉴욕까지 몇 시간을 날아왔을 것 같지는 않았다. 성우가 줄곧 눈빛으로 채근하자 그는 미소 지으며 다른 이들을 둘러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그 순간 그의 표정에는 평소와 달리 영업용 미소가 장착되어 있었다.

“우리 계약 조건을 살짝 바꾸는 건 어떨까?”

< 광끼 -145 > 끝

ⓒ l살별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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